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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나눔과 섬김의 밥이어야죠”

밥 잔치마당 여는 한지흔 씨

본문

  ‘밥’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우리가 밥상에서 마주 대하는 그 ‘밥’이란 것은 어떤 이에게는 하느님같은 존재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자신의 몸을 혐오스럽게 만드는 애물단지같은 그 무엇이다.

  북한 어린이들의 굶주려 퀭해진 두 눈을, 아니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이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 한복판 노숙자들이 무료급식소 앞에서 필사적이 줄서기 끝에 받아든 밥을 미어지게 먹어대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안쓰럽게 바라보기도 하지만 곧이어 대하는 내 밥에는 왠지 감동이 없다. 그냥 허겁지겁 살아내기 위해서 배를 채워두는 일상의 행사는 가끔 귀찮아지기도 한다.

  그저 나 혼자만을 위한, 나만의 밥이기 때문은 아닐까.

“많이 먹어도 적게 먹어도 탈이 나는 밥! 어떤 이는 탐욕의 밥으로 죄를 짓고 또 어떤 이는 가난하지만 적은 밥을 잊고 지냈던 넉넉한 마음, 따뜻한 밥 한공기의 이야기를 온 마음으로 뜨겁게 느끼는 잔치마당에 모든 분들 누구든지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다소곳한 초대의 글을 내보이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쓰레기 문화를 살리는 모임’과 ‘우리말 우리글 살리는 모임’, ‘나눔과 섬김으로 함께 하는 친구들의 모임’ 회원들이다. 이 잔치마당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 12월 6일부터 8일까지 과천시민회관에서 진행될 예정인데, 무속인 이 밥을 놓고 비나리이자 넋놀음 같이 행하는 살풀이한 판도 곁들여질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희망의 밥을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바람이 적힌 종이학들도 불태워져 훨훨 날을 것이라고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초대하고 그들의 글을 받고 있지만 무엇보다 절실한 마음으로 밥을 바랐던 가난한 사람들의 ‘진짜’ 밥 얘기도 쓰레기더미에서 찾아낸 찌그러진 밥 공기나 아주 오래 전 도시락 뚜껑같은 것들 위에 풀어져 나올 것이다. 따뜻한 희망과 안타까움의 눈물이 베어날 것이 눈에 선연한 그 잔치마당의 한복판에 이 사람, 한지흔 씨도 있을 것이다.


‘우리집 못찾겠네요’라는 이름의 찻집 이야기

  한지흔, 그이에 대해 구구하게 설명을 하기 보다 먼저 그가 과천에서 운영하고 있는 ‘우리집 못찾겠네요’ (02-502-8443)라는 이름의 찻집으로 안내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서울 지하철 4호선 과천정부 종합청사역 인근의 과천극장 지하에 위치한 그 찻집은 ‘쓰레기...모임’과 ‘우리말...모임’의 실질적인 모임터이니 그 잔치마당을 위한 온갖 쑥덕공론들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이기도 하다.

  사실 그 찻집은 쓰레기 집합소라고 할 수 있다. 그 곳의 모든 탁자와 의자, 장식물들이 강남 아파트며 이곳 저곳의 쓰레기터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설명을 듣고 나서 자세히 살펴본 후라고 다들 제각각인 디자인과 재질이라는 점만 발견할 수 있을 뿐 그 말은 믿기질 않는다. 하지만 그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란다.

  “찻집 열려고 이 건물에 세를 들어온 다음에 제가 어디서 쓰레기들만 주워 갖다 놓으니까 수위 아저씨나 다른 상가주인들도 마치 냄새라도 나는 것 같은지 코를 감싸쥐고 찡그리면서 걷더라구요. 그런데 나중에 찻집 내부를 이렇게 정리하고 문을 열었더니 주위 사람들이 와서 보고 다들 ‘와’하고 놀래는 거예요. ‘아, 나도 이제부터 쓰레기통 뒤져야지’, 이게 유행어가 됐어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쓰레기통 기웃거리고 심지어 어떤 유행어도 나왔냐면 한 선생님 알게 되면 똑같이 쓰레기 인생된다고, 다 쓰레기통만 보면 눈이 간다고 그래요. 그리고 날 만나면 ‘이거 쓰레기통에서 주워왔어요’하고 그거부터 자랑하는 거예요. 참 기뻤어요, 그런거 보면.”

