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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그리고 정리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장애우 노동자 류선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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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가 있기 바로 이틀 전 그는 병원에 사흘 동안 입원해 있었다. 전경들에게 특히 머리를 많이 얻어맞아 안정을 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회 일각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던, 흡사 5.18의 기억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폭력적이었다는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사월 십일의 경찰 진압 현장에 그도 있었다.
올해 마흔 다섯의 류선희 씨, 그도 지난 이월 십구일 정리해고 통지서를 받은 대우자동차 해고 노동자다. 그리고 지체 삼급의 장애우다.

 

병가 후 그를 기다리던 해고통지서

 

그와 함께 해고당한 대우차 부평공장 노동자들의 수는 자그마치 천칠백오십명이다. 노동자들의 격렬한 반대시위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리해고조항이 삽입된 노동법 개정이 이루어졌다지만 이렇게 사상 초유의 대량 정리해고 사태가 현실로 나타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천년 팔월 최종 부도처리 된 후 정든 대우자동차 공장을 떠난 사람들의 수는 희망퇴직 신청자까지 합하면 모두 육천팔백여명이나 된다. 대부분 한 가정의 가장인 그들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다시 일자리를 찾아 나서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어느 싯구처럼 "그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이다.

 

그런데 외환위기 이후 특히나 제조업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 인근 인천공단 공장들이나 동종 업체에서도 이들은 대개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다. 게다가 나이가 마흔이 넘은 사람이라면 아예 일거리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란다. 이렇게 남편들이 집에서 넋을 놓고 있게 되자 부인들이 당장의 생계를 위해 일자리에 나서 보지만 그들을 받아주는 곳은 청소 아니면 일반 식당이다. 제조업도 나이 마흔이 넘은 여성이라면 하루 여덟시간 꼬박 일해도 보수가 사십오만원 안팎이라고 했다.

 

다들 나오는 게 한숨뿐인 처지지만 주위 사람들이 특히 류선희 씨의 처지는 더욱 안쓰러워한다. 그는 장애라는 악조건까지 갖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일 해온 사람에게는 몸이 재산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처지들이라 류씨의 사정이 남의 일 같지 않다. 더욱이 산업재해가 드물지 않은 작업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내일로 닥치지 않은 한 그렇게 실감나는 일이 되지 못할 터이다.

 

그도 처음에는 그저 허리를 삐끗한 줄만 알았다. 그가 하는 직무상 쇠를 깎는 커터를 자주 쓰는데 그것을 쓰려면 이, 삼십 킬로그램이 나가는 쇠뭉치를 들어올려 그 기계에 집어 넣어야 한다. 그런데 구십팔년 오월 어느 날은 기계를 들자 악 소리가 날 정도로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병원에 가서 처음에는 요부염좌라고 해서 단순한 치료를 위해 입원했지만 어떻게 된 것이 갈수록 악화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정밀검사를 했더니 척수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척수에 염증이 생겨 신체 일부분과 연결된 신경이 손상된다는 척수염의 전형적인 증상대로 두 다리의 운동, 감각이 점점 무뎌지기 시작했다. 대소변을 보는 일도 예전처럼 원활하지 않다.

 

주위에서는 척수염도 결국 업무상 생긴 질환이 아니냐고 했지만 그 인과관계를 입증할 뚜렷한 증거는 없어서 회사측은 요부염좌만 산업재해로 인정해 처음 육개월 간의 치료비만 지원해줬다.

 

그런데 치료를 마치고 복직하려고 했더니 달라진 그의 몸상태에 맞는 자리가 마련되지 않았다며 휴직을 권했다. 외환위기 이후 계속 어려웠던 회사 사정 때문에 급여의 70%만 받고 장기 휴직중인 사람들이 당시 여럿 있었기에 일단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일년여를 쉬고 복직한 것이 올해 이월이다. 그러나 그때 이미 회사는 일차 매각협상이 불발로 끝나면서 채권은행단과 매입 가능성이 있는 업체들에게 가시적인 자구노력을 더욱 확실하게 보여줘야 할 상황이었다. 그것은 곧 정리해고를 통한 구조조정이라는 결론에 이미 도달해 있었고, 노조에서는 이에 반대해 파업과 조업거부를 검토하고 있던 차였다. 류씨는 그렇게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보름 여 회사를 다니다 결국 정리해고 통지서를 받은 것이다.

