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그 남자를 꼭 잡아야돼요”
본문
화려한 호텔건물이 줄지어 있고, 서울의 전경이 제일 잘 보인다는 남산타워가 있고, 국립극장과 이국적인 갤러리들이 줄지어 있는 남산. 봄에는 진달래, 개나리가, 가을에는 은행나무의 노란 칠이 아름다운 남산 길은 그래서 서울을 대표할 수 있는 몇몇 관광코스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연인들의 데이트고스로도 손꼽히는 곳이다.
그 남산 길의 한쪽 편 아래로 계단이 하나 나 있는 줄 기자도 최근에 알았다. 계단이 이어지는 곳에 서 있는 회현시범 아파트, ‘서울 중심지에 이런 곳이 있나’ 싶게 낡은 건물에다 육층이 지상으로는 일층이고 그 아래로는 지하층처럼 되어 있는, 그래서 오층까지는 대낮에도 복도가 컴컴하다.
어둠을 눈에 익혀야 제대로 찾을 수 있는 그곳 2층의 한 가구에 이정남 씨(40)는 혼자 살고 있었다. 어떤 남자로부터 혼인빙자간음을 당했고, 거기다 그 사람에게 오천만원에 달하는 돈은 사기 당했다는 사연을 알고 갔기에 이정남 씨가 살고 있는 그 아파트의 분위기가 더욱 음침해 보였을까.
처음 대할 때는 전혀 다를 사람과 달라 보이지 않지만 이정남 씨는 전혀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우다. 대신 한 번 들으면 잘 잊혀지지 않을 만큼 곱디고운 목소리를 가졌는데, 그것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눈을 잃고 또 모든 걸 잃고 절망 했을때 그나마 남아 있던 그의 자산이었다. 삼 년 전 서른일곱의 나이에 뒤늦게 실명 한 뒤 다시 어둠 속에서의 삶을 살아 내기 위해 그가 배웠던 지압이나 안마 외에 모닝콜, 전화방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목소리 덕택이니까.
그런데 전화방 일을 하다 그에게 가슴을 도려낸 듯한, 아니 두 다리를 강제로 꺾어놓은 듯한, 아니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아픔과 절망의 상처를 안겨준 김석중이라는 사내를 만나게 됐으니 삶 가운데 때때로 입을 벌리고 있는 암울한 수렁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지.
“당신은 이미 실명상태”라는 의사의 선고를 받고
삼 년 전 길을 가다가 교통사고로 차에 튕겨진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떨어졌는데도 그는 사고 당시에는 외상 하나 없었다고 했다. 그래 이런 저런 검사를 하며 일주일 입원했다가 그냥 퇴원을 했었다.
그런데 얼마 후 갑자기 눈이 좀 침침해져 안과를 찾았을 때 의사는 그에게 심각한 목소리로 “당신은 이미 실명상태입니다”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내리는 것이 아니가. 직접 소견서를 써주며 큰 대학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믿기지ㅣ 않는 마음에 얼른 찾아간 그곳에서도 의사는 같은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아니, 선생님 저요, 선생님 가운에 있는 글씨도 다 보이구요. 저 글자들이랑 이 진료실 안에 있는 것들도 다 보이는데 제가 왜 실명이에요?”
그러나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잔영일 뿐이고, 의학적으로 그는 이미 실명상태라고 했다. 곧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얼마나 더 볼 수 있냐고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내일이 될지. 십년이 될지 의사 자신도 알 수 없다고 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은, 믿고 싶지 않은 말들뿐이었지만 얄궂게도 의사 말처럼 하루하루 갈수록 시야가 좁아져왔다.
“아침에 일어나면 시계가 맨 처음 눈에 들어오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바늘이랑 숫자가 점점 희미하게 보여요. 그렇게 시야가 점점 좁아지는 게 무서워서 잠도 잘 못 잤어요. 자고 일어나면 더 안보이니까. 그러다 어느 날 일어났더니 정말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거예요. 하느님한테 글자만 읽을 수 있는 눈을 달라고 얼마나 기도했는데...”
삼 년 전, 그러니까 암흑 속에서 세상을 더듬거리며 살아나가기에는 서른일곱이라는 나이가 너무 늦은 듯해 친구들과 함께 바닷가로 여행을 가서 맛있는 것 많이 먹고, 좋은 곳에서 좋은 친구들과 아낌없이 돈도 쓰고 그리고 죽으리라 했다.
