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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이야기] “북한 두레마을 준비 다 됐어요”

농촌에서 사람살림 운동을 펼쳐나가는 두레마을 사람들

본문

 올해 내로 북한 나진 선봉에 남북한 고동 두레마을이 세워진다. 정권이 바뀌면서 남북 대화도 크게 개선될 것이라는 발표와 함께 1970년대 청계천에서 빈민운동을 시작했던 활빈교회의 김진홍 목사가 20년전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에 제1두레마을을 세운 데 이어 국내에서는 두 번째로 남북한 공동두레마을을 설립하는 것이다.
지난 2월 김 목사가 북한을 방문해 북한측과 직접 체결한 남북한 고동 두레마을 성립은 남북 화해의 물꼬를 틀 것을 기대를 모으고 있다.
 남북한 공동 두레마을의 모델이 될 것으로 보이는 제 1두레마을을 찾아가 신앙공동체이자 농업공동체를 꾸리며 살아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70년대 청계천 빈민운동에서 시작한 두레 공동체운동

 조암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다시 조암에서 이화리가는 버스를 갈아타고 한 10분쯤 가다 보면 ‘두레마을’이라는 표지가 보인다. 현재 약 3만평의 땅에 100가구가 살고 있는 두레마을은 신앙 공동체이면서 농업공동체이다.

 신앙공동체하면 브니엘이니 한나, 임마누엘 등 성서에 나오는 이름을 지었을 법한데, 이속은 ‘농업’을 한다는 것에 더 중점을 둔듯하다.

 두레는 삼한시대부터 발생해 일제시대가 시작될 까지 이어져 온 공동생간방식의 한 형태로 일할 능력이 있는 모든 구성원은 공동체에 기여하지 않으면 안되고, 공동체는 기여할 능력이 없는 모든 가족을 도왔다. 아무도 제외되지 않았으며, 어떤 개인도 공동체에 대해 독단할 수 없다는 두레정신을 신앙을 바탕으로 계승한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선교를 위해 농촌공동체를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27년 전 현 두레마을 대표인 김진홍 목사는 서울의 대표적 빈민가인 청계천에 활빈교회를 세워 고아, 장애우, 노인 등 병들고 약한 사람들을 돌보았다. 이른바 빈민 선교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1976년 청계천 판자촌이 철거되면서 우연찮게 활빈 귀농개척단을 구성해 5년 동안 함께 했던 8가구와 함께 경기도 남양만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땅을 개척해 농사를 짓는 것밖에 없어서 이 때부터 본격적인 농촌선교와 지역 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두레마을’의 유래가 된 것이다.

 이렇게 30여 년간을 빈민, 농민 선교운동을 하고 있는 김 목사를 두고 사람들은 그를 정약용같은 인물이라고 말한다. “농민, 민중의 아픔을 보듬고 사회개혁을 외치는 목사요, 경영가요, 교육가”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두레공동체가 표방하는 신학을 일컬어 일각에서는 ‘목민신학’이라고 부른다. 목민신학이란 간단히 말해서 이기심, 소유욕과 명예욕에서 해방된 채 정직과 부지런함으로 신앙심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목민신학은 점차 단순이 선교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현 사회에서 파괴된 인간을 ‘연대적 인간’, ‘공동체적 인간’으로 회복하는 ‘사람살림’운동으로 번져나갔다.

 그리고 목민신학은 곧 우리 나라 뿐 아니라 북한동포는 물론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민족에게까지 뻗어나가 지난 1996년에는 해외에서는 최초로 미주 올버니에도 두레마을이 만들어졌다.


 유기농법으로 자급자족하는 것이 목표

 마을에 입구에는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야채를 재매하는 비닐하우스와 유기질 퇴비장이다.

 이 곳에서는 유기농법을 이용해서 농사를 짓기 때문에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유기질 비를 사용해 땅을 기름지게 하는 방법으로 농사를 짓는다. 이석은 사람 뿐만 아니라 자연도 함께 살아야한다는 두레정신을 잘 반영한 것이다.

 마을에는 예쁜 조각과 나무로 만든 표지판이 많아 마을에 있는 건물의 이름을 쉽게 알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수 없기에 그 다음부터는 두레마을 홍보담당인 김치산 씨의 안내를 받았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공터가 보이는데 이것은 야외 강의장이다. 이 야외 강의장은 용도가 다양한데 매일 아침 6시면 마을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손을 잡고 기도를 드리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예배당이자, 매월 보름이면 열리는 마을 잔치 때 제기도 차고 널도 뛰고, 줄다리기도 하는 운동장도 된다.

