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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이야기] “갈 곳 없는 나그네들이 여기 다 모였네요”

나그네가 주인인 하남 나그네 집

본문

경기도 하남시 덕풍 3동에 위치한 장애우공동체 ‘나그네집’. 나그네, 행인은 가장 약한 존재라고 성경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들과 함께 사랑을 이뤄가자는 뜻에서 이른 붙여졌다는 ‘나그네집’에 28명의 장애우도 산다. IMF 이후 가정이 흩어지면서 들어오게 된 비장애우들도 더 많이 늘어가지만 어려운 살림에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나그네집 식구들의 이야기.


  “이 곳 생활이요? 행복 그 자체예요. 저는 이 일이 하나님이 주신 제 일이라고 생각해요. 머리 좋은 사람들과 살면 혹 실수를 할 까봐 마음이 편치 않은데 이 곳에서는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고 실수를 해도 마음이 편해요. 오히려 실수를 하면 더 재미있어 하고 즐거워하죠. 전 이 곳 생활이 좋아요. 자연인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논밭만이 황량한 하남시 덕풍 3동에 장애우공동체인 ‘나그네집’을 설립한 김 철 씨의 아내 이난애 씨의 말이다. 처음에 이난애 씨는 누구보다 김 철 씨가 나그네집 짓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지금은 태도가 180도로 확 바뀌었는지 들어보자. 그러기에 앞서 남편 김 철 씨의 얘기부터 해야겠다.

  김 철(43) 씨는 한 족 발목을 절단한 지체장애우이다. 그이는 나그네집에서 매일같이 예배를 주관하고 있어서 나그네집 식구들은 그이를 목사님이라고 부른다.

  김 목사는 가난한 농가에서 팔 남매 중 큰 아들로 태어났다. 네 살 때 동생 두 명과 함께 홍역을 앓았는데 무지한 어른들이 바람을 쐬면 좋지 않다고 해서 임시방편으로 양말 열 켤레를 신겨두고 논에 나갔다. 그 후 일이 바빠 제대로 못 보다가 일주일 후 생각이 나서 양말을 벗겨보니 피가 안 통해 발이 곪기 시작했다. 놀란 부모님은 김 씨를 업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면서 치료를 했지만 한 번 곪기 시작한 발을 완전히 치료할 수는 없었다. 계속 곪을 부위가 퍼져서 결국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그네집 설립한 김 목사 부부

  가난과 어른들의 무지로 장애를 갖게 된 김 목사는 자라면서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대학도 신학교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도 계속 교회생활을 열심히 했다. 그러나 신학을 배우면 배울수록 장애우를 대하는 교인들의 냉랭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또 어느 교회를 가봐도 장애우를 위해 편의시설을 마련한 곳이 없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다를 줄 알았는데 장애우를 차별하는 것은 교회에서도 다를게 없었다. 이에 적잖이 실망을 한 김 목사는 장애우들이 마음 편히 다닐 수 있는 그런 교회를 짓기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 이순애 씨가 그이의 뜻에 동의하지 않아 김 철 씨는 혼자 몰래 일을 시작했다. 그 때 이 씨는 왜 김 철 씨의 일을 반대 했을까?

  “어려운 사람을 보면 저 역시 도와주고 싶지만 그 때 저희가 많이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돕자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그런 게 다 허황된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냥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여튼 그래서 김 철 씨는 잠시 사회생활을 하며 알게 된 장애우 친구들과 함께 하남시 변두리에 축사를 개조해 집을 지었다. 그 때가 1980년대 초반이다.

  당시 마을 주민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그보다는 주민들의 제보로 달려온 행정기관의 탄압이 더 극심했다. 불편한 몸으로 어렵게 지은 집을 모두 부수고 장애우들을 발로 툭툭 치며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는데 김 목사는 너무나 억울해 피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기를 수 차례, 그 동안 낸 벌금만도 수백이 된다.

  초창기 피눈물 나는 시련에도 불구하고 나그네집이 지금까지 꿋꿋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내 이 씨가 뒤늦게 두 팔을 걷어올렸기 때문이다. 갑자기 둘째 아이가 원인 모르게 시름시름 앓아 이 병원 저 병원 다녀도 낫지 않고 1년을 가자 다급해진 이 씨는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렸다. 아이만 낫게 해주면 뭐든지 다하겠다는 내용의 기도였는데 그 이 후 아이의 거짓말처럼 나았다. 그 후 이 씨는 두말 않고 김 목사의 뜻을 따라 지금까지 나그네집을 운영해 오고 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신중하다는 핑계로 많이 망설이다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늘 제 자리 걸음을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다른 욕심 없어요. 그저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만 일하려구요. 시작할 때도 계산하지 않고 시작한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라고 말하는 이 씨는 그런 면에서 참 용기 있는 사람이다.