▲류선희씨의모습
그런데 조금 느릿한 말투로 풀어내는 그의 지난 날의 이야기는 놀랍기만 했다. 알고 보니 이번이 그에겐 벌써 세 번째 해고이고, 감옥에도 세 번이나 갔다 왔다는 것이다. 신산한 삶이 드러나는 그의 얼굴, 그 사이 숨길 수 없는 주름이 그제서야 보이기 시작했다.

 

보육원 나와 부랑아로

 

그가 태어난 곳은 강원도 홍천. 기억도 잘 안 나는 네 살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그의 삶이 조금은 달랐을까. 아버지는 머슴일이나 다른 일거리를 찾아 밖으로 나돌았지만 부인이 있었다면 어린 두 아들에 대한 걱정을 조금은 덜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럴 수 없었던 아버지는 그의 형을 외갓집에 보내고 혼자 힘으로 아직 어린 선희 씨를 키워 보려 애썼다. 아니, 그랬을 거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어린 아들까지 건사하기는 아버지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라는 사실도 이해한다. 그렇다고 외갓집에서 선희 씨까지 맡을 형편이 아니었는지 결국 그는 여섯 살의 나이에 보육원에 보내졌다.

 

보육원 시절이 어땠는지 묻자 류씨는 "너무 어렸을 때의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한 열두 살에 그곳을 나와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보육원들이 그러했듯 빠듯한 살림에 너무 많은 아이들을 책임지다 보니 "관리" 차원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억압적인 장치도 많이 있었는데 자신은 그것을 참지 못했을 뿐이라고 했다. 보육원을 나와서는 춘천으로 갔지만, 그가 의지할 곳은 물론 없었다. 그래서 시장 골목이나 다리 밑 같은 곳에서 잠을 자며, 넝마를 주워 파는 사람들과 어울려 그날 그날을 이어갔다. "말하자면 거지 생활이었죠." 담담한 목소리로 그가 말한다.

 

그런 생활을 일년 정도 하던 중 춘천비비에스회관에서 그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무료로 기숙할 수 있도록 잠자리를 제공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숙소를 당장 회관으로 정하고 그 즈음 알게 된 사람들을 통해 구두닦이일도 배웠다. 그렇게 처음으로 그나마 조금 안정된 생활을 하던 열여섯의 어느 날, 같이 생활하던 친구 세 명과 같이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 같이 올라온 또래 중 한 명이 아는 사람에게서 먹고 자면서 돈도 벌 수 있다는 서울 뚝섬 근처의 한 악세사리공장을 소개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그곳은 사람들을 거의 감금된 상태로 가두고 일만 시키는 곳이었다. 거의 유일한 외출이 목욕하러 가는 일이었는데 조금의 이탈도 용납되지 않은 채 집단적으로 이뤄졌고, 뭘 사러 나가는 것도 금지됐다. 아침 여섯시 무렵부터 밤 열시 정도까지 그저 일, 일만 하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류씨 일행을 데려온 사람은 당시 돈으로 한 사람당 오천 원씩을 받았다고 했다.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에 그런 감옥아닌 감옥생활을 육개월 이상 하다 보니 당연히 더 이상 못 참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어느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살던 그로서는 어쩌면 오래 버텨온 셈이다.

그래서 어느 날 밤중에 뜻을 같이 한 친구 몇 명과 함께 공장을 탈출했다. 그 동안 일한 댓가는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다시 동대문운동장 쪽에서 구두닦이 등의 일을 하며 일년 정도를 살았다. 어느 덧 그의 나이가 열여덟에 접어든 때였다.

 

그리고 선택한 노동자의 길

 

"나도 이렇게 살 것이 아니라 좀 새롭게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어떤 사람의 소개로 "영동야학" 이란 곳을 알게 됐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마쳤던 류씨지만 평소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늘 배움에 대한 갈망은 있었기에 이제 좀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야학에 열심히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 야학은 옛 강남구청 자리 근처에 있었는데 당시 그 주위는 한창 개발이 시작되고 있었다. 개발이 되는 곳이라면 늘 그렇듯 원래 그곳에서 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높아진 땅값 때문에 밀려나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남은 사람들을 위해 그 야학은 마련됐던 것이다. 당시 행정구청과도 얘기가 잘 됐는지 빈 경찰서 건물을 야학건물로 사용했는데 강의실로 쓰는 곳 외에도 다른 방들이 많았기에 다른 강사들의 허락을 얻어 그는 숙소도 아예 그곳으로 옮겼다.

