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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최민희 사무총장

“평생 운동하겠다는 약속, 지키고 싶었다”

본문

수수팥떡,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소설 ‘성난 휠체어’
혹시 벌써 눈치 채셨는가, 아니면 아직 오리무중이신가.
아마도 고개를 갸우뚱 하실 분이 더 많으실 것 같다.
그렇다면 좀 더 힌트를 드리겠다.
‘황금빛 똥을 누는 아기’의 저자, ‘조선일보 유감’의 작사가, 전직 월간 말지 기자.
자, 이정도면 어떠하신지?
4월의 인물로 함께걸음이 만난 사람은 바로 위 단어들의 주인공인 최민희 씨다.
그이는 1985년 월간 말지 기자로 시작해 현재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이하 민언련)의 사무총장으로써 20년 시간동안 꼿꼿하게 현장을 지켜왔다. 또한 최민희 씨는 88년 창작과비평에 노동소설 ‘성난휠체어’로 등단한 소설가다. 그리고 자연건강법을 대중화시키고 있는 (사)수수팥떡 대표다.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이며, 이미 육아책 3권을 낸, 남의 아픈 아이에게도 관심이 많은 여성이다.
언론운동가이며, 자연건강법 전파자이고, 엄마인 그이를 수수팥떡 사무실에서 만났다.

 
사실보도, 균형보도, 전망제시 할 수 있어야 바른 언론
최민희 씨의 경력을 소개하는데 한참을 정리해야 했다. 최대한 줄인 소개인데도.
하지만 막상 만난 그이는 말랐지만 야무진 체격에, 수수한 단발머리, 화장기 없는 까무잡잡한 맨 얼굴, 무엇보다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아유, 이런 말하면 푼수라는 소리 듣는데.…”라며 수줍게 웃는 그이. 담백하고 소탈했다.
84년 창립된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련의 전신)이 85년 월간 말지를 발간했고, 이 때부터 최민희 씨가 민언련과 연을 맺었으니까, 어언 20여년 세월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언론운동을 작정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의 소위 운동권 학생이던 시기, 글 쓰는 것을 좋아했던 그녀는 해직기자들이 모여 창간한다는 말지에 지원했고, 들어와보니 언론운동 하는 곳이었다나.
“저는 단지 글을 쓰고 싶어서 코드가 맞는 곳을 찾아들어갔던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십여 년 언론운동 현장을 지켰던 이유는 평생 운동하겠다고 결심한 약속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민언련은 언론운동이 생소했던 90년대, 언론이 우리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대중적으로 알려낸 대표적인 언론운동단체.
“창립 당시만 해도 일부 보수언론의 시각이 전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질 않더라고요. 이를테면 조선일보가 쓰면 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쫓아가고, 이어서 저녁 9시 뉴스에 보도되죠. 그렇게 조선일보의 논조가 사회 의제화 되는 상황이었어요. 바로 그 때 언론운동을 시작한 거죠”
덧붙여 최민희 씨는 “사람들이 언론에 대해 몇 가지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요. 첫째는 자신이 언론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둘째는 언론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점이에요.”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민언련은 시민들과 함께하는 언론운동에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언론시민학교나 신문방송 모니터, 시청자 퍼블릭 엑세스 등을 대중화 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특히 민언련이 92년 처음 주도하기 시작한 ‘안티조선 운동’은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얘기.
“그렇게 조선일보에 의해 사회 의제가 만들어지던 시기였죠. 근데 조선일보가 그것을 잘못 설정하고 있었어요.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유독 조선일보가 보수를 넘어 수구적이었죠. 예를 들어 과거사 청산과 관련해서 중앙과 동아일보는 아무리 해도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데 지금 이 시점에서 무슨 과거사냐’정도 밖에 못나가요. 그런데 조선일보는 ‘김일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내보낸다는 거죠.
한마디로 조선일보는 극우 상업주의예요. 중앙과 동아는 기회주의적 상업주의고요.
그래서 조선일보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통일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생각했고, 안티조선운동을 시작한 겁니다.”
최민희 씨는 안티조선운동으로 적어도 우리 사회가 조선일보가 왜곡 보도를 하고 있는 수구적인 매체, 그냥 신문이 아닌 특정정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 매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고 그간의 성과를 평가했다.
이러한 안티조선운동의 최종목표는 조선일보의 정상화.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남은 것은 조선일보의 최대 피해자인 민중진영이 바통을 이어받아 한다고 했다.
이제 십여 년이 넘은 안티조선 운동을 지식인이나 운동단체에서 계속 이끌 것이 아니라, 노동자나 농민 등이 중심이 되어 목표와 내용을 정할 시점이 된 것이다.
“바른 언론요? 정론 기능을 하는 언론이죠. 주장하기보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균형 잡힌 보도를 하고 전망까지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균형 잡히지 않는 대안은 일부에게만 이익을 주게 되고, 사실에 기초하지 않는 전망은 왜곡되기 쉬우니까요.”

