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선관 시인 > 세상, 한 걸음


故 이선관 시인

기형의 노래를 부르며 인간선언을 한 장애우시인의 삶

본문

경남 도민들을 대상으로 발행하는 경남도민일보는 지난해 12월 12일자 신문 1면에 ‘마산의 보물, 이선관 시인 영면하다’란 기사를 실었다.
도대체 고인이 어떤 삶을 살았기에 부고 기사가 신문 1면에 올랐는가. 언론사 밥을 10년이나 먹은 필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부고 기사의 제목이 ‘마산의 보물 이선관 시인...’이였으니 한 지자체의 보물이라 칭하며 그렇게 애닳아 한 것도 전대미문이었다.

ⓒ오마이뉴스 윤성훈 기자

시인 이선관이 없는 마산은 마산이 아니다
                     
이제 마산은 그 이름표를 잃어버렸다
시인이 육십네 해 동안 보듬고 살았던 마산은
시인이 떠남으로써 그 숨을 다했다
무학산 학봉을 툭툭 건드리고 있는
저 푸르른 하늘이 시인 이선관인가
간장바다 밀물 치고 썰물 지는
저 검은 물결이 마산인가
아니다 아니다 다 아니다
저 끝없는 허공을 떠도는 뭉게구름은
시인 이선관도 마산도 아니다
이제 시인이 그토록 사랑했던
마산이란 이름은 그 어디에도 없다
먼 훗날 우리 모두 죽어
저승에 간다면
시인 이선관이란 이름표와
마산이란 이름표를 찾을 수 있을까
그때 더 이상 삶도 죽음도 없는

영결식에서 낭송된 시인 이소리의 추모시다.
이선관 시인은 그렇게 ‘마산의 보물’로 부르는데 누구도 하자가 없을 예향 마산에 큰 족적을 남긴 시인이었다. 

경남 문화예술인 망년회 열어주고 떠난 고인

▲생전의 故 이선관 시인
지난해 12월 11일, ‘향토 시인 이선관이 마산의료원에서 치료중인데 건강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경남도민일보를 보았다. 필자에게는 각별했던 어른, 헌데 세상살이가 아무리 각박하기로서니 투병중인 줄도 몰랐다니 이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다. 하루 빨리 병문안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만 하고는 또 다시 일상에 젖었다. 그런데 바로 이튿날 경남도민일보는 이선관 시인의 부고를 알렸다. 그때의 자괴감이라니, 황망히 마산으로 향했다.
마산의료원 영안실에는 많은 이들이 모여 고인을 추모하고 있었다. 경남 도지사와 마산 시장, 시민사회단체, 전교조, 민주노총 관계자들이 다녀갔다. 특히 한 지역에 살면서도 예술에 대한 관점 차이로 서로 소원하게 지내온 예총과 민예총 인사들도 한 자리에 모였다. 누군가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 선생님이 진짜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 한 자리에 불러 망년회 시켜놓고 가셨네”라고 했다. 모두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마도 고인은 이 시대의 화두인 양극화(여기서는 대립적 관계를 칭함), 그 중에서도 문화계 양극화가 지역 문화계에서나마 다소 해소되길 바랐던 건 아닐까.
고인은 생전에 무엇, 무엇으로 나누지 않았다. 예총과 민예총, 장애우와 비장애우, 진보와 보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따위의 경계를 두지 않았다. 그 정도 되면 집단성이 강한 우리네 풍토를 보자면 어느 한쪽에서 비난도 있으련만 이선관 선생을 두고서는 일체 그런 말들이 나오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선관 선생의 영결식은 예총과 민예총, 문화계 인사 모두가 참여한 ‘경남문화예술인장’ 으로 치러졌다.     
아래 시가 그의 인생을 관통한 이념이 아니었을까. 

살이 살과 닿는다는 것은
살과 살이 닿는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가령
손녀가 할아버지 등을 긁어 준다던지
갓난애가 어머니의 젖꼭지를 빤다던지
할머니가 손자 엉덩이를 툭툭 친다든지
지어미가 지아비의 발을 씻어 준다던지
사랑하는 연인끼리 입맞춤을 한다던지
이쪽 사람과 위쪽 사람이
악수를 오래도록 한다던지
아니 영원히 언제까지나 한다든지, 어찌됐던
살과 살이 닿는 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이선관 시인은 영결식이 끝난 뒤 생전에 ‘창동 허새비’로 불리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녔던 마산 창동 4거리, 태어난 집, 마지막까지 살았던 추산동 집을 둘러본 후 자신의 바람대로 ‘화장’ 된 후 영생원에 앉으셨다.    
 