 또 마을 사람들의 사기가 떨어졌다 싶으면 자장면내기 축구시합을 벌이는 축구장으로도 쓰인다.

 이 다용도의 야외 강의장을 세탁소와 믿음관, 평화관, 소망관이 오른쪽에서부터 쭉 둘러싸고 있다. 세탁소는 마을 공동 세탁장소로 세탁시설 및 보관소를 갖추고 있고. 평화관은 여 독신자와 고아의 숙소로 사용중이다. 또 믿음관은 훈련생의, 소망관은 남학생과 할머니의 숙소다.

 신앙공동체인만큼 마을의 중앙에는 활빈교회가 위치하고 있다. 교회 입구 양쪽으로 완만한 경사로가 나 있어 휠체어를 탄 장애우와 노인을 배려했음을 알 수 있었다. 문에는 문턱이 없고 휠체어가 들어올 수 있도록 입구에서부터 강단 바로 앞까지 의자를 비워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바닥에 앉는 것이 더 편한 노인들을 위해 온돌을 깔고 그 위에 장판을 깔아 전체적으로 장애우와 노인에 대한 자상한 배려를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교단에는 화려한 장식이 하나도 없다. 심지어 마을 전체에 핀 흔한 들꽃 한송이조차도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면 하늘이 바로 보인다. 아마도 자연친화의 의미가 담긴 듯하다. 특이한 것은 예배당 중앙에 있는 십자가인데 백두산 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듯하고, 목사님이 설교하는 강단은 청계천 활빈교회 시절 쓰던 것으로 벌써 25년이 넘은 것이다. 초창기 그 빈민운동의 정신을 간직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예배가 없는 날 교회는 마을 사람들 혹은 이웃에 사는 주민들의 결혼식장으로도 이용된다. 지역사회를 생각하는 두레마을의 정신이 물씬 풍겨나오는 대목이다.

 교회 맞은편에는 남자 독신자와 장애우가 생활하는 사랑의 집이 있고 그 앞에는 부부들이 생활하는 행복의 집, 그 왼쪽에는 콩나물과 표소를 생산하는 콩나물공장, 국수 및 참기름 농산물을 가공하는 가공공장, 야채 및 농산물을 보존하는 저온창고, 국수공장이 있다. 그리고 마을의 맨 오른쪽 끝에는 놀이터와 어린이집, 그리고 남자 독신자와 부부 숙소인 야곱의 집이 있다.

 마을을 다 둘러보고 나오는데 길 건너 밭에서 당근, 파 등 모종을 열심히 심고 있는 다음 사람들이 보였다. 화산 7리 이장이자 두레마을에서 10년째 살고 있다는 베테랑 농꾼인 금경연 시는 근래에 보기 드문 까만 고무신을 신고 있었는데 밭일 뿐만 아니라 다른 일 할 때도 노상 까만 고무신을 신고 다닌다 해서 별명도 ‘까막 고무신’이라고 한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에게 어떻게 10년씩이나 두레마을에서 살게 됐냐고 묻자 “더불어 살아야 살맛나는 것 아니냐”는 말로 답변을 대신한다. “더불어 살려면 최소한 자급자족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직은 과정에 불과하다”며 너털웃음을 보였는데 그 모습이 정말 이 곳에 뿌리를 내린 농민의 그것과 닮아 보였다.


 역시 가장 어려운 것은 대인관계

 “사람과 사람이 만나 함께 살아가려면 서로가 지켜야 할 규칙들이 있기 마련이죠. 그런 규칙들은 결코 어려운 것은 아니에요. 지키기로 마음만 먹고 조금씩만 노력을 하면 능히 지킬 수 있는 일들이죠. 거듭 말하여 우리 사회는 이점을 소홀히 하기 때문에 모두가 큰 불편을 겪고 때로는 큰 손해를 본다고 봅니다.”

 마을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3개월 동안 공동체훈련을 받아야 한다. 공동체 훈련은 경건의 훈련, 노동훈련, 생활훈련 이 세가지인데 경건훈련은 아침 6시 기도 모임과 저녁 8시 찬양모임에 참석하는 것이다. 또 노동훈련은 낮시간에 육체노동을 8시간 행하는 것이다. 생활훈련은 10가지로 세분화되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기, 쓰레기는 분리하여 제 곳에 버리기, 물 아껴 쓰고 음식 남기지 않기-남한 사람 1명이하루에 버리는 음식량이 평균 3백90kg인데 북한에서 1인당 하루에 배급받는 식량은 2백50g이하라고 한다.