 

야학의 교육과정이 중학교 과정부터 마련됐기 때문에 그는 다른 강사들의 특별지도를 받으며 혼자 초등학교 과정부터 시작했다. 그렇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검정 시험까지 단계별로 모두 마친 그의 꿈은 대학입학이었다. 당시 강사들은 서울대 출신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자신이 사회로부터 받은 혜택을 돌려주고 싶다고 했다. 개중에는 시위에 참가해 수배를 받고 공부방에서 몰래 기숙하고 있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들의 고민을 들으며,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더불어 함께 사는 삶에 대해 받아들였다. 그러한 삶은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게 만드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터였다. 그렇게 시작된 고민의 결론은 빨리 대학생이 되어 사회에, 그리고 그와 같이 어려운 시절을 겪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받은 것을, 가진 것을 나눠야겠다는 것이었다.

 

차근차근 대입 준비를 해나가던 그에게 엉뚱한 걸림돌이 나타났다. 이름이 류선희, 여자이름이라 행정서기가 착오를 일으켰는지 호적에 여자로 기재돼 있는 것이었다. 당장 병역문제가 걸려있는 그로서는 그것을 빨리 바로 잡아야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재판을 해야 한다고, 법원에 가야 한다고 했다. 법원이니 재판이니 하는 것들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지만 주위에서는 그 일부터 해결하고 대입시험을 보라고 성화였다. 그 일로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시험준비에 집중할 수도 없었고, 일을 대충 마무리짓고 결국 시험을 보긴 봤는데 점수가 원하는 대학에 갈만큼 나오지 않았다.

 

조금은 허탈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는 자신이 걷게 될 노동자의 길을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학생이 되어야만 자신의 생각대로 나누며 사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노동운동의 길에는 그가 할 일이 더 많다는 사실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마침 박정희 정권 시절, 까다로운 입학 요건과 최고의 취업률로 이름을 날리던 "정수직업훈련원" 입학 기회가 그에게도 찾아왔다. 당시 팔십이년도는 오랜 불황이 계속되던 시기여서 사백명 뽑는데 오천명이 몰려들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지만 꾸준히 대입시험을 준비하던 실력이 있어 그는 쉽게 공채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일년 정도 밀링 기술을 익히고 졸업을 앞둔 팔십삼년, 그에게 대우자동차에서 손길이 왔다. 당시 새한자동차에서 대우자동차로 옷을 갈아입은 직후라 회사 이름은 낯설었지만 자동차회사라면 전망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입사 후 성남공장과 인천공장 가운데 근무지를 선택하라고 할 때 "아무래도 노동운동을 하려면 인천공장이 낫겠다 싶었다"니까 그의 앞날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당시 노조는 있었으나 어용노조에 가까웠고, 갓 들어온 사람이 노조 활동에 적극성을 띤다면 금방 빨갱이취급 받던 시기였다. 그는 우선 같은 라인사람들을 중심으로 친목회를 꾸리면서 인간관계를 잘 풀어나가려고 했다. 결국 친목회장이 됐고, 주위의 신임을 얻어 입사 이년차인 팔십사년에 이미 노조 대의원으로 당선됐다.

 

그 다음 팔십오년은 대우자동차 노조 역사상 손꼽히는 격렬한 투쟁이 있었던 때였다. 임금인상건으로 촉발된 당시 노조의 투쟁은 부평공장 이천삼백명 가운데 이천명이 모두 파업에 동참할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보름간의 격렬한 투쟁 끝에 결국 그는 구속되고 말았다. 이심까지 진행되는 동안의 십개월을 갇혀 있다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해고통지서 뿐이었다. 금고이상의 형을 확정받은 사람은 해고할 수 있다는 당시 회사 내규에 따른 것이었다지만 부당 해고가 명백한 것이었기에 그는 다른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복직투쟁에 들어갔다. 인천지역의 다른 해고자들과 투쟁위원회를 조직해 각종 집회를 주도하던 그는 또 다시 구속돼 십개월 형을 받았다. 그리고 팔칠년 노동자 대투쟁 후인 구월 풀려나온 후 다시 복직투쟁을 벌여 이년 후 시월 복직됐다. 이렇게 투쟁과 수배, 투옥을 번갈아하는 강팍한 나날의 그에게도 늘 곁에 함께 하며 힘을 주는 박순이라는 여성이 있었다. 박씨 또한 투옥경험이 있는 해고노동자 출신이어서 그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를 주었기에 동지로서 반평생을 함께 하기로 하고 팔십팔년 결혼을 했다.

 

퇴직금 십칠만 원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던 그이지만 노동자로서의 험난한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구십일년 그는 다시 구속돼 일년간 형을 살고 나와야했던 것이다. 구십이년 석방돼 복직투쟁을 벌인 결과 이년간 계열사에서 근무하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구십삼년 복직했다.

