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사람에게는 눈물을, 없는 사람에게는 희망을 > 세상, 한 걸음


가진 사람에게는 눈물을, 없는 사람에게는 희망을

소설가 공선옥 씨

본문

여성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모성을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표현해 내는 공선옥(38, 소설가) 씨, 등단 10년째를 맞고 있는 그녀를 전라남도 여수의 해안가에서 만나보았다. 그녀의 삶과 소설속에 녹아들어 있는 구수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수년 전, 여수행 기차를 탔었다. 대입을 마치고 난 겨울, 목표가 사라진 휑한 마음에 친구들과 탄 기차였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서울역에서 가장 먼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땐 여수가 서울에서 제일 먼 줄 알았다. 그 때 여수는 우리에게 김승옥 소설

<무진기행>속의 무진과 같은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부산의 번화함도, 광주의 아픔도 아닌, 뿌연 안개와 같은 곳, 서울에서 가장 먼 곳 그리하여 일상에서 가장 멀리 벗어날 수 있는 곳. 돌아오는 밤차, 누군가 한번도 입술에 바르지 않은 립스틱을 꺼내어 차창에 서로의 축복을 빌어주는 글귀를 적었었다. 스무 살 이전이었기에 가능했던 까무룩한 시간들. 어쩌면 기자는 그녀만큼이나 여수를 보고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주일전에 잡아놓은 약속시간만을 믿고 무작정 여수로 내려갔던 탓일까? 기자가 여수에 도착했을 무렵 공선옥(38, 소설가) 씨는 춘천발 서울행 열차에서 내려 서울역에서 다시 여수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고 있었단다. 그녀 소설처럼 인생은 늘 엇갈리는 법, 그렇게 그녀를 기다린지 만 하루만에 가까스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식사 했어요? 아침 안 먹었으면 순대국 먹을까? 우리 애 유치원 데려다주고 버스타고 오니까 시간에 좀 늦었네요. 사실 우리집에서 여수역이 끝에서 끝이거든.”

오랫동안 알고 지낸 언니처럼 반색을 표하는 그녀를 따라 선착장 부근의 횟집으로 들어섰다. 어서 먹으라며 한사코 음식을 권하는 그녀의 모습이 천상 엄마같다.


모성이란 사회적 약자를 품는 돌봄의 힘


그녀 소설 속의 어머니는 늘 상처받은 존재로 묘사된다. 떠나버린 남편과 닥쳐오는 가난, 주렁주렁 달린 아이들까지, 우리네 전형적인 어머니상을 연상시키는 그네들은 억척스럽기는 하되 자신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을 끔찍히 여기지만 때로는 밤늦도록 술을 마시느라 아이를 방치하기도 하고, 아이들을 두고 나와서는 도시의 거리를 배회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녀 소설 속 등장인물의 끔찍한 모성에 기가 질려버리다가도 방황하는 어미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모성이라는 건 단순히 어미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적 약자를 품에 안으려는 무조건적인 애정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건 본능일 뿐만 아니라 아주 신적이고 고귀한 영역이죠.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위한 희생을 받아들이는 거니까요.”