 계산하자면 남한 사람들이 버리는 음식만으로도 북한 동포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셈이라면 음식 남기지 않기 운동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이부자리 개고 펴는 것 스스로 하기, 만나면 인사하고 서로 이름 부르고 고운 말 쓰기-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부딪히는 문제중의 하나가 인간관계인 만큼 서로 바른 관계를 맺어가자는 의미에서라고 한다-주변청소와 소지품 정리하기 등이다. 정말 아주 사소한 듯 하면서도 이 규칙들을 모두 지킨다면 알아가는데 있어서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에도 나름의 어려움이 있고 들어왔다가 떠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신앙공동체라고는 하지만 굳이 신앙을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그밖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 것일까?

 “새로운 영농기술을 개발하고 있지만 아직은 유기농사와 가공공장 등이 시헌단계에 있어서 소득이 그리 높지 않아요. 초창기에는 우레마을만 유기농사를 짓기 때문에 인근에 있는 해충이 옮겨와 농사를 망친 것도 여러 번이었어요. 또 몇 년 전에는 돼지와 닭을 대규모로 키웠는데 우루과이라운드 때문에 돼지값이 폭락해 1차두레마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죠. 최근에는 IMF로 사료값이 폭등해 지금은 아예 축산을 하지 않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젊은 사람들 중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 생길 수도 있죠. 그래서 떠나기도 하구요.”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어려움은 대인관계라고 한다.

 “초창기 생활이 어려워 함께 살았던 사람들은 청계천 활빈교회가 철거되면서 다 떠나고 뜻이 있는 사람들만 몇 남았었죠. 남양만으로 이주한 후 한동안은 사회운동에 몸담았던 지식인들이 많이 몰려 들었어요. 인재가 많으니 다 잘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너무 똑똑해서 그런지 의견충돌이 잦아 결국 그 사람들이 먼저 떠나버리더군요. 이렇게 사람들이 유기농법을 익힐만하면 떠나고 또 새로 사람이 들어오고 하다보니 2차 두레마을이 생긴지 10년이 지나가는데도 아직까지 자급자족을 못하고 이죠. 지금은 정말 오래된 사람은 거의 없고 장애우, 노인, 아이들과 신앙과 농촌공동체에 뜻이 있는 사람들만이 살고 있어요.”

 두레마을 내의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금같이 바깥사정이 어려울 대는 이 곳에 들어오고 싶어 문의하는 사람들도 더 많다. 갈데 없고 지친 사람들이 쉬려고 이 곳을 찾지만 일할 수 있는 젊은 사람이 부족한 두레마을에서는 현재 있는 무의탁 농인과 정신질환자도 돌보기가 힘들어 좀 야속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더 이상 받지 않는다고 한다.


 사회개혁을 위해 함께 하는 사람들

 사랑의 집은 장애우와 남자 독신자가 사는 집이다. 기자가 찾아갔을 때는 낮시간이어서 그런지 모두 일을 나가고 숙소에 남아있는 사람이 몇 안됐다 이곳에서는 비록 장애가 있거나 나이가 많은 노인이어도 방안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능력에 맞는 일을 한다.

 몇몇 장애우들은 김치공장에 나가 할머니들과 함께 일을 한다.

 숙소에 들어가자 사람이 온 지도 모른채 계속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청년이 한 명 있다. 반듯하게 생긴 그 청년은 한 때 연세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다니던 엘리트였다고 한다. 군입대 후, 상관한테 맞고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는데 그 후 회복이 되지 않아 부모들이 이곳에 위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50대 중반인 안국빈 씨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있다 온 저명한 정신과 의사다.

 한국에 돌아와서 한국하회의 부조리와 의료계 내부의 비리에 신물이 난 나머지 돈과 명예를 모두 버리고 이 곳에 들어와서 정신질환 장애우를 돌보며 조용히 지내고 있다. 이 사횡 더 있다간 자신도 그 연대생처럼 발작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두레마을로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곳이라고 해서 사회와 완전히 담을 쌓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레마을에 한 1백세대가 살고 얼마 전 새로 생긴 기아공장 사옥에 한 2백 세대 살죠. 그런데도 우체통이 하나 없어서 내가 조암에 나갈 때면 기아공장 사옥에 사는 사람이 나한테 전화를 해서 편지 좀 부쳐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3백 명이나 사는 곳에 어떻게 우체통 하나 없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조암 우체국에 전화를 해서 왜 우체통 하나 설치 하지 않냐고그랬더니 담당자가 없다며 나중에 다시 하라는 거예요. 그래 다시 했더니 이번에는 우체함 설치 신청을 했냐는 거예요. 그래서 내 그랬지. 당신들이 당연히 알아서 설치해야지. 주민들이 신청 안하면 생전 안해주려고 그러느냐고 막 따졌지요. 편지 하나 부치자고 조암까지 나가는 시간 낭비, 기름 낭비, 당신들이 알기나하냐고. 우체통 하나 만들어 놓고 우체부가 잠시 들렀다 수거해 가면 될 것을 말이야. 그런데 우체통을 설치 못하는 진짜 이유가 뭔지 알아요? 우체통을 새로 설치하려면 그 옆에 우표를 파는 수퍼같은 곳이 하나 있어야 한 는 거예요. 내 기가 막혀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부조리로 꽉 차 있어요.”