자원활동 하다 눌러 앉아버린 할머니 세 자매

  기자가 나그네집을 방문한 날은 1년에 한 번 하는 대공사가 있던 날이었다. 가구나 옷가지 등을 헌 것을 가져와서 사용하기 때문에 그런지 나그네집에는 바퀴벌레가 참 많았다. 게다가 정신지체 장애우들이 벽지를 찢기도 해 1년에 한 번씩은 꼭 도배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도배 공사가 대공사가 된 것은 작년 한 달 연료비가 2백만 원이나 나왔기 때문이다. 방바닥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방바닥을 뜯어내가 보니 이렇게 대공사를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왕 하는 김에 남자 숙소 옆에 화장실도 하나 만들었다. 남자 화장실이 숙소와 너무 떨어져 있어 그 동안 많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옷가지는 물론 나그네집 식구들도 모두 마당에 나와 따스한 가을 햇볕에 쬐고 있었다.

  아이들은 늘 정돈된 모습만 보다 이사가는 집마냥 물건들이 나왕 있고 또 못 보던 작은 물건들이 여기 저기서 나타나자 재미있는지 부산스럽게 마당을 뛰어다녔다.

  마당 중앙에는 넓적하게 비닐자리를 펴고 앉아서 아파트 부녀회에서 보내준 헌 옷을 고르는 할머니 두 분과 젊은 여성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다. 가까이 가 보니 할머니 두 분의 얼굴이 닮은 것 같은데 아니다 다를까 두 분은 친자매라고 한다. 12년 전부터 이 곳에 자원활동을 나오시던 세 자매가 자녀들이 다 장성해 시집 장가가고 우연찮게 남편이 먼저 세상을 뜨셔서 이 곳으로 아주 들어오신 것이다. 그 중 막내분은 미국에 사는 자녀에게 일이 생겨서 잠시 미국에 가고 없었다.

  할머니들은 이 곳에서 대소변을 못 가리는 식구들 뒤처리를 하고 빨래며 헌옷 고르는 등의 일을 하며 소일을 하신다. 세 분 다 칠십을 넘기신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주 정정해 보이는데 그 비결이 이렇게 바쁘게 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곳 생활이 자식들하고 사는 것보다 좋으시냐고 묻자 “좋으니까 있지” 하신다. 결혼 전에나 같이 살 수 있었던 세 자매가 이렇게 나이 들어 다시 같이 살 수 있을 거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면서도 할머니들은 뭐 그리 할 얘기가 많은 걸까? 가만히 들어보니 어제 본 드라마 얘기다. 요즘 한창 인기 있는 드라마 ‘보고 또 보고’를 보시고 하루 종일 어제 본 얘기를 하시는데 왜 이리 시간이 안 가는지 모르겠단다. 그러나 저녁 8시 30분이 되면 또 왜 그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그러면 아쉬움에 또 내일이 기다려지고, 어찌되었든 칠십을 넘기신 할머니들에게도 내일이 기다려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방세는 못내 쫓겨난 가족과 두 남매

  할머니와 함께 일을 하고 있는 아낙네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셋방살이를 하며 이 근처에서 살던 새댁인데 올 해 들어 IMF의 영향으로 남편의 벌이가 시원치 않아 집세를 못내고 계속 밀리다 결국 쫓겨나 이곳에 들어와 살게 됐다고 한다. 남편은 일을 하러 나가고 새댁과 꼬마만이 나그네집에서 남아 있다. 집에 있는 동안 새댁은 이난애 씨를 도와 부엌 일을 거들고 꼬마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목사님 댁 막내와 수정(정신지체)이 누나와 함께 논다.

  수정이는 인근에 있는 특수학교인 성광학교에 다닌다. 스쿨버스가 나그네집 앞까지 와서 매일 통학을 하는데 수정이는 공부를 아주 잘 한다. 오늘 받아쓰기 시험을 봤다고 하는데 하나만 틀려서 90점을 맞았다. 평소에도 시험을 보면 곧잘 100점을 맞아 오는데 시험을 보고 나면 나그네 집에서 가장 어른인 할머니들한테 먼저 시험지를 보여드린다고 한다. 그러면 할머니들은 잘 했다고 친손주처럼 수정이를 안아주시고 엉덩이도 토닥거려 주신다.

