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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무선제국, 이 손 안에 있소이다"

벤처 사업가 오대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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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에 앞서 무선 인터넷 게임개발업체 노리넷(www.norri.net)의 홈페이지를 방문했다. 이번호 "사람사는 이야기" 코너의 주인공으로 인터뷰약속이 돼 있는 사람이 그곳 사장(CEO)인 오대규 씨(30세)였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손에 쥔 마우스는 씨이오이력이 적힌 아이콘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력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 "이 사람 장애우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경성고등학교 졸업, 구십오년 서강대 수석입학, 경영학과 수석졸업..."

 

오대규, 노리넷, 뜨다

 올해 삼월호 함께걸음에서 만나봤던 정훈기 씨, 그가 뇌성마비 장애우로는 최초로 서울대에 들어갔을 당시 대통령에게 축하전화까지 받는 등 세상이 온통 떠들썩했다. 그런데 명문 서 강대 전체 수석 입학생이라는 영광의 주인공이 장애우라는 보도를 본 기억은 좀처럼 나질 않았다. 합격자가 앞다퉈 발표되던 구십사년 겨울은 분명 조용했다. 게다가 이력 옆에 나란 히 올려진 사진을 보니 더 의심스러워졌다. 자연스러운 포즈에서 어떠한 장애 특성도 눈치 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직접 그를 만나고 보니 오른쪽 손마저 불편한, 뇌성마비 장애우가 분명했다. 그 때까지 가졌던 의구심이 겸연쩍어 그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아, 그러실만도 하지요. 합격 후에 제가 인터뷰를 다 거절했었거든요. 그리고 사진은 최근에 한 잡지사에서 인터뷰하면서 한 사백장 정도 찍은 다음에 제일 잘 나왔다며 저한테 보내준 거고요."

  아, 그래서 잘 몰랐었구나. 어, 그런데 왜 인터뷰는 거절했었지?

"지금과는 달리 그때 제가 좀 소극적인 성향이 강하기도 했지만 제가 수석 합격한 사실을 놓고 언론에서 이상할 정도로 관심을 갖는 게 꼭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것 같았어요."

그래, 가만 보면 때론 세상이 좀 우스울 정도로 이상하다. 장애우가 비장애우처럼 세상살기가 그렇게 어려운 줄 안다면, 그래서 비장애우들이 이룬 것을 장애우들이 똑같이 이루기까지 얼마나 많은 순간 자신의 장애를 "극복"해야 하는지 그렇게 잘 안다면 거리에, 학교에, 취업과정에 놓인 수많은 걸림돌들을 치우는 일에는 왜 그리 냉담하고 무관심한가 말이다. 만신창이로 그 걸림돌을 헤치고 선 장애우를 향해 붙여지곤 하는 "장애를 극복한 인간승리"라는 타이틀은, 그래서 장애우들에겐 고약한 찬사로 받아 들여지게 마련이다.

 

▲벤처사업가오대규씨

"왜, 장애우가 공부 잘 했다니 신기한가. 그게 왜 신기한건데?" 그때 젊은 혈기의 그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을까.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는 또 다시 인터뷰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노리넷이 한 마디로 "뜨고" 있기 때문. 최근 영화 <친구>의 두 주인공이 포장마차에 앉아서까지 몰두하는 광고의 한 장면에서 보여지듯 조만간 "스타크래프트" 못지 않은 폭발적인 수요가 예상되는 분야이다. 그런데 지난해 칠월 법인등록을 마친 이 신생업체가 첫 개발품인 "트레져 헌터"라는 게임서비스를 016, 017 등 오대 통신사에 모두 제공하는 등 업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현재 무선인터넷게임 개발 업체 삼천여개 가운데 노리넷처럼 오개통신사를 장악한 업체는 네개에 불과하단다. 이 같은 소문이 중소기업청에도 알려져 중소기업청장이 직접 노리넷을 방문하기도 했다. 덩달아 관련 매체와 여성지 기자들까지 그를 찾아오고 있는데 이제 그는 가능하면 기꺼이 인터뷰에 응한다.

