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에 만난 장애우]작은힘 모여 큰힘 되는 자석처럼 > 세상, 한 걸음


[이달에 만난 장애우]작은힘 모여 큰힘 되는 자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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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7일 서울맹학교에서는 성대한 퇴임식이 있었다. 각 시각장애우단체의 축하와 수많은
제자들의 박수 속에서 강당의 중앙 길을 웃는 듯, 우는 듯 마지막으로 나오는 그날의 주인
공 김홍진(61세)선생.
35년간 서울맹학교 교단을 지키며 또 특수교육의 제도를 개편하는데 주역을 맡고 더불어 복
지사업에 헌신한 김홍진씨는 이제 조용히 자택(종로구 홍의동)에서 환자를 돌보고 있다.
이분의 일생은 시각장애우아동 특수교육의 역사요, 시각장애우복지사업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 역사 속에는 희망도 있고 절망도 있고 고통과 환희가 있었다.
아직도 젊은이처럼 또랑또랑 말씀하시는 김홍진 씨의 이야기의 자락을 잡고 특수교육의 발
자취와 시각장애우복지의 형성과정을 더듬어보자.

 <20세부터 장애운동 나서>
시각장애우교육은 일제시대부터 있었다. 김씨가 졸업한 "조선총독부제생원맹아부"에는 시각
장애우아동과 청각장애우아동이 한학교에서 교실을 달리하고 교육받았다. 시각장애우 아동
은 안마, 침, 뜸 등을 직업교육으로 했고 청각장애우아동은 양복짓는 것을 배웠다. 해방 후 
제생원은 맹학교 초등부로 바뀌고 중학교(일반은 6년제, 맹학교는 5년제)가 인가되었다. 그
런데 1950년 일반교육제도의 개편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되었으나 맹학교는 중학교
만 존재하고 고등학교는 없어졌다. 당시 김홍진 씨가 중학생이므로 고등학교를 갈 수가 없
어진 것이다. 이때부터 김홍진 씨의 장애운동이 시작되었다.

"시각장애우도 똑같은 사람이니 대학을 가고 싶으면 가야지요. 그러나 고등학교가 없으니
대학을 어떻게 갑니까? 그래서 인가를 해달라고 졸랐죠. 중학교 졸업식도 안가고 사은회도
거부했어요. 그러다 사변이 나서 부산으로 가 계속 운동을 벌이고 우리끼리 모여 공부를 했
지요."

고등학교추진운동을 벌이다 문득 사범학교가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시각장애우교육 교사
수급문제도 해결되고 대학도 갈 수 있고, 그래서 사범학교 신설을 추진해 온갖 방해와 질책
을 무릅쓰고 결국 54년에 사범과가 인가되고 김씨는 5년을 소급해 교육받은 것으로 인정되
어 사범과 1기 1호 졸업자가 됐다.

지금은 사범부는 대학으로 변하고 서울맹학교에 유년부, 초등부(약시반, 맹인반), 중등부(중
학과정, 고등과정)로 개편되어 이 학교를 졸업하면 범위는 한정되어 있지만 취업이 잘 되고
보수도 적지 않아 사는데 지장이 없다고 자랑도 빼지 않는다.


<시각장애우는 특교과 나와도 취업할 수 없어. >
해방되어 미군정당시만해도 학교의 운영은 좋은 편이었단다. 학교가 보사부 소속이라 급식
도 잘 나오고 간식으로 초코렛과 캔디도 먹고, 그러나 문교부로 이관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
졌다. 학교는 재정에 허덕이고 학생들은 굶주리기 일쑤였다고, 시설은 일제시대 때 워낙 잘
해놔서 지금보다 좋았으나 그 외 모든 것이 열악했다. 특히 교과서가 없어서 선생들이 일본
교과서를 번역하여 강의하는 등 교과서 없이 수업하기도 여러 해.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다 좋아졌다.

그럼 현재 불만은 없는가.
"침술은 한의사들이 대학과정에서 배우는데 우리는 고등과정에서 배웁니다. 그래서 여러 이
유로 안마사들이 침술을 못하도록 한의사 쪽이 보사부를 걸고 행정소송을 했어요. 우리도
전문대를 세워 침술을 전적으로 가르치려고 신청을 했어요"

또 시각장애우들은 특수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자격증을 가졌어도 특수학교 교사가 되려면 3
년 이상의 유경험자라야 한다.