  수정이는 원래 집이 부천이다. 가족은 모두 부천에 살고 있다. 수정이는 방학 때나 명절 때 집에 간다. 집에 가면 언니랑 같이 노는데 이번 추석에도 집에 간다며 어서 빨리 추석이 왔으면 좋겠다고 한다.

  수정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종이 접기다. 시간만 나면 책을 펴놓고 종이 접기를 하는데 저고리도 만들고 튤립도 만든다. 커서 종이 접기 선생님이 되고 싶단다. 시골아이 마냥 살갗이 검게 타고 옷에도 흙이 묻어 개구쟁이 같은 수정이의 눈빛이 참 맑고 순진해 보였다.

  아이들이 밖에서 노는 동안 어른들은 안에서 공사 마무리는 하느라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예년 같으면 더위가 한 풀 꺾일 듯도 한데 올해는 유난히 늦더위가 기승이다. 거실과 큰방 작은방 화장실에서 각각 도배를 하느라 잠시도 말을 붙일 잠이 없어 보여 일하는 광경을 그냥 지켜만 보고 있는데 유난히 앳되 보이는 여자 아이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올해 열 여섯이라는 이 소녀는 다른 아이와 달리 사진 찍는 것을 무척 싫어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다.

  아버지가 알콜 중독자인데 하도 어머니를 때려 어머니가 가출을 해버린 것이다. 남은 남매는 갈 곳 없어 이 곳으로 피신을 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어서 혹 사진을 보고 찾아오지나 않을까 겁을 먹은 것이다. 거처가 불분명해 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한 소녀는 검정고시로 중등과정을 마쳤고 남동생도 지금 야학을 다니며 중등 검정고시를 준비 중이다. 나그네 집 아이들 중 유일하게 이 아이의 눈빛에만 걱정과 두려움의 빛이 서려 있었다.

  한참 도배작업을 하고 있는데 밀짚모자에 썬그라스를 끼고 몸집에 비해 좀 작아 보이는 꽃무늬 쟈켓과 반바지를 입은 남자가 얼음과자를 한 박스 가지고 나타났다. 이 사람도 나그네 집 식군가? 옷차림을 봐서는 평범해 보이지 않는데 알고 보니 나그네 집 후원인 정경원 씨였다. 김 철 목사의 신학교 선배로 그이가 등록금이 없어 학교를 다니기 곤란할 때 학비를 내주기도 한 친형제와도 같은 사람이다. 일하기 편하게 입기 위해 헌 옷 중에서 골라 입은 것인데 입고 보니 그렇게 우스꽝스러워졌다고, 나그네집 식구들도 그의 그런 모습이 재미있는지 자꾸 그를 쳐다보며 웃곤 했다. 이 곳에서는 점잔을 빼고 가만히 안자 있는 사람보다 식구들에게 웃음과 재미를 주는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이다. 이렇게 해서 힘든 도배작업도 웃고 떠드는 가운데 끝이 났다.

  나그네집에서는 장애가 있다고 공부를 못한다고 비싼 메이커 옷을 입지 않았다고 또 집이 없다고 해서 그 누구에게도 놀림 당하거나 무시당하지 않는다. 또 혹 아이들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른답게 꾸짖어줄 어른도 있다. 그래서 이곳은 진정한 나그네집이다.

  그러나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에 40명이 넘는 대가족이 특별한 일거리도 없이 이렇게 자꾸 새 식구를 받아들이면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까 걱정이 된다. 옷은 아파트촌에서 보내주는 헌 옷을 갖다 입는다 치더라도 워낙 대식구라 먹는 일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후원인들의 후원금도 많이 줄었다는데 말이다.

  “요즘 김치 값이 너무 비싸 두달째 김치구경을 못했어요. 그렇지만 마을분들이 많이 도와주세요. 풍년이 들어 갖다 팔아도 별 소득이 없는 작물은 버리기 일쑨데 그걸 저희들에게 갖다 주시더라구요. 고맙게 받았죠. 파같은 건 한꺼번에 다 먹지 못하니까 흙을 파서 심어놓고서 필요할 때마다 베어먹기도 하구요. 귤같이 금방 상하는 건 식구들에게 나눠주고 남는 건 이웃에 사는 장애우 가족과 나눠먹었죠.”

  초창기 나그네집이 들어서는 걸 반대했던 주민들도 어느 덧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자 나그네집 식구들에게 정이 들어가는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나그네집은 보통 장애우 시설과 다르게 바깥 세상과 구분을 짓는 높은 담이나 대문이 없다. 그저 낮을 울타리만 있을 뿐이다.