물론 노리넷이 이뤄낸 성과보다 경영주가 장애우라는 사실에 더 관심을 갖고 접근하는 언론 의 태도는 여전하다. 그래도 쏟아지는 세상의 이목을 예전만큼 불편하게 느끼지는 않은 듯 했다. 여성지 기자에겐 공개 구혼한다고 써달라고 장난스레 농을 할 정도의 여유가 생긴 걸 보면 말이다. 실은 이제 자연인 오대규로서가 아니라 그의 분신인 노리넷의 홍보에까지 신경을 쓰게 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사회에 한발 한발 발을 내딛어 오면서 장애우로서 언론을 통해 세상에 전하고픈 말들이 많아졌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는 사건 하나

 나중에 보니 수석입학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정도로 그는 정말, 공부 하나는 기막히게 잘 한 사람이었다. 그가 처음 공부로 기염을 토한 것은 초등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지나지 않을 때였다. 시험을 봤는데 일곱 개 과목 모두 올백을 맞은 "사고"를 친 것이다. 그는 이때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고 표현했다. 초등학교 올백은 "누구나 한번쯤 맞는 거 아닙니까?" 그가 이렇게 반문했을 때 그 "누구나"에 끼여보지 못했던 기자는 그야말로 "깨갱" 할 수밖에.

이런 그를 처음엔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위 친척들은 장애우학교에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의 부모에게 조언했었다. "애 똘똘한 거야 알지만, 일반 애들이랑 섞어놓으면 괜히 놀림이나 받지 않겠냐"는 거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비장애인들과 똑같이 어울리고 똑같이 경쟁하도록 해야 한다고 고집을 굽히지 않은 어머니의 선견지명 덕분에 일반 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물론 어머니는 어린 대규 씨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칠판 가득 적혀 있던 자습내용을 부지런히 아들의 공책에 옮겨 적는 수고를 감수해야 했지만 말이다.

 주위 어른들의 우려만큼은 아니었지만 역시나 그는 몇몇 짓궂은 친구들에게서 놀림을 받기 도 했다. 학교 인근의 보육원 아이들이 같은 약자인 그를 놀려댔다니 묘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그럴 때 방패가 되어 오히려 그 아이들을 혼내준 든든한 친구들도 함께 있었기에 학교에서의 시간이 그렇게 괴롭지만은 않았단다.

공부를 잘 한다는 건, 한국의 학교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일정한 권력이 되기도 한다. 흔히 장애우 부모들이 자녀의 뒷바라지에 악착같이 나서는 것도, 또 자신의 현실을 일찌감치 간파한 장애 학생들이 공부에 더 열심히 매달리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일학년 때까지는 반에서 그냥 "잘한다" 소리만 듣는 정도였던 그가 "박인기"라는 과외교사를 만난 것은 그에게는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될만 하다. 당시 서울대 경제학과 학생이던 박씨도 소아마비 장애우였다. 부모님이 일부러 그 과외교사를 택했나? 그건 아니고 어머니가 친구분에게서 잘 가르치는 학생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냥 소개를 받았을 뿐이란다.

박교사는 일단 성격이 굉장히 밝고 매사에 자신감과 여유가 있었다. 자신만큼 불편해 보이는 몸이지만 능숙하게 운전을 하는 모습도 멋있게만 보였다. 어느덧 오씨는 그 대학생 형을 자기 삶의 모델로 삼게 됐다.

자연히 성적도 쑥쑥 올라갔다. 비로소 자신의 앞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고,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장애우의 대부분은 남들보다 의학공부에 대한 욕구를 더 많이 갖고 있게 마련일 터. 그러나 세상은 그것을 알아주지 않았다. 대규 씨가 태평스럽게 의사의 꿈을 키워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불현듯 아버지는 그를 받아줄 의과대학을 미리부터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대부분의 의대에서는 장애를 가진 학생은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힘없이 그 사실을 전해주시며 인문계열로 바꿔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난 뒤 그에게는 꿈이 사라져버렸다. 하고 싶은 전공이 없어 모의고사를 볼 때면 남들 따라 그저 법대나 경영대를 썼다.

 오기로 시작한 재수 이후 삼수를 거쳐 오수까지 하긴 했지만 그동안 목표로 했던 곳은 모두 서울대 법학과, 경영학과였다. 한 번은 모의고사에서 전국 일등까지 했었다니 그것이 허황되기만 한 목표가 아니었음도 분명하다. 그가 구십일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정훈기 씨가 서울대에 입학한 것이 구십사년의 일이니 서울대에 입학한 최초의 뇌성마비 장애우라는 스포트라이트는 그의 몫이 될 뻔도 했다.