  그렇게 다만 한두 사람이라도 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쓰레기통 한 번 기웃거리게 되는 것, 그게 진짜 사회운동이라고 그이는 생각하고 있다. 그냥 쓰레기가 될 것이 다시 한 번 생명을 넣고 싱싱한 사랑과 다시 만나서 사람과 물건에 기운이 오가면서 그것의 생명력이 다시 살아날 때 그렇게 따뜻해지고 또 고맙더란다.

  이 찻집 전에는 바로 근처에서 헌옷과 헌책을 파는 가게를 운영했다는 사실을 알고 보면 그이의 쓰레기에 대한 애정의 깊이를 조금은 헤아릴 수도 있을 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모아들이고 곱게 다듬어 다시 생명력을 갖게 된 헌 옷이나 다른 물건들을 그이는 주위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들에게까지 고루 나누어 주기도 한다. 평범한 환경주의자를 넘어서 사람이라는 사실을 넘겨 짚게 하는 대목이다. 아닌게 아니라 올해 두 번째로 마련하고 있는 그 밥잔치마당도 생명사상이 아닌 평등사상, 말하면 나눔과 섬김의 사상에 기인한 것이라고 그이는 거듭 강조한다.


세월이 훌쩍 비켜가버린 그이의 얼굴

  이쯤해서 기자도 그이의 사진을 마주 대하고 있을 독자들에게 장난을 걸어보고 싶다. 예전에 장난기 감추지 못하고 기자에게 그 질문을 던졌던 어떤 분처럼, 옆의 사진을 좀 자세히 보시라.

  이 사람의 올해 나이가 몇이나 되어 보이는지. 서른 예닐곱? 마흔 한 둘? 에이, 너무 많이 본 것 아니신가. 하하, 이쯤해서 진실을 밝히자면 그이의 나이는 쉰 일곱이다. 실제 나이에 훨씬 못 미친 앳띤 얼굴들을 가끔 대하게도 되지만 그이의 얼굴을 대할 때면 그만큼이나 비켜간 세월이 어처구니없기까지 한다.

  그이를 장기수분들이 생활하고 있는 만남의 집에 취재갔을 대 처음 만나본 후 ‘그리운 수제비’와 ‘기쁜 슬픈 술’이 있고 온통쓰레기로 꾸몄다는 그이의 찻집 ‘우리집 못찾겠네요’에 가끔 찾아가 조금씩 그이를 더 알게 되면서 기자는 그 쉰 일곱해, 그리고 그 매일매일의 이십사시가 도대체 어떻게 채워져 왔는지 몹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장기수분들에게서 중풍등으로 쓰러진 몇몇 장기수 선생을 극진히 모시며 건강을 되찾을 때까지 돌본 자신들의 대모같은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현재도 어느 장기수분의 보호자로 되어 있다고 했다. 또 얼마 후에는 정신대 할머니들의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여러 가지를 챙기는 그이를 보게 됐다. 지난 8월 위안부 역사관 개관식을 앞두고는 누구보다 분주히 과천에서 경기도 광주까지를 오갔고, 개관식 당일에는 문화공연의 전반적인 무대 뒤 진행을 거의 혼자 도맡아 해내는 듯했다. 그 출연자들이 공연할 때 입었던 한복을 전부 그이가 손수 지었다는 얘기를 또 다른 분에게서 들었고 바라춤에도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또 9월2일 창립된 ‘민중의 기본권 보장과 양심수석방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에 공동대표로 그이가 참여했다는 얘기도 그 며칠 후 들었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는 몇 년 동안 승가생활을 했고, 이후 다시 환속하여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또 그 며칠 후의 일이다.

  ‘우리집…’과 또 하나의 ‘전통찻집’, 이렇게 두 개의 찻집을 운영하면서, 그것도 독신도 아니고 세 자녀의 어머니와 한 남자의 아내로서 말이다. 게다가 이미 장기와 시신을 의대 학생들의 해부학 실습용으로 기증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인생 선배로 바라볼 때 감히 발꿈치를 따라가기 아득할 정도로 치열하게 사시는 분이라는 생각은 웬지 무력감을 느끼게도 했다.

  그런데 더욱 아득해지는 사실은 이미 지난 해에 용하다는 한의사가 그 해를 넘기지 못할 거라는 진단을 내렸다고 하고 지금도 아슬아슬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미 한 쪽 신장이 없고 심장에도 병이 있어, 그런 탓인지 예전에는 눈도 잘 안 보이고 귀도 잘 안들렸지만 두세 차례의 수술 끝에 겨우 지금의 시력과 청력을 되찾았다고 한다.