나그네집에 사는 장애우들

  나그네집은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장애우 28명 중 남자가 20명이다. 그 중 장애가 가장 심한 사람은 박훈영(20․자폐)씨다. 훈영 씨는 때로 짐승같은 소리를 내며 공격적이 된다. 심할 땐 밤에 잠도 안 자고 다른 식구들을 많이 힘들게 하는데 훈영 씨가 일찍 교육을 받았더라면 지금보다 증세가 덜했을텐데 지금은 덩치가 너무 커버려서 훈영 씨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일찍 알았다 해도 가정 형편이 어려워 훈영씨가 치료를 받았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다른 식구들은 모두 밖에 나와 볕을 쬐는데 혼자 방안에 웅크리고 안자 있는 훈영 씨가 안돼 보였다.

  박성환(41․정신장애)씨는 결혼하고 싶어한다. 매주 월 수 금요일마다 정신보건센터에 다니면서 요리나 설거지, 콩 심는 기술 등을 배우는데 최근에 센터에서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생활능력이 없어 결혼을 꿈도 못 꾸고 그저 짝사랑만 할 뿐이다.

  일명 ‘오서방’이라고도 불리는 오재호(36․정신지체)씨는 식구들 중 지능이 가장 떨어진다고 한다. 말을 알아듣지만 표현은 잘 못한다.

  민영기(44․정신지체)씨는 치아관리를 못해 이가 다 빠져버렸다. 그래서 입을 다물면 마치 할머니처럼 입주변이 오무려진다. 만나는 사람마다 웃는 얼굴로 “반가워”, “고마워”라며 인사를 하고 다니는데 할머니들에게 반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렇지만 할머니들도 민영기 씨를 꾸짖지 않는다. 노래부르고 춤추는 것을 좋아해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들 앞에서 텔레비전 만화영화를 수정이 보다 더 깜찍하게 부르기 때문이다. 민영기 씨는 나그네집에서 가장 인기있는 연예인이다.

  박장영(38․소아마비)씨와 조천수(65․지체장애) 씨는 작년까지 서울에 있는 샬롬의 집에서 있다가 원장이 성폭행 혐의로 구속됨에 따라 작년에 나그네집으로 이사왔다. 다리가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 조천수 씨는 공사를 돕지 못하는 대신 파리채를 들고 열심히 파리를 잡는다. 인근에 축사가 많다 보니 파리가 많다.

  모든 일이 참견을 잘하는 임기원(39․정신지체)씨는 나그네집에서 임 반장으로 통한다. 이 날도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들고 이곳 저곳 기웃거리며 참견을 했다.

  이렇게 저마다 다 제각각인 나그네집 장애우 식구들도 공동생활을 유지하고 위해 다함께 지켜야 하는 규율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아침 6시 10분에 일어나서 30분간 예배를 보고 7시50분에 아침식사, 12시20분에 점심, 오후 6시에 저녁식사 9시에 취침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하나는 일이 있을 때 다 같이 협력해서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저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보람을 느끼도록 하는데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을 맡기는 데에도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누구든 파리 잡는일, 누구는 자기보다 더 장애가 심한 식구에게 목욕시키기, 누구는 청소하기 등이다. 규율을 어겼을 때는 벌도 있다. 손들고 있기서부터 먹는 것을 좋아하는 식구라면 음식 조금 먹기 등 벌도 각자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세상에서 가장 월급을 많이 받는 간사들

  28명이나 되는 장애우를 목사 부부가 다 돌볼 수 없어서 간사를 두 명 두었다. 법인이 아닌데다 워낙 중증정신지체 장애우가 많아 간사를 구하는데도 8개월 이상이 걸렸다고 한다.

  이 두 간사는 나그네집에서 유일하고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 중 고경희 간사는 이 곳에 온 지 1년째 되는데 그 전에서 서울 화평재활원에 있었다고 한다. 고 간사가 하는 일은 바로 한 달에 한 번씩 나그네집 소식을 담은 회보를 내는 것과 후원인을 관리하는 것이다.

