[사람사는 이야기] 자유인을 꿈꾸는 구족화가 김영수 > 세상, 한 걸음


[사람사는 이야기] 자유인을 꿈꾸는 구족화가 김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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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인을 꿈꾸는 구족화가 "김영수"


구족화가 김영수씨가 지난 유월과 칠월, 서울과 수원에서 두 차례에 걸쳐 첫 개인전을 가졌다. 입으로 붓을 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어언 사 년, 인고의 날들을 이기고 마련한 이번 개인전은 그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닌 개인전임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개인전이 하나의 성과로서 치불 될 수 있다면 그는 개인전이 열리던 날 절망으로 점철됐던 지난날들을 회상하며, 하지만 그 절망을 이기고 선 자신을 대견스러워하며, 남모르게 기쁨의 눈물 한 방울 흘렸을 수도 있겠다.
그 잔잔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그에게 장애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고려대 건축물학과 이 학년에 다니고 있던 일천구백칠십사년 늦봄, 당시 그는 검도부 승단 시험을 앞두고 합숙훈련을 하고 있었던. 그 합숙훈련은 학기 중에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심한 피로감을 안겨주었다. 그렇지만 일년을 기다려온 승단 시험이었기에 그는 합숙훈련에 빠질수 없었다. 그는 피로를 느끼며 보름동안의 합숙훈련을 마쳤다. 드디어 승단 시험이 있는 일요일을 앞둔 토요일, 그는 "어부"라는 뜻을 가진 기독교 연합서클 네비게이토의 일원으로 기도원에 가게 된다.
  불행은 바로 그 기도원에서의 하룻밤 일정을 마치고 승단시험을 치르기 위해 돌아오는 날 시작됐다. 갑자기 편도선이 붓기 시작하면서 그는 목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는 처음 "무리해서 생긴 감기려니, 쉬면 낫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목에서 시작된 통증은 잠깐 사이에 물도 못 마실 정도로 악화됐다. 그는 결국 승단시험도 포기하고 집으로가 내리 십여 일을 앓아 누워 있어야 했다.
  어머니의 정성어린 간호로 편도선이 부은 것은 차츰차츰 회복됐다. 그런데 문제는 체력이었다.
  힘이 없어지기 시작하면서 쉬 피로하고 진땀도 나고, 무엇보다 종아리의 근육이 빠져 나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선명했다. 그는 그런 현상이 몸이 쇠약해져서 나타나는 현상인줄 알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쉬면 낫겠거니, 회복이 되면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마음과는 달리 나날이 체력은 약해져만 갔다.
  그는 할 수없이 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병원에서도 명쾌하게 병명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구두를 신지 못하게된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종아리 근육이 빠져나가면서 발뒤꿈치를 들고 서지 못해 구두를 신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몸에서 근육이 빠져나가는 진행성 근이양증 장애의 시작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혈기 왕성하고 꿈 많던 스물 두 살이었다.
  스물 두 살, 세상이 온통 장밋빛으로 보일 그 나이에 그는 뭔지 이유는 모르지만 자신의 인생이 어긋난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해야 했다. 그래, 뭔지 모르지만.
  그가 자신의 장애를 알 수 없었던 것은 그때만 해도 근이양증 장애가 생소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 후 삼 년 동안 알지 못했다. 구두를 못 신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게 부담이 되는 정도였지 운동화를 신으면 불편 없이 걸을 수가 있어 그는 자신의 장애를 깨달을 수 없었다. 그러던 그가 비로소 자신의 장애를 안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남들은 모두 시도하는 취업을 그는 주저했다. 어쨌거나 몸이 정상이 아니다라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 직면하자 어쩔 수 없이 그는 크게 낙심했다. 경쟁시대에서 젊은 나이에 취직도 하지 못하고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인생의 실패를 의미했다. 낙담이 깊어지면 자살까지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비관은 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신앙과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낙천적인 성격이 큰 도움이 됐다.