  “내가 귀가 한 쪽이 안들리는데 오른쪽도 자꾸 장애가 와요. 왼쪽이 문제가 생기니까 오른쪽도 문제가 생기더라구요. 이 상태로 나가면 보청기 껴야 되지 않겠는가 싶어요. 남들이 질문할 때 난 자꾸 딴소리를 하게 되는게 입 모양을 봐서 잘못 보면 딴 얘기를 하게 되는 거라. 한 때는 눈이 하도 안보여서 아예 눈 감고 생활을 해봤어요. 내가 눈이 완전히 안 보일 때 어떻게 생활할 수 있는가 해서 시간만 나면 눈감고 하는 일을 이렇게 연습해본 적도 있어요. 다행히도 두 번 수술해서 예전보다 눈은 잘 보여요. 그렇지만 안보이면 안보이나 보다, 안들리면 안들리나 보다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이젠 병원도 안가요.”

  그렇지만 남들보다 조금 갖게 될 자신의 남겨진 시간에 대해 그이도 어쩔 수 없이 생각이 많은 듯하다.

  “주위 분들이 보기에 제가 맘이 참 급해 보인다는 생각을 요즘 참 많이 하실 거예요. 그건 마음이 급하다기 보다 내가 가는 곳마다 해야할 일들이 눈에 보이고 또 그게 마음이 와서 꽉 차면 이쪽 일을 빨리 발리 서둘러서 끝내야 하는 상황인데, 그게 항상 내일이 없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래요. 대개 시한부인생들은 그런 여유가 없어져요. 넉넉하게 봄햇살처럼 이렇게 관조하면서 보는게 아니라 가을의 해를 보는 것처럼 ‘이 햇살이 기울면 내일이 올까’, 그런 생각이 드니까, 그러니까 마음에 여유가 없죠. 가끔 다른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설명했던 것이 무의식 속에 그 스토리가 전개돼요. 길거리를 다니다가 거짓말처럼 갑자기 앞이 안 보이면 발리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 입장이거든요.”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그는 병마 앞에서 넋 놓고 있지는 않다. 그이는 쉬고 있으면 더 병나고 더 아프다는 사람이다. “노닥거렸다는 생각이 들 대, 그 시간에 일했으면 어땠을텐데 생각하면 가슴이 막 뛰어요. 누가 나한테 일거리를 줬을 때 제일 기쁘고 고맙고 눈물나고, 살아있는 생각이 들고 내가 할 몫이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요.


거짓없는, 살아있는 양심인 그이의 손

  사실 이 ‘사람사는 이야기’라는 꼭지에서는 그 사람의 출생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삶을 대력적으로나마 모두 담아내곤 한다. 다른 모든 일도 마찬가지겠지만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만큼 인과관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을 이야기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이도 원하지 않은 일이기도 했지만 기자도 그 삶의 구구한 사연을 다 담아내고 싶지는 않다. 소설가 안일순 씨가 쓴 <과천미인>이라는 단편 소설로도 다 담아내지 못한 그 이야기를 이 네면 짜리 지면에서 풀어 낸다는 것은 어설픈 손놀림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저 현재 그이가 살아가고 있는 방식을 기자가 이해한 한도 내에서 일부라도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이의 손얘기부터 해야 할 것 같다. 거칠하고 딱딱해서 나무토막 같다는 손, 세 손가락이 기계에 말려 들어가 아직 흉터도 품고 있는 손, 그래서 늘 퍼렇고 피가 잘 안통해서 겨울에는 너무 시렵다는 손, 쓰레기더미를 뒤지다가 아무렇게나 그 사이에 끼어있던 유리조각들에 숱하게 베이기도 했다는 손이다.

  “그래도 살아있는 것 요 손 하나, 요거 뿐이에요. 눈도 입도 귀도 가끔 거짓말하고, 마음도 거짓말을 하는데 이 손만은 살아있는 양심이에요. 내 몸에서 요 부분은 안 썩었으면 좋겠다 싶어요. 그리고 이게 정상이라면 나중에 누구한테 줘도 안 아까운 부분이에요. 다른 부위는 주기가 좀, 그래요.” 그러나 그이는 예전에 입은 상처 때문에 잘 곱아지지 않아 조금 삐뚤한 글씨를 내보이게 될 때마다 몹시 부끄러워 하기도 한다.

