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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이야기] “학교부적응아가 사회부적응아가 되는 일은 없어야죠”

최연소 장애우 교육위원 정상범 씨

본문

지난 8월19일 실시된 제 3대 대전시교육위원 선거에서 전국 최초로 장애우 교육위원이 당선됐다. 대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대성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올해 서른여섯의 정상범 씨가 그 주인공이다. 참고로 말하면 정상범 씨는 최연소 시교육위원이기도 하다.
  본인에게는 최초의 장애우 교육위원이란 꼬리표가 부담스러울지도 모르겠으나 일반 교육에 비해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 열악한 특수교육계에서는 그이에게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일을 시작한 지 이제 겨우 한 달이 조금 지났지만 그이를 만나 서른여섯 해 동안 그이가 살아온 이야기와 장애 우에 대한 생각, 교육에 대한 생각, 또 앞으로 교육위원으로서 어떤 활동을 펼칠 것인지에 대해 들어보았다.

너는 시계나 도장파는 일을 배워라

  팔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집안의 온갖 귀여움을 받고 자란 정상범 씨는 세 살 되던 해에 소아마비로 장애를 갖게 되었다. 그로 인해 그이의 인생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러나 그 변화는 세 살 이후에 바로 나타난 것이 아니고 세월이 한참 흘러 그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후천적으로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 대부분이 장애를 갖고 난 다음 자신의 변화보다 주위 사람들의 변화에 더 큰 충격을 받고 성격도 바뀐다고 하는데 정상범 씨는 달랐다. “장애를 갖고 나서 제 생활은 달라진게 없었어요. 솔직히 전 사춘기가 될 때까지 제가 장애우라는 사실조차 몰랐거든요.”

  걸을 때마다 다리 한 쪽을 절었어야 할텐데도 정작 본인은 사춘기가 될 때까지 장애에 대해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자는 학교에서 장애에 대한 개념을 배운 적이 있다. 장애에 대해 배우기에 앞서 손상과 불능에 대해 먼저 배웠는데 ‘손상’은 인간의 어떤 조직이나 기관에 결함이 생긴 것이고, ‘불능’은 몸의 일부 또는 기능의 일부가 구비되지 않거나 이상이 생겨서 재생 불능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그럼 장애란 무엇인가? 손상이나 불능으로 지적, 심리적, 사회적, 직업적인 분야에서 개인이 불리하게 됨을 의미한다고 했다.

  즉 사춘기까지 정 씨는 불능의 단계였지 장애의 단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시골에서 자란 탓도 있겠지만 부모님과 위로 일곱이나 되는 형과 누이의 따스한 배려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그이는 소아마비 장애에도 불구하고 여느 집안의 막둥이들처럼 장난끼가 다분한 외향적인 성격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다.

  그럼 정상범 씨는 어떤 계기로 본인이 장애우임을 느끼게 되었을까?

  “고입시험에 낙방했어요. 재수를 했는데 또 떨어졌어요. 그 당시 저는 대전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의사가 되는게 꿈이었거든요. 그런데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이렇게 두 차례나 떨어지니까 부모님께서 시계나 도장기술을 배우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난데없이 시계나 도장기술을 배우라 하실까, 어이가 없었어요.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장애우이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신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지금도 그 때와 많이 달라진 건 없지만 그 당시에는 다리만 불편하고 손 사용에 별 어려움이 없는 장애우들은 대부분 시계나 도장 기술을 배웠다. 열심히만 하면 나중에 가게를 차려 독립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장애우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그나마 장래성이 밝은 일이었다.

  그 때 정 씨는 처음으로 본인이 장애우라는 걸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정 씨는 도장파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활동적인 것을 좋아하는 그이로서는 하루 종일 가게에 앉아서 도장만 파야 하는 일은 생각하기만 해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다행히 어머니가 “상범이를 더 공부시켜야 한다”며 편을 들어주셔서 그이는 다시 공부를 했고 몇 년 후 충남대 수학과에 진학했다. 바라던 대로 의대에 진학을 하지는 못했지만 일단 대학에 들어가면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그러다 보면 뭔가 그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정이 모자란 아이들

  정 씨는 대학생활을 하며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많은 경험을 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다크호스’라는 동아리에 가입한 것이다. 다크호스는 장애 학생들이 주축이 된 동아리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사회봉사 동아리였다.

