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그 길고도 짧은 이야기] “부끄러운건 우리가 아니라, 너희다” > 세상, 한 걸음


[가족, 그 길고도 짧은 이야기] “부끄러운건 우리가 아니라, 너희다”

일본군 위안부였던 어머니와 청각장애우딸 김윤심 선예숙 모녀

본문

1930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김윤심 할머니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14세 어린 나이에 일본군에 납치되어 ‘일본군 성노예’가 되었다. 45년 4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해 고국의 땅을 밟지만 다시 일본군에 끌려갈 것을 두려워해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결혼을 해 아이를 하나 낳았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가 청각장애우라면...
  그 다음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직접 이어가라고 한다면 어떻게 써 내려갈까? 소설가라고 해도 쉽게 펜이 내려가지 않을 듯싶다.
  그런데 다행히도 김 할머니(70)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고 딸 선예숙(42)씨는 심성이 곧고 착했다. 그렇다면 김 할머니와 선예숙 씨의 삶에 이후로 불행은 멈추었을까.


 “나 때문에 우리 딸이 청각장애우가 됐어요”


_ 따님은 어떻게 해서 귀가 안 들리게 됐어요?
  “애가 백일이 돼도 고개를 못 이기니까 병원엘 데려갔는데 의사가 내 피를 빼서 검사를 하고는 ‘아이 엄마가가 무슨 병에 걸렸던 일 이 없냐’고 묻는 거야. ‘엄마가 건강치 못해서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부터 뇌에 이상이 생겨 말을 못하게 됐다’는 거야. 나는 가슴이 터질 것같이 놀랐어. 나로 인해서 그렇게 됐다는 게 사람들한테 알려질까 봐 무서워서 애를 그냥 데리고 서울로 와버렸지. 그거만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고 그게 평생 가엾지.”

  처음부터 마음에도 없는 결혼이었을 뿐더러 남편이라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않고 생활비도 주지 않아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던 터라 김 할머니는 아무런 미련 없이 예숙 씨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김 할머니는 ‘내 딸에게만은 더 이상 불행한 일이 오지 않도록 무슨 일을 해서라도 내 몸이 다하는 날까지 보살피리라“고 결심을 했단다.

_ 서울에 올라와서는 어떻게 생활하셨어요?
  “홍인동에다 옥상방 하나를 얻어서 살면서 나는 평화시장에 일하러 다녔어. 애를 데리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집에서 혼자 놀으라고 내가 인형을 하나 만들어줬지. 그러면 애가 여름엔 더우니까 혼자 옷 다 벗어놓고 있다가 누가 빨래 널러 올라오면 나무 하나들고 도둑놈 올라온다고 해서 나중에 이웃 사람들이 ‘집의 딸이 아무 소리 없다가도 사람만 올라가면 어떻게 가라고 울고 그러가 빨래도 못 널러 가겠어’. 그러더라고. 그러다가 얘가 조금 크니까 지 혼자 평화시장까지 찾아왔는데. 오다가 옷가게 앞에 있는 마네킹하고 전부 악수하고 빠이 빠이 하고 그래요, 하루는 올 때가 됐는데 안 온다 싶어 가서 보니까 악수를 하다가 마네킹 팔이 하나가 빠져 갖고 애가 놀래서 막 울어, 마네킹이 아프다고.”

_ 따님이 참 사랑스러웠겠어요.
  “얘가 참 이뻤거든. 그래서 말을 못해도 다들 욕심내면서 자식 못 낳는 사람한테 보내주라고 그러더라고. 그렇지만 절대 마다하고 선희학교(청각장애학교)에 보냈어. 거기서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다녔거든. 공부도 잘했어. 지는 절대로 한국에 안 있고 일본으로 가서 공부 많이 해 갖고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일본 간다고 그랬어. 그때 잘 사는 집에서 결혼하자고 청원이 들어와도 지는 외국에 가서 공부하는 게 꿈이라고 사람도 안 사귀더라고. 얘가 무용부였는데 외국에서 손님 오면 학교가 청와대랑 가까우니까 자주 가서 무용도 하고 그랬어.”

_ 그런데 꿈을 못 이뤘네요.
  “그때는 내가 집에서 병풍에 동양자수를 놨는데 별로 돈이 안돼서 학교를 더 보내지는 못하고 그러니까 그냥 농아인협회에 놀러 다니다가 거기서 남자를 만나 갖고는 결혼한다고 왔더라고. 그러더니 가난한 사람 만나서 즈그끼리 고생하고 살다가 지금은 이혼해서 따로 살아요.”

