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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우생활탐험]김영만의 결혼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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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른다섯살 청각장애우 김영만씨의 결혼을 통해 우리 시대 한 장애우가 넘어갔던 굴곡 많은 삶의 풍속도 "결혼"의 겉과 속을 들여다 본다.

<배우자 구함>
 지난해 8월 말 한겨레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혼광고가 실렸다.
배우자 구함
·진실한 분을 만나 민주적 가정을 이루고 싶습니다.
·35세, (남) 청각장애
·월수 250만원 보석가공업
연락전화 : 587-****
 장애우로서는 드물게 보는 대담한(?) 공개구혼장이었다.
 광고를 낸 김영만(가명·본인의 요구로 부득이 가명을 쓸 수 밖에 없었다)씨는 두 살 때 홍역을 앓고 심하게 열이 나면서 그때부터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청각장애우가 되었으며 간신히 일반중학교만을 마친 뒤 기술훈련원에 들어가 보석세공일을 배웠으며 현재는 일급기능사 자격증을 가진 보석세공사로 일터와 집 밖에는 모를 정도로 "평범한" 사람이다.

 "신문광고요? 실패했어요."
 지난 1월 10일 김씨의 결혼까지 사실상 이번 작전을 진두지휘(?)한 이미옥씨(김영만씨의 제수)가 당시 8만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한겨레 신문을 택한 이유는 이 신문이 "순수한 사람들이 보는 신문"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막상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은 이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조금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광고가 나간 뒤 이미옥씨는 약10여통의 전화를 받았는데 전화를 했던 사람들은 거의다 "학부"출신 이었으며 대부분 "집이 있느냐" "어디까지 배웠느냐" "키는 몇이냐" "몇째 아들이냐" "전혀 안 들리냐"하고 물었다. 그리고는 "전혀 안 들리기 때문에 말도 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선 "알겠어요" 하면서 전화를 끊곤 했다.
 한번은 모여자대학 출신이라는 여자가 전화를 걸어 자신은 "83학번인데 한번 이혼했다고"고 말했는데 이미옥씨에게는 그말이 "상처를 달래기 위해 나보다 훨씬 못한 장애우와 살아주겠다"는 식으로 들렸다.
 어떤 사람은 그냥 전화해서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서 전화를 했다며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고 말하고는 끊기도 했다.
 또 한 사람은 수원 근처의 장애우 공동체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출신의 아가씨였는데 자신이 하고 있는 "봉사"일을 같이해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에 대해 김영만씨는 "지금 내가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무슨 소리냐"는 말을 해이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이처럼 신문을 보고 김영만씨와 결혼을 하겠다고 전화를 했던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뭔가 사연이 있거나 "봉사광"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희생양"에서 "골칫덩이"로>
 김영만씨는 4남 3년의 둘째 아들로 2살 때 홍역을 앓은 뒤부터 소리의 세계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특수교육의 "특"자도 알 수 없는 일반 중학교를 마친 뒤 보석가공일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수입으로 집안을 꾸려나갔던 사실상의 가장이었다. 그러나 동생들이 나이가 차면서 자신을 "앞서가기" 시작하자 "희생"을 강조하며 짜증을 부리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아주버님의 변화와 앞날을 걱정하던 동생 부부는 김씨의 결혼작전을 본격적으로 준비했으며 신문광고는 그 작전의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미옥씨가 시아주버님인 김영만씨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약속을 하면서 부터였다. 결혼 날짜를 잡는 과정에서 남편이 "형이 장애잔데"하고 말해 처음 알게 했으며 이들 부부는 김씨의 "먼저가라"는 양보(?)로 결혼식을 올리고 한 지붕 살림을 시작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알음알음으로 몇차례 중매가 들어오기는 했지만(물론 대부분 장애우이었다) "청각장애우는 안 된다"는 김영만씨의 결혼관과 자신의 아들을 며느리가될 장애우 처녀에 비해 "아깝게"생각하는 어머니의 까다로움으로 얘기도 꺼내기 전에 깨지곤 했다. 한번은 양품점을 경영하는 척추장애 아가씨와 맞선을 봤는데 고등학교도 마치고 얼굴도 예쁘장해 김씨의 부모들도 모처럼 맘에 들어했다.

