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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교수

가진 것을 나누며 고르게 가난하게

본문

▲김종철 교수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영남대 교수) -

 <고르게 가난하게>
“여러분, 부~자 되세요!”
어느 신용카드 회사의 이 광고카피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부자(富者)’사전을 찾아보니 재산이 많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광고주가 신용카드 회사니까 아마 돈 많이 벌어서 카드 팍팍 긁으라는 얘기일 게다. 사람들은 그걸 알면서도 부~자되라고 하니까, 그저 좋아서 힐끗힐끗 웃으며 덕담이랍시고 신년 벽두부터 너도나도 입에 담으며 서로 인사한다. 주고받는 사람 모두 행복해 보인다. 정말‘부~자’되길 간절히 바라는 것 같다. 사람들은 어느새 돈과 권력이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일차적 조건이라 여긴다. 로또 열풍은 말할 것도 없고, 얼마 전 30대에 10억을 번 사람의 책은 이미 베스트셀러가 되어 버렸다. 또 10년 안에 10억 만들기 동호회 같은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면, 모두‘부~자’가 되는 것을 이제 꿈이라 생각치 않고 현실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모두에게 물질적 풍요는 지상 최대의 가치가 되어버렸고 ‘언제든 나도 하면 된다’는 환상은 거의 현실적 실천 강령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90년도부터 이와는 반대로 “가난하게 살자, 그것도 골고루, 모두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91년 12월에 창간하여 벌써 10년이 넘은 격월간 「녹색평론」발행인 김종철 교수(영남대 영문학과)다. 그에게 가난은 무엇이기에 가난하게 살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일까? ‘가난’하다는 것이 부끄럽고 죄스러운 것으로 치부되는 오늘 날, 모두가 가난해지는 것이 인간과 자연이 서로 공생(共生)하는 길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제자가 운영하는 <오래된 미래>라는 까페에서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오래된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성장과 발전, 그 뒤에 온 파괴>
그는 녹색평론(2002. 11-12월호로 통권 73호를 맞았다)을 통해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한 푼이 아쉬운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난하게 살자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한번도 부자인 적이 없고, 부자가 될 가능성도 없는, 오히려 부자들로부터 무시와 소외, 차별이 일상이 되어버린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더더욱 말도 안되는 소리로 들릴 지 모른다.
그러나 출발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자본과 중앙집권, 세계화, 뭐 이런 단어들을 전면 부정하면서 뒤집어보기를 시도해보면 ‘고르게 가난한 사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한 그림은 그릴 수 있지 않을까.
태풍 매미와 같이 매번 경험하는 자연 재해가 아니더라도 작금의 생태계 위기가 인류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는 “우리가 맞이한 위기는 자초한 것이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근대 산업문명은 성장과 발전, 진보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졌지만 실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을 분열시키고 서로 파괴하는 결과만 낳았다”고 말한다. 따라서 “가난하게 살지언정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자”고 고집한다. 그는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만들자고 하는 것은, 물질의 욕망과 성공의 신화 앞에서 모두가 무릎 꿇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자신의 이익만 챙기려 하고 누군가를 밀치며 이기려고 하는데, 이게 전체로 확산되어 어떤 구조를 만들어낼 때, 그것은 부당함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 구조를 만들고 강요한 건 근대 자본주의 체제다. 인간이 왜 체제에 굴복해야 하는가”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자칫 무거운 주제며 내용일 수 있지만 그는 “사람이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며 살아야 하지 않냐?”고 되물으며
“가난해도 인간이 품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이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라며 다시 보편적인 인간적 고민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근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공존공영(共存共榮)이란 있을 수 없다.”
이 논리는 끝없이 개발 가능하고 성장 가능하다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며, 모두가 자기 욕심대로 취할 것 다 취하면서 살아간다는 건 결국 이웃을 짓밟고 자연을 훼손할 때라야만 가능한 조작된 구호라는 것.
그는 “약자의 생활방식이 기준이 되어 서로 존중하고 보살핌과 섬김을 기본으로 한 삶의 태도만이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자니 ‘우리에게 절망할 권리는 없다. 단지 희망할 권리만 있다’는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절망과 무기력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새로운 희망의 싹이 돋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의 확고한 사상에 빨려가고 있었다.
참, 가난한 민중들의 삶을 이야기하자니 녹색평론사 그의 방에 있는 민중판화 그림 하나가 생각난다. 그림 제목은 잘 모르겠지만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을 사람들이 꽹가리, 북, 장고를 들고 나와 꼬리를 잇는 흥겨운 춤을 추는데, 그 바로 중간에 목발을 짚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평소 장애 가진 사람이 특별하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옴을 바림직하게 생각했던지라 보통의 이웃으로 그려진 그 풍경은 눈에 꽂혔다. 그도 그 그림이 참 마음에 든다고 했다. 사람들 사이의 흥겨운 어울림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다시 이야기를 돌리자. 기자는 ‘가난하게 사는 것보다 제대로 분배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란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는 명쾌한 답을 내린다.
“현대 경제학의 기본이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적절하게 분배할 것인가’로부터 출발하는데, 실제 자원은 희소하지 않다. 미국에 식량문제, 농업문제를 전문적으로 모니터링하는 푸드퍼스트라는 민간단체가 있는데, 기아문제로 고민하는 국가의 80%가 자기나라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먹고도 남을 정도라고 한다. 전 인구가 먹고도 남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물자가 부족해서, 먹을 것이 부족해서 기아사태가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치, 경제 구조의 문제다. 분배구조, 사회정의 문제다. 자원의 희소성을 문제의 원천으로 삼는 것 자체가 큰 잘못이다”라고.

