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영원한 글쟁이, 영원한 자유인” > 세상, 한 걸음


“우리는 영원한 글쟁이, 영원한 자유인”

원로 장애문인 박용수 & 이선관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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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마지막 날들이 가고 있다. 지난 1백년, 그 격동의 역사를 뒤돌아보고 반성하기 보다 새로운 천년에 대한 기대 속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주워 올리느라 정치, 문화, 경제 등 각계각층이 요란하고 분주하다. 대체로 섬세한 감수성을 지녔다고 하는 시인들, 그 중에서도 ‘장애’라는 신경돌기를 하나 더 가졌고, 그것도 파란의 반백년 현대사를 걸어온 원로 시인들이라면 세기말의 시기를 보내는 감회가 남다르리라. 함께걸음은 원로시인 박용수, 이선관 선생의 대담을 통해 지난날을 담담히 돌아보고 앞날을 조망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올해 66세인 박용수 선생(사단법인 한글문화연구회 회장. 함께걸음 98년 7월호 소개)과 58세인 이선관 시인(마산 ‘책사랑’ 주간,97년 12월 소개), 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무렵 박 시인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족문학작가회의 전신, 이하 자실)에서 파견한 민통련 중앙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나 그의 사진기술을 알게 된 문익환 목사가 보도실장의 직책을 주면서 사진기록을 전담시켜 민통련에 상근하던 때였다.

  그리고 이 시인은 경남 마산 태생으로 마산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고등학생 때 3 ․ 15 시위에 참여할 정도로 사회의식이 강했던 터라, ‘6 ․ 10 대투쟁’ 으로 일컬어지는 ‘87년의 시위 대열을 보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을 때 사진기를 들고 방독면까지 찬 박용수 시인을 데모현장에서 마주친 것이 처음이었다.

  그것이 첫 대명이었지만 “초면이 구면 같았다”고 두 시인이 회상하는 까닭은 모두 같은 “자실” 회원이기에 앞서 박 시인이 마산과 가까운 진주에서 60년대 말까지 문학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이 서로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게 된 것은 박 시인이 ‘연합포토저널’에 기고하고 있는 <장애를 극복한 사람들> 취재를 위해 지난 추석 무렵 마산에 내려가 이 시인과 길고 긴 시간 동안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눈 이후라고 한다. 그래서 단풍고운 11월 서울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다시 마주한 두 노시인의 정담은 은근하면서도 뜨겁게 이어졌다.


 홧김에 박대통령에 시집을 보내고

  ―두 분 선생님은 반백년을 넘게 살아오셨고, 특히나 식민시기와 해방, 한국전쟁과 분단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넘어 오셨는데요 두 분의 삶에 개입됐던 역사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떠 했는지 궁금합니다.

박용수:
1934년생이라 일제 치하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셈이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철이 일찍 들었어요. 그때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군사교육을 받아 세근 머리가 안들 수 없었지. 전교생이 군사훈련을 받다 보니 운동장이 좁아서 저학년들은 교문 밖 신작로로 밀려났어. 1학년생한테는 걷는 훈련만 시켰는데, 그냥 걷는 게 아니고 ‘고찌오도레!’라는 구령이 떨어지면 무릎팍이 가슴에 탁탁 닿는 솟을 걸음으로 걸어야 되요. 맨발로 신작로를 팍팍 걷다보면 돌부리에 채여서 발가락이 깨지지 일쑤지만 피가 나도 엄살을 피우지 못했어요.

이선관: 나야 43년생이라 이제시대 기억은 별로 없고 사변 때의 기억은 생생해요. 아홉 살 땐데 학교가 국군병원이 돼서 우리 학생들은 산에 가서 공부하고 그랬어요.

박용수:
나는 하필이면 사변 때 장티푸스를 앓아서 청각을 잃었잖아. 진주는 마산과 달라서 인민군 점령지였지. 사변이 나기 몇 달 전인 49년 겨울에 이현상 부대가 시내까지 쳐들어 온 일도 있고, 거창, 함안, 산청 같은 서부 경남 곳곳은 밤이면 야산대(빨치산은 공비와 야산대, 두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가 휘젓고 다니는 이른바 해방구가 곳곳에 있었는데 사변이 나고 인민군이 내려오기 전에 진주시는 이미 야산대에 점령됐었어요. 그런데 시민들이 진주를 비우고 피난을 간 것은 야산대가 아니라 쌕쌕이라는 호주기가 무서워서였지요. 본 사람들 얘기로는 비행기가 시가지 위를 낮게 돌면서 분무기로 물을 뿌리듯이 기름을 뿌리더래요. 그리고는 소이탄(네이팜탄)을 퍼부었다나. 시간으로 따지면 오후 3시쯤인데 30리밖 시골집에서 보자니 진주 쪽 산 위에 때 아닌 뭉게구름이 물씬물씬 피어오르더라고, 그런데 그게 구름이 아니었어, 시커먼 연기야. 남는 게 있을 턱이 없지. 이 시인은 학교를 뺏겨서 산에서 공부했다지만 우리는 뺏길 학교도 없었어. 음악실로 쓰던 조그마한 단층건물 하나 빼고는 몽땅 타버렸거든. 그래서 요즘도 모교를 소개하는 동창회 회보 같은 데는 그 건물이 꼭 올라요, 진주고등학교의 보물1호인 셈이야.