더욱이 그 집안에서는 그 처녀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서 아파트까지 사주겠다고 제의했는데도 김영만씨가 죽어도 싫다고 우겨 결국 이 혼담도 깨지고 말았다. 그 다음에는 간질을 앓는 처녀였었는데 이번에는 김씨의 어머니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리고 김영만씨에게 결혼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가져다 준 사건이 일어난다. 88년 가을 평소 김영만씨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던 금방 아주머니가 자신의 가게에서 일하는 아가씨를 소개해 줘 김씨는 모처럼 마음에 드는 아가씨와 사귈 수 있었다. 그 아가씨도 김씨의 듬직하고 성실한 태도를 좋아해 집에도 여러차례 찾아왔으며 심지어 "부모님은 내가 모시겠다"는 말까지 해 김씨 집에서는 거의 "며느리"로 여길정도였다. 그런데 두 사람의 사랑이 무르익어 갈 즈음 이 사실을 알게 된 여자측 집에서 그것도 부모도 아닌 이모와 이모부가 그 처녀를 감금하고 강제로 다른 사람에게 결혼시켜 아이까지 낳았던 것이다. 이 사건이 있은 뒤 김영만씨는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며 일 손을 놓고 한동안 방황을 했으며 이때 입은 상처로 "맞선" 자리에 쉽사리 나서려 하지 않았다.

<기나긴 항해 그리고…>
 하지만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버린 큰 형 대신 칠십대의 노부모를 모셔야 하는 이미옥씨 부부는 해가 지나갈수록 더욱 암담해지고 어려워지는 김영만씨의 앞날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김영만씨는 마침내 "물건"까지 작전의 범위를 넓혔다. 당시 서울근교에는 중국에서 건너온 많은 중국동포들이 식당이나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관광비자로 들어온 "불법체류자"들이기 때문에 언제 강제추방당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따라서 정당한 법적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서울 사위"를 얻으려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김영만씨는 안산의 한 식당에서 일하는 중국동포를 소개 받았는데 이들 부부 역시 중국에 두고온 딸을 서울 총각에게 결혼시키고 싶어했다. 연변에서 왔다는 두 부부도 "이만하면 됐다"며 김영만씨를 흡족하게 생각해 서로 사진도주고 받았는데 중국에서는 자녀들의 결혼에 대한 결정권이 부모에게 있어 보통 "부모가 가라고 하면 그대로 따른다"는 말만 믿고 초청장을 만들기 위해 출입국관리소를 드나드는 등 다시 한번 부산을 떨어야 했다. 그러나 스물 셋인가 넷인가 하는 이 연변 처녀는 "고향을 떠나기 싫고 서울 생활이 두렵다"며 부모의 명령을 거역하는 바람에 다시 한번 헛물을 켜야 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안 된다고 깨달은 김영만씨는 마침내 장애우 전문 결혼 상담소의 문을 두드렸다. 91년 가을 명동 성당에 있는 장애우 결혼상담소를 찾은 김영만씨는 입회비 5천원과 함께 신상명세서, 주민등록등본, 사진 등을 내고 그곳 상담원에게 시시콜콜한 집안얘기까지(물론 이미옥씨가 대신)했다.
 "청각장애우는 싫다"는 김영만씨의 요구에 상담원은 "그럼 목발을 짚어도 되겠느냐"하고 물어봤는데 김씨는 즉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머니께 물어봐야 한다"고 결정을 떠넘겼다. 김씨의 어머니는 "목발" 운운하는 얘기를 듣자마자 노발대발하면서 신청 자체를 당장 취소해버렸다. 또 밀알선교단과 삼육재활원에 있는 이미옥씨의 친구에게까지 부탁을 했지만 한결같이 "남자만 몇백명 밀려있는 실정"이라거나 "여자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맥빠진 얘기를 들을 뿐이었다. 혹시나 하고 "미혼모의 집"까지 전화를 해보기도 했지만 이들 대부분이 십대일 뿐 아니라 "아무리 결혼하기가 어렵다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들어서 그만 두고 말았다.
 이처럼 결혼으로 가는 모든 길이 막혀버리고 말자 이미옥씨는 마침내 김영만씨 일에서 손을 떼고야 말았다.

<"장애자 취급 안해요">
 지난해 가을 신문광고로도 짝을 찾지 못해 이렇게 또 한해를 그냥 넘기나 보다 하고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노처녀 구혼광고"라도 없나하고 신문을 뒤지던 이미옥씨 눈에 문득 결혼상담소 광고가 눈에 띄였다. 그래서 즉시 전화를 돌린 것이 "전통과 성실"을 신조로 내세우는 반포의 모 결혼상담소. 그러나 그 상담소는 "장애잔데요"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장애자는 취급안해요"라고 딱 잘라서 거절했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상담소 직원은 장애자를 취급하면 자신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과 신뢰"에 흠이 간다고 대답했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이미옥씨는 제기동에 있는 "십팔년 전통"의 모 결혼상담소로 전화를 했는데 뜻 밖에도 거기서는 너무도 흔쾌하게 "여자들이 많이 있으니 한번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혼이 성사될 때까지 필요한 법적 추진비용이라는 팔만원을 들고 부랴부랴 찾아간 상담소는 진한 화장을 한 중년의 두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한 쪽에서는 화투판을 벌이고 있어 "십팔년 전통"이라는 말과는 달리 어딘지 허술하고 이상한 분위기 였다.