<뿌리부터 생각하자>
많은 사람들은 그를 근본주의자라고 평한다. 그는 “그래서 수해피해를 입어 복구에 나서야 할 때, 나무를 심자는 사람이라는 소릴 듣기도 한다”며 웃어넘기지만, “뿌리부터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사회가 바로 근대 자본주의 사회”라며 “우리가 처한 위기는 현실주의로 극복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고 단호히 말한다. 그렇다고 현실의 문제를 회피하거나 외면하지는 않는다. 근대 자본주의, 국민국가체제로부터 문제의 근원을 생각하지만 땅에 발 딛고 사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직면한 문제에 무감각할 수 있으랴. 그래서 지난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에게 선뜻 100만원을 후원하기도 했다.(사람들이 노무현을 중심으로 힘을 키우는 걸 보면서 변화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그의 관심사는 ‘공동체’다. 그는 “우리는 농촌에서 뛰쳐나오는 것이 근대라고 생각했고, 사회주의 실패도 결국은 공동체를 간과한 것 때문이라 생각한다. 내가 이런 전통을 이야기할 때마다 사람들은 래디컬(radical)하다고 하는데, 아마 급진적이라는 해석을 받아들인 것 같다. 하지만 래디컬하다는 것은 과정을 한 단계 뛰어넘는 차원이 k니라 문제 근원을 뿌리부터 생각하는 근본주의에 가깝지 않을까”라며 현실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의 대안보다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공동체 가치 구현이 더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지난 해 8월 제주평화학술회의에서 강연을 마치는데, 누군가 “당신 사상의 뿌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했단다. 그는 “어린 시절 글씨도 모르고 조그만 땅덩어리 하나를 일구어내며 7-8남매를 키웠던 외할머니, 그리고 그게 가능했었던 것은 어려움을 나누고 상부상조하며 살았던 마을”이라고 대답했단다. 사람은 독립적으로 살 수 없고 존재로서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맺고 있는 가족과 이웃, 지역공동체 안에서만 진정 살아 숨쉬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는 “장애가 있거나 여성이기 때문에, 노인이라고 또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다고 수용시설과 양로원, 고아원에 그들이 왜 가야 하는가, 우리의 전통사회는 지역에서, 마을에서 모든 것이 해결 가능했다. 서로 보살펴주고 존중해주고…. 우리는 결코 과거의 유교사회로 돌아가 모든 것을 개인과 가족의 책임에 맡기자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시적 마음과 생태적 세계관>
간혹 그이를 냉소적이고 원칙을 강조하는 대쪽같은 사람이라 평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가까이서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인정 많고 유머있는 유쾌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건, 민감한 생태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그는 최근 도룡뇽 소송운동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천성산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데, 생태계 보존이란 문제보다는 지율 스님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지율 스님이 가녀린 여성의 몸으로 40일 넘게 단식하는 것을 보고 또 천성산에 터널을 뚫는다고 해서 혼자 몇 개월에 걸쳐 산을 다니며 생태계를 파악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있을 수 없었다고 한다. 천성산의 마음이 곧 지율 스님의 마음이었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모든 나무와 벌레와 동·식물의 마음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도룡뇽이 죽어갈 것이라는 절박함과 괴로움이 지율 스님의 마음을 붙잡은 것인데, 어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라며 탄식했다. 어차피 거의 끝난 공사이기에 추후를 지켜봐야겠지만 이나마 버티며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힘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지율 스님의 시적 마음과 생태적 세계관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율 스님이 도룡뇽이나 지렁이들이 가슴에 와서 못견디겠다고 했는데, 일체가 된 것이다. 지율 스님의 고집과 정성은 생태계와 자신을 일체시키고 있는데서 나온다. 우린 그 마음을 보아야 한다”며 아름답고 소중한 것을 느끼고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모든 것의 출발은 ‘그 마음’이라는 것이다.
“만일 지위와 권력을 가진 사람이 40일 단식을 했다 해도 언론이나 사람들이 가만있었을까?”라며 그는 우리가 그 중요하고 아름다운 사람의 마음을 왜 못보는지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종철 교수의 직업을 굳이 이야기하자면, 그는 문학평론가다. 세상에 대해 근원적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도 ‘브레이크’라는 영국의 시인을 연구하면서부터다. 그는 “시를 읽고 쓰는 마음은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알게 해준다”며 시(詩)는 인간에게 삶의 풍요로움을 전해주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학교에서 영시를 가르치는데 이번 학기에 종강을 하면서 한 편의 시를 학생들에게 읽어주었단다. 시의 내용은 직업이 십자가에 목박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예수에게 못을 박았단다. 너무 괴로워 고민을 하고 있으니까 옆에 사람이 “너무 걱정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거지”라고 했단다. 그래서 그는 ‘그래 내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어’라며 그냥 묻어두었단다. 짤막한 이 시를 통해 그는 “우리가 얼마나 엉터리 짓들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그리고 또 우리 스스로 그걸 명분이라고 내세우면서 정당화하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해도 인간은 항상 이런 식으로 자신의 어리석음과 과오를 정당화하고 있다”며 남을 해치고 자연을 파괴하면서도 우리가 무슨 짓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실은 잊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정답게 보살피며 살자>
그러나 그가 이야기라는 것은 결코 간단하고 쉽게 풀릴 성질의 것이 아니다. 생각과 행동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하는데,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그게 쉬운 문제일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고민이 세기를 넘나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도저히 눈에 보이지도 않고 가닥도 잡힐 것 같지 않은…
그렇지만 그는 “무기력하지 말자”고 제안한다. 뿌리부터 바꾸는 일이 어려운 일이지만,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고 삶의 원리로서 ‘프랜드 십(friendship)’을 실천하며 살자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원하는 삶이 몇 십년 걸릴꺼라는 비관적 생각은 무기력하게 만들뿐이다. 삶은 재미있어야 하고 기운을 잃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인간관계를 통해서 가능하다. ‘관계’는 어쩌면 가장 큰 보험인데,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상상력을 펼쳐 보이면 될 것이다.”란 말로 위안을 준다. 아니 그에게도 가장 큰 위안이 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는 “그런 측면에서 나는 많은 젊은이들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큰 걱정 없다. 정확한 것이 진실이 아니다. 정다운 것이 진실이다”는 말로 이어가며 시원스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는 오늘날 온 세계를 휩쓸면서 자연과 사회적 약자의 생존을 위협하는 경제의 세계화란 실은 500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식민주의의 현대판임을 직시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배가 파선한다는 걸 안다면 내려야 한다. 생태공동체 운동이 파선하는 배에서 내리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무 것도 믿지 말자. 국가도. 시장도 믿지 말자. 우리 자신만 믿자. 생태공동체 운동을 황대권 선생에게만 맡기지 말고, 우리도 한 번 상상력을 동원해서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 보자. 아니 꿍꿍이를 펴보자. 우리끼리라도 먼저 해보는 거다”라고.
너무나 확고한 그의 신념 안에는 ‘희망’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글 홍여준민 기자
사진 윤정은 객원사진기자