문제는 시험운이었다. 모의고사에서는 안정권의 성적을 거듭 기록했지만 시험 당일 컨디션 이 좋지 않아 시험을 망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주위에서는 "혹시 장애 때문에 떨어(뜨리는)거 아냐?" 라고 짐짓 위로섞인 분노를 내보이기도 했지만 그는 인정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유쾌하지 않더라구요. 저는 학교측을 믿고 싶었습니다. 그때 괜히 학교나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장애 때문에 입시에서 계속 실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겠죠."

 

대학생 증권모의투자대회 연속 두 차례 1위

 성적은 늘 합격 안정권이었는데도 번번이 미역국을 먹고 삼수, 사수생이라는 꼬리표를 단 채 살아가는 동안 아무래도 가장 불안한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더구나 그 과정에서 당 장 수학능력시험 체제로 시험제도 자체가 바뀌고 교과서도 바뀌는 악조건에 놓이게 됐다. 현실과의 타협으로 후기명문대인 에스대 경영학과에 합격해 잠시 다니기도 했지만 그 학교 는 전철역에서 강의실까지 거리가 너무 멀었고 학교 다닐 흥도 나지 않아 한 달만에 휴학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입시에 도전해봤지만 또 실패, 다시 예전 대학에 복학해 다니다가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또 한 번 시험을 쳤다. 오수째였다.

결국 그는 서울대를 포기하고 안정 지원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와이대에 지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거듭된 실패를 보다 못한 부모님과 고교 때 담임선생님이 대규 씨도 모르게 서강대에 지원을 해버렸다. 사실 그래서 수석합격 소식을 듣고도 그리 기쁘지 않았고 인터뷰 요청도 귀찮기만 했다고.

그래도 한 장애주간지와의 인터뷰는 거절하지 않았었다. "집안에만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오라"는 말을 다른 장애우들에게 하고 싶어서였다.

"실제로 제가 경험해보니 그래요, 물론 간혹 나쁜 사람들도 있지만 무슨 일이건 하려고 하면 장애우를 힘껏 도와주는 사람들이 아직은 우리사회에 많이 있다는 걸 꼭 알려주고 싶었어요."

 남들보다 뒤늦은 출발이었고 미련스러울 정도로 학교 서열에 매달려온 시간이 길었던 만큼 조금 허망하기도 했던 신입생 시절. 그러나 시간이 흘러 학교에 정이 붙기 시작하면서 그의 숨은 능력도 슬슬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처음 경영학도로서 능력을 좀 시험해보고 싶어 시작한 것이 증권투자였다. 잠시 관련 분야에 대해 공부를 하고 난 뒤 현대증권이 주최하는 대학생 모의증권투자대회에 출전해 그는 일등을 거머쥔다. 겨우 이학년 때의 일이다. 그 다음해 서울시립대가 주최하는 대학생 모의 증권투자대회에서도 거푸 일위를 했다니 관련 공부를 좀 했다지만 "선천적인 감"으로밖에 설명될 수 없을 듯하다.

"원래 아버지가 증권투자를 오래 하셨지만 투자전략에 대해서 제게 가르쳐 주신 적은 없어요. 저도 제 나름대로 터득한 비법은 아버지께도 물론 비밀로 하죠. 하하."

 두번째 도전은 공인회계사. 재학 중 삼 년여를 매달렸건만 불행히도 여전히 시험운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그래도 회계사 시험준비를 하면서 전공 공부를 착실히 따라간 덕분에 졸업 때 성적은 또 과 수석이었다. 미팅을 백여 번은 하고, 삼 년여 진한 연애도 하고, 컴퓨터실 실장에, 과외 아르 바이트와 각종 술자리를 가리지 않았던 전력(?)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제 졸업을 앞둔 그의 선택은 당연히 증권회사쪽이 아닐까 생각했던 기자의 예측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증권투자에 있어 공인된 실력을 보인만큼 증권회사측의 스카웃제의가 빗발치기도 했으나 뜻밖에 그는 "증권은 취미일 뿐 업으로 하진 않겠다"는 생각으로 모두 사양했다.

그리고는 스무 군데도 넘는 회사에 이력서를 내가며 취업을 위해 애썼다. 남에게 손색없는 학벌에, 모든 기업체에서 환영받을만한 전공에, 다른 사람이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성적에, 뛰어난 영어실력까지 갖춘 그는 당연히 모든 서류전형은 합격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면접 과정에서 면접관들이 제게 꼭 장애에 대해서 물어요. 그때까지는 사실 제가 장애우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받는 것 자체가 불쾌해 반감을 가지고 답변을 하곤 했죠. 실력으로는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꿀릴 것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번번이 탈락하는 거예요."