이선관:
그러다 3 ․ 15때는 정부에서 용공조작하려고 그랬는지 동아일보 보는 집을 파악하라고 했다는데 우리 집도 당시 동아일보를 보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무척 불안해했던 것도 생각이 나네. 이런 환경이었으니 4 ․ 19 뒤 들어선 민주당 정부가 박정희한테 짓밟힌 건 참으로 분하고 원통했어요. 73년도에 내 두 번째 시집 나왔을 때 하루는 술김에 객기가 나서 시집 한 권을 봉투에 넣어서 ‘청와대 박정희 대통령 앞’ 이라고 써가지고 보냈어요. 보낸 다음에 생각하니 후회막급이었지. 거기 내 시 ‘애국자’하고 ‘헌법 제1조’도 다 있었는데 ‘헌법 1조’는 ‘씨알의 소리’에 발표했다가 나는 마산에서, 함석헌 선생은 서울에서 한바탕 곤욕을 치르게 한 시였거든요. 그런데 얼마 있다가 어머니가 얼굴이 노랗게 되셔 가지고“얘야, 선관아, 청와대에서 편지가 왔다”고 공문봉투를 내미는 거예요, 뜯어보니 청와대 비서실장이 보낸 건데 대통령한테 잘 전달했다고, 앞으로도 좋은 시 많이 쓰시라고 써 있어요. 아무 일 없이 지나간 게 다행이었지. 그런데 다음에는 술 먹고 밤길 다니다가 경찰이랑 시비가 붙으면 청와대에서 보낸 봉투 보여주면서 거들먹거리기도 했어요.(웃음)


  역사와 함께 걸어왔던 자신의 삶을 기록하려고 했다고 이 시인은 털어놓았다. 출생부터 차곡차곡 써내려간 그의 기록은 그러나, 부마사태때 제2의 남민전 조직사건을 만들려는 기관의 조짐이 있다는 후배의 귀뜸에 증거인멸 차원에서 모두 불태워지고 말았다.

박용수:
운동권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함부로 기록을 남기면 위험하지. 내가 문인이라 친구들이 민통련 활동을 일기로 남기라고 자꾸 권했지만 사실 일기수첩 쓰는 일도 조심해야 했거든. 언제 잡혀 들어갈지 모르고 잡혀 들어가면 맨 먼저 하는 일이 몸 뒤짐인데 일기나 수첩 같은 게 주머니에 들어 있어봐, 조직 기밀을 몽땅 일러바치는 결과가 돼요. 실제로 그런 일이 나한테 있었어요. 86년 11월 11일인데 민통련 해산명멸에 불복하고 농성을 벌였다고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서 구속됐는데 그 때 내 주머니에 전화번호수첩 하나가 들어있었거든. 내가 하는 일이 사진촬영인데 이 일로 미운털이 박힌 처지라 수첩에는 일부러 사진재료점이니 뻔한 사람들의 전화번호만 빼곡히 적어뒀기 때문에 탈을 잡을 건덕지가 없을 텐데도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누구냐고 꼬치꼬치 캐묻더라고.

이선관: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면 박종철 고문치사로 유명한 곳이잖아요?

박용수:
박종철은 내가 끌려간 지 1년 후인 87년 11월 15일 ‘억’ 하고 죽었다고 했지. 그리고 거기가 또 이근안이 김근태를 고문한 곳이라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수갑을 채우고 눈을 가리고 어디로 끌고 가더니 눈에 가린 것을 풀었을 때 ‘아, 여기가?’하면서 등에 식은 땀이 나더구만. 가장 섬짓한 것이 벽 색깔인데, 천장하고 바닥을 뺀 네 벽이 온통 벌개. 핏빛도 아니고 황토 빛도 아닌 벌건 그런 색인데, 그 위에 까만 점이 촘촘히 찍혔어. 그 구멍이 소리를 잡아먹는대. 그러니 고문당하면서 지르는 비명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는 거야.


 “세상 참 좋아졌지”

  ―어떠세요, 살아오시면서 이제 장애에 대하 사회적인 인식이나 주위 사람들의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고 느끼시나요?

