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우 고수 조경곤 씨 > 세상, 한 걸음


시각장애우 고수 조경곤 씨

“시각장애우는 북을 칠수 없다는 편견이 걸림돌이었죠”

본문

판소리에서 북을 치는 고수(鼓手)는 반주자이자 지휘자이자이며 연출가이자 관객이다.
고수는 명창이 하는 소리에 따라 장단을 짚어주면서 소리의 이면에 알맞은 북가락을 넣어 소리판의 흥을 고조시키는 반주자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북장단 내에서 일정한 박자로 소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지휘자의 역할을 한다.
또 판소리에 갖가지 효과를 넣어 단조롭지 않게 끌어가는 연출가의 역할도 고수가 하고, 잘 아는 것처럼 관객을 대표해 소리꾼의 소리에 ‘얼쑤~!‘, ‘잘 한다‘ 등의 추임새를 넣어 관객들의 반응과 추임새를 유도하는 것도 고수다.
보통 사람들은 판소리에서 명창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억하지만 고수는 이렇게 일인 다역을 해내는 판소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수의 역할은 대대로 비장애우의 몫이었다. 악보가 없는 판소리는 명창의 발림과 입모양을 통해 박자를 맞춰야 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얼마전 시각장애우는 고수가 될 수 없다는 국악계의 통념을 깨고 여러 경연대회에서 연거푸 입상하면서 국악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람이 등장했다. 지난해 9월 인천에서 최초로 시각장애우 독주 고법발표회를 열기도 했던 조경곤(38)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시각장애우 고수 조경곤 씨


어린시절부터 맺어온 판소리와의 인연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조경곤 씨가 판소리 고수가 된 것은 판소리를 몹시 좋아했던 큰아버지의 영향이었다.
바로 앞집에 살던 큰아버지는 아침마다 소리를 했을 뿐만 아니라 겨울 농한기만 되면 집으로 소리하는 사람들을 부르실 만큼 판소리를 좋아했다. 큰 아버지가 부른 명창들은 그의 집 사랑방에 머물렀고, 그 덕에 그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소리명창의 판소리 가락을 들으면서 자랐다.
“사랑방에서 명창들이 북을 치면서 소리를 하면 저는 제 방에 혼자 앉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어요. 가끔씩 명창과 고수들이 전부 외출을 하면 슬그머니 사랑방에 들어가 북을 잡아보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판소리를 몸에 익혔던 거죠.”
대여섯 살 때도 그는 명창의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를 따라 갔단다. 시골은 잔치를 할 때 판소리 명창들을 부르는데, 그는 명창이 소리하는 내내 그 앞에 서서 소리를 듣다가 끝나면 그제야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땐 너무 어려서 뜻도 제대로 모르고 들었지만 그래도 판소리가 좋았다. 그의 아버지도 타고난 목소리가 워낙 좋으셔서 전국대회는 아니지만 판소리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기도 하셨다니 판소리 사랑은 집안 내력이 아닐까? 그는 그렇게 판소리가 무엇인지를 배웠고, 판소리의 박자를 몸에 익혔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용돈을 모아서 본격적으로 명창을 찾아 판소리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자신이 판소리를 좋아해서 겨울 농한기만 되면 명창들을 불러서 먹이고 재우고 하셨던 큰아버지는 소리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에 그가 판소리 배우는 걸 반대하셨다. 
“큰아버지가 학원까지 찾아와서 ‘10년을 해도 밥한 술 먹기 어려운 게 판소리다. 너는 너의 갈 길이 따로 있으니 판소리를 배우지 마라‘고 하시며 말리는 바람에 판소리의 길의 접어야 했어요. 대신 그때부터 운동에 빠져들기 시작했죠.”
그래도 그는 판소리에 미련이 남아서 전문적이진 않지만 감각을 잃지 않도록 중간 중간 명창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소리도 배우고 대금도 배웠다.