하도 답답해 그는 학창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모교 학생생활연구소의 상담 선생님을 찾았다. 그랬더니 그 선생님은 "네가 자꾸 떨어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며, 우선 스스로 장애우임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곰곰 생각해보던 그는 이후 면접에 임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면접관이 장애에 대한 질문을 하면 "제가 비록 장애 때문에 다른 사람들 보다 이러이러한 점은 조금 어렵겠지만 이러이러한 점은 자신있습니다"라며 겸허하지만 자신감을 잃지 않은 태도를 보인 것이다. 그런 자세를 높이 샀는지 결국 그는 다섯 개 회사에 동시에 합격했고, 그중 모 대기업을 선택해 입사했다.

"막상 대기업에 들어가니 그 조직문화라는 것이 저를 참 숨막히게 하더라고요. 제 핸디캡이나 여러 가지 상황을 볼 때 그 기업에서 별다른 비전을 찾기도 어려웠고요. 그래서 한 달 여만에 나와버렸죠."

 

뜻밖의 선택, 생명보험회사

 그다음 선택이 뜻밖에 생명보험회사였다. 미국계 회사인 그곳은 칠개월간의 영업 업무가 신입사원들의 필수코스였다. 바로 그 이유로 대부분의 임원들이 그의 임용을 반대했지만 단한 명, 그를 눈여겨 본 임원이 있었다. 다른 회사에 입사했다가 뒤늦게 다시 찾아온 그를 본 그 임원의 첫 마디가 "자네는 결국 이곳에 올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잘 다니던 대기업을 박차고 나온 그를 이해할 수 없다며 성화였지만, 장애우이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성공을 해야 주위의 확실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생각에는 변함없었다. 더구나 그가 보험분야에서 성공해 보이면 "장애우들도 보험영업이 되는구나"라는 것으로 사람들 생각이 바뀔 것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사명감도 느껴졌다.

회사에서는 전 신입사원에게 칠 개월의 영업활동 기간 동안 이뤄야 할 할당 목표 실적을 제시했다. 그런데 오씨는 입사 당시 자신을 두 달만 지켜봐 달라는 약속대로 그 목표액을 두 달만에 해치워 버렸단다.

"비결이요? 처음엔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소개를 많이 해줬죠. 그래도 남들이 한번 찾아갈 곳을 저는 두세 번 찾아다니면서 제 나름대로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번 가입한 고객은 꼭 주위 사람들에게 저를 소개해 주더군요."

"무엇보다 하고 싶은 일이었고, 사람들을 만나서 내 논리를 가지고 상대를 설득해 보험이라는 무형상품을 파는 일 자체도 재미있었다"는 것이 그가 들려주는 보험영업의 매력이다.

 물론 "서강대 나왔다면서, 그리고 몸도 불편한데 뭣하러 이런 일을 하느냐," "그 회사 뭐 하는 회산데 당신같은 사람 데려다 쓰느냐"며 시비조로 묻는 고객을 몇몇 만나기도 했다. 그럴 땐 그도 욱하는 기분에 다 뒤엎어 버리고 싶었지만 순간 생각을 바꿔 부드러운 응대로 고객의 생각을 바꾸는 "수련"기회로 삼기도 했다. 아무튼 주위의 예상을 깨고 보험실적은 육개월 간 연속 일위. 덕분에 수습 딱지를 뗀지 얼마 되지 않아 이례적으로 팀장으로 고속 승진했다.

그런데 입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슬슬 회사생활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직원 스스로 원하는 일보다는 조직에서 원하는 업무에 자신을 끼워맞출 것을 당연히 요구하는 것을 보고 그는 납득할 수 없었다. 가능하면 하고자 하는 일을 하게 할 때 동기가 유발되어 효율성이 높아질 것은 뻔한데, 기업의 조직 체계에서는 그런 단순한 원리가 무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즈음 동생과 그 친구들이 그를 찾아왔다. 컴퓨터게임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어 몰려 다니던 그들은 당시 일 년여 피씨방을 전전하며 무선인터넷게임 개발에 골몰해왔다. 어느 정도 개발에 성공하자 경영학을 전공한 그에게 사업화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손을 내민 것이다. 학창시절 컴퓨터실장을 지내며 남 못지 않은 컴퓨터실력을 갖춘 그의 식견으로 보기에도 한 눈에 전망이 있다는 감이 왔다. 게임 속에 광고를 접목시키는 방법으로 수익을 올리는 모델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퇴근 후에 사업계획서를 작성해 투자자를 물색하러 다니는 그의 이중생활이 시작됐다.