그런데 그 계열사근무라는 것이 "사무직"에서의 근무를 뜻하는 것이었다. 전혀 생소한 업무환경 속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그렇게 이년을 있는 동안 그는 노동자가 동지들이 있는 현장을 떠나 있는 일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를 절감했다. 부인 박순이 씨는 "그때 남편은 내가 왜 사는지 모르겠다"며 하소연을 할 때가 많았다며 그때는 그래도 이년만 버티면 된다는 기약이라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하며 말문을 닫지 못했다.

 

약속된 이년을 마치고 구십오년 현장에 복귀한 직후부터 그는 다시금 물을 만난 고기처럼 다시 대의원활동도 하고 현장 내에서 이런 저런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삼년여를 맹렬히 활동하던 그에게 척수염이 발병한 것이었다.해고될 때마다 퇴직금은 강제집행됐고, 거기다 그 동안 회사를 통한 각종 대출금이 퇴직금으로 일부 자동 상환돼 그가 올해 이월 해고되면서 받은 퇴직금은 고작 십칠만원이다. 그 십칠만원으로 회사는 그와의 모든 관계를 일단 끝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부동산에 대한 운이 없나봐요, 지금 사는 집이 내 명의로 된 최초의 부동자산인데 분양받은 시기가 하필이면 아이엠에프 직전이어서 은행 이자가 높아져서 아주 힘들더니 결국... 천성이 내 것은 못 챙기거든요."

 

아파트 분양가는 팔천육백만 원인데 회사에서 융자해주는 주택자금과 회사대출금, 은행에서 꾼 돈까지 합치니 사천이백만 원이 담보로 잡혀있는 상태다. 장애인고용촉진공단에서 차량융자받은 돈을 포함해서 다달이 갚아야할 돈이 얼마인지 류씨 자신도 잘 모른다고 했다. 앞으로 육개월은 실업급여로 근근이 살아가겠지만 그마저도 끊기면 아직 어린 두 딸과 부인과 함께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래도 처음 해고를 당한 사람들에 비해 세 번의 해고와 복직 경력이 있는 류선희 씨의 존재는 열심히 투쟁하면 언제든 다시 복직될 수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가 되기도 하지 않느냐고, 그리고 류씨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기에 복직에 대한 더 확실한 믿음이 있어 지금도 내심 담담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회사 사정도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상황이고, 제 자신의 몸 상태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악조건이라서 사실 이전보다 더 자신이 없죠. 무엇보다 정들었던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내몰린 존재라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힘이 빠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는 복직을 통해서만 결론을 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더욱 머리를 떠나지 않아요."

 

그가 회사에 다닐 때도 학습지 배달일을 하며 생활비를 보태던 그의 부인 박씨는 노조원과 가족들의 정리해고 반대투쟁이 본격화되자 오히려 일을 그만 뒀다. 열심히 싸우는 다른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면서 말이다. 사실 이 싸움이 어떤 싸움인가. 남편의 복직만이 자신의 가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길이라고 박씨도 내심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다. 일터에서 밀려난 후 다른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남편의 축 처진 어깨를 가족들이 앞으로 계속 보고 살아야하는 건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이 될 것이다. 이들은 아직 젊은 사십대다.

 

부평지역의 어딜 가도 대우차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은 쉽게 만날 수 있다. 해고노동자들도 아직 그 점포를 벗지 않는다. 한 해고노동자 부인은 마을버스를 타고 가다 다른 사람이 입은 그 점퍼를 보고 울컥 눈물이 났다고 했다.

 

자신도 이런데 이십년 가까이 그곳에서 일해온 남편은 어떨까, 새삼 남편의 심정이 헤아려지더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점심식사를 함께 한 곳이 바로 창밖으로 부평공장이 보이는 곳이었다. 그곳을 보기가 힘겹지는 않은지 물었더니 "왜요, 아직도 우리 공장으로 생각하고 있는데요" 라고 그는 답했다.

 

그와 같은 해고노동자들의 마음을 세상은 몰라도 너무 모른다. 부평공장에서 걸어서 십분여 거리의 산곡동성당에서 천막을 치고 정리해고 철회를 위한 철야농성을 계속하면서 거의 매일이다시피 각종 집회와 선전전을 벌이고 있지만 회사와 회사쪽의 이해만을 대변하고 있는 경찰은 앞서 얘기한 것처럼 법원이 합법이라고 공시한 노조원들의 노조사무실 출입도 지난 십일 그렇게 폭력적인 방법으로 막아나섰다.