내 몸 안에 모든 민주주의 원리가 있었다
“한 4년 인터뷰만 하고 다닌 적이 있어요. 무척 방황하고 있을 때였죠.”
90년대 초 동구권의 멸망은 운동가였던 최민희 씨를 혼란에 빠뜨렸다고 한다.
“제가 사회주의자여서 방황했던 것이 아니에요. 적어도 사회주의 국가는 자본주의처럼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시켜 더러운 폐부까지 드러내지 않는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사회주의도 생각만큼 그렇지는 않더군요. 그렇다면 이 시궁창 같은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맞는 제도란 말인가 싶어서 방황 많이 했죠. 그래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요.”
어려서부터 글 쓰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는 최민희 씨는 88년 창작과비평에 ‘성난휠체어’로 등단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렇게 방황하면서 그녀는 사람들 속에서 길을 찾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실패했어요. 아직도 찾지 못했죠. 운동을 오래 한 누구를 만나보니 그는 차고 넘쳐서 운동을 했던 것이었어요. 또 어떤 사람은 없어서 운동을 시작했지만, 운동 때문에 너무 강퍅해져 있었어요. ‘큰 바위 얼굴’이라는 단편 소설 아시죠? 주인공이 큰 바위 얼굴을 계속 찾아다니잖아요. 그것처럼 사람 속을 헤매고 다닌 거죠.”
방황하던 그녀가 희망을 발견한 곳은‘몸’이었다.
최민희 씨는 몸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몸 안에 모든 민주주의의 원리가 들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내가 괴로워하는 순간이든, 어떤 순간이든 이 몸은 나를 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것을 알게 되니까, 내가 좌절하는 것이 너무 미안해지더라고요. 나의 몸에게 말이죠.”

은혜 갚기 위해 보년  십년 세월

 
이제 최민희의 자연건강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그녀가 여기에 빠지게 된 사연에는 장기수였던 왕영한 선생 때문이었다고 한다.
말지의 ‘분단과 사람들’이라는 꼭지로 인터뷰 기사를 싣던 최 씨는 위암 말기 3개월 시한부 판정를 받고 출소한 왕영한 선생을 만나게 된다.
“저는 그렇게 깨끗하고 천진난만한 사람은 첨 봤어요.”라고 왕 선생을 기억하는 최민희 씨는 선생을 살리고자 당시 자연건강요법의 대가인 한 사람을 찾아가게 된다.
그러나 거절만 당했고 고민 끝에 다시 찾아가 “왕영한 선생을 살려준다면 당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은혜를 갚겠다”고 했단다.
결국 그 사람의 방법을 전수 받아 선생은 단식과 생채식, 풍욕 등의 방법으로 건강을 추스려 7년을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었다고.
“그가 원한 것은 자기 이름으로 책을 세 권 내달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최민희 씨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십 년동안 자연건강법을 공부하는 그룹에 들어가 환자들과 생활하며 그 사람의 이름으로 책 세 권을 출간했다. 그 책으로 그 사람은 아주 유명해졌다고 한다.
“초등학교 학력 수준인 그 사람에게도 한이 많았겠죠. 제가 첫 번째 책을 내주던 날, 이틀을 울더군요. 책을 세 권이나 내는 건데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겠어요. 또 그게 공부만으로 되나요.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이 봤고. 인생 공부 어마어마하게 했죠. 그렇지만 약속을 지킨다는 것, 남의 이름으로 책을 낸다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사람들은 약속은 깨어지기 위해서 있는 거라고 쉽게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마치 한 편의 소설을 듣는 듯했던 그녀의 얘기 속에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이의 철학이 보였다.
그렇게 왕 선생의 건강이 회복되는 것을 본 최민희 씨는 낳을 때부터 많이 아팠던 아들, 용혁에게도 그 자연건강법을 시키게 되었다.
지금 열여덟인 용혁이는 누구보다 건강하다며 소박하게 웃었다.