  자세히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 손으로 그림을 그렸던 때가 있었다고 했다. 그냥 계속 그림을 그렸다면 욕심 많은 삶이니까 어디 교수자리를 탐하고 언젠가는 그 자리에 올랐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렇지만 서른 셋 나이에 그이는 붓을 꺾어버렸다고 했다.

  “그 때는 백지는 백지로 있는 상태가 제일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어요. 백지에 내가 붓칠하는 순간, 그건 이미 탐욕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그림을 그려왔지만 사물을 보고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이 제대로 나타났던 적이 없었어요. 그것 때문에 많이 침울하기도 했었고. 그런데 작품을 하나 완성하고 처음으로 조금 만족한 듯한 느낌을 받은 그 며칠 후의 일인데 알고 지내던 목사님이 돈 십만원이 없어서 자궁의외 임신된 임산부가 저기 빈민촌에서 대굴대굴 구르고 있고 생명이 위태롭다고 전화를 하셨어요. 어렵게 어렵게 십만원을 구해가지고 갔죠. 그 때는 나도 어려웠을 땐데. 하지만 결국 그 사람은 그 후유증으로 삼 년도 못돼서 죽었어요. 그 때 무력감이란... 나는 화폭에 그림이 안된다고 징징대면서 사오 만원짜리 물감을 처덕처덕 바르고 있었는데, 그거 두 개면 사람의 생명도 구할 수 있었는데, 이제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일까 생각했어요. 이제 그림은, (주위 모든 사람들이) 밥 걱정 안할 때 그림 다시 그리겠죠. 밥 걱정 안할 때.”

  그런 일을 겪고 방황하면서 자신이 살아갈 삶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일곱 가지, 자신이 평생을 두고 추구해야할 과제를 스스로에게 던지게 됐다.

  우선 그가 중요하다고 꼽은 것이 우리말 우리글 살리기였다. 그래서 <우리말 바로쓰기>와 같은 많은 우리말글 관련 저서를 낸 이오덕 선생을 찾아갔고, 현재 ‘우리말우리글살리기시민모임’ 의 회원들과도 인연을 맺게 됐다. 그 회원들은 그저 길을 가다가 외국어가 무분별하게 써 있는 찻집에 들어가 조용히 차를 마시고 나가기 전에 주인에게 그런 외국어 보다는 이런 이런 우리말이 좋지 않겠냐고 조곤조곤 얘기한 후 그냥 돌아나오곤 한단다. 그래도 자신들의 말을 듣고 외국어로 썼던 것을 다른 우리말 표현으로 바꾸는 찻집들이 생기는 사실에 기뻐하며 조금씩 우리말이 제 자리를 찾아나 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푸르디 푸른 젊은이들이 영어가 크게 써진 옷을 입고 아무 거리낌없이 길거리를 다니는 모습을 보면 눈물까지 난다는 그이다. 그 젊은이들의 책임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어른들의 책임이라는 것을 통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이 정신대, 장기수 분들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찾는 것이었고 그 분들과의 인연은 앞서 대략 설명한 대로다.

  “내가 붓을 꺾었을 때 분명히 나 자신하고 약속한 게 있어요. 입 밖에는 안냈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곳, 나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하여튼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애쓰시는 분들, 그 분들이 힘이 부족할 때, 그래서 힘이 필요할 때 나는 어느 자리에라도 서야 한다, 이름 앞세우지 말고. 그러다 이제 여기에 내가 필요없겠다 싶으면 말없이 내 자리로 와야지 생각했어요.”


“우리집 찾았네요” 할 날이 오기를

  그이가 주위 아름다운 선후배들과 나누고 싶었던 사랑은 옛 할머니나 어머니들이 아무 조건을 걸지 않고 주었던 그런 내리사랑이다. 그 옛날 고향에서 그랬던 것처럼 학교에서 돌아온 후 열어젖혔던 창호지문, 그 방문 안에 언제나 그 모습으로 계시던 할머니, 어머니들, 그저 못줘서 한이 됐던 그 분들의 사랑이다.

  때로는 그도 그런 사랑을 계속 배우는 모양이다. 그가 가끔 침을 놓아주곤 하는 청소부 아줌마, 수위 아저씨들에게서.