 사회의 부조리와 비리가 싫어 이 곳으로 왔다는 안국빈 씨는 이 곳에서도 그 부조리와 싸우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곳에서는 자신의 의술을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과 함께 사회부조리와 싸워 나가고 있다는 공동체의식이 있기 때문에 이 곳에서 그나마 안정을 찾는 듯 했다.


 대안학교와 남북 공동 두레마을을 추진 중

 두레마을은 현재 두 가지 일을 추진중이다. 하나는 강원도 태백에 두레 자연학교를 설립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에 남북공동 두레마을을 설립하는 것이다.

 지난 한 해 가출한 고교생 숫자가 무려 7만명에 이른다. 비행으로 퇴학당한 중고등 학생이 5만3천6백명이라고 한다. 눈만 뜨면 공부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가출을 하고 비행청소년이 되는 것이다. 두레마을은 이렇게 학교에서마저 내몰린 학생들은 위한 대안학교를 세우려는계획이 있다.

 학생 20명을 한 학급으로 해서 교사들과 학생 전원이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공부하는 것보다 노는 것을 중요하게 가르치고, 하루 두서너 시간씩 꼭 노동을 하면, 오후 한낮에는 스포츠와 놀이에 열중하고, 학교 공부는 아침 저녁 시원할 때만 하면 되는 그런 학교를 세우려고 한다. 그렇게 공부하여 대학엔 언제 가냐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글쎄요. 굳이 대학을 가야만 하나요? 대한엘 못가도 행복하게 살 줄 알면 되는 것 아니에요?”라고 똑부러지게 답할 수 있는, 좀 더 여유있게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학생으로 키우는 것이야말로 차세대 두레마을을 이끌어갈 후진양성인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계획이란 북한 나진 선봉에 두레마을을 조성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북한ㆍ중국 두레마을추진본부’ 대표인 김진홍 목사가 지난 2월 28일 북한을 방문해 나진시 당국과 나진 성봉지구내 3백15만평에 두레마을 조성과 간장공장 설립을 위한 장기 임대계약을 했다고 지난 달 밝힌 바있다.

 김 목사가 나진 선봉지구 행정경제위원회 측과 맺은 계약 내용은 남한 농업기술의 북한 이전, 종자, 비료 등 물자지원, 북한 두레마을 공동경영 등이라고 한다.

 또한 “향후 남북한 공동으로 8백만달러를 투자해 농업발전연구소를 건립하고 올 4월부터 농기구기술자, 농업관리인 등 10여명의 국내 농업전문인력이 이 지구에 상주하면서 공동 농업생산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이 북한 두레마을에는 북한주민 1백여명이 참여해 생산된 옥수수, 감자 등을 북한 주민에게 공급하고 일부는 수출도 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두레마을에 대규모 돼지축사를 세우고 밭을 개간한 뒤 국내에서 개발한 씨감자를 심기 위해 대상그룹과 40만개의 종장확보 계약을 이미 끝냈다고 한다. 이렇게 북한 두레마을 조성이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어 조만간 남북 공동 두레마을을 곧 볼 수 있게 될 듯하다.

 돌아오는 길에 마을 놀이터 근청서 뭔가를 열심히 줍고 있는 여자 아이를 만났다. 김치산 씨가 “강의야”하고 부르자 얼른 일어나 인사를 하는 그 아이 손에 네 잎 클로버가 한 움큼이다. 기자가 어렸을 적 몇 시간을 찾아도 보이지 않던 네 잎 클로버가 이곳에는 이렇게나 많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행운을 상징하는 네 잎 클로버를 한 움쿰 쥐고 있는 아이를 보며 두레마을의 미래도 이렇게 밝을 것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이 날 아이에게서 선물받은 네 잎 클로버 하나는 책상 유리 아래에 곱게 끼워 두었다.     


글/ 노윤미 기자

작성자노윤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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