  정 씨는 1학년 때부터 대학교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 자원활동을 나갔다. 그 학교에선 학습부진아반이 있었는데 정 씨는 특히 그 반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가르쳐주고 함께 놀아주었다.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하고 선생님한테도 관심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차츰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고 학습부진아에서 학교부적응아로 자라고 있었다.

  “뒤처지는 아이들일수록 선생님의 사랑이 더 필요한 법인데 그렇지 못한 현실을 보면서 아이들에게 사회복지적 마인드가 있는 선생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자주 머리를 쓰다듬어줬더니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이 저를 무척 따르더군요.”

  수업이 없는 오후에는 학습부진아반이나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 학습지도를 해주고 방학 때엔 학교에서 할 수 없었던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해 아이들을 모아 작은 캠프도 열었다.

  4학년이 돼서는 야간학교에 나가 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다니지 못한 사람들도 가르쳤다. 4년 내내 교육현장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만나면서 정 씨는 느낀 점이 많아 사회복지에 대해 제대로 공부를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집안 형편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졸업하자마자 바로 공부를 시작하지 못하고 꾸준히 사회복지단체에서 활동을 하다가 10년 후인 1995년 하남대학교 지역개발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2년 뒤 ‘대전광역시 중학생 사회봉사활동의 실태와 활성화 방안’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해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획득했다. “대학시절부터 하고 싶었던 일을 이제야 하게 됐죠. 사회 복지적 마인드가 가미된 교육. 그것이 제가 바라는 이상적인 교육상이에요.”


대전에서 가장 인기있는 학원강사

  언제까지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가며 생활할 수 없기 때문에 우선은 졸업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졸업 후 정 씨는 이력서를 들고 이곳 저곳 많은 곳을 찾아다녔다. 서른 군데가 넘는 곳에 이력서를 재출해 보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문득 고입 시험에 떨어졌을 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떠올라 그이는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취업이 쉽지 않아 그이는 마음을 고쳐먹고 취업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사회복지단체에서 계속 자원봉사활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 후 정 씨는 매일같이 눈만 뜨면 사회복지단체에 드나들었는데 거기서 여직원 한 명을 사귀게 되었다. 자주 보면 정이 든다고 한 이년 그렇게 오가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아주 가까워져 팔십 육년도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을 하고 얼마 안 있어 학원을 경영하는 대학 선배한테서 연락이 왔다. 그 선배 역시 장애가 있는 선배였는데 정 씨에게 아이들을 가르쳐 볼 생각이 없냐는 제의를 했다. 좀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학교 다닐 때 아이들을 가르쳐 본 경험도 있고 당장 일자리도 필요했기 때문에 정 씨는 그 다음날부터 바로 학원으로 출근을 했다.

  졸업 후 처음 갖게 된 직장인만큼 정 씨는 학원생활에 열과 성의를 다했다. 학원강사라는 직업이 보통 일요일에도 보강을 하느라 쉬지 못하고, 평일 오전에는 수업 준비를 하고 오후에는 밤 열두 시까지 수업을 해야 하는 등 워낙 고된 일이어서 다들 오래 버티지 못하는데 그이는 적응을 잘 했다.

  그리고 강사일을 시작한지 이 년만에 정 씨는 대전에서 가장 수강생이 많은 인기 학원강사가 되었다. 정 씨의 수업에 수강생이 자그만치 일천명이 몰렸는데 서울도 아닌 대전에서 수강생이 일천명이 넘는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 씨는 그 비법을 들어보자. “비법이 따로 있나요? 딱딱한 수학과목을 어떻게 아이들에게 재미있고 쉽게 가르칠까 늘 연구하는 거죠”

  마치 수능시험에서 수석을 한 학생이 인터뷰할 때 하는 말을 떠올리게 하지만 사실이 그랬단다. 마이크 시설도 안된 강의실에서 몇 년 째 매일같이 10시간을 연달아 수업을 하다가 그만 당뇨에 걸릴 정도였다. 당뇨에 걸릴 그이는 몸을 추수리기 위해 학원을 그만 두었다. 6년만에 처음으로 갖는 휴식이었다.

