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시간여행을 떠나는 달팽이처럼 > 세상, 한 걸음


[사람사는 이야기] 시간여행을 떠나는 달팽이처럼

구족작가 김희정 씨

본문

인생극장 이라는 제목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다. 매회 만나게 되는 그 인간다큐멘터리의 주인공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정말이지 소설이, 영화가 따로 없다. 기구한 인연, 성공·실패 곡선의 출렁거림, 믿음과 배신들이 그 이야기들에 없어서는 안될 양념처럼 꼭 끼어 들어가 있곤 한다.
 그리고 프로그램의 마지막 부분에 그 모든 인생의 풍상을 겪어낸 후 갖게 된 자글자글한 삶의 주름이 오롯이 스며들어 있는 주인공의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나 자신과 그리고 내 주위 이웃과 너무도 닮은 모습이다. 그래, 모두들 자신의 지난 날들을 돌아보면 한 편의 영화고, 드라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렇게 각자 한 편의 드라마를 간직하고 있는지 모른다.  
 장애우들의 이야기는 더욱 그러하다. 대부분의 장애우들이 살아온, 사는 이야기는 다른 비장애우들에 비해 확실히 극적인 요소가 더 많이 들어가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 사람의 객관적인 신체조건에도 불구하고 그 조건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을 때 흔히 떠올리게 되는 ‘인간승리’, ‘장애 극복’이라는 말을, 그러나 대부분의 장애우들은 질색하는 걸 봤다. 그래, 그건 그냥 삶의 드라마의 한 부분일 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들려줄 이 사람의 이야기도 일단 한 편의 드라마로 손색이 없을지 모른다.

  

스물 네 살 나이에 닥친 불운
 

▲구족화가

 사진 속 그이의 모습은 정말이지 예뻤다. 이제는  거의 이십여 년 전의 모습이라지만 가녀린 몸집에 청순한 얼굴, 같은 여자지만 다가가 말을 건네고 싶을 정도로 발랄함도 엿보인다. 뜻한 바는 꼭 이루고 말겠다는, 욕심많고 야무진 속내의 스무살 초반의 앳된 그이가 사진 속에서 친구와 함께 활짝 웃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 공부를 썩 잘해 주위의 권고대로 서울 최고의 명문 여자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해 졸업 후 무역회사에 다녔던 그이는 다행히 그 일이 자신의 적성에 잘 맞았다고 했다. 자신이 그 분야에서 더 커나가기 위해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일년여를 다니다가 직장을 그만 두고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무역업인지라 영어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국내에 있는 미국의 한 대학 분교에 진학해 공부를 하고 있던 차였다. 결혼에 대한 생각도 없이 앞으로 자신이 하게 될 일에 대한 계획과 욕심만 가득한 시기였다.
그런 그녀가 얼마 후인 팔십사년 스물 네 살 해에 자기집 이층 난간에 앉아 있다 순간적인 실수로 ‘아’ 하는 순간에 떨어져 목뼈가 부러졌다. 이는 곧 경추손상이었고, 목 아래 모든 신체기능의 마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 그에게 일어난 일들은 젊디 젊은 그가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큰 고통이었고 절망이었다고 지금도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터뷰에 선뜻 응해놓고도 이 당시를 다시 회상하게 되는 상황을 만든 것을 스스로 잠시 자책할 정도로 당시의 삶은 그리고 온 몸은 고통 자체였다. 아래 이야기를 듣고 보면 그런 그를 이해할만했다.
병원으로 옮겨져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에서도 그는 어렴풋이 머리카락이 온통 밀려지고 있음을 느꼈다고 했다. 젊은 여성이었던지라 머리카락은 무척이나 소중했기에 ‘어, 내 머리 이렇게 밀면 안 되는데…’하고 생각했다고 그는 기억했다. 그러나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는 그렇게 머리를 밀고 머리에 구멍을 내어 끊어진 신경줄을 잇는 큰 수술을 받았고, 수술이 끝난 후에도 머리 양쪽의 구멍에는 무언가가 심어져 있었다. 부러진 목뼈에는 큰 추가 달려 목이 늘어나게끔 고정돼 있었고 양팔도 벌린 채로 고정돼 있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형상있죠? 바로 그대로였어요.” 의식을 찾고 눈을 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봤을 때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감히 상상도 안된다.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외에 움직일 수 있는 건 눈동자밖에 없었다. 팔을 움직일 수 없어 몸 어딘가가 가려워도 긁을 수가 없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긁어달라고 했을 때 엉뚱한 곳을 긁어댈 때, 음식을 먹다가 조금 흘려 얼굴을 닦아야할 때 그는 자신의 손을 쓸 수 없는 절망적인 현실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그런데다 문을 닫거나 수저를 들거나 컵을 들었다 놨다 하는 조그만 소리도 신경을 건드리는지 온몸에 면도칼로 긋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의 조그만 움직임 하나 하나가 모두 두려움이었다.
또 벨트로 단단히 묶여진 몸은 욕창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십 분만에 한 번씩 뒤집어댔다. 그런 상황이니 깊은 잠을 자기도 어려웠다.
“제가 중학교 이학년 때 우연히 유네스코회관에서 ‘저 하늘에 태양이’라는 영화를 봤어요. 사고로 척수장애를 갖게 된 여자 스키선수의 이야기였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 주인공이 사고 후 하던대로 제가 똑같이 그러고 있는 거예요. 몸이 뒤집어져 있을 때 손님이 오면 그 손님들이 바닥쪽에 앉아서 저와 얘기하고 그랬는데 영화 속 그 스키 선수도 그랬었다는 사실이 다시 생각나더라구요.”
 