- 따님이 남편하고는 왜 이혼했는데요?
  “결혼하고 남매를 낳았는데 애들 아버지가 의처증이 있어서 연장 갖고 달려들면서 나도 때리고 얘도 때리면서 함부로 했거든. 그래서 우리 딸이 몰래 집을 나왔어. 얘가 거진 일 년 동안 집에 안 들어가니까 내가 손자들을 길렀지. 그런데 지 얘비가 오기로 애를 뺏어 간 거야. 그래서 애들이 한 일 년 동안 무척 고생 많이 했어. 긍게 할 수 없이 내가 이혼소송을 해줬지. 애 아버지가 애기를 안 줄라고 그래. 그래서 내가 ‘남자아이는 네가 데리고 살고 여자아이는 동생이라 어리니까 내가 데리고 있으마’, 했더니 그렇게는 못 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돈 50만원을 주고 데려왔어. 그래서 재일이가 초등하교 사학년 때 즈그 아빠한테 갔다가 아빠랑 안 살란다고 떼를 쓰니까 지네 아빠가 할 수없이 애를 데리고 나한테 왔더라구. 그래서 재일이도 고등학교는 나한테서 다녔어.”
 “재일아, 참 잘 갔다” 
  “올해 내가 악연이야. 내가 올 3월에 워싱턴을 가서 한 일주일간 일을 보고,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까지 가니까 한 20일이 넘었어요. 우리 손자보고는 15일 만에 온다고 그랬는데...로스엔젤레스가서 예감이 나쁘더라구. 그래서 내가 막 갈란다고 하니까 거기서 정해놓은 날짜가 있으니까 그 날만 참고 가시라고 그래. 그런데 한국에 오니까 우리 손자가 죽었다는 거야”.

- 손자가 죽다뇨?
  “얘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군대에 갔어. 군대에 안 가게 할 수도 있는데 군대에 안 가게 해봤자 보충병으로 방위를 받으면 즈그 아빠한테서 받게 되니까 군대에 가서 세상 사람들 다 겪는 거 겪으라고 했어. 그런데 걔네들은 군복무를 1년밖에 안하더라구. 지난 12월에 제대를 하고 방위를 또 1년 받아야 하는데 방위는 어쩔 수 없이 아빠한테 가서 받아야 되더라구. 그걸 받느라구 분당에 있었어. 그런데 3월까지 방위를 석 달 받고 그래 버렸어”.

- 무슨 일로 죽었다는 말씀이세요?
  “노상 새엄마하고 다퉜다고 그러더라구. 전화해서는 ‘할무니 아침밥을 못 먹으니까 낮에는 배고파요’, 그러더라구. 아침에 식은 밥이라도 있으면 지가 차려서 먹는데 식은 밥도 없으면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그냥 나와야 되니까 아침 굶으면 점심도 없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점심값을 줄 테니까 아침은 거르더라도 점심은 먹으라고 하고 한 달에 꼭 20만원씩 통장에 부쳐줬어. 그런데 애가 성질이 너무 급해 갖고 즈그 새엄마랑 싸우고 속상하면 밤중에라도 택시를 타고 여기 오는 거야. 그 때도 내가 있었으면 나한테 왔을 텐데 내가 떠나기 전 보름치 용돈을 주고 가면서 ‘보름만 있으면 할머니 있으면 온다’ 그랬어. 그 돈 쓰고 만약에 돈이 없으면 친엄마한테 달라고 하라고 했는데 엄마한테는 절대로 돈 달라고 얘기 안 하거든. 엄마 사정을 아니까 찾아가지도 않아. 지 엄마도 재혼을 했거든. 속이 아주 깊은 애야. 그런데 내가 그날 안 왔으니 얘가 얼마나 기다렸겠어. 내가 있는 줄 알았으면 휭하니 왔을거야. 화는 나지, 갈 데도 없지. 그래도 꾹 참고 자고 일어나서 나가는 애를 새엄마가 복도에까지 나와서 뭐라고 한 모양이야. 이웃사람들이 그러더라고. 복도에까지 나와서 그 엄마하고 막 손짓을 하면서 싸우고는 문 닫고 들어가 버리더니 조금 있다가 ‘쿵’하는 소리가 나서 나와 보니까 애가 분을 못 참고 옥상에서 몸을 던져버렸대...”