"교회 집사고 전직 교사출신"이라고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은 오십대 중반의 상담소장은 자신들은 "있는 그대로" 얘기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한번도 항의를 받아 본적이 없다고 자랑을 하면서 결혼이 성사되면 양쪽에서 백만원씩을 사례비로 내야 한다고 말했다. 신청을 만친 다음날 바로 "눈이 약간 사신데 만나 보겠느냐" 해서 이미옥씨는 당시 결혼 시즌이기 때문에 밤새워 반지를 깎아도 모자를 정도로 바쁜 김영만씨와 함께 상담소 아래 지하다방으로 나갔다. 그러나 "곧 온다"던 여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옥씨가 화낼 새도 없이 나타나지 않은 여자에게 "이년 저년"욕을 해대던 상담소장은 즉석에서 "아파트도 있는" 다른 여자의 전화번호를 적어주면서 그리로 전화를 하라고 했다. 부들부들 속이 끓어오른 이미옥씨는 상담소 소장을 곁에 앉혀 놓고 그 자리에서 전화를 해 다짜고짜 "만날 사람이 청각장애자라는 걸 아느냐"고 물었더니 상담소장은 갑자기 밖으로 휙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전화 저편에서는 김영만씨를 "종로삼가에 보석상을 하고 아파트도 한 채 있는 서른 일곱 살의 건실한 청년"으로 알고 있었다. 이미옥씨는 "이런 식으로 속이면서까지 할 수는 없으니까 됐다"고 전화기를 내려놓으려는 순간 저편 여자는 "그래도 한번 보자"고 뜻밖의 요구를 했다.

<결혼 그리고…>
 "인정이 많고, 성실하고, 집안에서는 책임도 없고, 부모는 우리내외가 모신다"등등 어떻게 하면 잘 보일까하고 마구 떠들어대는 이미옥씨의 얘기를 듣고 있던 그 아가씨는 간단하게 "나만을 아껴주는 사람이면 결혼하겠다"고 말하고는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또 "퇴짜"를 맞았다는 생각에 속이 상해 결혼상담소에 전화를 걸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애자를 그렇게 등처 먹을 수 있느냐"고 따졌지만 상담소장은 "비웃지 말라"며 오히려 큰 소리를 치기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벼룩시장"에 내볼까하던 참에 뜻밖에 퇴짜를 맞았다고 생각했던 그 집에서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부랴부랴 나간 자리에서 그쪽 사람들은 김영만씨에게 "처음 본 사람같지 않다" "듬직해서 좋다"는 칭찬을 해 김씨와 가족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이야기 끝에 슬쩍 지나가는 말로 "얘가 약간 어지럼증이 있다"고 했는데 아무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고 지나갔지만 이미옥씨는 자신도 모르게 퍼뜩 "간질"을 떠올렸다. 이미옥씨의 고민 속에서 혼담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어느덧 결혼 날짜까지 잡게 됐는데 이날 신부측 오빠가 "속이고 갈 수도 있지만 말을 하겠다"며 "신부될 사람이 고등학교때부터 쓰러지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그 점이 용납이 되면 날짜를 잡자"고 요구했다. 김영만씨와 김씨의 부모가 "쓰러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모르고 있었을 뿐 아니라 동생부부의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절박한 마음은 그전 같으면 당연히 "없었던 일"이 될뻔한 혼담을 성사시켜 마침내  "날"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 1월 10일 서른여섯 노총각 김영만씨의 파란만장했던 "결혼작전"도 그 막을 내렸다. 김영만씨는 결혼식 날까지 과로와 긴장으로 두 번을 "쓰러졌던"신부의 병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으나 제주도에서 찍은 그들의 결혼사진을 본 주위 사람들은 "참 잘어울리는 한쌍"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평생의 짐"을 나눠지고>
"장애자들이 결혼하는 과정이 이렇게 힘들 줄은 정말 몰랐어요 차라리 방관하고 가만히 있었으면 될텐데 내가 괜히 일을 저질렀구나하고 생각했던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어여." 이미옥씨는 이전에 자신도 똑같은 과정(김영만씨의 동생인 이미옥씨의 남편 역시 군에서 사고로 왼쪽 손을 잃었다)을 겪었으면서도 그동안의 일이 너무도 힘들고 고통스러워 다시 생각해 보기조차 싫다고 진저리를 쳤다. 이씨 역시 대학시절에 만난 지금의 남편이 군에서 손을 다치고 장애우가 되자 집안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으나 "자신의 부족한 곳을 넉넉히 채워주는" 남편의 존재는 집안의 반대보다 훨씬 소중한 것이었다. "장애가 결혼생활을 하는 데 직접적으로 힘드는 일은 없는데 "평생의 짐"이라는 생각은 들어요." 이미옥씨는 맞선을 퇴짜놓고 돌아와 자신의 손을 내밀면서 내뱉었던 시어머니의 비수같은 말 한마디를 잊을 수가 없다. "여기가 이렇게 없는 데 징그러워서 못보겠다라 야"