  “내가 침 놓으러 가면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은 줄 게 없으니까 김치하고 따뜻한 밥 한끼 주려고 몇 시쯤 가겠다 하면 밥솥 타이머를 시간 맞춰서 딱 눌러놔요. 그래서 제가 들어가면 거의 정확하게 그게 딱 꺼져요. 그렇게 어두침침한 지하실에 계신 청소부 아줌마들을 만나고 계단을 오르면 눈물이 나요. 밥이 식을까봐 이불 속에 이렇게 넣어놨던 밥 공기를 내미시던 엄마 손길이 떠올라서요. 그런데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은 왜 그러질 못할까요.”

  하루는 청소부 아주머니가 어깨 때문에 무척 고통스러워 해서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니 계단들 모서리에 깔림 철심을 반들반들하게 닦느라 그랬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자신의 한 발이라도 더러움을 더할까 두려워서 그 부분을 안 밟으려고 조심조심 기어가듯 이 계단을 내려가곤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아직 완전할 쓰레기가 되지 않을, 되어서는 안될 물건들을 아끼는 마음도 예전 어머니, 할머니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구두쇠들이 갖고 있는 미덕들이 새롭게 발견되고 칭송되고 있는 요즈음이기도 하지만 사실 누구랄것도 없이 우리들 모두는 각자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생활모습을 떠올려보면 쉽게 그 마음을 그려낼 수 있다.

  한지흔 씨는 “무심코 흘린 밥 한 알도 할머니는 물에 씻어 드시기도 했죠. 근데 도시락 반찬으로 김을 싸거나 이웃과 나눌 쌀을 담거나 할 때 사용했던 라면봉지를 놓고 ‘재활용’ 운운하지 않았잖아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들의 눈은 알록달록한 그 봉지에서 더러움을 발견한 걸까.

  “아시다시피 과천에서는 매년 세계마당극대잔치가 열려요. 이번 밥잔치마당도 그 행사시기에 같이 열자고 하는 제의가 있었지만 왜 꼭 마당극잔치 끝나고 하는지 아세요. 다른 이유도 있긴 하지만 마당 극잔치가 끝나면 쓰레기가 너무 많이 나와요. 그럼 우린 그걸 이용해요. 포스터도 마당극잔치 때 썼던 그 뒤쪽에 써서 붙이는 거예요.”

  밥 잔치마당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를 더 들은 후 인터뷰를 정리하려는데 문득 찻집 이름‘우리집 못찾겠네요’에서 그 ‘우리집’이 어떤 의믤까, 궁금해진다.

  “모두들 ‘내 집’에 대한 꿈은 있잖아요. 그렇다면 우리집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집, 들어오고 떠날 수 있는 집, 공동의 집을 말하는 거예요. 전신대, 장기수, 입양자, 실직자, 특히 죄를 짓든 안짓든 옥살이하는 분들 나오시면 갈 데가 너무 없는데, 그 분들이 마음 편하게 오갈 수 있는 그런 집 말이에요. 또 우리 사회를 보면 우리말, 우리글, 우리 먹을 것, 우리 볼거리.. 전부 다 우리 것이 아닌 세상이잖아요. 내 것은 있는데 우리 것은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집 못찾겠네요에요.”

  그래서 ‘우리집 못찾겠네요’가 앞으로 ‘우리집 찾았네요’로 이어지기를 그이는 꿈꾼다. 그 곳은 이런 것이다.

  “작은 터에 집을 지어서 진정한 사람내음 가진 사람, 사랑 하나 그리운 사람들, 모여 사는 어우러지는 마을을 만드는 거예요. 공동체라는 말은 너무 어렵고, 우리는 그냥 작은 마을에 손이 없는 사람 발로 하고 발이 없는 사람 손으로 하고 서로 도와주고 도와주면서 살았으면 해요. 그래서 그게 잘 이뤄져서 나중에 기술학원도 하나 차려서 있는 사람은 돈 주고 배우고 없는 사람은 무료로 배울 수 있는 기술학원이 차려져서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집 못찾겠네요가 운영되겠죠. 여기 드나드는 분들이 거기 투자되고 있는 거예요. 백 원 하나하나가 그 우리집 찾았네요를 만들고 있어요.”

  그이 자신은 이름 앞에 그저 ‘두 손 모아’라는 말이 덧붙여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렇지만 어떤 이는 그이를 작은 예수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과천의인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기자는 그이를 어떻게 칭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그저 그이를 위해 두 손 모을 뿐이다.


글/ 한혜영 기자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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