이선관:  많이 바뀌었지. 개인적으로 보면 어렸을 때부터 놀림도 많이 받았고 대학 다닐 때까지도 스스로 장애로 인한 열등감을 감당하지를 못했거든. 내 몸을 내보이지 않아도 되는 게 편해서 가만히 어둠 속에서 혼자 영화 보는 것만 좋아했어요. 그때 아버지가 영화관에서 일하셔서 돈 안내고 영화 실컷 볼 수 있었거든.

박용수: 그냥 뒀더라면 두더지가 될 뻔했네.(웃음)

이선관:
그러다 3 ․ 15의거 거치면서 점점 우리 사회 현실에 눈을 뜨게 되니까 나 개인의 내부 고민에만 매몰돼 있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죠.

박용수:
그런 과정은 누구나 겪나보네. 아니면 장애가 인생의 피날레게. 나도 말 못할 수렁 길을 거쳤지만 이 시인과는 좀 달랐을거야. 젖먹이 때 장애를 갖게 된 이 선생하고 달리 나는 17살 때였으니까 심적인 갈등도 질이 달랐겠지. 한 달 전인가 한 청각장애 여성을 만난 일이 있는데 이 아가씨는 대학 2학년 때까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기처럼 침묵 속에 사는 줄 알았대요. 그래서 그런지 성질이 천진난만했어.

이선관:
최근에 내가 시집 내는 것 도와준 방연복이라고 홍익재활원에 있는 젊은 뇌성마비친구는 심한 언어장애 때문에 말로는 의사소통이 안 되고, 두 손도 못쓰고 휠체어 타고 다녀요, 그 친구가 어쩌다 나 만나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발로 어렵게 글을 쓰는 연복이를 보면 내가 그래도 이렇게 걸어 다닐 수 있으니 난 참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도 처음 했어요. 그 친구 보면서도 새삼 느낀 거지만 이제 장애인문인협회도 있고, 또 작품을 써도 발표할 지면이 찾아보면 적지 않게 있지만 예전에는 그런 게 어디 있었나.

박용수:
옛날에 지면이 없었다는 건 이 시인의 작품이 안 좋았기 때문 아니야?(웃음)
그걸 장애하고 연관시켜 차별이라고 봐서는 안 될 것 같은데. 문제는 장애가 사회 구성요건에서 어떤 작용을 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닐까. 예컨대 노동판에서는 수족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노동력이 떨어지니까 차별하는 것이고, 청각장애의 경우 서로 소리를 주고받으며 하는 일터에서는 구박 안 받기 바랄 수 없지. 그러니 활동범위가 좁아진다고 봐야지. 이걸 차별이라고 해서는 안돼요. 그렇지만 어쨌든 성한 사람도 일자리가 없는데 무슨 장애우냐고 얼굴을 돌리는 태도는 우리 시민의식이 아직도 원시사회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거지.

  이선관 시인은 전업시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버겁기만 했던 두 아들의 학비가 면제된다고 해서 88년도에 일찌감치 장애등록을 마쳤다. 그러나 그뿐, 지방에 있으니 전철 무임승차 혜택 같은 것도 없고, 지금 혜택 받는 건 전화세감면 밖에 없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장애우들에게 영구임대아파트를 공급한다고 하는데 그가 있는 마산은 아직도 먼 얘기다. 창원으로 이주하면 영구임대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게 배려하겠다고 도지사에게서 약속받은 적이 있지만 이 시인은 그래도 마산의 단칸방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정든 마산 땅에 있는 사람들이 집 한 채 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산의 공식적인 홍보물에도 소개된 바 있는, 마산의 정신적 지주라고도 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해서 마산시가 무심한 것에 대해서는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박용수 선생은 올해 1월에야 장애등록을 했다. 장애이력에 비춰볼 때 명료하게 말을 하는 자신을 보고 “의사가 장난하는 줄 아는 게 기분 나빠”, 또 등록해봤자 혜택보는 것도 별로 없다는 생각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올해 들어서야 등록을 한 것이다.

박용수: 장애가 생활에 어떤 어려움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인 모양인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아. 사람이 태어났으니 이것저것 해보고 싶겠지만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한 가지 일밖에 못해요. 문제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고, 욕심이지, 이런 마음을 다스리면 장애란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런데 이 자리에서 이 시인은 가슴 속에 품고만 있었던 얘기라며 한 가지 응어리를 풀어 내 보였다.