"어디서 3년을 경험합니까? 일반인이야 경력을 쌓는다해도 시각장애우들은 힘듭니다. 정부
가 이 규정을 풀고 길을 터야 해요"


<분위기상 맡지 않을 수 없어.>
이제는 김홍진씨가 가장 잊지 못하고 힘들었으며 일생의 역작이라 할 수 있는 "안마사 협회"
설립과정을 들어보자.

일제시대에는 맹학부를 졸업하면 안마사 등 3가지 자격증을 주었다. 그러나 해방 후 행정명
령으로 이를 금지시키고 이후 의료법이 만들어졌으나 시행수칙에서 삭제해버려 자격증 제도
가 없어졌다. 교육은 계속하고 자격증은 주지 않으니 또 운동을 할 수밖에.

끝내 63년 12월 "안마사 허가에 대한 규정"을 제정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정부가 시행할
의사가 없으니 애로사항이 무척 많았다고 매일 보사부로 일찍 출근해 사회국과 의정국을 돌
며 농성하여 결국 자격증 문제를 해결했다. 무려 4개월만에.

당시에도 안마사협회는 있었다. 그러나 임의단체여서 제약이 많아 대구에서는 이를 법인으
로 설립하기 위해 2년간 섭외하였지만 보사부는 "안마사는 신체교정에 과한 사항이니 문교
부 체육국에가서 협의하라"며 각하되었다고.

"그 사람들을 위로할 겸 술을 같이 먹는데 갑자기 서울에서 김홍진이 맡아서 좀 해라 해요.
분위기상 안한다고 할 수 없어 맡았지요. 서울에 와서 한 국회의원의 도움을 얻어 보사부장
관과 앉아 협의하여 허가해주기로 약속을 받았습니다. "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관(官)을 상대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어느 날 "세계각국의 시각장
애우들의 분포사항"을 서면으로 제출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전혀 필요
가 없는데 계속 요구해 "약"이 올라 부서의 모든 직원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하고 호되게
꾸짖은 후에야 겨우 법인설립을 받았다.


<한시회, 시설은 만족하나 운영조직은 불만>
김홍진 씨는 현재 "한국시각장애자복지회(한시회)"의 이사로 있다. 한시회는 본보 작년 12월
호에 "이것이 문제다"란 예에 "……한시회 사태"로 기사화 되었던 단체다. 김홍진 씨를 비롯
몇 분이 단체를 설립하고 지금도 그들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부분을 좀더 실감나게 문답식으로 풀어본다.

문: 한시회를 처음 설립하실 때 의도는 무엇입니까?

답: 한시회는 내가 처음 구상했고 모든 계획도 내가 했어요. 일본 것을 보고 힌트를 얻었는
데 그곳은 대표이사를 시각장애우가 하고 명예회장은 앞을 보는 이 중에서 전에 정치하던
사람이 하니 섭외도 잘 되고 발전하는 것 같았어요

문: 그런데 왜 백리전 씨가 모든 것을 맡게 됐습니까?

답: 내가 맹인복지협회 상임이사로 있을 때 보사부에 출입을 자주 했어요. 그때 백리전 씨가
항상 보사부에 있어요. 그래서 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이 좋겠다 생각하고 다른 이사들의
반대를 뒤로하고 참여시켜 사무장을 맡겼어요. 정상궤도에 오르면 시각장애우가 대표를 맡
기로 약속하고 우리는 운영방침만 정하고 그 사람이 모든 사항을 다 처리했어요.

문: 백리전 씨가 족벌체제를 한다는 말이 많은데

답: 그 후 백씨가 자기 가족들을 요직에 두었어요. 나는 그래도 일만 잘하면 되지하고 별 생
각없었는데 직원들이 불편하고 편하적이라며 반발해요

문: 어떻게 진전되어 있습니까?

답: 나는 단계적으로 시정하자고 했어요. 그러나 다른 사람의 반대로 내가 밀렸어요. 지금은
백씨가 물러나고 한현진 씨가 전권을 맡았으나 운영상황은 그전과 마찬가집니다.

문: 한시회를 설립하신 분으로 그 동안을 평가해 주세요

답: 시설이나 규모는 내가 생각한 것대로 완전히 궤도에 올랐다고 봐요. 세계수준이라 말할
수 있어요. 다만 현 운영조직에 불만이 있습니다.