 입으로 펜을, 붓을 물기 시작하고
  
그래도 그 때까지는 오개월만 지나 부러진 목뼈가 붙으면 병원생활과는 안녕일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그 상태에서 앞으로 생활하는데 필요한 작업훈련을 받는다고 했다. 손 안 쓰고 단추 끼우는 법, 옷 입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처음 물리치료실에 가서  앉았을 때 헝겊인형처럼 푹 쓰러지는 자신의 몸을 온통 거울로 돼 있는 그곳에서 여실히 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거울을 보면서 현실을 깨달았죠. 내가 왜 이런 몸으로 옷 입는 법 이런 거 배우면서까지 그렇게 살아가야 하느냐, 죽는 날까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데, 기적도 없다는데…. 그땐 자연스럽게 죽음밖에 생각나는 게 없었어요.”
그러나 사람들이 크나큰 절망에 부딪혔을 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로 삼는 ‘자살’에 대한 자유도, 자격도, 능력도 그는 허락받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남겨진 길은 한 가지, 그냥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착실히 재활훈련을 받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스스로 죽지 못하니 그냥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못한 체념이었다. 끝내 재활훈련을 거부하고 퇴원해 집에 돌아올 때 휠체어도 거부했던 그였다. 어머니가 떠 먹여주는 음식물을 죽지 않을 만큼만 먹으며 그는 절망만을 껴안고 지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나 싶어 그 이유라도 알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하느님한테 한 번 묻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나 간절해서 어느 날은 정말 그거 물어보러 하늘로 올라가는 꿈도 꿨으니까요. 그리고 또 소원이 손가락 하나만 쓸 수 있다면, 설 수 있다면, 하는 거였어요. 그때 꿈에서는 서서 다녔는데 이제는 꿈에서도 휠체어를 타고 다니더군요.”
풀 수 없는 그 의문으로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는 나날에서 그나마 혀로 책장을 넘기며 책을 읽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러다 입에 펜을 물고 일기도 쓰기 시작했다. 원래 시원시원 잘 쓰는  필체여서 학창시절 친구들 이력서를 대필해주곤 했는데 입으로 써도 그 필체가 살아나는지 어떤 사람은 그의 글씨를 보고 회화같은 느낌이 난다고 평했다. 그리고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도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결국 주위의 주선으로 그는 세계구족화가협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던 당시 한 장애화가를 만나게 됐던 것이다.
 