아이는 한 열명 쯤 낳고 싶었어요
서른부터 마흔까지 최민희 씨는 민언련 활동하랴, 자연건강법 공부하며 책 출간하랴, 아픈 아이 돌보랴, 생계까지 책임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마흔에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제가 학생운동 하던 때는 페미니즘이 막 치고 올라오던 시기였거든요. 당시 운동권 친구들은 애 안 낳고 죽을 때까지 운동만 하겠다고들 했죠. 그 와중에도 저는 결혼은 꼭 할 거고, 애는 한 열 명 정도 낳을 거라고 했어요. 다들 희한하다는 눈초리로 저를 쳐다보곤 했죠. 선배들은 꼭 네가 아니어도 애 낳을 사람 많다며 설득하기도 했고요. 하하.”
그렇게 아이를 좋아하던 사람이 11년 만에 둘째를 가지게 됐으니 그 때 심정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내가 늙었다고 제왕절개를 하라는 거예요. 내 몸에 다른 증세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단지 11년 만의 출산과 노산이라는 이유로 제왕절개를 하라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최민희 씨는 조산소를 찾았다. 그녀가 조산소에서 애를 낳겠다고 하자, 친구들은 너 때문에 미치겠다고 하며 말렸다고 한다.
그렇게 찾아간 조산소에서 최민희 씨는 아이를 받는 일흔여덟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그녀를 보자마자 “애 잘 낳게 생겼다. 걱정 말라.”며 칭찬부터 했다고 한다.
그렇게 낳은 둘째 아이가 이제 일곱 살이 된 윤서다.
최민희 씨는 되도록이면 아이를 데리고 다닌단다. 용혁이도 그랬고, 어린 윤서도 마찬가지.
그런데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일하는 풍경은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그 꼴을 보질 못한다. 참는 척 하다가 끝에 가서는 꼭 한마디 던진다.
“제 상처는 주위에서 저를 도와주지 않는 거였어요. 제가 마흔에 애를 낳았잖아요. 나는 이 애랑 밖에서 활동하는 것이 너무 좋은데, 그거 남자들 정말 싫어하거든요. 자기들도 애 있으면서. 내가 애가 있다는 것을 약점으로 잡아서 나랑 헤게모니 장악 싸움을 하는 거예요. 참 기자님도 애 엄마라면서요. 그럼 알겠네. ”
어린 아이가 있는 엄마는 사회로부터 무언의 선택을 강요받는다. 아이에게 충실하려면 집에 들어앉던가, 일을 하고 싶으면 애가 없는 사람처럼 하던가. 일 하던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으면서 양 끝에서 갈팡질팡 하게 된다.
칸막이 너머로 인터뷰를 듣던 수수팥떡의 한 간사가 말을 보탠다.
“제가 민언련에서 일할 때 임신을 했거든요. 그 때 사무총장님이 출근 시간 11시로 늦춰주고 업무도 조정해주셨어요. 그러면서 미안해하지 말라, 당당해라, 이건 당연히 네가 누려야 할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죠. 사무총장님은 아이를 둘이나 키우시는 동안 사실 그런 배려 받아보지도 못하셨는데.”

아픈 아이가 있는 엄마들을 위해서
자연건강법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몸의 관계, 가치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요구한다. 그러한 성찰과 함께 병을 예방하는 것에 초점이 있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치료법일지라도, 이미 병이 난 상태에서는 효과도 떨어질 뿐만 아니라, 심신이 모두 괴로워지기 때문.
“우주 자연의 이치 속에 인간은 어느 지점에 있나를 성찰해야 합니다. 그 연장선에서 한 인간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를 고민하는 거죠. 따라서 매일 섭취하는 음식과 나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가치관이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것을 아토피와도 연결짓고 운동하는 거죠.”
최민희 씨는 2001년 아이를 사랑하는 모임인 ‘수수팥떡’이라는 싸이트를 개설했다.
최근 몇 년 갑자기 유병율이 높아진 아토피 때문에 수수팥떡의 자연건강법은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이에 대해 최민희 씨는 정색을 한다.
“제가 어쨌든 언론운동판에 있다보니, 우리 사회의 구조를 알게 되었고, 가치관이 잘못 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저는 이 세상이 여자가 아이를 낳아서 잘 키울 수 있는 구조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 사회는 여자가 아이를 낳아서 잘 키우는 것은 하찮은 것이고, 그 아이가 밖에 나와서 사회 생활하는 것은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고 있거든요.”
최민희 씨는 이것을 고치고 싶었다고 한다.
어디서부터 손을 댈까 고민하다가, 우선 당사자인 엄마들로부터 시작하게 됐다고. 이들을 모아내기 위한 방법을 찾다가, 최민희 씨는 본인이 살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나를 곰곰이 되짚어보게 됐다고.
결론은 아이 낳고 키우기와 아픈 아이 돌보기였고, 우연한 기회에 자연건강법을 공부했으니 두 가지를 접목시켜 보자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
이 두개의 코드로 엄마들을 끌어내고, 의식을 깨우는 작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수수팥떡인 셈.
최민희 씨는 아이의 아토피를 통해서 음식의 문제를 알게 되고, 이를 함께 공유하면서 사회의 문제를 깨닫게 된 아줌마들을 조직해 2004년 총선 때 아줌마 물갈이 연대를 발족시키기도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쉽지 않아요. 어리고 아픈 아이가 있는 엄마들이잖아요. 우리 사회가 이 엄마들이 어디 움직일 수 있게 해주나요? 그래서 다음 과제는 이런 엄마들이 일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자 합니다. 생태 유아 공동체, 유치원, 방과 후 학교까지 말이죠.”
최민희 씨는 내년 3월 민언련 사무총장으로써의 임기를 마치면 수수팥떡에 더 몰두하겠다고 한다.
“수수팥떡은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서 벌린 일이에요. 그리고 여성이고 아줌마인 제 존재와도 잘 맞는 일이라 정말 재밌고 즐거워요.”
최민희 씨는 건강하고 행복하려면 “비우라”고 한다.
그리고 시민운동이건 사회운동이건 그녀는 운동을 하면서 사는 것이 ‘비우는 길’이라고 생각한단다. 그래서 쉽지 않은 길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건강한 삶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무의식적으로 집어넣기만 하는 ‘더하기’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보내고 버리는 ‘빼기’.
최민희 씨가 가장 원하는 삶의 방법인 듯 하다.

글 최희정 기자 / 사진 조은영 기자

 

작성자최희정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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