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매력에 푹 빠져봅시다~! > 세상, 한 걸음


은혜의 매력에 푹 빠져봅시다~!

본문

모든 아가들은 엄마의 몸을 빌어 세상에 나온다.
은혜가 내게 왔을 때, 임신은 광고에서처럼 우아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임신은 나를 선택한 아이와 내가 하나되려는 몸부림이었고,
이기적인 나에게 나눔의 기쁨을 알려주고 생명을 살려내는
살림꾼이 되게 하는 주술이었다.

- ‘별아이 현실엄마’ 제2회 임신 중에서


 

 
은혜와 장차현실 씨, 두 여자를 만나러 가는 길은 색달랐다.
군데군데 숨구멍 몇 개를 제외하면 온통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된 갑옷을 둘러 입고 지하철 역 이름과 버스번호로만 연결된 갑갑한 도시. 그곳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온 몸의 막혔던 숨구멍이 하나둘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몇 번의 전화 끝에 도착한 곳은 경기도 양수리에서도 조금 더 들어간 곳. 버스가 하루 세 번밖에 다니지 않는다는 외딴 시골이었다. 이곳에 ‘엄마, 외로운 거 그만하고 밥 먹자’를 비롯해 각종 신문과 잡지에 만화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다운증후군 소녀 은혜와 그 만화들을 비롯해 ‘색녀열전’, ‘마님난봉가’ 등을 그려낸 만화가 장차현실 씨가 산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은혜는 한창 일을 하고 있는 엄마를 대신하여 우리를 맞이했다.
도착하자마자 은혜가 우리에게 건넨 종이에는 환영인사와 함께 손님맞이 일정이 적혀있었다. 은혜는 자기가 짜놓은 일정대로 커피와 과일을 내오고, 노래를 선곡하여 틀어주었다. 그러는 동안 현실 씨는 일하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은혜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딸 자랑에 푹~ 빠진 팔불출 엄마

 
페이니스트 잡지 ‘이프’가 처음 나오던 97년부터 현실 씨가 연재하던 ‘색녀열전’을 본 기자는 어느 날 문득 작가의 얼굴이 궁금해 사진을 찾아본 기억이 있다. 그 정지된 사진 속의 장차현실 씨는 언제나 도회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화통하지만 세련되고 똑부러진 성격의 도시 여자. 그것이 그의 만화와 사진을 보면서 받은 인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움직이고 말하고 있는 그녀의 첫 인상은 ‘팔불출’이었다.
“어머, 커피잔이 제각기 다르네. 왜 달라?” 은혜가 우리를 위해 커피를 타와서 한잔씩 나눠주고 있을 때 현실 씨가 짐짓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건네자 은혜가 “옷 색깔에 맞춰 온 거야.”하고 대답한다. 그러자 현실 씨, 뿌듯한 눈으로 한마디. “오신 손님들 옷 색깔에 맞춰서 커피잔을 선택한 센스 봐요.”
잠시 후, 은혜가 딸기를 내오자 씻어온 딸기를 우리에게 보이며 또 한마디. “어머, 먹기 좋게 딸기 꼭지를 다 따온 거 봐요.”
그리고 은혜가 촬영을 위해서 분홍색 봄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마자 이어지는 한마디.
“어머나~, 너~무 예쁘다. (마땅히 동의해야 한다는 듯 우리를 바라보며) 예쁘지 않아요?”
현실 씨는 촬영과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은혜에 대한 칭찬과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칭찬과 자랑을 늘어놓는 내내 그의 시선은 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볼 때의 시선, 다른 모든 것이 하얗게 사라지고 마치 은혜만 있는 것처럼 바라보는 그런 시선이었다. 은혜를 바라보는 현실 씨를 보고 그녀가 정말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이 가득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안겨주는 존재. 은혜는 현실 씨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런 그의 앞에서 “장애 가진 아이 때문에 힘드시겠어요.” 따위의 말은 모조리 플루토늄 운반에 쓰인다는 납상자에 넣어서 쇠사슬로 꽁꽁 묶고 다시 시멘트를 두껍게 덧발라 땅속 저 깊은 곳에 묻어야 할 것 같다. 만약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장애를 가진 ‘아이’가 아니라 아이의 장애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의 편견’일 테니 말이다.