  휴식 후 그이는 독립을 해서 학원을 차렸다. 중학생을 상대로 해서 국영수 과학만을 가르치는데 그이의 명성 덕분인지 학원 문을 열자마자 다시 일천명이 넘는 많은 학생들이 학원에 등록을 했다. 그 여파를 몰아 그이는 1년만에 대전시내에 두 개의 분원을 냈다. 세 개의 분원에 각각 따로 원장을 두고 그이는 세 곳을 돌면서 강의를 계속 하는 동시에 전체 이사장직을 맡았다. 물론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러나 그 돈의 대부분이 개인의 호주머니로 들어간 것은 아니고 대학 때부터 후원하고 있던 아이들과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이가 관여하고 있는 각종 사회복지단체에 다시 환원을 했다


빵점 남편 백점 아버지

  밖에서 정 씨가 학원강사로서 명성을 쌓아가는 동안 그의 가정에는 불화의 씨앗이 점점 자라고 있었다. 정 씨는 학원 일만으로도 충분히 바빴지만 남에게 거절을 못하는 성격 탓에 여러 단체에 이름을 올려 놓고 활동을 했다.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했던 그이는 대전광역시 배드민턴협회장과 중구 체육회 이사직을 맡고 있고, 사회복지단체로는 사회복지법인 한마음 이사, 둔산 사회복지관 자문위원, 사회복지협의회 자문위원단 부위원장, 대전광역시 노인의 전화 부회장을 맡았다. 또 장애우로서 장애우 관련 단체의 일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대전․충남 장애인 재활협회 이사일을 맡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끌려다니며 하는 것은 아니고 정 씨는 스스로도 자부심을 가지고 또 보람을 느끼며 참여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집안일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데 특히 아내의 불만이 많았다. 그런 와중에 그이가 95년도에 시교육위원 선거에 출마하게 되자 아내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이 일로 정 씨는 아내와 심한 갈등을 겪었고 그 해의 합의 이혼을 하게 되었다.

  사회적 통념으로 볼 때 사회 저명인사가 이혼을 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보기 마련이다. 특히 그 사람이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일 때는 더욱 그러한데 시교육위원인 그이에게 이혼 경력은 흠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 씨는 이 부분에 대해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주었다.

  “앞만 보고 살다보니 사정을 놓게 됐어요. 제가 부족한 탓이죠. 인정합니다. 그러나 애들 엄마가 저에 대한 불만을 애들한테 화풀이하면서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많이 불안해 했습니다. 수업시간에 화장실을 두 번 간다든지 주위가 많이 산만해졌죠. 그리고 엄마를 무서워했습니다. 당시 애들은 큰애가 10살, 작은애가 7살이었는데 최종적인 결론을 아이들한테 내리라고 했더니 아빠랑 살겠다고 하더군요. 대신 아빠가 새엄마를 얻지 않는 조건에서요.”

  결국 하던 일을 포기할 수 없었던 정 씨는 아이들을 위해 이혼을 결심했고 지금까지 새엄마를 얻지 않고 할머니와 그이의 일곱 형님과 누나들이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다. 정 씨도 이혼 후에도 아이들한테 더 신경을 쓴다. 아무리 바빠도 일년에 두 번 여름과 겨울방학 대는 가까운 곳에라도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다녀온다. 또 일주일에 두 번은 강의가 없는 낮시간을 이용해 담임 시간들을 만나 상담을 하고 지도계획표도 함께 작성한다. 이혼 후 엄마 몫까지 하겠다는 생각에 아이들 교육에 더 신경을 썼는데 그게 계기가 되어 그이는 아이들 학교 운영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게 되었다.


소외된 아들을 위해 발로 뛰는 교육위원

  한 번 맡은 일은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그이의 성격 탓에 그이는 학교 운영위원회 일도 잘 해냈다. 다른 학부형과 교사들 사이에서도 그이에 대한 신임도가 높아 그이는 올해 또 다시 시교육위원 선거에 출마하게 됐다.