  그가 낙담을 극복하기 위해 찾은 곳은 교회였다. 그는 "내 문제는 사람의 힘으로 풀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대학 재학 중 야학교사로 활동했던 경기도 대정리 한뜻 교회를 찾아갔다. 그 곳에서 두 달여 동안 기거하면서 그는 장애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그리고 나서 식구들의 권유로 찾아간 곳이 서울 순천향 병원이었다.
순천향 병원에서는 단박에 그의 장애를 알아보았다. 정형외과 의사는 주저하지 않고 그가 "진행성 근이양증 장애를 가지게 됐다"고 통보했다. 그는 장애명이 생소해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의사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그렇다면 치료방법은 없느냐?"고 물었다. 의사는 "특별한 거는 없고 많이 움직이고 될 수 있는 한 비타민을 많이 먹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의사는 "장애가 점점 더 진행돼 움직일 수 없게 될 지도 모르니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말했다.
  그때는 초가을이었다. 그는 사실상의 사형선고를 받고 어머니와 대학 삼학년 때부터 사귀고 있던 여자친구와 함께 병원 문을 나섰다. 하늘은 화창했고 세상은 생기로 푸르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세상이 온통 먹빛 어둠으로 가득 차 있을까? 그는 한올 절망감에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데 이 사람, 고개를 든 그의 뇌리에 떠오른 파격적인 자위.
"그래. 내 장애는 하나님이 나를 연단 하시기 위해서 어려움을 주신 거에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연단을 세상 의사들이 감히 어떻게 고칠 수 있겠어. 오직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지"
  그는 당연하게 병원을 등지고 기도원으로 향했다. 여러 곳의 기도원을 전전하면서 그는 "내 장애가 낫던지, 아니면은 장애가 심해져 당장 죽게 되던지 모두 하나님의 뜻이니 하나님이 내 삶을 주관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찾은 그는 그 해 십일월, "활동을 하면 정신적으로 상태가 좋아질 수 있고, 그러면 혹시 장애도 나아질 수 있을지 몰라"라는 기대를 가지고, 운동화를 신고 다닐 수 있는 직장은 설계사무실밖에 없어, 서울 계동에 있는 "공간사"라는 건축설계사무실에 취직했다.
  그로부터 일년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가 얻은 것은 처절한 패배감뿐이었다. 바쁘면 밤을 새서라도 맡은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그는 장애 때문에 도저히 힘이 들어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사정을 알리 없는 직장에서는 그를 무능력자로 취급했다. 노골적으로 그의 책상을 가장자리로 배치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자존심이 상한 그는 사표를 던질 결심을 한다.
  그 무렵 그가 몸담고 있던 직장건물 지하 화랑에서는 한 여성화가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는 우연히 전시회장을 찾았다가 그 그림들에 매료당한다. 대학 재학 때부터 원래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그 자리에서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림 그리는 일밖에 없다"라는 결심을 굳힌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여성화가에게 다가가 "그림을 배우고 싶은데 가르쳐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의 부탁을 받은 여성화가는 "나는 곧 프랑스로 유학을 간다"면서 난색을 표명했다. 그가 실망해 하자 여성화가는 "나 대신 서양화가 이만익씨를 소개해 주겠다"고 호의를 베풀었다.
  그 즉시 미련 없이 직장을 그만둔 그는 틈틈이 그린 그림 서너 점을 들고 이만익씨의 화실을 찾아갔다. 이 화백은 그의 그림을 살펴보더니 "소실이 있다"며 "그러나 나는 가르칠 시간이 없으니 대신 후배를 소개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만난 스승이 지금은 서울여대 교수로 있는 오수환 씨였다. 그는 그로부터 삼 년여 동안 오수환씨에게 그림을 사사 받는다.