문: 지금 잘 운영된다고 봅니까?

답: 모든 시설이 잘 운영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체육시설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우리 시
각장애우들이 잘 이용하고 있질 않아요.

문: 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습니까?

답: 지금 시각장애우 대표들이 몇 가지 요구하는 것이 있어요. 그러나 잘 들어주지 않아요.
모든 것을 쾌히 다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문: 복지단체는 어떻게 운영되어야 한독 생각하시는지.

답: 앞에서 말 한대로 대표이사는 장애인 당사자가 맡고 명예회장은 정치력 있는 사람이 맡
아야 발전합니다. 즉 내부운영은 당사자가, 섭외는 정치인이 해야지요.

김홍진 씨는 "장애인고용촉진법"에 대해 매우 못마땅해한다. 기업에 장애우를 고용할 의무는
있으면서 처벌규정이 없는 법은 있으나마나, 적어도 이 법이 잘 운영되려면 벌금제도를 두
어 고용치 않을 경우 벌금을 거두어 이를 장애인복지에 사용해야 한다면서 그렇지 않는 경
우의 법은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혹평을 서슴치 않았다.


<속으로 울고 겉으로 웃으며 떠나.>
김홍진 씨는 평소 반주로 소주 2홉들이 한 병을 마신다. 그러다 퇴임을 앞두고 고량주 한
병을 사발로 마셨으니 교단을 떠나는 심정을 어찌 다 헤아릴까.

"오래 전부터 떠날 준비를 해서 아무 감정이 없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명예퇴직서에 도
장을 찍고 보니 마음보다도 뱃속이 찡한 것이 아픈 것도 아니고 이상한 느낌이 들더군요.
마음을 달래며 잠이 안 오면 술을 먹고요. 명예퇴직이 확정되자 더 심하게 마음이 아립디
다"
그러면서도 그는 퇴임식장이 울음바다가 되지 않게 밝고 명랑한 분위기를 연출하느라 일부
러 힘주어 말하고 시종 웃으며 진행해나갔다. 떠나는 자리는 언제나 슬픈 것, 그러나 장내는
일동이 일어나 축하하며 화기 있게 수분동안 박수를 치며 선생님을 보냈다. 선생은 속으로
울며 겉으론 웃으며, 그래서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하였는가.


<이젠 조용히 살고 싶다.>
지금 김홍진 씨의 업무는 새벽 4시 30분부터 시작된다. 4시에 기상하여 준비를 하면 아침
일찍부터 환자들이 몰린다. 식사할 시간도 없이 치료하며 상담하다보면 어느덧 밤 12시, 따
지고 보니 20시간이란 중노동을 하는 셈이다.

이제 그는 여생을 조용히 보내고 싶단다. 사실 여러 운동이며 활동, 교육에 힘을 쏟아 그 동
안 가정을 돌볼 시간이나 있었으랴

"장애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첫째, 부정적인 자세로 살지 말라는 것이지요. 평생
최선을 다해 "된다" 생각하고 남들 보다 몇 배 지속적으로 노력하세요

둘째, 신용이 기본재산입니다. 돈 문제뿐 만 아니라 우정 그 외 어떤 경우도 신용을 잃어서
는 안되요.

셋째, 자기가 행한 행동의 결과는 분명히 자기에게 돌아온다고 생각하고 생활해야 합니다."

 

<작은 힘 모아 큰 힘 되는 자석처럼>
퇴임 인사에서 그는 서두로 난데없이 자석이야기를 끄집어내며 시작했다. 어렸을 적 자석에
대해 공부할 때 너무 신기하게 들었단다. 자석에는 천연 자석과 전자석이 있단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이야기는 슬슬 감명으로 이어졌다.

기자가 다시 그를 만났을 때 역시 자석이야기를 잊지 않았다. 모든 물건에는 자석분자가 있
다. 다른 물건들은 그 분자들이 한 방향으로 모아져 있지 않아 자석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
러나 자석은 모든 힘이 한 곳에 모아 있어 큰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전자석은 전기적 자
극을 줄 때만 자석이 될 수 있다.

"우린 장애우는 자석처럼 작은 힘을 모아서 행동하면 큰 힘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서로 협력
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적어도 천연자석이 못되면 전자석처럼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힘을
합쳐 큰 일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작성자박종서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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