죽음을 생각하니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무용을 전공한 후 어엿하게 무용학원과 카페도 운영했던 좋았던 시절도 있었다. 한 남자의 아내로 불러오는 배를 감싸 안으며 행복해했던 날들.
그러나 그 남자에게 부인과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배신감에 치를 떨며 뒤돌아서면서부터 세상과의 싸움은 시작됐다. 육남매의 맏딸로서 부모님이나 동생들을 볼 낯이 없어 아이만 키워 달라고 맡기고 독립을 한 후 학원과 카페운영도 실패에 돌아가자 지난 십칠 년 동안 자동차영업, 책 세일즈, 군고구마장사까지 하며 악착같이 살아왔었는데...
눈마저 잃게 되자 이제 자신에게 남은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삶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국시각장애복지회에 가서 안마와 지압법을 배우며 열심히 살아가려는 같은 시각장애우들을 만나 힘도 얻었다.
입소 훈련을 마친 후 안마 일거리가 많은 호텔들과 가까운 남산의 이 시영아파트에 월세로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이 년여 밖으로 일을 다녔지만 익숙치 않은 거리를 흰 지팡이로 길을 두드리며 걸어야 하는 바깥 외출이 힘겹지만 했던 그이는 채택근무를 원하게 됐다. 그래서 여러 곳을 문의해 봤지만 목소리를 듣고는 다들 모닝콜이나 전화방 아르바이트를 권했다.
그 때 전화방 아르바이트가 뭔지도 몰라서, 그게 뭐하는 거냐니까 외로운 남자들 상대로 전화로 얘기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전화방 업체에 전화번호를 등록해 두면 남자들이 전화를 걸어오고 그 통화시간은 기계로 집계돼, 한 시간에 삼천 원 정도씩 나중에 그 시간만큼 돈이 통장으로 입금된다는 것이었다.
못할 것도 없겠다 싶어 시작하긴 했는데 언뜻 생각하기에는 쉬울 것 같지만 새벽 여섯시까지 계속해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다 보면 목도 아프고 일년 넘게 하다 보니 이젠 수화기를 갖다 댄 귀부분도 일그러질 정도였다. 그러나 때로 정말 대화를 원하는 외로운 남자들에게 장애우에 대한 얘기도 해주면 나름대로 용기를 주려고 했다.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남겨준 김석중(37)이라는 사람도 지난 해 십일월 처음 그렇게 다가왔다.
“한 세 번인가 통화를 했는데 처음에 김석중 그 사람이 동료한테 빚보증을 잘못 서서 이천만원의 빚을 졌는데 부모님도 안 계신 상황에서 월급도 압류가 들어오고 그러면 직장도 그만 두게 생겼다고, 그런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죽어버리려고 한다고 그래요. 그래서 용기를 내라고, 나이도 젊은데 그 돈이야 어찌됐든 벌어서 갚으면 되지 않느냐, 왜 아까운 목숨을 버리려고 그러느냐고 말렸죠. 제 개인적인 얘기는 아무 손님한테나 잘 안하지만 용기를 더 주려고 나는 눈도 잃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는데 왜 당신은 젊고 눈도 보이는 사람이 그러느냐고 했어요.”
자신에게 처음으로 친절했던 사람
그이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았는지 김석중은 조금은 밝아진 목소리로 이정남 씨를 직접 찾아와서는 진심어린 호의를 보이며 시각장애인복지회에 찾아가 손수 흰 지팡이나 시각장애우용 시계를 구해다 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얘기를 들어보니까 롯데월드라는 번듯한 직장에 십년 정도 다닌, 신원도 확실한 사람이로 독실한 종교인에다 아마추어 산악사진작가로 직장 안팎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더군요. 그런데 빚 때문에 방도 다 빼고 추운데 회사 의무실에서 잠을 잔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살고 있는 집에 방이 하나 남으니까 그냥 그 방 쓰라고 했죠. 나보다 나이도 어린 사람이니까 처음부터 이성적인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같이 사니까 참 좋더라구요. 집에 세금 고지서 같은 우편물이 와도 뭐가 왔는지 알 수도 없고. 혼자 하는 외출은 엄두를 잘 못 내는데 같이 밖에 저를 잘 데리고 나가주고, 사람들 앞에 저랑 같이 가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처음이었어요, 세상천지에 나한테 따뜻한 관심 가져주는 그런 사람.”