 

만난사람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교수(2)


어느 조용하고 아늑한 어촌 마을의 아침이었다.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바닷가의 모래밭에서 한 고기잡이 노인이 평화롭게 단잠을 자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마을에 휴양을 온 한 관광객이 바닷가를 거닐다가 이 노인이 잠자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이 젊은이는 사진을 찰칵, 찰칵 찍어댔다. 그런데 그 소리에 그만 이 고기잡이 노인이 잠을 깨고 말았다.
"그 뉘시오?"
"아이쿠, 죄송합니다. 지나가는 나그네이온데 할아버지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아서 그만..., 죄송합니다."
"........"
"그런데 할아버지는 왜 고기를 잡으러 나가지 않으세요? 벌써 해가 저만치..."
"이미 새벽에 다녀왔구먼."
"아, 그러세요?... 그러면 또 한번 더 다녀오셔도 되겠네요?"
"그렇게 고기를 많이 잡아서 뭐하게?"
"...참, 할아버지두. 그러면 저 낡은 거룻배를 새 걸로 바꾸실 수 있잖아요?"
"그래가지고선?"
"그 다음에는 새 거룻배로 고기를 잡으시면 훨씬 빨리, 한결 많이..."
"음... 그 다음에는?"
"그야 당연히 크고 좋은 배를 몇 척 더 사시고, 사람도 많이 부리고... 그러면 뭉칫돈 버는 것은 시간 문제 아니겠어요?"
"옳거니, 그래서는?"
"그 다음에야... 이 마을에 생선 가공 공장도 세워, 싱싱한 통조림도..."
"흠... 그리고 나서는?"
"그때는 별 일도 않고 가만히 누워 그저 편안히 지내실 수 있지요."
이 말에 고기잡이 노인은 대답했다.
"지금 내가 바로 그렇게 지내고 있네."
"......."                                       ‘느림예찬’중에서/ 하인리히 뵐