글/전홍윤

 

인터뷰
<장애우 자신의 주체적 결정이 앞서야>
밀알선교단 결혼상담소 간사 주정옥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지금까지의 결혼관, 가치관을 바꿔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다른 곳을 통하더라도 여기서의 경험을 통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밀알선교단에서 2년째 장애우 결혼 상담을 하고 있는 주정옥 간사(45)는 지금까지 상담을 하면서 중요한 점으로 "결혼관과 가치관의 정립"을 꼽았다. "중매의 특성이 조건과 조건의 만남인 이상 장애우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개중에는 주정옥씨가 "내 생전에 처음 만나본 여자"라고 할 정도로 딴 세상 사람(?)도 있었다.
 장애우의 사회참여가 활발해 지면서 결혼에 대한 욕구 역시 크게 늘어나고 있음에도 "나보다 장애가 가벼운 사람"만을 원하는 장애우들의 결혼관과 "당장 눈에 뛰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아 시급한 장애우의 결혼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정부와 관련기관들의 무성의" 때문에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주정옥씨는 두사람 모두 장애우로 교통사고와 성격차이 등으로 갈등으로 겪었으나 2년 가까운 긴 상담기간을 거쳐 오는 3월 결혼을 하게 된 장애우 커플을 보면서 자신의 "일"과 그 일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들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수줍게 웃었다.

장애우 결혼 상담소 현황
 현재 장애우의 결혼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는 기관이나 단체는 전국에 10여곳이 채 안될 정도로 절대적으로 부족한 형편이다. 이중 현재 장애우 결혼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곳은 다음과 같다.

푸른하늘 가족모임
 올해로 10년째 맞선대회를 열고 있는 대표적인 민간결혼상담단체로 지금까지 약 470여쌍의 결혼을 성사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모임은 원래 "내일은 푸른하늘"이라는 장애 관련 방송에 출연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친목단체였으나 이 프로그램의 성공으로 현재는 장애우 맞선의 대표적인 기관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 단체에서는 4월에 이틀간 약 50여쌍의 신청자를 모아 이틀간 일대일 합동맞선을 갖는 것을 비롯 가을에는 집단맞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이와는 별도로 연중 맞선을 주선해 주고 있다고 한다.
 연락처) 851-5854 이종응 회장

청음회관
 연중 계속 결혼상담을 하고 있으며 언어소통 등의 문제 때문에 주로 청각장애우 위주로 프로그램을 진행해왔으나 올해부터는 다른 결혼상담기관단체와 연계해 참여의 폭을 넓힐 계획이다. 연락처) 556-3493 노연숙

한국밀알선교단
 1988년 기관지 밀알보를 통해 지상주매코너를 운영해왔으며1989년부터 한해에 세 번 "만나는 날"이라는 대화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 부설 기관인 "결혼상담소"를 설치해 단순히 사람을 소개를 해주는데 그치지 않고 결혼 이후의 문제에 대해서도 계속적으로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연락처) 567-4070 주정옥 간사

가톨릭 장애인사회복지협의회
 3년전부터 장애우 결혼상담을 하고 있으며 1년에 한차례 1박2일 캠프를 갖는 것을 비롯 지난해부터 10여명 이내의 모음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연락처) 777-4517 지 요세피나

Y W C A
 전문적으로 장애우 결혼상담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매월 마지막주 월요일 오후 6시30분에 서울 YWCA 강당에서 "만남의 광장"을 열고 있다.
연락처) 779-7561 오경애

 이밖에 지방에서는 대구·경북지역에서 장애우 결혼상담을 하고 있는 산재 장애우들의 모임인 "청실홍실"과 "장애인봉사협회" 두 곳을 비롯 몇군데가 더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나 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락처) 청실홍실 : 053-985-0131
장애인봉사협회 : 053-767-6392


작성자전홍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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