  그렇게 그림에 몰두하면서 "이제는 생의 의미를 그림에서 찾겠다"며 안정을 찾아가던 그에게 또 한번의 불행이 찾아든다. 대학 삼 학년 때부터 사귀기 시작해 약혼식까지 한 여자와 장애가 이유가 돼 헤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약혼식을 할 때 여자 집에서는 그의 장애를 몰랐던 게 화근이었다. 그러다가 그가 인사를 하러 여자 집에 들락날락 거리면서 여자 쪽 부모들이 그의 장애를 알아버렸다. 여자 쪽 부모들은 딸의 결혼을 극구 만류했다. 물론 가족들이 반대해도 당사자인 여자가 결심을 굳히면 결혼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이미 그의 장애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장애가 문제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족들의 만류가 심해지면서 여자는 점점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민간요법을 받기 위해 삼 개월여 여자 곁을 떠나는 일이 일어났다. 치료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그는 여자에게서 "그만 만나자"는 통보를 받는다. 그가 이유를 캐묻자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대답했다. 그의 마음이 쓰렸지만 "그러니, 그거 잘됐구나"라고 말하고 여자를 보내준다. 그리고 며칠 후 마지막으로 만난 여자에게 "사람이 우리처럼 이렇게 오래 사귀다 헤어지면 마음의 상처가 클 거야, 그럴 때는 뭔가 일에 몰두하면 쉽게 잊을 수 있을 텐데, 나야 그림이 있으니까 쉽게 잊어버릴 수 있겠지만 너는 어떻게 잊을런지 모르겠다"며 오히려 여자를 위로해 주는 여유까지 보인다.
  그가 무려 육년여 동안 정을 준 여자를 떠나보내면서 이렇게 냉정해 질수 있었던 것은 사전에 이별을 미리 예감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장애 때문에 겪는 아픔이 너무 크다보니 그에게는 나머지 문제, 이별까지도 그리 큰 아픔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자와 헤어지고 팔십이년 먼저 가있던 누님이 초청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물론 이민 목적은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미국 시카고에 정착한 그는 그 지역에서 제일 큰 병원을 찾아가 정밀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병원 측 답변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미국과 같이 의학이 발달된 나라에서도 그의 장애는 고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장애라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이년여를 지낸 후 다시 국내로 돌아왔다. 치료방법도 없는데 굳이 도와줄 사람도 없는 미국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칩거의 날들을 시작해야 했다.
  그때쯤 그의 장애는 빠르게 진행돼 손을 사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다리는 몰라도 손은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상 그가 죽음의 상태에 다다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지막 생의 의미로 애착을 가지고 붙잡았던 그림 그리는 일이 그때부터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제 사실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팔십사년, 집으로 돌아온 그는 외출을 꿈도 꾸지 못하고 집안에서 주로 책을 읽으면서 하루하루를 지냈다. 무능력을 곱씹는 날들이 이어졌지만 이 기간 중에 그래도 삶의 기쁨은 있었다.
  그 무렵 그는 처음 여자와 헤어진 후 두 번째 여자와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었다. 그 여자는 그가 예전에 야학교사로 활동하던 한뜻교회에서 만난 여자였다. 여자는 신앙이 좋았고, 그래서 그의 장애를 이해했다. 그가 집안에만 있을 수밖에 없게 되자 같이 활동하던 교우들이 그의 집으로 찾아와 같이 성경공부를 했는데 그 여자도 주로 그 시간에 그를 찾아왔다.
  그는 여자에게 자신의 장애를 숨김없이 얘기했다. 여자는 "당신의 장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랬는데 나중에 결국 그의 장애가 원인이 돼 그는 다시 한번 이별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팔십칠년, 그는 사귄 기간도 오래됐고, 어차피 결혼을 할거면 빨리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여자에게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청혼을 했다. 물론 여자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결혼은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여자 부모를 설득시켜야 했는데, 그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여자 부모는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 "결혼을 하면 몸도 더 나빠지고 금방 죽는다더라. 그러니 결혼을 하지말고 그냥 사귀어라"라며 결혼을 반대했다. 여자 부모가 반대하자 "그렇다면 그냥 사귀자"고 여자에게 말했다. 말 그대로 그냥 사귀는 상태로 그 후 여자는 무려 사 년여를 보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여자 쪽 부모의 반대가 결정적인 원인이 아닌 그 긴 기간이 원인이 돼 여자와 헤어져야 했다.