  김 할머니는 목이 메어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김 할머니의 출국일정 때문에 인터뷰 일정이 너무 갑작스레 잡힌지라 기자는 수화통역자를 미처 대동하지 못했다. 때문에 김 할머니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예숙씨는 김 할머니기 어떤 얘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김 할머니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아마도 죽은 아들 재일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하는 짐작을 하는 듯 했다. 그러나 예숙씨는 할머니처럼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 이번에 또 미국 가신다고 들었는데요. 이번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거예요?
  “내가 다시는 외국 안 갈라고 그랬는데 이번엔 또 미국에 가게 됐어. 위안부였던 사람들이 다들 노인이 돼놔서 갈 사람이 없다고 해서. 나도 관절 때문에 두 무릎이 아팠는데 이젠 팔이 또 아프고 그래서 이번에 갔다 오면 더 이상 못나가겠어. 그런데 내가 너무나 기구한 게 뭐냐면 그 애 둘을 낳기는 우리 딸이 낳았지만 내가 무지하게 고생을 하며 키웠거든. 애들이 밤에 울어도 못 들으니까 딸네 부부는 넋 놓고 자. 그래서 내가 낮에는 공장에 나가고 밤에는 애가 둘 다 데리고 잤어. 자다가 울면 즈그 엄마한테 깨워서 젖 멕여 갖고 다시 자고 그렇게 해서 걔네들을 키웠거든. 그랬는디 손주 놈이 죽었어.(할머니는 또 다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가 너무 기가 막혀서 그래. 말 못하는 사람들 안 데리고 산 사람은 그 속을 모르거든. 막 불러도 몰라. 가서 툭 쳐야 알지. 우리 애들이 어렸을 때도 어디 가서 놀다가 이마 같은 데가 터져서 피가 줄줄 흘러서 ‘엄마’ 하고 울고 와도 문을 딱 열어봐야 알지. 문밖에서 아무리 문을 때려도 몰라. 우리 애들이 그렇게 컸거든. 그런데 죽었어(눈물을 훔치며). 요즘은 우리 재일이 생각하면 ‘참 잘 죽었다. 니가 살았으면 내가 겪은 일을 니가 다 겪을 텐데 그 가슴 아픈 일 겪기 싫어서 니가 먼저 갔구나. 재일아, 잘 갔다’. 내가 늘 그래”.


 “엄마가 평생 나를 먹여 살릴 수 있어요?”

_ 따님은 언제 결혼했어요?
  “애들 아빠랑 헤어지고 나서 쭉 나랑 살았는데 두 살인가 아래의 남자를 데려와서 결혼한다고 하더라고. 그 남자도 귀가 안 들리는데 초혼이고 장사하는 사람이래. 내가 처음에 무척 반대를 했거든. 한번 그렇게 결혼해서 실패했고 남매가 있으니까 애들 크면 얘네 아빠가 깨달아서 혹시 널 찾으면 다시 결합했으면 했거든. 그래서 앞으로 3년만 기다리면서 넘겨보자고 했는데 못 넘기더라고. 엄마가 평생 나를 데리고 먹여 살릴 수 있느냐면서. 사실 장애를 갖고 혼자 살기가 너무 힘든데 엄마 죽고 나면 어떻게 할 거냐고 하는데 내가 할 말이 있어? 나만 믿고 살자고 할 수도 없고. 결국 결혼을 시켰는데 3년 전에 남편이 사고가 나서 지금 누워있어. 속상해 죽겠어.”

_ 무슨 사고였는데요?
  “얘가 결혼하고 나서는 저도 뭘 해봐야겠다고 백석전철역 바로 옆에 조그맣게  포장마차를 차리고 오뎅장사를 했어. 그런데 남자가 술 머고 들어오다 그만 석유통 위에 넘어졌는데 담뱃불에 인화돼 갖고 화상을 입어서 병원에서 2년간 치료받았어. 그 때  손이 다 오그라들었거든. 지금 한 손은 조금 펴졌는데 한 손은 아직도 못 펴. 걸음은 조금 걷는데 올 겨울에 재수술해야 된다고 하고. 그래서 내가 작년에 일급장애우로 재등록해줬지. 또 셋방에서 살았는데 영구임대 아파트도 작년에 신청을 해서 지금 거기서 살고 있어요. 이제 영원히 죽을 때까지 거기서 살아야지. 관리비가 15만 원쯤 되더라고. 나는 정부에서 한 달에 얼마씩 돈이 나오거든. 내가 쓰고 남은 건 다 주는 거지. 그런데 더 이상은 내가 도움을 못 줘. 요즘 내가 아파서 안간지가 한 달이 넘었어요.”