서서히 사람의 감정까지 고백하며 결혼하자는 그 남자에게 정남 씨는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 남자는 술을 먹고 들어와 고통스러워하며 자신이 지고 있는 이천만원의 빚만 갚으면 정말 열심히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 남자의 빚 같은 경제적인 문제만 자신이 해결해 나가면 든든한 남편으로 자신에게 계속 이렇게 머물러 주겠구나 싶었던 그는 안타까운 마음에 추운 날 노점상을 하며 모아두었던 돈까지 건네주었다.
그리고 정남 씨는 갖은 정성으로 그 남자를 위해 매일 도시락도 싸고, 김치를 담그고, 돌아가신 그 남자의 부모님을 위해 방안에서 재도 올리고 했다. 조금은 불안했지만 그를 사랑했고 그에게서 자그마한 선물을 받곤 하는 날들이 행복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빚쟁이들의 독촉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이상해서 이전에 건네줬던 돈의 행방을 물으니 이자 갚는데 다 썼고 실은 직장동료를 보증인으로 세워 대출을 받는 적이 있어 빚이 더 있다면 해결하려면 다시 이천만원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그 동안 발걸음을 끊었던 친정집에까지 찾아가 현재 살고 있는 월세 집을 전세로 좀 바꾸려고 한다며 울면서 아버지에게 사정했다. 아버지는 유산조로 주는 것이라며 마지못해 그에게 이천만원을 해주었는데, 그 돈도 고스란히 김석중에게 건네졌다. 때로 급하다고 할 때마다 몇 백만 원씩 쥐어준 돈도 천만 원 가량이 됐다.
그런데 돈 문제만 해결되면 이제 아무 문제가 없을 것만 같던 두 사람의 사이가 평안해지지 않았다. 정남 씨가 알고 있는 김석중의 핸드폰은 알고 봤더니 두 개가 더 있었고 삐삐도 두 개나 됐다. 은행이나 채권자들에게서 빚 독촉 전화도 계속 끊이지 않았다. 퇴직금도 이미 절반 이상 타서 쓴 상태였다. 조금씩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절친하다는 직장 동료 김영일 씨에게 전화를 했더니 사실과 전혀 다르게 정남 씨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같이 살지도 않고 자신을 귀찮게 하는 시각장애우라는 식으로 그 남자가 말해왔던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도 김석중의 자필 각서를 받아낸 것을 보면 정남 씨도 대찬 면이 있다. 김석중이 못미더운 언행을 계속 하자 김석중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정남 씨는 형사들에게 사정을 얘기를 한 후 김석중이 잠자는 동안 파출소에 연락, 김석중에게 혼인빙자간음, 사기죄가 분명히 적시된 각서를 받아내기도 했다. 파출소장은 정남 씨에게 나중에 일이 잘못되면 이 각서를 들고 고소하라고 했다.
이렇게 정남 씨가 단호하게 나오기 시작하여 남자는 결국 짐을 쌌다. 그것도 정남 씨의 앞에서 자신이 찍은 산사진이 담긴 앨범만 중요하든 듯이 들고 나가는 그를 막기 위해 조는 앞에서 가위로 손목을 끊기도 했지만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정남 씨를 두고 그는 가버렸다. 주위 이웃들의 도움으로 정남 씨는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을 건졌지만 소중하게 모아왔던 돈도, 어려움 속에 키워가려 애를 썼던 앞날에 대한 희망도 그 남자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그것이 올해 구월 오일의 일이다.
다행히 받아 놓은 각서 덕에 정남 씨는 혼인빙자간음죄와 사기죄로 그를 고소했고, 현재 기소정지 칠년으로 김석중은 수배상태다.
한때 사랑했지만 이제 정말 나쁜 사람이라고 정남 씨가 김석중을 생각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같은 사무실에서 십년 간 같이 일한 김영일이라는 착한 친구를 상대로도 일억 팔천만 원에 달하는 액수의 사기를 친 것이다.
그러나 김영일이라는 사람은 보증을 서게 해서 대출을 받아낸 친구를 그냥 믿고 각서 같은 증빙서류를 하나도 갖춰놓지 않아 은행에서 압류가 들어와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고, 배신감에 치를 떨며 김영일은 김석중의 누나들이 살고 있는 부여근처에 일가친척을 동원해 잠복을 하며 김석중을 찾고 있다.
“기억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음성뿐”
기소중지 시한, 즉 김석중의 수배기간은 사건발생일로부터 칠년이기 때문에 이천오년 십일월까지다. 따라서 그 기간 동안 김석중이 잡혀야 죄를 물을 수 있다.