종종 그녀의 소설을 읽으며 소설 속 어머니들의 질긴 모성에 화가 나기도 했더랬다. 여성은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지 답답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식 가진 어머니에게 자기 자식 사랑하라는 모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말하는 모성성은 여성성으로서의 모성성이 아니라 인간성으로서의 모성성인 것이다. 세상 모든 작고 여린 것들을 향한 넉넉한 품, 그녀는 우리 모두에게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문제는 사회적으로 이 모성이 보호받고 있지 못한다는 거죠. 애 버리는 엄마들, 나쁘죠. 하지만 그 엄마들이 애를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게끔 하는 건 뭘까요? 책임을 망각하고 있는 이 땅의 많은 아버지들, 잘못된 제도와 편견, 사회적 무관심 그런 거 아닐까요? 그럼 이런 문제들은 왜 생길까요? 예전에도 장애우, 어린이, 노인, 이런 사회적 약자들은 다 있었어요. 근데 그때는 한 마을에서 대충 이 사람들을 다 거두는 분위기였거든. 암묵적으로 사회적 모성이 존중을 받았던 거지. 하지만 예전의 문화가 돌봄의 문화였다면, 지금의 문화는 맡기는 문화, 수용하고 격리하는 문화라고 할 수 있어요. 보세요. 아이들을 학교에 맡기고, 장난감에 맡기고, 노인들은 노인정에 맡기고, 장애우는 시설에 맡기죠. 돌봄의 문화 속에는 책임이란 게 있지만 맡기는 문화에서는 책임이란 게 없죠. 서로 떠넘기기 바쁘니까요. 그러다보니 이 관계 속에는 필연적으로 ‘돈’이 개입되어 있지. 결국 지금의 모성의 부재는 잘못된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아버지가 낳은 어쩔 수 없는 결과인지도 몰라요.”


즉, 그녀의 소설 속에 어미들은 약자들을 마음놓고 사랑할 수 없는 못된 아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어머니인 것이다. 그래도 어찌하랴, 어머니는 그 사랑만큼은 내어놓을 수가 없어 괴롭다. 그 눈물겨운 애정을 차마 저버리지 못하는 그녀는 말한다.


“죄 없는 저 어린것들을 누가 미워할 수 있단 말인가. 저 어린것들은 추위와 배고픔과 슬픔 속에 빠뜨려놓고 누가 마음 편할 수 있단 말인가.”


「수수밭으로 오세요 」

공선옥 /여성신문사 펴냄 중에서


이 땅의 지식인, 그들의 소명은 무엇인가


우리 나라의 굵직한 문학상 중에 하나인 동인 문학상, 올해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그 문학상의 후보작에 공선옥 씨의 작품도 끼어 있었다. 5000만원의 상금 - 가난한 작가들에게 이보다 더 현실적인 유혹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그녀는 과감하게 그 유혹을 뿌리쳤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경우없는 집안에서 주는 건 받지 않겠다. 뭐, 그런거죠. 사실 문제는 내가 그 상을 거부한 이후인데, 수상 거부 의사를 밝히고 나서도 신문에 내 작품이 후보작인걸로 두 번이나 나갔단 말이지. 재차 항의를 하니까 그제야 이름이 빠졌는데, 그 이후에는 내가 수상을 거부했다는 아무런 지면상에 발표도 없이 그냥 유야무야 넘어간 거야. 이건 정치적인 거라기 보다 뭐랄까, 작가로서의 자존심 문제라고 할 수 있어요. 작가의 선택을 존중하던지 뭔가 실수가 있었으면 실수를 인정하고 언론의 기능을 다 하던지 해야되는 거 아니겠어요?”

사실 조선일보의 논조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지식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면으로 그들의 잘못을 꼬집어 주는 지식인이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당대의 현실을 작품에 반영하는 소명을 지닌 작가들조차 고개를 돌려 현실을 외면해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못내 서운한가보다. 지식인에 대한 이러한 비판의식은 그녀의 이번 소설

<수수밭으로 오세요> 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녀 소설 속 필순이 가난할 수 밖에 없는 여성이었다면, 이섭은 가난을 선택한 소위 진보적 지식인으로 등장한다. 가난을 선택한다는 것은 실은 가난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가능한 일. 그래서일까 소설 속 이섭은 가난한 필순의 무대책의 모성에 혀를 내두르며 그녀를 떠난다.

“이런 말이 있죠. 돕는다는 것은 비오는 날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것이다. 저는 이 말이 이 시대 지식인이 해야할 소명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 땅의 지식인들은 이상하게도 우산을 씌워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고나 할까요? 사실 우산을 던져버리고 함께 비를 맞는 것. 그것이 가장 민중에게 가까이가는 것, 아니 민중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중이 되지 않고 민중을 위한다는 건 사실 위선이죠.”