스물여섯에 1만5천원 들고 상경
눈을 다친 건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합기도 겨루기를 하다가 망막이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니었는데 망막박리가 일어나는 바람에 6번의 수술을 받아야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수술을 하고도 끝내 시력을 회복하지 못한 채 결국 실명하게 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언젠가는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시각장애우가 된다는 사실이었죠. 그것은 저에게 충격과 함께 절망을 안겨줬습니다.”
망막박리란 물체의 상이 맺히는 망막이 제자리에 붙어있지 않고 떨어지는 것으로 매년 만명에 한명 꼴로 생기는 드물지 않은 현상이다. 망막이 제자리에서 완전히 떨어져 버리면 눈을 통해 들어온 상이 시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앞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는 그나마 시력을 한번에 잃은 것이 아니라 서서히 진행됐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시력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말했지만 그게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워낙 활동적인 성격에 운동도 좋아했고 친구들과 다니는 걸 좋아했는데 시력이 떨어지면서 행동의 제약이 생기기 시작했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운동을 하겠다는 꿈을 접어야 했기 때문에 실망도 컸다.
그 사이 서울에서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딸 넷을 낳고 얻은 귀한 아들의 눈을 고쳐보겠다고 사업마저 접은 채 백방으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여러 번에 걸친 수술은 물론이요, 침술부터 시작해서 그의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면 어디든 쫓아다녔고 무엇이든 하기 시작했다. 눈을 뜨게 해주겠다는 유혹에 날린 돈도 적지 않았다. 잘 살았던 집은 그의 눈을 고쳐보겠다고 여기저기 돈을 쓰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얼마 가지 않아 재산을 모두 날렸다.
그런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력은 20대 중반까지 계속 떨어졌고 그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일정한 직업을 갖기 어려웠다. 그래서 자영업을 해보기도 했고 고향을 벗어나 객지를 돌며 방황도 많이 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주변에서 폐인이 되어가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눈이 잘 보이는데도 그렇게 사는데, 그들보다 신체조건이 나쁜 그가 그 상태로 지내면 결국 그들처럼 폐인이 될 게 분명해 보였다. 그는 고향을 떠나 자신의 위치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 시각장애우에게 무료로 거주할 곳을 내주고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방송을 들었다.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갖게 했고 그는 1만5천원만을 달랑 들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가 92년, 그의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다시 판소리의 꿈을 키우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그 교회에서 지내면서 다시 판소리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워낙 판소리를 좋아했던 데다가 눈이 보이지 않더라도 판소리는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국립국악원에 찾아가 다시 판소리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아다니면서 다시 들은 북소리는 그의 옛 꿈과 열정을 되살아나게 했다. 그러나 가진 돈도 없는 상황에서, 가르치는데 다른 사람의 몇 배나 걸리는 그를 위해 시간을 투자해줄 스승을 찾을 수가 없었다.
흔히 북은 타악기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북을 치면 한가지 소리가 나는 줄 알지만, 북에도 음의 높낮이와 음량이 있다. 북의 어느 위치를 어떻게 치느냐에 따라서 소리는 제각기 다르게 난다. 피아노나 기타는 절대음이기 때문에 누가 치든지 동일한 음이 나지만 북은 손의 위치에 따라서 음이 완전히 달라져버린다. 손의 위치가 정확하지 않으면 ‘도‘ 음이 나야 할 때 ‘레‘ 음이 나기 때문에 손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문제는 허공에 기준점도 없이 떠있는 손의 위치를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설명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게다가 조경곤 씨 스스로도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도대체 북과 북채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손의 감각만으로 가늠하는 게 쉽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고수가 북을 치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고 소리를 들으면서 그 섬세한 감각을 익히는데, 저는 다른 사람들이 배우는 방식으로는 도저히 북을 배울 수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비장애우가 한 시간이면 배울 것도 저는 열 시간이 걸렸죠. 그러니 선생님들마다 저를 가르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겁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악보가 존재하지 않는 판소리는 소리하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호흡이 달라지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 같은 날 불러도 시간마다 다르게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소리꾼이 기교를 부리기 위해 소리를 늘이거나 뺄 때 고수가 기민하게 소리에 맞게 북장단을 쳐줘야 하는 고수는 명창의 마음을 읽지 못하면 제대로 북을 치는 게 불가능하다. 소년 명창은 있어도 소년 고수는 없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소리를 보필하는 것이 북이기 때문에 명창의 소리가 달라지는 것에 북도 맞춰가야 한다. 그리고 소리가 울면 북도 따라 울어야 한다.
일반적인 고수는 이러한 변화들을 명창의 입모양과 발림을 보고 알아낸다. 그가 음을 얼마나 길게 뺄 것인지, 어디서 장단을 맺을 것인지는 내뱉는 소리보다 반박자 먼저 변하는 입모양을 보고 아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 명창들이 박을 맺으라는 뜻으로 발림을 넣는 부채를 휘둘러 신호를 보내기도 하는데 고수는 그 신호에 맞춰서 박을 맺어줘야 한다. 그러나 시각장애가 있는 그는 이러한 것들을 볼 수 없으니 동일한 방법으로 배울 수 없었다. 그러니 국악 역사 속에서 시각장애우들이 대금, 가야금 등의 연주자로 활발히 활동하던 때에도 판소리 고수는 없었던 것이다.
나중까지도 그에겐 소리가 빨라지고 느려지는 완급처리가 가장 어려웠단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감각을 기를 수밖에 없었다. 명창의 소리를 듣기보다는 명창의 호흡을 파악하고 마음을 읽어내는 것, 그것을 통해 그는 보이지 않는다는 한계를 넘을 수 있었지만 배우는 과정에서는 이런 까닭들로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선생님들은 조금 가르치다 포기하고 또 조금 가르치다 포기하기를 반복했고, 심지어는 “시각장애우는 고수가 될 수 없다”며 가르치는 것 자체를 거절하기도 했다. 그런 일을 겪다보니 그에게 북을 가르쳐 줄 스승을 찾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일만큼이나 어렵게 느껴졌다.
그는 그사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그리고 그러는 중에 시력은 더욱 나빠져 완전히 시력을 잃고 말았다.