  여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지루함 때문인지 몰라도 다른 환경을 원했다. 그래서 그가 반대했지만 한외국 신학교 국내 분교에 다니면서 유학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그와는 점점 거리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한편 그는 그 기간 중에 장애를 잊기 위해 사소한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다큐멘터리를 빠짐없이 녹화한다든지, 한겨례신문 만평을 빼놓지 않고 스크랩한다든지 하며 뭔가에 몰두하기 위해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가 이렇게 사소한 일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뭔가 일이 있다는 거와 없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혼자 지내면서 육체적인 장애가 정신적인 장애를 불러올 수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인 기피증과 이중적인 성격이 생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가령 그는 괴로운데 남들한테는 괴롭지 않은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친구가 이따금씩 연락을 해올 때 만나기 싫지만 장애 때문에 그런다고 할까봐 억지로라도 만나서 전혀 안 그런 것 같은 표정과 말을 해야 했고,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니까 나중에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싫어지면서 자폐증 비슷한 증상을 앓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증상을 극복하기 위해 사소한 일에 몰두하는 한편 의식적으로 또 하나의 자신을 만들어서 분리시키는 작업을 시도했다. 즉 마음 속에 장애를 가진 채 현실에 벽에 절망하는 내가 있다면, 또 하나의 나는 장애를 가지지 않고 정상적인 활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믿고, 주로 후자 쪽에서 생각하며 표현을 하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하자 그는 움츠러들지 않고 자신의 장애를 잊을 수 있었다. 주위 사람들 또한 그의 의도대로 그를 비장애우로 대해줬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구십일년 십이월이 됐다. 그 무렵 그는 "내가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살아도 좋으니 제발 뭔가를 할 수 있는 일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사귀던 여자친구가 찾아와 "내 일을 갖기 위해 유학을 가겠다"고 말을 꺼내는 바람에 크게 다툼을 벌였다. 여자친구가 돌아간 후 기분이 울적해진 그는 무심히 텔레비전을 켰다. 텔레비전에서는 마침 구족화가 김희정씨가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 "입으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구나"라고 감탄했다. 그뿐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랬는데 새벽에 눈을 뜬 그는 그 영상이 다시 떠오르면서 "나도 한번 입으로 그림을 그려보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연필을 입에 물고 주전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수월했다. 아마도 예전에 그림을 그렸던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삼개월을 그렇게 그림을 그리자 요령도 생겼고, 그래서 그는 연필로 그린 그림을 가지고 구족화가 협회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 날 이후 그는 구족 화가로서 새로운 생을 시작하게 된다. 그랬는데 또다시 아픔이 찾아왔다. 사귀던 여자친구가 끝내 "결혼의 의미를 모르겠다"며 그의 곁을 떠난 것이다.
  그는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 상황이 올 수도 있겠다고 예견을 했지만 막상 이별을 하자 그는 자신을 비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충격 때문에 이틀을 꼬박 앓아 누워야만 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별의 아픔을 잊으려 그림에만 몰두했다. 그러다가 다시 한 여자를 사귀게 됐다. 지금 그의 아내가 된 간호사 이강경 씨이다. 이강경씨 역시 그와 쭉 성경공부를 같이 하던 교우였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사이였지만 별다른 감정이 없었는데 한 일이 계기가 돼 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어느 날 그는 성경공부를 마치고 이강경씨가 있는 자리에서 한 교우의 신앙상담을 해주고 있었다. 그는 그때 "성경에 자족하라는 얘기가 나오는데 그 말은 현재 있는 상태로 뻗어나갈 수 있는 여유를 가지라는 얘기다. 현실에 튼튼하게 발을 딛고 서는 것과 감사하는 마음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자족이다. 우리는 그런 자족하는 마음을 배워야 한다"라는 얘기를 했다.