 

기자가 이 글을 처음 접한 것은 97년이었다.
당시 IMF가 닥쳐 갑자기 경제위기 어쩌고 저쩌고 하는 판국에 어느 시사 잡지에서는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왜 이런 위기가 한국 사회에 왔는지 나름대로 진단과 대안을 모색하는 좌담회를 가졌다. 그 때 강수돌 교수(고려대 경영학과)는 이 글을 예로 들며, 우리가 물질에만 탐닉하고 있다면 과연 지속가능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주제를 전달했던 것 같다. 그 때, 그는 이 글을 통해 이미 우리의 상식이 되어버린 ‘더욱 부지런하게 몸을 놀려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을 획득하는 것이 진정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하는 것인지 되물음 해 보라’며 진지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었다. ‘근본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든 잊혀지지 않는 글이다.
이 글을 접한 후, 사회복지 정책이라고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구조를 고민하지 못하고, 잘못된 길을 가다가 빈틈 혹은 허약한 명분 때문에 구멍이 생기면, 그저 살짝 가려주는 역할밖에는 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문제의 본질은 그대로 존재하는데, 그 문제되는 생각과 행위에 동의하면서(혹은 지속하도록 도움을 주면서)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만을 고민한다는 것은 답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한동안 무기력하고 모든 활동이 별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그 시기에 녹색평론과 김종철 교수를 알게 되고, 또 그이가 주장하고 실천하는 길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함께걸음>은 가난한 사람들이 소외받지 않고, 주눅들지 말고, 또 피해의식도 갖지 않고 당당하게 드러내어 그들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지혜가 빛날 수 있길 바란다. 어쩌면 ‘스스로 선택한 가난’과 어쩔 수 없이 ‘강요당한 빈곤’은 차별성을 두고 접근해야 하는 게 맞는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잘못된 제도와 시스템에 분노하고, 또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래디컬(Radical)해 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래디컬(Radical)하다는 말이 급진주의가 아니라 근본주의에 더 가깝다면, 문제가 발생되는 뿌리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생각하고 행하는 것과 생각 없이 행하는 것의 차이는 언급해봐야 별 이득이 없을 것 같다.
<함께걸음>은 독자들과 무한한 상상력으로 ‘무력감’을 지우고 싶을 뿐이다.
줄기는 다르게 뻗어나가도 같은 뿌리에서 출발하는 한 그루 나무의 풍요로움을 느끼고 싶다.
 
글 홍여준민기자

 

만난사람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교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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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그를 이해하기 위한 짧은 글-