 캔버스 안에서 자유로워지고파
 
김희정 씨의 작품들을 보면 단순히 장애를 입은 후 그림을 접하게 된 수준이 아닌 것 같았다. 역시나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선생님이 그림을 보고는 그에게 미술반에 들어오라고 할 정도로 원래 남다른 소질이 있던 사람이었다. 인문계에 진학하지 않았고 또 미술의 길을 걷는 게 왠지 쉽지 않을 것 같아 포기했지만 그때 착실히 미술 수업을 받아둔 것이 장애를 입은 후에야 빛을 발한 것이다.
누군가 동양화물감을 사줘 물을 이용해 비교적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동양화와 수채화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동양화는 붓을 눕혀서 그려야 한지 위에 골고루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입으로 붓을 눕혀 그리다보면 물이 밑으로 줄줄 흘러 너무도 힘들었다.
그 즈음에는 어느 정도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여 일년여 동안 재활병원에서 이런 저런 재활훈련을 받았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래도 간단한 보조장치를 이용해서 이제 혼자 밥을 먹을  수 있고, 전동칫솔이 있어 혼자 이를 닦을 수 있게 됐다.
병원측의 배려로 병원에서도 계속 그림은 그렸다. 그리고 퇴원 후 한국화가 이승하 씨로부터 문인화를 사사받는 동안 실력은 한걸음 한걸음 나아갔다.
그림 실력의 진척 속도가 빠르고 무엇보다 작품에서 엿보이는 앞으로의 성장가능성에 후한 점수를 받아 그는 세계구족화가협회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었고, 팔십팔년 서울장애우올림픽 기념전시회를 시작으로 개인전과 구족화가협회 회원전을 거쳐 드디어 구십년도에는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열린 ‘미술가들과의 밤‘에 다른 일반 아티스트들과 함께 나란히 작품이 전시되는 영광을 안게 됐다.
그러나 전시장에 걸린 다른 작가의 작품들 속에서 자신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면서 그는  깨닫게 됐다. 자신이 캔버스 안에서 자유롭지 않았음을, 잘 그린다는 칭찬만을 바라며, 잘 그린다는 얘기를 쉽게 들을 수 있는 풍의 그림만을 선호해 그렸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그 자신이 잘 알았기에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본격적으로 그림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든 것이 바로 그때였다. 그런 식으로 계속 남의 평가에 전전긍긍해 그림을 그릴 수는 없는 것이라면 무엇보다 자신이 자유롭기 위해서 그림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국내 대학을 알아봤지만 그와 같은 중증의 장애우가 시험을 칠 자격을 주지도 않을뿐더러 석고상 데생같이 매우 정밀한 터치를 일괄적인 실기시험 과목으로 내세우는 국내 대학은 어차피 너무도 먼 목표였다. 
그 즈음 우연히 법정스님이 인도에 대해 쓴 글을 읽으면서 선진 외국과는 뭔가 다른 정신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듯한 인도라는 나라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나 정작 인도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투성이어서 그는 인도한인회의 연락처를 알아내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인도의 상황을 알려달라고 편지를  썼다. 그러나 답장에 적힌 바로는 온도가 늘 섭씨 사십도가 넘고 물과  전기도 쉽게 끊길 정도로 사회 전반적으로 낙후하다는 내용이었고 결론적으로 ‘오지 마시라’는 것이었다. 그 편지를 읽으니 불현듯 두려움이 엄습해오기도 했다.
“저는 늘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사람이었어요. 그때는 세상에 두려운 게 없었어요. 죽음이 두렵지 않은데 그런 환경이야 그저 불편할 정도였죠. 다른 가족들이 몹시 반대하면서 일주일만에 다시 돌아올 거라고 장담했지만 어쨌든 저는 구십년도에 짐을 챙기고 떠났죠.”