장애 그리고 시대에 저항한 시인의 길    

 
故 이선관 시인은 1942년 경남 마산에서 건강한 남자 아이로 태어났다. 하지만 한 살 무렵 약을 잘못 먹어 죽음의 문턱을 오간다. 부모는 ‘이미 죽은 줄 알았지만 어린 것이 원이나 없게 하자’며 병원에 데리고 갔다고 한다. 그런데 병원에 가자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숨을 쉬더란다. “소생할 가망이 없다가 / 다시 깨어난 저는 / 자라면서부터 / 목을 잘 가누지 못했고 / 말을 잘 하지 못했고 / 걸음을 잘 걷지 못했지요.”-어머니. 3
뇌성마비 2급, 이때부터 어눌한 말 평생 갈지자 걸음의 지난한 삶을 살게 된다. “아버지가 극장에서 일하시는 덕으로/ 시내 극장이란 극장은 죄다 돌아다니면서/ 오직 영화 보는 데만 소년시절을 보내었습니다/ 왜 영화보기를 좋아했냐 하면/ 몇 시간 동안/ 제 몸이 남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어머니.4 
그렇게 청소년 시절을 보낸 그는 대학에 진학했지만 곧 그만 두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나자 고갈비(고등어구이)집을 냈고 그 가게는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 구실도 하게 된다. 그 후 이혼과 함께 정신적 고통을 겪던 그는 간이 좋지 않아 의사로부터 비관적인 진단을 받기까지 하지만 “내 곁에 시가 없었더라면 나는 벌써 죽었을 거야”라는 그의 말처럼 시와 더불어 평생을 보냈다.  
세상에 나온 그의 첫 작품은 1971년, <씨알의 소리> 10호에 실린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을 비꼰 ‘애국자’란 시다.

빛이
어둠을 사르는
새벽이었다.
문틈에선가
창틈에선가
벽틈에선가
나의 침실 깊숙이 파고드는
동포여 !
하는 소리에 매력을 느끼다가
다시 한 번 귀 기울여 들어보니
똥퍼여 ?
라는 소리라
나는 두 번째 깊은 잠에 취해버렸다.  -애국자

서슬 시퍼렇던 군부독재시절이라 이 시를 받아 든 씨알의 소리 편집진은 잘못하면 폐간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라 함석헌, 장준하씨와 의논 한 후 게재하게 된다. (경기도 가평 두밀리 자연학교 채규철 박사 전언). 그 후 이 시로 인하여 이선관 시인이 고초를 겪었음은 물론이다. 아래의 시 한편으로 그가 엄혹했던 70-80년대를 어떻게 넘어왔는지 알 수 있다.

저항

끓는 물에
조개를 넣으면
아가리를 벌리듯
내 가장 아끼는
선배 한 분이
그렇게 살아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첫 시집 ‘기형의 노래’와 ‘인간선언’을 연달아 출판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나아가 자신의 장애를 통하여 사회적 모순, 민족적 장애, 환경적 장애를 성찰한 시인은 주로 참여시를 쓰며 활발한 문학 활동을 펼친다.
오염되는 마산 앞바다를 보며 우리나라 최초의 환경 시로 평가받는 ‘독수대’ 연작 등 환경파괴의 위험을 일치감치 경고하며 환경운동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동기를 부여하기도 했다.
엄혹한 군부독재 시절 민주주의를 주창하고 환경파괴를 경고하던 시인의 문학세계는 더 넓고 깊어져 남북통일 문제, 노동자 문제 등 사회 전반적인 모순에 대해 노래한다.
그렇게 살아온 고 이선관 시인은 <기형의 노래>를 필두로 <인간선언> <독수대> <보통시민> <나는 시인인가> <살이 살과 닿는다는 것은> <창동 허새비의 꿈> <지구촌에 주인은 없다> <우리는 오늘 그대 곁으로 간다> <배추 흰나비를 보았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손에는> <어머니>, 시집 12권을 남겼다. 그리고 13번 째 시집 <나무들은 말한다> 출간을 앞두고 병마에 지고 말았다. 이런 그에게 <불교문화상> <녹색문화상> <통일문학공로상> <교보환경문화상> 등이 주어졌다.

좋은 세월이 오면 나도 서정시를 쓰고 싶다
출간을 못 한 고인의 미 발표작 시들 중에 ‘흙으로 돌아가기 위한’이란 시 한편을 발견했다. 자신의 운명을 예견이라도 했던 걸까.  


흙으로 돌아가기 위한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되면
키도 작아지고
몸무게도 가벼워지는 걸까
그것은 아마
자연에 빨리 귀의하려는
귀소본능이 발휘되어
그렇게 되는 것일 게다
흙에서 나왔기에 흙으로 돌아가기 위한

그란 한편으로 미 발표작 중에 눈길을 끄는 시가 또 하나 있으니  ‘이제 나도 서정시를 쓰고 싶다’ 이다. 고인은 ‘좋은 세상이 오면 누구나 읽어 행복한 서정시’를 쓰고 싶다 했다. 그러니 이제 남북이 하나 된 세상, 개발보다 환경이 먼저 인 인간중심 세상, 천형으로 안고 살았던 장애해방을 앞당겨 고인이 천상병 시인과 더불어 천상에서 서정시를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들의 몫으로 남았다. 

글 한관호(전 남해신문 대표)
사진 함께걸음 자료사진(1997년 12월호)

 

작성자한관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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