  고정희 간사에게 이렇게 열악한 근로조건인지 알고 왔냐고 하자 그이는 빙그레 웃는다. 굳이 묻지 않아도 자발적이지 않고는 결코 이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지만 그이가 이곳에서 어떤 마음으로 일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 간사는 학창시절 친구 중에 장애우 시설에 자원활동 하러 가는 친구가 있어 같이 갔다가 장애우를 처음 만나 특수교육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대학에 진학할 즈음에는 장애우에게 복음을 전하는게 교육보다 더 중요하다 싶어 마음을 바꿔 신학을 전공하게 됐다고 한다. “우리의 생이 이 땅 위에서 사는 것만으로 끝난다면 교육이 더 중요하겠지요. 그렇지만 우리 영혼은 땅에서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 것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단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렇다면 고 간사는 어떤 계기로 영혼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을까? “아파도 아프단 설명을 못 하는 중증 정신지체 장애들도 누가 자기를 좋아하는 것,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죠. 그리곤 표졍과 태도가 달라져요. 세상에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사랑은 영혼이 맑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한다. 고경희 씨는 아마도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장애우들에게 그 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큰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고 간사는 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전도사의 길을 걸으면서 계속 장애우시설을 찾아 다닌다고 한다.

  남자 간사 이길혜(31)씨는 모 교회에서 청년부 활동을 하며 전부터 이곳에 자원활동을 왔다가 최근에 아주 이 곳에서 간사 일을 맡게 된 경우다. 하루 24시간 근무에 매주 월요일밖에 쉴 수 없어 개인생활을 갖기가 어려운데 한 달 월급은 55만원이다. 이렇게 열악한 근로조건이다 보니 간사 한 명을 구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나 보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나그네집에 딱 맞는 사람을 고른듯 해 보인다. 고 간사에게 일하는 것에 비해 월급이 너무 적다는 생각을 하지 않느냐고 물어봤더니 나그네집 형편을 생각하면 이것도 많이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그네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는 일의 가치를 결코 돈으로 따지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받은만큼 일하는 그런 일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일하는 것, 이것을 희생이라고 표현하기 보다 운동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가장 약한 사람들이 바로 나그네죠”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나그네집 식구들이 있다. 이들은 가끔씩 나그네집에 자원활동 하러 나오는 사람들이다. 주로 교회 여전도회나 학교에서 나오는데 적어도 3,4명은 돼야 자원활동신청을 받는다고 한다. 와서 청소하고 빨래해주는 것도 좋지만 하루 이틀 와서 일해 주는 것보다는 식구들과 함께 놀아주는 것이 더 보탬이 된다고 한다. 장애우와 같이 놀면서 장애우에 대해 몰랐던 것을 알아 가는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두 명만 오면 덩치가 큰 성인 남자 장애우가 놀기 곤란하니까 세네 명씩 받는 것이다.

  끝으로 후원자들, 나그네집 식구들을 먹여 살려주는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다. 가끔씩 직접 찾아와 먹을 것을 가져오기도 하는데 이점에 대해 고 간사가 꼭 할 말이 있다고 한다. 후원인 가운데에는 본인이 가져온 음식을 보는 앞에서 다 먹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는데 정신지체 장애우 중에는 먹는 것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 많아 주는 대로 다 먹고 나중에 탈이 나면 그 뒤처리가 만만치 않다고 한다. 그러니 부디 그 자리에서 음식을 다 먹지 않는다고 해서 오해하지 말고 이해해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그네집 식구들 가운데 정신지체장애우도 명절을, 그 따뜻하고 들뜬 분위기를 안다. 명절이면 보고싶은 가족들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명절엔 부모님이나 친형제들이 찾아와 집에 가는게 그것을 알고 벌써부터 신이 나 있다. 1년에 한두 번씩 그렇게 집에 갔다 오고 나면 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느라 한동안 나그네집도 활기를 찾는다고 한다. 맛있는 음식, 새로 산 옷 등 자랑할게 무궁무진해진다. 그러나 가족이 없거나 있어도 찾아오지 않을 경우 나그네집에 홀로 남은 가족들은 차마 보기 민망할 정도로 우울해 한다. 그래서 고 간사는 명절 때만이라도 가족들이 나그네집 식구들을 꼭 데려가길 당부하고 싶다고 한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김 목사가 서울에 볼 일이 있다고 해 합승을 했다. 나그네집 식구들의 응급처지를 위해 최근 이 간사와 함께 간호선교신학을 배우러 다닌다고 한다. 서울에 거의 다 와서 미처 물어보지 못한 중요한 질문이 하나 생각났다. “그런데 이름을 왜 나그네집이라고 지었어요?”

  “신약성경 베드로전서에 보면 나그네, 행인은 가장 약한 존재라고 나와 있죠. 나그네는 하나님이에요. 그와 우리가 함께 사랑을 이뤄가자는 뜻이죠.”


사진, 글/ 노윤미 기자

작성자노윤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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