그냥 물 흐르는 듯한 그의 말을 그렇게 흘려 듣다가 잠시 그가 비행기에 올라탄 이후 상황들을 상상해봤다. 여전히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입과 눈동자뿐이었던 한 젊은 여성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짐을 찾고 택시를 세워 그날 밤 묵을 곳으로 찾아가는 것부터 암담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출국 직전 병원에 있을 때부터 인연을 갖게 된 수녀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례를 받고 인도에 계시는 한 신부님을 소개받아 다행히 자리를 잡을 때까지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생활 전반이 불편한 것 투성이었을 텐데 그래도 그는 기세좋게 진학할 대학부터 알아보기 시작했다.
물론 인도의 대학 관계자들도 손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면서 어떻게 회화과 강의를 들을 수 있겠냐고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일주일도 못 가 그만 둘거라고, 그렇게 다니다가 그만 두면 괜히  다른 학생도 기회를 잃는 것이고 학교측도 손해라는 것이었다. 한국대사관에서 추천서를 써줘도 안되던 일이 그의 다부진 학습계획과 의지를 거듭 확인하자 빗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인도에서는 미대 입학시험에서 실기시험을 보긴 하는데 한국같이 정교한 데생이 아니라 정물화를 그리면 되었다. 그리고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배를 경험한 탓에 영어를 공용어처럼 사용하고 있어서 다행히 언어장벽은 없었다. 사고 전 공부해 두었던 영어가  이때 유용하게 활용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내 삶이 그렇게 인도에 이르게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어져 왔다는 생각도 들어요. 아무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고 하지만 저도 여잔데 왜 무섭고 두려운 일이 없었겠어요. 그런데 인도에 혼자 가겠다고 결심하고 결국 이루어낸 과정이나 이제까지 제가 했던 일이나 지식이 거기서 그 일들을 위해 꼭 준비한 것처럼 모두 유용하게 쓰여지는 걸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힘이 작용을 했다고 느껴져요.”
그러나 인도 유학생활은 역시 녹록치 않았다. 다른 부분에 대한 고통도 고통이지만 살인적인 고온의 날씨에 몸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학업에만 정진했던 탓에 어느새 욕창이란 녀석이 그이의 전신을 공격해오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부위는 밤톨만하던 것이 조금씩 커져 어른 주먹이 드나들 정도로 구멍이 커졌다. 욕창 때문에 식은땀이 나고 몸이 붓는 현상이 왔다. 유학시절의 사진을 보면 시기별로 모습이 많이 다른데 기름기 위주의 인도음식 탓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몸은 점점 부어가고 얼굴은 꼭 폐결핵환자처럼 검어졌다.
그래도 인도 평단의 뜨거운 반응이 그 대가로 그에게 찾아왔다. 재학시절 이미 독특한 화풍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해 구십사년에 가네샤갤러리에서 젊은 작가들과의 그룹전과 개인전을 갖고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에게 쏟아진 관심의 초점이 ‘장애’ 사실만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가 지금도 뿌듯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장애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이 당시 내로라하는 인도의 평론가가 작품만을 가지고 평을 쓴 것을 보고 그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고 회상한다.
  