  그 얘기를 옆에서 듣고있던 이강경씨가 나중에 전하는 말에 따르면 "저런 얘기를 할 수 없는 사람이, 내가 보기엔 오히려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이 친구를 위로해 주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일이 계기가 돼 이강경씨는 자주 전화를 하고 그의 집을 찾았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잠시 병원에 입원하게 됐을 때 집으로 찾아온 이강경씨는 "나는 당신을 결혼 상대자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물어왔다. 그는 주저하다가 "결혼 얘기는 하지말고 일단 사귀어 보자"고 말했다.
  그가 이강경 씨와의 결혼을 주저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또 깨지지 않을까 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결혼이 당사자만의 문제는 아닌 이상 이강경 씨 가족들의 동의를 받는다는 게 어렵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두 여자와 헤어진 후 그의 마음에는 "이제 결혼은 생각하지 말자. 결혼은 내가 하려고 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그냥 혼자 살다가 나중에 뜻이 맞는 몇몇 친구와 공동체를 만들어서 그림을 그리며 살아야겠다"는 각오가 자리잡고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이미 긴 기간동안 그와 성경공부를 함께 하면서 그의 됨됨이를 파악하고 있었던 이강경씨에게는 그와의 결혼에 아무런 장애가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데는 물론 그녀의 돈독한 신앙심도 큰 작용을 했다.
  이강경씨는 급기야 "나와 결혼해서 일년만 살다가 죽어도 괜찮으니 나와 결혼해 달라"고 청혼했다. 그렇게 되자 그의 마음도 바꾸었다. 이강경씨가 그 정도 각오를 하고 있다면 집에서 반대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 그의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마침내 결혼을 결심한 그는 이강경씨에게 한가지 다짐을 했다.
  "우리가 결혼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니까 결혼하는 거지 다른 것은 없다. 나는 혼자 살수 없어서 의지할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이다. 나는 당신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게 기쁠 뿐이다. 그러니 살다가 언제든지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 헤어지자. 그런 각오로 결혼을 하자"
  이강경씨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도 결혼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결혼 얘기가 나온지 이개월만인 구십이연구월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됐다.
  결혼을 하고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더욱 그림에 몰두했다. 구십삼년 삼월에 구족화가 협회 회원이 되면서 협회로부터 생계비도 지원 받고 있다. 이제 인생의 한고비는 넘긴 셈이다.
  그는 그 해 사월이 구족화가 합동전시회를 시작으로 그동안 일곱 차례의 합동 전시회를 가졌다. 그리고 나서 올해 처음 꿈에도 그리던 개인전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는 이번 개인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림을 그리는 입장에서 하나의 매듭을 짓고 싶었습니다.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앞으로는 뚜렷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그림을 그릴 것입니다. 저 자신이 장애우라는 의식을 떨쳐 버리고, 프로의식을 가지고 나 자신을 사회 속으로 던지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여건이 된다면 앞으로 지방에 내려가 마음 맞는 사람끼리 공동체 생활을 할 계획"이라며 밝게 웃는 그는 마음이 바쁜지 다시 입에 붓을 물고 화폭으로 향한다. 그의 붓이 닿는 화폭에는 그의 자유를 위한 비상이 힘차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 나는 마음껏 자유로와 진다. 붓을 손에 잡고 있는지 입에 물고 있는지 조차도 의식치 못한다. 오직 화면과의 대화 속에 벅찬 감동이 차 오르는 자유인일 뿐이다" (그의 일기 중에서 인용)

 

이태곤 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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