                                                                        <김종철과 녹색평론>

 
70-80년대 문학평론가로 이름을 떨치던 그였지만 90년대 들어서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생태철학자 혹은 생태운동가란 평을 받고 있다. 단지 잡지(법정스님은 녹색평론은 잡(雜)지가 아니라 순(誌)지라고 말하기도 했다)를 만들고 있을 뿐이지만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생명운동을 하는 근본주의자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생명운동’이란 것이 하나의 이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해도, 이렇게 쉽게 불리어지고 사용되어지는 것을 거부한다. 새로운 유행이란 것이 자칫하면 소비상품으로 떨어지기 쉬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말 상품으로 되어서는 곤란한 생명의 문제조차 그렇게 되어버릴 염려가 있다는 것이다. 또 우리의 삶 자체가 부단한 움직임이고 운동일 텐데 새삼스럽게 우리 삶의 어떤 절박한 위기를 생명운동이라는 말로써 분리·부각시키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는 의문이 있기 때문이다(녹색평론 창간호, <시의 마음과 생명공동체> 중에서).
‘생명운동’이란 것이 우리 삶의 지표가 되는 근본 사상이라기보다, 그저 한 때의 유행어로 치부되어질까봐 그는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그는 녹색운동, 녹색사상이라는 것이 오히려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구미에서 들어온 말이긴 해도.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것도 맞는 말 아닐까? 얼마 전 기자의 지인(知人)이 “녹(綠)색은 과연 무슨 색일까요?”란 질문을 한 적 있는데, 사람들이 별다른 대답을 못하자, 그는 “쇠에 녹이 슬면 나타나는 색이잖아요. 그렇다면, 녹색은 바로 검붉은 색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녹색사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풀색사상은 아니고 흑색사상과 적색사상이 결합하여 생기는 그런 사상이 아닌가 엉뚱한 생각을 해 봅니다”라고 겸연쩍어 하며 혼자 답했다. 그리고 나서는 하고 싶었던 말을 다 못했는지, “<녹색은 적색이다>란 책이 있는데, 일리 있는 말이군요. 녹색평론을 보면…”그렇게 말끝을 흐렸는데, 사람들은 그 말에 모두 동의하는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서구의 녹색개념은 직접민주제, 인간과 자연의 조화, 성장제일주의 생산구조의 변경, 공평한 분배, 비폭력수단 등의 KEY-WORD(키워드)로 설명이 가능하다. 녹색평론의 이념 또한 여기에 크게 어긋나지 않
 
을 것이다. 김종철 교수는 녹색평론을 소개하는 글귀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보다 조화롭고 평등하게 공존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녹색평론>을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간혹 강연장에서는 “할 수 있는 한 뭔가 구멍을 내고 갈라놓고 타격을 가해보자는 거죠. 하는데 까지 저항해보자는 겁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김종철과 장애>

2002. 4월 녹색평론사에서 출판한 마사-베크의「아담을 기다리며」.
이 책은 하버드생 부부가 다운증후군 아이를 낳고 키우며, 전에는 몰랐던 세계에 대한 이해로 자신들의 삶이 풍요로워지는 경험을 담은 책이다.
김종철 교수는 책 머리말을 통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 (중략) … 아담이라는 ‘특별한’ 아기의 잉태와 탄생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새삼스럽게 삶의 속도를 늦추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우리들의 안과 밖에 있는 ‘작은 것들’ 속에 아름다움과 진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롭고 풍부한 내면적 행복의 세계를 향해 열려지게 된 것이다. … (중략) … 인공지능이니 생명공학이니 하는 첨단기술이 이른바 인간의 개조와 질병 없는 세상을 운위하는 이 불경(不敬)의 시대에, <아담을 기다리며>는 인간이 이 세계에서 산다는 게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생각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책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 녹색평론사에서 출판한 책을 보면, 그이의 관심과 고민은 단순한 생태계 문제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기본에 충실하듯, 세계화, 농업, 경제성장, 평화, 석유자원, 원자력, 생활협동조합, 과학기술, 살림, 산업사회 등 우리 삶의 영향을 주는 과제들을 담고 있다. 권정생 선생의 ‘우리들의 하느님’같은 책도 있고.

참, 모 방송국의 <느낌표>란 프로그램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꼭지가 ‘책, 책, 책을 읽읍시다!’인데, 근래 이 프로그램에 책이 나올 수 있도록 애초 기획단계부터 겨냥한 책들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한다. 한번 선정되면 출판사, 작가는 성공의 길로 가는 것이고, 돈은 저절로 들어오게 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지난 해 초 녹색평론사에서 출판한 권정생 선생님의 <우리들의 하느님>이 선정대상에 올랐다. 담당 작가는 녹색평론사에 전화를 걸어 “책표지를 좀 바꾸는 게 어떨까요? 몇 만부를 준비하셔야겠어요”라며, 녹색평론사에서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제안했단다.
그러나 김종철 교수는 “안한다”며 한 마디로 거절했다. 그 프로에서 선정만 되면 베스트셀러는 따논당상이고 돈도 꽤나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이들이 책방에 가서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고르는 재미가 얼마나 좋고 또 필요한 일인데, 그게 바로 교육인데, 우리가 무슨 권리로 그런 기회를 막는가, 누가 무슨 책이 좋다고 하면 너도나도 서점으로 몰려가 책을 구입하는데,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 작가는 포기하지 않았다. 출판사의 의견은 그렇다치더라도 작가인 권정생 선생의 의견도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시골 농사에서 교회 종치기를 하면 평생을 가난하게 살고 있는 우리의 권정생 선생 역시 거부했다. 이유는 마찬가지에서 였단다.

글 홍여준민기자

 

 

작성자여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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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걸음 7,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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