 “명예, 그런 건 부수적인 거죠”
 
이후 그는 가네샤갤러리의 전속화가가 되는 영예를 갖게 됐고 이후에도 활발한 작품활동을 했다. 중간에 욕창 때문에 귀국을 권유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결국 석사학위를 마치고 구십칠년에야 그는 한국에 돌아왔다.
돌아온 직후 병원에 가서 환부를 보여주니 의사는 “당신 미쳤냐”는 소리부터 했다. 그만큼 욕창의 환부가 심각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욕창수술을 받고 육개월여를 치료받은 후 그는 퇴원할 수가 있었다.
그러한 사정으로 돌아온 직후 실력의 성장을 보여줄 전시회를 서두를 수 없었지만, 그리고 한국 화단에서는 인도에서와 같이 안정된 평단의 주목을 기대하기 어려워 어쩌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러한 세간의 평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가 원래 인도에 갔던 이유가 캔버스 안에서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인도에서의 명성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미련은 없었어요. 거기서 명성을 얻었다면 제가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생긴 것일뿐 그게 목적이 아니었으니까요.”
인도가 그에게 준 변화는 그렇게 그의 안에서 왔다.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하고 인도로 떠났는데 인도에 도착해보니 내가 왜 그리 가진 게 많아요. 공항에서부터 만나는 수많은 거지들, 그리고 그곳 천민들에 비해서 난 단적으로 말해 냉장고도 있고, 집도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인도에서는 되는 일도 없고 또 안되는 일도 없어요. 내가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됐던 일도 안 되는 게 너무 많아요. 노력한다고, 의지가 강하다고 다 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겸손과 인내를 배우게 됐죠. 누구못지 않게 육체적인 고통을 겪어낸 후에 그곳에 왔지만 그곳에서도 이런 저런 고통에 부딪치면서 제 스스로가 조금씩 깎여 나가는 것도 느껴졌어요. 우리 나라에서 깨닫지 못한 이런 것들을 거기서 체득하고 왔고 그것이 일에 있어서의 성취보다 더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지금도. 그래서 단순히 유학이 아니라 내면적인 인생공부를 많이 하고 온 듯 해요.” 
귀국 후 그는 엉겁결에 한국구족화가협회 회장직을 맡아 일하기도 했고 또 결혼도 했다. 구십구년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지금도 꾸준히 그는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제 그는 남편이 옆에 있을 때만 작품을 한다. 물감을 짜고 붓을 빠는 일을 해주는 사람이 옆에  있어야 그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도 남편이 일을 쉬는 날을 택해 이루어졌는데 사정상 문을 열어줄 사람이 없어 다른 날은 곤란하다는 그의 대답을 듣고 일본의 개호인제도가 절실히 떠올랐다.
“개호인이 이십사시간 옆에 있대도 그렇게 마음놓고 그림을 그리지는 못해요. 휠체어에 오래 앉아 있으면 욕창이 무서워서요. 몇 시간 하고는 꼭 자세를 바꿔 쉬어야 하거든요. 그러고 보면 예전 사고 직후에는 휠체어도 거부했지만 이제는 휠체어라도 맘껏 타면 소원이 없겠네요.”
‘장애는 단지 불편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고 그는 숨김없이 말했다. 그러나 직접적인 붓질 대신 그는 눈을 뜨고 바라보는 실내의 모든 풍경,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의 느낌들을 눈에 담뿍 담으며 오랜 명상을 통해 그는 ‘사실’을 떠나 자유롭게 새로운 공간과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머리 속에 작품 아이디어를 채워간다.
민화풍의, 어쩌면 아동화풍의 이미지인 그의 작품들은 “세상을 깊이 이해할수록 내면에서는 어린이의 감성으로 회귀하려는 심리적인 저항과 부딪치”는 것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래서일까, 「시간여행」이라는 동일한 제목을 가진 작품 시리즈를 발표한 바 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달팽이가 느릿느릿 기어가듯 그가 찬찬히 돌아서 여행하고픈 시기는 그의 인생에서 관연 어느 지점일까, 궁금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한 가지, 그는 "인간승리" "장애극복" 의 관점으로 자신이 언론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질색 이라고 했지만 어느 미술평론가가 그에게 내렸던 진지한 평가 처럼 사람들이 그를 바라볼 때가 많다는 사실도 거듭 이야기 해주고 싶다.
" 여기에서 그가 장애우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은 덤을 주려는 포석이 아니다. 장애를 극복한 데 대한 격려나 찬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노력의 결의 결과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하려는 것이다."

글/ 한혜영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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