- 그럼 따님은 요즘 어떻게 생활하세요?
  “오뎅장사를 계속 하지. 저도 건강한 몸이 아닌데 계속 해야 되니까 안쓰러워 죽겄어. 오후에 나가서 밤 11시까지 하고 들어오는 데 힘이 드는 모양이라.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내가 평생을 즈그들한테 해줄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이 적어서 장사가 안돼. 또 한여름에는 할 수도 없고. 거기다 사람들이 올라와서 담배꽁초를 그 주변에 다 버려서 음식 장사하는데 지저분하면 안되니까 얘가 그걸 다 치워주고 그래. 그런데 그 바로 옆에 신문 판다고 콘테이너 박스를 하나 놨더라구. 얘네들도 그거 하나 승낙받고 해줬으면 좋겠어서 동사무소 사회과에 가서 물어봤더니 장사도 안되고 콘테이너 못 놓는다고 하다라고. 우리가 못 놓으면 그 사람도 못 놓을 건데 그 사람은 다 놓고 하잖아. 그래서 그 사람들은 어떻게 놓냐고 하니까. 그사람들은 시청에서 허가가 나온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게 어떻게 된 속인지 나는 잘 모르겠더라고.”

- 손녀딸은 지금 어디서 살아요?
  “걔는 엄마랑 살지. 지금 아버지가 친아버지는 아니지만 사이가 좋아. 얘도 지 엄마만큼이나 공부를 잘 했어. 인물도 좋고 그랬는데 대학을 못 보내니까 상고를 보냈어. 졸업반 되니까 어는 기업체에서 제일 먼저 채용을 해 가더라고. 그런데 계속 책상 청소하고 은해에 가서 돈 찾아오는 일들만 시키니까 그만 둬버렸어.”


 “가족한테는 알리고 싶지 않아요”

- ‘부끄러운 건 우리가 아니라 너희다’라는 할머니의 자전적인 글이 ‘98년 전태일 문학상 생활 ․ 기록부분에서 우수상을 탔었잖아요. 그 글은 어떻게 쓰시게 됐어요?
  “나는 그 동안 내가 살아온 게 너 무 억울해서 전부터 이런 걸 쓰고 싶었는데 알아줄 사람도 없고 어디에 낼 지도 모르고 누구한테 말해봤자 휴지조각으로 생각할 것 같았어. 그래서 가슴에만 담고 있었는데 마침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그 당시에 자기가 당한 일을 적으라고 해서 한 번 적어봤는데 회장님이 가지고 가서 읽어본 다음날 전화를 해서 잘 썼다고 하시더라구. 그러면서 이 사람 저 사람 읽어보라고 했는가봐. 그냥 놔두기 아깝다고 세상에 이런 걸 공개해야 한다면서 그걸 책으로 내도 괜찮겠냐고 물어보더라고. 나는 ‘그럼 회장님 알아서 하세요’ 그랬어. 나는 내가 해 나온 거, 또 내 딸하고 살아온 거, 내 딸이 이렇게 생겼다는 거, 그것만 얘기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상까지 받데 된 거야.”

_ 정신대였다는 사실을 밝히기가 어려우셨을 텐테, 밝히시게 된 동기가 있었나요?
  “94년 5월인가 6월에 그랬지. 92년도서부터 한바탕 벽보가 붙고 막 그러더라구. 우리 동생은 우리 엄마가 말해줘서 내가 (일제 때) 공출돼 갔었다는 거는 알지만 내가 그런데서 뭣을 했는지는 자세히 몰라. 조우지간 공출간 여자들이 다 신고하니까 언니도 가서 신고하라고 그러더라구. 그렇지만 나는 ‘이제사 신고하면 뭣하겠냐’며 안 했는데 93년도에 중언한 사람들이 신문에도 보도되고 라디오,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그랬는데 뉴스를 보니까 일본 사람들이 그 사실을 부인하고 왜곡하더라고. 그게 너무 화가 나서 나도 공개했지.”