그런데 수배가 떨어져도 그 사람만을 전담해서 잡으러 다니는 형사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불심검문에 걸리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라 정남 씨는 얘가 탄다. 자신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가져가 버린 남자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로 구월 한 달 동안은 식음을 전폐하고 슬픔 속에서만 살았다. 김석중이 기거했던 방의 물건들을 하나도 치우지 않고 놔두었듯이 김석중은 아직 섬뜩한 화인으로 그의 가슴에 남아있다.
“왜 하고 많은 사람 중에서도 눈멀고 가진 것 없는 나 같은 여자를 농락했을까. 그 사람이, 세상이 원망스러워요. 실명 선고를 받았을 때도, 겨울에 추위에 떨며 군고구마를 팔았을 때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어요. 그 사람은 그러니까 처음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이제 나한테 나올 돈도 없는 것 같고, 그래서 이용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저를 버린 거예요. 그런데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어요. 기억하는 것은 음성뿐이고, 얼굴도 한 번 본 적이 없으니 앞이 안 보이는 제가 그 사람을 찾아내기란 불가능하잖아요. 이런 내 눈이 처음으로 원망스러워요.”
안정적인 직장까지 있었던 김석중이라는 사람이 왜 그렇게 돈에 집착했을까, 기자는 언뜻 이해가 도지 않는다. 다만 고가의 장비가 필요한 사진이 취미였던 만큼 그것도 아마추어 산악사진작가로 이름을 날리기까지 부모님의 뒷받침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능력을 넘어선 욕심이 그를 그렇게 악하게 만들었던 게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정남 씨의 집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정남 씨의 사진액자들이 집안 곳곳에 걸려있다. 행복했던 한때, 그 사람이 자신의 기술을 십분 발휘해 찍어 준 사진들이다.
“생각해 보면 그 남자 덕분에 개도 길렀어요. 혼자 있으면 건사를 잘 못하기 때문에 키울 엄두를 못 내는데 그래도 그 사람하고 살면서 개를 한 마리 키웠어요. 이름이 ‘아리’였는데 ‘아이(eye)보리’, 그러니깐 영어론 눈(eye) 보리라고 해서, 정말 언젠가는 세상을 꼭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에 이름도 그렇게 지었거든요. 너무너무 사랑했는데 그 개를 어느 날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래서 다시 마운틴이라는 이름의 개를 길렀는데 그 와중에 그 사람이 도망을 간 거예요. 그러니까 우울한 저와 매일 집안에만 있고, 더구나 이렇게 햇빛도 안 들어오는 집에 있으니 자주 데리고 나가서 햇볕 좀 쐬게 해줘야 하는데 전화방 일 때문에 그리고 이렇게 다리가 있어야 별로 쓸모도 없는 사람이니까 도저히 혼자 못 키우겠더라구요. 그래서 남한테 그냥 흥정도 안하고 팔았어요. 제발 다음에는 눈 보이는 주인 만나서 산책도 잘 하고 그러라구요.”
그렇게 정남 씨는 다시 혼자다. 그 사람이 이겨낼 수 있는 시련을 운명의 신은 몇 번이나 예비해 놓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운명과 대결이라도 하려는 듯 정남 씨는 다시 꿋꿋이 일어서려 하고 있다.
“가족들한테는 지금도 아무 얘기 못했어요. 그냥 이 한 세상 내 힘으로 어떻게든 살아가면 되니까. 그래서 하모니카도 배웠어요. 더 이상 기력이 없어 나를 안마사로 불러주지도 않고 모닝콜이나 전화방 아르바이트도 못하게 됐을 때 남산 길거리에서 구걸이라도 하게 되면 부르려구요. 그래도 아직 돈을 벌 수 있는 팔이 있고 남들이 미워하지 않는 목소리가 있으니 또 내 힘으로 살아갈 수는 있겠죠. 부모, 형제들, 그리고 정말 용서할 수 없는 그 남자도 나를 버렸지만 난 초라한 이 아파트에서 다시 한 번 일어서 보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이정남 씨는 지금 김석중이라는 사람을 꼭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칼날처럼 마음속으로 벼리고 있다. 자신이 힘겹게 모아온 돈을 가져가버리고, 자신의 순정한 마음을 짓밟아버렸던 남자를 그는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다. 더욱이 전국 어디에선가 제이, 제삼의 이정남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 그는 오늘도 불안한 마음을 진정 할 수가 없다.
글/ 한혜영 사진/ 김학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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