억척스럽게 홀로서기를 하다

 
처음 은혜를 낳았을 때, 대부분의 장애아동을 둔 가정이 그렇듯이 모든 책임은 현실 씨에게 떨어졌다. 일과 가사, 아이 돌보기를 병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조차 돌볼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기에 도움이 필요했지만, 그의 남편은 아무것도 하려들지 않았다. 결국 10여 년 전 현실 씨는 남편과 헤어지고 한부모의 길을 선택했다.
“이혼을 하고 나서 달라진 게 없더라고요. 남편의 빈자리가 있어야 했는데 어차피 모든 걸 혼자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만약 애를 같이 키운다는 느낌이었다면 헤어질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러나 한동안 혼자 사는 여자, 장애를 가진 아이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의 편견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
장애가 있는 아이가 생기면 엄마들은 하던 일을 관두고 아이에 매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 아이가 인생의 전부가 된다. 그러나 현실 씨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불행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현실 씨는 홀로서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하는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아이에게만 헌신해서는 만족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많은 것을 포기한 채 맥 빠진 엄마 밑에서 자라는 아이 또한 건강하게 자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억척스럽게 아이를 둘러메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장애가 있는 은혜를 받아주는 어린이집을 찾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에 늘 아이를 업고 한쪽 어깨에는 기저귀 가방을, 다른 쪽 어깨에는 일거리가 담긴 가방을 둘러메고 양손엔 작업한 그림을 든 채 뛰어다니기 일쑤였단다.
그가 만화를 하게 된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아이를 돌보기와 일을 병행해야 하기 때문에 되도록 재택근무가 가능한 일을 찾다가 장애와 여성을 주제로 한 만화작업을 각종 출판물에 연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용보장을 받을 수도 없었고, 쉬는 것과 일하는 것이 구분되지 않아 늘 근무 중인 것 같은 피곤함에 휩싸여 있었다.
그 상황에서 그의 곁을 지켜주며 힘이 되어준 건 은혜였다.
그런 은혜가 요즘 한창 사춘기이다. 사춘기가 되기 전에는 그 복잡한 감수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는지 고민을 했었다는 현실 씨는 막상 은혜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일어난 변화들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감정도 풍부해지고 생각도 깊어졌어요. 어휘력과 인지능력도 좋아진 것 같고요. 요즘 둘 사이는 더 친구 같고 자매애라고 할까 뭐 그런 게 생기는 것 같아요.” 요즘 쇼핑을 가도 은혜가 없으면 힘들다며 오히려 은혜가 현실 씨를 돌봐주는 상황이라고.
물론 이러한 은혜의 성숙이 마냥 즐겁기만 한 건 아니다. “사회가 장애여성, 특히 정신지체여성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나 그렇다고 장애여성의 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오히려 나쁘다고 생각해요. 반대로 더 잘 알아야 방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현실 씨는 은혜가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잘 파악하고 알려준단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집도 비워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피임도 잘 가르쳐주고요.” 현실 씨는 두 사람에게 상처로 남지 않는 방법으로 과연 감당을 해 낼 수 있는지도 고민하면서 두 사람의 성적 관계를 나누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쾌하고 낙천적인 은혜

 
장차현실 씨가 마감시간을 맞추느라 작업에 열중해 있는 사이, 은혜와 함께 독채로 마련된 작업실로 건너갔다. 한쪽이 전면유리로 되어있어 환하고 아늑한 작업실, 그 한켠에 놓인 커다란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아서 우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함께 살던 강아지, 자기를 가르쳐 준 선생님, 이웃에 사는 아주머니 이야기. 영화를 함께 찍은 감독언니, 촬영 스텝, 엄마 역할을 해준 서주희 씨 이야기까지. 가끔은 전후좌우를 자르고 바로 이야기하는 성격 때문에 짧은 시간을 마주한 기자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도 있었지만, 눈을 빤히 바라보기도 하고, 입을 오므리며 힘주어 말하기도 하고, 입 끝을 살짝 올리면서 웃기도 하고, 새침한 표정을 짓기도 하는 은혜의 매력에 푹 빠져들게 되었다.
장차현실 씨에게서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나도 은혜를 보면 미소가 지어졌다.
다운증후군이 있는 사람들과 무언가를 함께 해 본 사람이면 그들이 얼마나 유쾌하고 낙천적인지, 얼마나 관대한 마음을 가졌는지를 알 것이다. 남들보다 하나 더 가졌다는 21번 염색체가 낙천적이고 관대한 성격을 유발하는 유전정보를 가진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은혜 역시 그러한 자신의 장점을 잘 살려내고 있었다.
얼마 전 국가인권위원회의 프로젝트 영화인 ‘언니가 이해하셔야 돼요’(감독 박경희)를 촬영할 때도 은혜는 그러한 장점을 잘 살려 촬영을 마쳤다.
장애를 가진 소녀가 사춘기에 겪는 미묘한 감정들을 보여줄 예정인 이 영화는 ‘여섯개의 시선’처럼 옴니버스 형식으로 진행되는 영화의 한 부분으로 여름에 개봉할 예정이란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은혜랑 붙어 다니며 은혜의 일상을 관찰한 박 감독은 영화 속 대사들을 실제 은혜가 한 말들로 구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촬영이 끝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은혜는 ‘감독언니’ 이야기와 연기 이야기는 빠지지 않았다.
“나중에 크면 집에서 나가서 혼자 살 꺼예요. 그렇게 하고 나서, 연기하는 게 재미있으니까 배우도 하고, 등산하는 걸 좋아하니까 등산 선생님도 되고, 카페 나가서 노래도 하고 싶고, 방송에도 출연하고 싶고….” 나중에 뭘 하고 싶냐는 질문에 은혜의 대답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다 학교 이야기가 나왔다.