  4년 전 선거 때는 선거방식이 달라 구위원이 교육위원을 선출했지만 이번에는 학교 위원회 대표자가 선출을 했다. 정 씨보다 나이가 많은 구의원들은 젊은 사람의 개혁적 성향을 그리 달가와하지 않았지만 학교 운영위원들은 그간의 그의 활동사항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젊은 그이를 적극 지지해주었다.

  교육위원은 경력직과 비경력직으로 나뉘는데 대전시 교육위원은 경력직이 6명, 비경력직이 1명이다. 경력직은 말 그대로 학교 현장에서 10년 이상 아이들을 가르친 경력이 있어야 하고, 비경력직은 정 씨 같은 경우인데 정 씨가 그 1명으로 당선된 것이다.

  교육위원은 교육감을 견제 심의 의결 감사하는 기능을 갖고, 대전시내 모든 교육 문제를 다루게 된다. 임기는 4년으로 1998년 9월부터 2002년 8월까지다.

  교육위원이 된 지 꼭 1달이 지났는데 그이의 요즘 하루 일과는 어떠한지 궁금하다. “6시에 일어나서 배드민턴, 조깅, 등산을 하고 8시 30분에 한밭도서관에 나가 자료수집을 하죠. 사람 만나는 약속은 주로 점심식사 시간에 잡고, 오후 2시부터 사무실에 나와 민원을 받습니다. 저녁시간엔 관련 기관을 찾아가 실태조사와 면담을 하고 저녁 시간 이후엔 개인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모임에 나갑니다. 11쯤 귀가해서 아이들 얼굴 보고 하루를 정리하고 새벽 1시에 취침을 합니다.”

  그러고 보니 일과중에 강의 시간을 잡기도 어렵게 될 지경이었다. 요즘은 강의를 하지 않느냐고 묻자 일이 많이 직접 강의를 하지 않고 학원 운영만 한다고 한다.

  한 달에 천만원 가까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학원 강사직을 포기하고 무보수 명예직을 택한 것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혹 정치에 뜻이 있는 게 아니냐는 질문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 씨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굳이 그에 대해 해명하기 보다는 그이가 교육위원에 뜻을 두게 된 이유를 더 열심히 설명을 한다.

  “표면에 나타나는 장애보다 정신적인 장애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청소년의 학교폭력도 성장과정에서 여러 가지 결손으로 인한 장애라는 생각이 들구요 그래서 저는 소외된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과 이를 뒷받침해줄 정책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학교 부적응아가 영원한 사회부적응아가 되지 않도록이요. 앞으로도 한 30년간은 그런 활동에 주력할 계획입니다”  최근 광주시에는 재정적인 이유로 서른개가 넘는 특수학급을 폐지한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의 견해를 들어보았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야 서로 적응을 할 수 있는데 특수학급을 없앤 것은 잘못했다고 봅니다. 자칫하면 그 아이들이 더 소외될 소지가 많거든요. 재정이 부족하더라도 다른 방안을 마련했어야 하는데요. 다른 시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분명히 잘못했다고 보고 대전시에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 씨는 전교조와 교총에 대해서도 유연한 입장이었다. 당선되고 전교조와 교총 인사들을 모두 만났는데 결국 두 곳 모두 지향하는 것이 같다며 정치관에 비유하면 여당과 야당이 있듯이 두 단체가 제도권 안에서 교육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선거 때마다 후보들은 자신을 알리기 위해 독특한 표어를 마련하는데 그이는 어떤 표어로 선거운동을 했을까? 그의 선거 홍보 전단지를 보니 ‘연구하는 교육위원, 봉사하는 의정활동, 신나는 대전교육’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앞의 두 가지 구호는 그이의 과거 경력을 표현한 것 같고 뒤에 ‘신나는 대전교육’은 그이가 임기 동안 대전시 교육을 그렇게 만들겠다는 다짐일 듯하다. 4년 뒤 이 전 단지를 다시 펴 봤을 때 그이가 내건 표어와 공약이 모두 현실이 되있기를 기대한다.


사진 글/ 노윤미 기자

작성자노윤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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