 

그날의 폭력행위가 담긴 비디오와 동영상이 외부에 알려지고 사회정치적으로 문제화되자 나흘 뒤 집회는 이례적으로 허가가 떨어졌지만 해고철회까지의 과정은 첩첩산중이 될 것임을 알고 있다.

 

다시 류선희 씨, 그만을 집중해서 바라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에서 화상장애우인 주인공은 학부모가 찾아와 해고 운운하며 노발대발 항의하자 미안하지만 나는 장애우라 법적으로 해고할 수 없다고 당당히 맞선다. 그런데 왜 우리 법은 근무 중에 장애를 갖게 된 그와 같은 사람들까지 보호해줄 수 없는가.

산재치료 중인 노동자는 해고할 수 없다는 법 조항은 있어 이번에 정리해고통지를 받았던 사람 중 스물두명의 산재 환자는 해고가 철회되기도 했다. 그러나 "종결"된 산재 근로자는 나 몰라라다...

 

구십구년 장애 등록은 했지만 장애우에 대한 각종 지원책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그에게 더 알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우선 연구소로 전화하시라고 했다. 그런데 해고된 장애우를 위해서는 어떤 지원정책이 있나요? 라는 그의 질문에 맞닥치자 말문이 막혔다.

 

"노동운동 하고 참삶을 알았다"

 

나중에 결국 그는 아버지와 형을 찾았다고 했다. 보육원 기록을 통해 아버지의 행적을 물어물어 결국 찾았더니 형이 아버지를 모시고 가까운 서울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형은 그래도 중학교까지는 마친 것 같았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보육원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힘겨웠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혹 아버지나 형에게 원망의 마음이 있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전혀 없죠. 아버지도 돈을 벌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서 막일도 하고 취로사업 같은 힘든 일을 너무 많이 하셔서 후유증으로 중풍을 앓고 계시더군요. 같이 살았던들 뭐 호의호식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사는 처지가 거기서 거기니까요."

모처럼 찾은 가족이지만 형편상 그곳에서 함께 살 수 없어 그는 야학에 기거하면서 가끔 찾아가기만 했다.

 

그는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들려준 후 말 끝에 "(노조활동을 하며)인터뷰를 그래도 여러 번 해봤지만 내가 살아온 얘기를 가지고 인터뷰하기는 처음이라며 조금 쑥스러워했다. 그런 그에게 삶 자체가 사회복지학의 텍스트같다고 얘기하며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다.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생계문제로 가정이 해체되자 보육원에 맡겨지고, 부랑아노릇도 했던 그의 이력은 그대로 우리 현대사의 한 기록으로 대변될만 하다. 그런 그가 기술직 노동자로 대기업인 대우자동차에 들어가 그야말로 잘 먹고 잘 살았다면 해피엔딩의 한 편의 동화같은, 찬란한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됐을까.

 

해고와 투옥을 번갈아 하느라, 근무 중에도 잔업수당도 챙길 수 없는 노조 간부를 하느라 돈도 제대로 못 모으고 이제 남은 것은 빚과 또 한 장의 해고통지서 뿐인 것을 보고 남들은 그를 손가락질할 지 모른다. 거 보라고, 변변히 자기 앞가림도 못 하는 주제 아니냐고, 도대체 그래서 당신한테 지금 남은 게 뭐냐고 말이다.

"그래도 내 삶에 후회는 없어요. 후회가 있다면 이제까지 (조합활동에서)내 몫을 다 하지 못했다는 점이 있을 뿐이죠. 제가 걸어온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 길인들 이만큼 보람이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뿐이죠."

 

점심을 먹고 그와 함께 모처럼 합법적으로 열린 부평역앞 집회에 갔다. 만나는 동료들마다 전경들에게 맞은 머리는 괜찮은지 안부를 묻는다. 환하게 웃으며 동지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를 먼 발치에서 보고 돌아오면서 입에서 흥얼거리게 되던 노래 하나가 있다.

사람들은 날 보고 신세조졌다 한다/ 사람들은 날 보고 걱정된다고 한다/ 사람들아 사람들아/ 나는 신세 조진 것 없네/ 노동자가 언제는 별볼일 있었나/ 찍혀봤자 별볼일 없다/ 사람들아 너무 걱정마라/ 이렇게 당당하게 살아가지 않는가/ 노동운동 하고 나서부터 참 삶이 무엇인지 알았다.

 

글/ 한혜영 객원기자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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