▲아내 최정란(36)씨와 함께. 92년 교회 장애우 모임에서
최씨를 만났다.

운명을 바꿔놓은 스승
운명의 스승 이은태 선생을 만난 건 그렇게 스승을 찾아 헤맨지 10년만의 일이었다.
어느 날 명창 정상학 선생을 찾아갔다가 그곳에서 만난 분이 북을 배울 생각이 있냐며 배워보라고 권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여러번의 실패를 경험한 그는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다. 좋은 선생님을 소개해주겠다는 몇 번의 설득 끝에 그는 다시 용기를 냈고 그렇게 만난 사람이 이은태 선생님이었다.
2002년 6월 이은태 선생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을 새롭게 바꿔놓았다.
처음 6개월은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매우 힘든 시간이었다. 이은태 선생님도 시각장애우를 가르쳐 본 것이 처음인지라 그를 가르치는 게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은태 선생님은 다른 사람과 달리 가르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설명도 더 자세히 하고 그래도 안 되면 그의 손을 잡고 직접 북을 치면서 감각을 익히게 하셨다.
조 씨 역시 그 기간동안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던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아내에게 이제 그만 고수의 길을 접겠다며 한복이며 북이며 전부 쓰레기통에 넣어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를 잡아준 것도 이은태 선생님이었다. 큰 말씀은 없으셨지만 그에게 잠재되어 있는 자질을 알아보고 인정해주셨고 그가 해낼 수 있다고 믿어 주었다. 그것은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각종 경연대회에서 연거푸 입상
그렇게 힘들었던 6개월이 지나자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선생님도 좋아하셨고 그에게도 희망이 생겼다. 그리고 1년이 지나자 이번에는 무언가 틀이 잡히기 시작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빠르게 성장했다. 비장애우가 1시간 연습하면 그는 10시간씩 연습했다. 말 그대로 정말 손에서 피가 날 정도로 했다. 손에 굳은살이 박이면 그걸 잘라내면서 연습했고 갈라져서 피가 나면 붕대로 감싸고 연습했다. 10시간씩 앉아서 연습을 하다보니 어깨가 결려 침을 맞으면서도 연습을 쉬지 않았다.
이웃주민의 항의를 받으면 그는 명창의 소리를 담은 카세트와 8kg짜리 북을 둘러매고 아내의 도움을 받아 근처 약수터로 나갔다. 험한 산길을 따라 1km나 가야 했지만 큰 소리를 내며 몇 시간씩 연습을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름철엔 명창이 직접 집에 와서 그 곳에서 함께 연습을 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각종 대회에서 상을 받기 시작했다.  전주 전국고수대회에서 2003년 2004년 연거푸 입상했으며, 2004년에는 순천 팔마고수 전국경연대회 서울 전국국악경연대회 고법 명고부에서도 입상했다. 남들은 5~10년을 해도 쉽지 않은 일을 그는 단지 1~2년 사이에 이뤄낸 것이다.
‘시각장애가 있으면 고수는 불가능하다‘며 가르치기를 포기했던 사람들은 그의 성장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처음에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연주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 겨우 3년을 배웠는데 다른 사람들 20년 배운 것보다 앞서간다는 평가도 받고 있단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 문화재 이수증을 주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은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화재 이수증을 받으면 지금 당장 몇백만원을 벌 수도 있고, 앞으로 문화재가 될 기회도 얻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 배운 적도 없는데 양심상 이수증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이은태 선생님이 있지 않는가. 문화재는 아니지만 이은태 선생님은 오늘의 그를 있게 한 고마운 스승이다. 그 은혜를 저버릴 수는 없는 일, 그는 제안을 거절했다. 그를 믿고 가슴으로 품어준 이은태 선생님은 친형님 이상의 존재이며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앞으로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이 그가 스승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방법이라며 그는 중요한 것은 남들이 시각장애 때문에 할 수 없을 것이라던 일을 해냈다는 것, 그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그렇게 편견을 깨뜨리는 것이 또다른 시각장애우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영역의 장애우들에게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해보자.‘는 희망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 2004년 9월 조경곤씨는 인천 서구 문화회관 대극장
에서 "조경곤 남도판소리 고법 발표회"를 열었다. 사진은
이난초(남원시립국악단,92년 남원 전국판소리명창대회 대
통령상 수상자)명창이 부르는 판소리에 맞춰 북을 치는 모습