‘푸른숲학교’, 통합교육을 원칙으로 하는 첫 번째 대안학교
은혜는 현재 ‘푸른숲학교’라는 대안학교를 다닌다. 이곳은 통합교육을 원칙으로 하는 첫 번째 대안학교로 전교생 중 30%를 장애아동으로 받도록 규정하고 있단다.
“대안학교에 다니고 난 후부터 은혜가 행복해하고 학교 안 간다는 얘기를 하지 않게 됐어요.”
현실 씨 역시 처음에는 일반학교에서 통합교육을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은 그런대로 적응이 됐는데 문제는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커가기 시작하면서 은혜가 점점 친구들과 거리가 멀어졌던 것. 결국 서울에선 안 되겠다 싶어서 현실 씨는 은혜를 아이들이 적은 학교에 보내려고 덕소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전교생이 100명 남짓의 학교에서도 문제가 생겨서 양수리에 있는 분교로 옮겨왔고 전교생 34명의 분교에서도 적응을 하지 못하자 결국 학교를 관둔 채 홈스쿨링을 선택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부모를 닮아서 어린 나이에도 얼마나 편견에 휩싸여 있는지 몰라요. 아이들조차 성적위주로 공부를 잘해야겠다는 생각만 있어서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 학교에 다니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더라고요.” 현실 씨는 학습위주로만 돌아가는 학교의 공부시스템에서는 장애아동의 통합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홈스쿨링 역시 적절한 방법은 아이었던 모양이다. 은혜는 친구들과 싸우기도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있고 싶어 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교육의 혁신을 꿈꾸는 교육공동체 모임에 참여해 지금이 ‘푸른숲학교’를 만들었다. 물론 대안학교라고 해서 아이들이 완전히 다른 건 아니다. 대부분이 일반학교를 다니다 왔기 때문에 초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교사도 부모도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아이들도 달라지기 시작했단다.
“대안학교는 학습위주로 진행하지 않아요. 자연 속에서 몸으로 하는 공부를 많이 하죠. 그래서 농사, 명상, 예술 공예를 중시하는데 그렇게 하니까 통합의 여지가 많아요.”
현실 씨는 이 학교에서 또 다른 계획을 갖기 시작했다. “12년제 학교라서 계속 이곳을 다닐 예정인데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치고 졸업을 하면 직업도 학교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현재 유치원도 만들 계획인데 그곳에서 아이들을 돌보거나 아니면 총무과에서 간단한 업무처리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물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는 은혜에게 달린 일일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꿈꿀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 만으로도 기쁜 일이다.

그리고 또 기쁜 일이 있다.
사진을 봐도 알겠지만 장차현실 씨는 현재 임신 7개월째다.
뱃속 아이의 아빠는 그의 ‘동거인’.
처음 만날 당시 영화를 제작 중이던 아이의 아빠는 은혜를 인터뷰하기 위해서 현실 씨 집에 찾아왔다가 함께 살게 되었다.
결국 “어디를 가든 은혜를 데리고 다니기 때문에 ‘작업’을 하고 싶어도 그럴 기회가 없다”고 말했던 그에게 은혜는 아이의 아빠를 집으로 불러들여 만나게 해 준 셈이다.
처음엔 ‘오빠’라고 부르던 은혜도 가끔 혼용해서 써서 헷갈리게 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제법 그를 ‘아빠’라고 부른다.
거실 한켠에 걸려있는 초음파 사진을 통해 뱃속의 아이를 미리 만나 본다. 문명이 얼마나 빠르게 발달하는지 아이의 이목구비가 뚜렷이 나타난 것이 초음파 사진만으로도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누구를 닮았는지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아이의 초음파 사진을 설명하면서 현실 씨는 행복해보였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뱃속의 아이는 뻔히 아빠를 두고도 하마터면 사생아가 될 뻔 했다고.
“호주제가 있을 땐, 호적을 만들면 아이, 아이의 아빠, 그리고 나는 한 호적에 올라가 가족이 되는데 은혜만 따로 동거인으로 남게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하느니 뱃속의 아이를 사생아를 만드는 한이 있어도 전부 동거인으로 가자고 결정한 거였는데, 이제 호주제가 폐지되었으니 동거의 끈을 풀고 가족으로 가야죠.”
은혜는 지금 자기처럼 장차현실 씨를 엄마로 선택한 동생을 기다리고 있다. 아기가 나오면 사랑을 듬뿍 전해주겠다고 벼르면서 말이다. 이제 곧 장차현실 씨 만화의 또다른 주인공이 될 그녀석이 기대된다.

글 조은영 기자 / 사진 정선아 객원사진기자

작성자조은영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께걸음 7, 8월호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8672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연월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 : 함께걸음미디어센터  /  청소년보호책임자 : 노태호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