 그러나 작년 초만 해도 업계는 온통 유선 인터넷 게임 열풍이어서 다가올 무선인터넷게임의 비전을 내다보는 투자자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두세 달 동안 발 아프게 돌아다니다가 거의 포기단계에 이를 무렵 현대-기아자동차회사에서 투자업체를 찾는다는 공고가 눈에 띄었다. 밤을 새며 비장의 무기를 준비한 노리넷은 결국 오백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투자자본과 벤처플라자 사무실 등의 지원을 얻어내는데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지난해 유월의 일이다.

이후 구월에는 세 개 업체, 그리고 올해 삼월부터 전 이동통신사에 게임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중소기업 진흥공단의 벤처 육성지원자금 오천만원을 받아낸 후 그 힘을 동력삼아 올해 사월에는 "트레져헌트"를 대만과 독일, 스웨덴에까지 수출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우리와는 다르게 유선보다 무선인터넷게임 열풍이 먼저 일었던 일본에까지 수출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서비스 시작 사 개월만에 "트레져헌트"의 국내 회원수는 십오만 명으로 늘어났을 정도.

이 같이 가파른 성장곡선은 노리넷이 보유하고 있는 뛰어난 유무선 연동기술과 독특한 컨텐츠 덕분이다. "트레져헌트" 외에 이미 "야시장"과 "나이스빠따"라는 재미있는 게임이 개 발돼 공급되고 있는데 올해 내 출시 예정인 게임만 십여 개에 이른다. 오 사장은 단순히 게임개발에만 그치지 않고 하반기부터는 핸드폰에 자신의 사진을 올려 화상미팅을 하는 서비스 등도 상품화시켜 판매할 계획이다. 노리넷의 지상목표가 무선제국인 것은 바로 이러한 자신감에서 나왔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꿈"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요즘은 투자를 유치하는 일에 특히 더 주력하고 있다. 거듭되는 회의와 투자상담으로 거의 매일 자정 가까이 퇴근하기에 건강을 챙기느라 한약을 늘 몸에 달고 산다. 재미있는 건 예전의 과외 선생님이 한의사가 되어 그에게 약을 대주고 있다는 사실.

주식투자도 여전한 그의 취미거리다. 요즘 같은 증시불황 속에서도 손해를 본 적이 없어 그 이익분을 필요할 때 회사에 투자하기도 한단다. 현재 하이텔에 증권관련 칼럼도 연재하고 있을 만큼 그의 명성은 이제 널리 알려져 있다. "덕분에 아줌마팬들이 많다고 은근슬쩍 자랑도 한다."

그런 그의 또 하나의 꿈이 "보건복지부 장관"이라니 조금 생뚱맞기도 하다. "이제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장애우들의 피부에 와닿는 더욱 실제적인 정책을 펴고 싶다"는 게 이유다. 서울방송 개국 초기에 선보였던 것처럼 장애우에 대한 에티켓을 다룬 광고가 계속돼 장애우에 대한 사회인식이 더 많이 개선됐으면 한다는 바람도 덧붙였다.

일단 그는 장애우들이 더욱 활발히 창업을 할 수 있게 중소기업청의 지원폭을 늘리도록 요구하는 일부터 시작하려 한다. 지금은 시작단계지만 앞으로 사업이 자리를 잡아 어느 정도 돈을 벌면 일정 부분은 사회복지사업을 쏟아 부을 생각도 갖고 있다. "그래서 장래 아내될 사람이 사회복지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며 슬쩍 공개구혼도 한다.

 눈길을 끄는 이력과 능력으로 인해 그는 요즘 특강을 위해 대학 강단에도 자주 불려 다닌 다. 한 학생은 "성격이 참 밝은 것 같은데 어떤 인생관을 갖고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기 도 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내 자신을 비관하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계속 비관만 하게 됩니다. 결국 그 상황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죠. 문제의 키포인트는 바로 내 자신이 쥐고 있다는 걸 압니다. 그리고 내가 최선을 다 한다면 어느 곳에나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서른 살, 도전하고 성취하는 인생의 참맛에 눈뜬, 한창 물 오른 이 젊은이의 앞날을 지켜보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꽤 즐거운 일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머리를 스친다.

 

글/ 한혜경 객원기자. 사진 이수지 기자

작성자한혜경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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