장애우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넘어
지난해 9월 그는 인천 서구문화예술회관에서 국내 최초로 시각장애우 독주 고법발표회를 열었다. 박을 하나라도 놓치면 그것이 크게 부각되기 때문에 문화재급의 명고수 중에도 독주회를 하지 않으신 분이 많을 만큼 독주회는 자신의 기량을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보여주고 평가받는 자리이다.
그는 이 발표회에서 이난초(남원시립국악단, 92년 남원 전국판소리명창대회 대통령상 수상자) 명창이 부르는 판소리 <심청가>와 <흥보가> 중에서 주요대목의 장단에 맞춰 1시간 동안 북 실력을 보여줬다.
그날 그와 함께 호흡을 맞췄던 이난초 명창은 “한번도 제대로 맞춰보지 못했기 때문에 시작 전에는 과연 이 발표가 제대로 될까 싶었는데, 막상 무대에 올라가 보니 그만하면 됐다”며 웃음을 보여줬단다.
그리고 발표회의 사회를 맡았던 동국대 최종민 교수는 “국악 역사에서 장애우 고수가 나온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브랜드화 할 수도 있다. 세계를 다니며 홍보를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발표회는 관련 교수와 문화재급 선생님들이 많이 온 자리에서 그의 실력을 보여주고 인정을 받기 위한 또다른 모험이었다.
“장애우는 무엇을 하든 그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직업이 아니라 자기만족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많아요. 저는 그러한 인식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제가 각종 대회에 나가 상을 받은 것도 그런 까닭이었어요.”
이렇듯 예술분야에서도 장애우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구조적이고도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지금 이러한 관례를 깨기 위해서 노력 중이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로 치면 국립국악원에 해당되는 궁중악사의 60%가 시각장애우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그러한 맥이 끊겨버린 거죠. 오히려 서양음악 분야에서는 장애우들이 활동을 하는데 국악에서는 장애우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문제로 문화관광부에 연락하면 ‘국립국악원의 단원 선발 규정에는 장애우를 배제하는 규정은 없다‘는 말만 하는데, 그러나 현실적으로 시험을 볼 수 있는 여건도 마련되어있지 않고 비장애우 중심으로 운영체계가 맞춰져 있기 때문에 사실상 장애우가 단원으로 입사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단원을 뽑을 때 공개적으로 시험을 봐서 뽑지 않는데다 시험을 본다고 하더라도 매우 형식적이고 국악단에서 활동하는 선생님들에게 배운 사람들이 인맥을 통해 선발되기 때문에 그는 사실상 인맥이 닿지 않는 장애우가 단원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장애우는 뽑지 않는다는 규정은 없지만 이들 국악단 선생님들에게 배우기 어려운 장애우들은 결국 구조적으로 국악단에 들어갈 수 없게 되어있는 셈이다.
그는 이러한 차별의 벽을 넘어보고자 국립창극단,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안산시국악관현악단, 경기도국악관현악단, KBS국악관현악단 등등 많은 곳에 시험을 봐서 단원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정식 단원이 어렵다면 직접 내 실력을 시험해보고 실력이 인정되면 한시적으로라도 기회를 달라고까지 해 봤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지난 11월 그는 예전처럼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중앙 국앙무대에서 함께 연주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달라며 청와대에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답이 없기는 청와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계속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예정이다.

 

지금 그는 비장애우들에게 직접 북을 가르치면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장애 비장애라는 용어는 그저 사회가 만들어낸 언어일 뿐, 장애와 비장애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별로 적합하지도 않다고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다. 장애우와 비장애우라는 구분을 넘어 사람은 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서로의 도움을 받아 채워나가며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며 이것을 문화를 통해 알려가고 싶다고 했다.
그것이 시각장애라는 어려움을 넘어 고수에 도전했던 그의 소망이었다. 이제 그의 소망이 나래를 펼 시간이다. 예술에 끝은 없는 것이니 고수를 천직으로 알고 평생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그는 올해 다시 남도판소리의 불모지인 제주도에서 또다시 독주회를 가질 예정이란다. 그의 앞날에 봄이 어서 찾아오고 그의 소망이 싹을 틔우게 되길 기대해 본다.

글·사진 조은영 기자



 

작성자조은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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