  26,7년 전 박정희 군사독재 하에서 반정부적인 시작품들을 발표했다고 구속된 김지하 씨에 대해 국내외의 석방요구가 높아지자 당국은 일단 폐결핵을 앓고 있는 김지하 씨를 마산 국립 요양원에 강제 입원시키게 된다. 그 때 기사가 1단기사로 동아일보에 나온 걸 보고 평소 김 씨에 대해서 같은 문인으로서 동지적인 애정을 느끼고 있던 이 시인은 일면식도 없었던 김지하를 친구 김호부 씨와 함께 병문안을 갔다고 한다. 언어장애로 인해 어눌한 발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다는 자괴감 때문에 김 씨를 대면하고도 말 한 마디 꺼내지 못했지만 소중하게 품어온 자신의 시집을 선물하며 마음속으로 쾌유를 빌고 왔다.

  그런데 나중에 김지하 씨는 방학을 맞아 마산에 내려온 재경학우회 사람들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어떤 병신도 날 면회 왔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한 후배가 김지하에게 실망했다며 이 시인을 찾아와 그 얘기를 전했다.

  그 때 일이 아직도 화인처럼 이 시인의 가슴에 남아 있는 듯했다. 김지하 씨가 몇 해 전 지난날의 과오를 고백하는 글을 썼다길래 혹 자신에 대한 부분도 있을까 해서 관심을 갖고 봤지만 그런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어 또 한 번 실망했다고 한다.

―이제 얘기를 좀 마무리 지어야 할 시간인데요. 그럼 새로운 천년에 대해 두 선생님은 또 어떻게 전망하고 또 개인적으로 어떤 것을 기대하고 계신가요.

이선관: 오늘의 이 자리가 밀레니엄. 새천년을 맞기 전 송년특집으로 마련된 자리인 듯 합니다만 사실 21세기다, 뭐 새천년 운운하는 건 다름 아닌 서양 쪽의 기준일 뿐이거든. 그럼에도 새 천년을 굳이 기준으로 삼아 이 시기를 되돌아본다면 다시 문제는 지구촌이고 이 땅의 문제는 다시 친일세력의 청산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해결돼야 비로소 우리 사회는 진정한 새천년의 시작을 할 수 있거든요. 사회 일각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운동의 일환으로 대학교수들이 벌이고 있는 서명 작업은 늦었지만 좋은 출발이라고 할 수 있죠. 그것을 범국민운동으로 확산해서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데 한 계기로 삼았으면 하는 것이 바람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친일의 역사를 뿌리부터 제대로 바로잡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것이 오늘날 우리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모든 부정과 부패의 근원이 되고 있어요. 부끄러운 친일의 역사가 바로 잡혀지는 날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민족이 새 출발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박용수:
사실 그렇지. 민주화를 위해 그렇게 많은 젊은이가 피를 흘렸던 것도 독재정권을 옹호한 친일세력 때문이었고, 평화통일이 요원한 것도 북한을 무력으로 접수하려는 친일세력들의 자기보신 술책 때문이야. 그런데 우리 겨레가 언제까지 이들에게 시달려야해? 20세기와 21세기의 전환기는 독재와 민중, 보수와 개혁의 대결장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나 할까, 여기서 이기지 않으면 2000년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거야.



  이 시인의 고향인 마산 앞바다는 원래 호수같이 잔잔하고 맑은 물로 유명했다고 한다. 태풍이 오면 진해군함들도 모두 피신 왔을 만큼 잔잔한 바다였던 마산 ․ 창원일대를 박정희 전대통령이 공업단지로 만들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관광도시로 만들어야 했다고 이 시인은 안타까워한다. 그랬다면 샌프란시스코나 시드니 버금가는 아름다운 항구도시가 됐을 것이라며.

  이 시인의 주된 화두 중의 하나가 바로 환경문제다. “통일되면 북한 사람들을 어떻게 보려고 이 땅을 이렇게 더럽히나 싶다”는 생각에 지역 내에서 계속 운동을 벌여나가면서 “완전한 자유인, 완전한 글쟁이로서 살다 가겠다”는 것이 그의 거듭된 다짐이다.

  이 시인을 또 “우리 두 사람은 말 안 해도 서로 통하는 것이 있다”며 특히 박 시인의 우리말연구작업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나도 시작(詩作)을 하면서 독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말 연구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돼요. 그런데 박 선생을 보면 청력을 잃은 것이 오히려 사전을 연구 하는데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도 같아요.”

  그렇게 서로의 작업에 대한 존경과 중단 없는 왕성한 창작활동을 독려하면서도 이제 어쩔 수 없는 나이가 됐다며 서로 건강에 대한 염려를 나누기도 한다. 그럼에도 빠질 수 없는 술잔이 오고 가는 가운데 두 시인의 앞날에 대한 축원과 기원도 무르익어 갔다.

진행, 정리/ 한혜영 기자
사진/ 김학리 기자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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