그렇게 까지 하기에는 지식인이 얻을 수 있는 보상이 너무 적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변화가 바로 보상이죠. 지식인은 거름이 되는 거에요. 거름을 통해 땅은 변화하고 그렇게 열매를 맺는 거 아니겠어요? 거름에게는 땅이 기름져지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되는 것, 그것이 보상이죠. 그 이상이 있겠어요?”


문학이 희망이 되는 세상을 기대하며


“요새 간판들이 어지럽고 지저분하다고 말들이 많데요. 우리도 유럽처럼 품위 있는 거리를 만들어보자 뭐 그러던데 서울의 청담동인가 하던 데는 또 실제로 그렇게 꾸며지기도 했답디다. 근데 거리가 지저분하다고 아우성들 치기 전에 왜 그렇게 간판들로 요란스럽게 치장을 해야만 할까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적이 있을까요? 누가 깨끗하면 좋은 거 모릅니까? 이 불황에 그렇게라도 안 하면 먹고 살 수가 없으니 그러지 않겠어요? 저는 그곳에 진정한 삶이 숨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치열한 삶이 있는 어지러운 간판의 거리에 서 있을 겁니다. 청담동이 그들의 거리라면 이곳은 나의 거리에요.”

그렇다. 요란스러운 간판 너머에는 가난한 그들이 있다. 그곳에는 초라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진실이 있고 가난한 그들이 되어 그 초라한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 작가의 소명이 아니겠느냐고 그녀는 되묻는다.

“가진 사람에게는 눈물을, 없는 사람에게는 희망을 주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어요. 사실 세상을 바꾸는 사람은 지식인도 아니고, 돈 많은 사람은 사람도 아니고 지금도 고통받고 있는 그들, 그들입니다.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소설, 이것이 제가 하고싶은 문학입니다.”


낯선 도시에서 세 아이를 키우는 그녀, 또 그 아이를 키우는 마음으로 소설을 쓰는 이 사람 공선옥. 바닷가 선착장에서 오물로 더러워진 바닷물을 보고 그녀가 한마디한다.

“여그 바닷물이 더러워, 배가 들고 나는 데라 그래, 배가 들락날락 거리면 물이 더러워지지, 암.”

한데 이상하게도 더러운 바닷물을 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짙은 애정이 드리워져 있다. 인간사 어디 다 깨끗할 수만 있겠냐마는 그래도 사는 건 다 귀하지 않겠냐는 듯, 그 더러운 바닷물이 실은 우리네 고단한 삶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겠냐는 듯. 바다를 보는 그녀의 눈이 깊고도 푸르다.


수년전의 여수가 기자에게 뿌연 안개 속의 도시로 기억되었다면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목, 이제 여수는 칼칼한 생의 자락으로 다가왔다. 어미로, 여성으로, 글 아는 자로 살아가는 그녀의 삶과 소설이 척박한 땅에 기름진 거름이 되어줄 것을 기대해 본다.


“아이들에게 눈물을 보이는 게 쑥쓰러워 나는 그만 자운영꽃 무더기 속에 내 얼굴을 콕 묻어버렸습니다. 나 죽어 이 세상에 없어지면, 그때 우리 아이들도 자운영꽃밭에 얼굴을 묻고 제 아이들 몰래 울까 모르겠습니다. 제 엄마 자운영꽃밭에 얼굴 묻고 울었던 때가 생각나 저희들도 그렇게 울까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제 어미와 함께 놀았던 섬진강가에서의 한때가 못 견디게 그리워서, 그렇게 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운영꽃밭은 예나 지금이나 너무 아름답고 그리고 너무 슬프군요. 슬픔은 때로 저 자운영꽃밭처럼 아름다운 것이기도 한 모양입니다그려.”


「자운영꽃밭에서 나는 울었네 /

공선옥 산문집 / 창착과비평사 펴냄 중에서」


글·사진 박채란 객원기자(rhanair@hanmail.net)


 

작성자박채란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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