_ 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에 따님한테도 할머니가 정신대에 끌려갔었다는 거 얘기하셨어요?
  “아니, 우리 딸은 몰라. 내가 얘기 안했거든. 공개하면서도 우리 딸은 귀가 안 들리니까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 딸이 교회에 다니니까 나중에 교회 회보에 간단하게 나온 거 보고 내가 일제 때 공출을 갔었다는 것만 대강 알지. 내가 그런 데 가서 성폭행 당한 건 몰라. 내각 쓴 책도 안 보여줬거든. 우리 손녀도 손자도 몰라. 나도 알리기 싫고. 다른 사람은 글을 쓰면 다 모아둔다는데 나는 어디서 그런 쪽지가 나와도 안 보여주고 중요한 건 폐품에 넣어버리고 그래.”

_ 할머니는 일제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외국에 가서까지 증언을 하고 계시는데 가족들한테는 그래도 조심스러우신가봐요.
  “가족한테는 알리고 싶지 않아. 남자들한테 성폭행을 당하고 시달렸다는 걸 나타내기 가 싫더라고. 매주 수요일에 수요 집회하러 일본 대사관 앞에 가서 앉아 있으면, 요즘은 별론데 그 전에는 사람들이 지나가다 우릴 보고 비웃는 것 같아. ‘도대체 그때 일이 언젠데 창피하게 저렇게 나와서 앉았나’그러는 것 같아. 그래서 어디서 오라고 하든 그런 거 얘기하기 싫더라고. 지금은 나도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오라고 새서 가면 대강만 얘기하고 자세한 건 얘기 안 해주지. 아주 저주스러워서 말하기 싫어. 그렇지만 외국이나 일본 같은데 가면 아주 자신만만하게 하나도 거리낌 없이 다 얘기해주거든. 한번은 일본에 가서 얘기하다가 너무 화가 나서 내가 운 적이 있어. 우리 어머니 얘기를 하는데 속이 무척 상하더라고. 어머니가 나 공출 보내놓고 무척 고생을 하셨거든. 그런 얘길 하니까 나도 울고 거기 있던 사람들도 막 울어. 나중에 나와서 막 손을 잡고 울면서 아주 다정스럽게 대하더라고. 즈그들은 그것이 가슴이 아파서 그렇게 했는지 모르는데 난 돌아서면서 ‘이중성격을 가진 너희들은 요물이다’ 그런 생각이 딱 들더라고. 그래도 요즘 보면 일본 사람 중에도 그러지 않은 사람도 많아. 자기네 나라가 그런 일 했다는 걸 가슴 아파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요.”


  기자가 김 할머니와 예숙 씨를 알게 처음 된 것은 ‘낮은 목소리’의 3부작인 ‘숨결’이 완결되면서 변영주 감독이 한 일간지와 한 인터뷰기사에서였다 <숨결> 최고의 ‘명장면’이 바로 김 할머니와 딸 예숙 씨의 인터뷰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영화가 수화로 진행되면서 감독은 묻는다. “어머니 책 못 봤어요?” 뜻밖의 대답. “봤어요.” 카메라조차 놀라서 움찔거리는데, 대화는 수화 통역을 통해 감동적으로 진행된다. “엄마가 나 아는 것을 싫어하잖아요.” 그래서 비밀을 지켜왔다는 딸의 미소가 더없이 해맑다.’

   이미 예숙 씨도 알고 있는 듯 했다. ‘부끄러운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우리들’이라는 것을.

  이제 김 할머니는 조금은 부끄럽게 생각했던 자신의 과거를 뒤늦게나마 세상을 향해 호소어린 탄원의 목소리로 거듭 밝히고 있다. 힘없는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것도 여성으로서 역사에 의해 맥없이 뭉개진 자신의 삶이 후손들에게 절대로 또 다시 대물림 되지 않기를. 정당하게 평가되기를.

  그러나 김 할머니는 그 가슴 절절한 사연을 딸에게는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아직 내지 못하는 듯 했다. 이 두 모녀가 40년간 가슴속에 쌓아 두었던 응어리가 눈물로 모두 풀어져 나올 그 날이 새천년의 어느 날에는 꼭 올까.

글, 사진/ 노윤미 기자

작성자노윤미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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