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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이야기] “한 오십년 산 것 같아요”

장애우 아내 연송절씨의 꿋꿋한 삶

본문

 사회적으로 실업 문제가 심각한 양상을 띠며 진행되고 있다. 정부 통계는 백육십만명이라지만 잠재적인 실업자까지 합치면 현재 실업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이미 사백만명에 육박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물어볼 필요도 없이 이러한 실업 문제는 아이엠에프 시대가 가져온 대표적인 고통이다. 

 하긴 딱히 아이엠에프 시대가 아니더라도 실업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장애우들이다. 사실 장애우들의 실업률이 높은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회적 관심사가 되지 못해서 그렇지 많은 장애우들이 실직할래야 실직할 수 있는 직장이 없어서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장애우들의 실업도 편차가 있다. 중한 장애로 인해 취업이 원천적을 힘든 경우가 있는가 하면 취업할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취업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사고로 인해 장애우가 된 경우에는, 실직의 고통에다 상실감으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까지 겪고 있다.

 거기다 장애우 실직자 당사자가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라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비정하지만 현실에서는 가정이 파탄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비장애우도 마찬가지지만 가장이 실직했을 경우 장애우 가정은 곧바로 위기를 맞는다. 장애는 능력의 상실이라는 등식이 어김없이 적용되면서 가장의 존재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 눈물나는 사연은 전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가정이 다 파탄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장애우 가장과 함께 꿋꿋하게 위기를 헤쳐나가는 착한 아낙들이 많이 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연송절 씨도 그 착한 아낙 중의 한 사람이다.

 버스회사에서 경리로 일하고 있던 연송절 씨가 지금의 남편 임종국 씨를 만난 것은 지난 팔십일년 이월이다. 친척의 중매로 임 씨를 만난 연 씨는 만난 지 삼 개월만에 결혼했다. 당시 남편은 비장애우였고, 서울 을지로에서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그건 남편 임씨가 차남이었지만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고 우긴 것이다. 연 씨는 “사람이 어디서 났는데 부모님을 모시지 않느냐”며 쉽게 남편의 조건을 받아 들였다.

팔십일년 오월 결혼한 두 사람은 경기도 구리시 수택동에 신방을 꾸몄다. 그리고 다음 해 첫 딸이 태어났다. 이렇게 별 무리 없이 이어지던 결혼 생활은 그러나 이 해 팔십이년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먼저 남편이 운영하던 인쇄소가 빚에 몰려 망해 버렸다. 졸지에 남편은 실직자의 대열에 서게 된 것이었다. 더욱 기가 막혔던 것은 남편은 털어먹은 인쇄업에 정나미가 떨어졌는지 ‘내가 리어카를 끄는 한이 있더라도 죽어도 인쇄쪽 일은 안 한다’고 선언해 버렸다.

 할 수 없이 집안 생께는 연송절 씨, 그녀가 꾸려가야 했다. 그녀가 막막해 한 것도 잠시, 갓 돌이 지난 아이를 들쳐 업고 여기저기 직장을 알아보러 다녔다. 그러다가 이웃 소개로 이 해 오월부터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한 만화가게를 운영하게 됬다. 그녀 기억에 따르면 만화가게는 생각 외로 짭짤한 수입을 그녀에게 가져다 줬다. 그 때 수입으로 하루 평균 만오천원 내지 이만원을 벌 수 있었다.

 그녀가 만화가게에 매달려 있는 사이 남편은, 결국 그게 불행의 계기로 작용한 셈인데, 백이십오씨씨짜리 오토바이를 구입해 타고 다니면서 만화 나까마, 우리 말로 만화 도매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도 모자라 부부는 만화가게 옆 전파사 자리를 인수해 오방떡 장사를 시작했다. 한 개에 백원씩하던 오방떡 가격을 오십원으로 내려 팔자 오방떡은 만들기가 무섭게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이런 식으로 그럭저럭 먹고 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는 여건이 만들어졌다, 거기다 팔십삼년 팔월달에 그녀는 둘째 딸을 순산해, 그녀는 힘은 들었지만 사는 보람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남은 세월 만화가게와 오방떡 장사를 하면서 별 탈없이 소박하게 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는데 사고가 일어났다. 그녀는 남편의 사고 일자를 정확하게 기억한다. 둘째 딸을 낳은 후 사개월 후인 팔십삼년 십이월 십삼일, 그 날 남편은 아침밥을 먹고 일하러 간다면 오토바이를 몰고 나갔다. 그녀는 가게에서 만화책을 대충 정리한 다음 정신없이 오방떡을 굽고 있었다. 오후 한 시 반경 가게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 난데없이 다급한 큰 형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지금 은미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실려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래서 전화에다 대고 “뭐라구요? 다시 한번 말 해주세요?”라고 소리쳤다. “놀라지 마, 은미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했대.”그녀는 정신이 아득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수화기를 놓고 말았다.

 남편 임종국 씨는 그 날 서울로 만화를 가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한다. 멀리 구리 시장 앞 횡단보도를 앞에 두고 그는 시내버스를 뒤따르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가게를 늘리느라 빚진 돈을 갚아야 할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돈을 융통하지 라는 생각으로 골똘해 있는 사이, 앞서 가던 시내버스가 횡단보도 신호에 걸려 정차하는 것을 그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의 오토바이는 그대로 시내버스 후면 범퍼를 향해 돌진했고, 다음 순간 그는 둔탁한 충격을 느끼며 쓰러져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몇 시간 후 서울 중랑교에 있는 한 병원, 부랴부랴 달려간 그녀 앞에 남편 임 씨는 피범벅이 된 채 거의 사망한거나 다름없는 상태로 누워 있었다. 병원에서는 보호자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응급처치만 해 놓은 채 남편을 구석에 방치해 두고 있었다.

 눈물을 흘릴 새도 없었다. 그대로 놔두면 남편이 정말 사망할 것 같아 그녀는 가족들과 의논해 남편을 큰 병원, 명동성모병원으로 옮겼다. 병원 중환자실에 들어간 남편은 여전히 의식불명이었고, 병원에서는 부기가 빠져야 수술할 수 있다면 그녀의 애타는 심정을 묵살했다. 더욱이 병원에서는 “수술해도 깨어날 확률은 일퍼센트 정도로 적으니까 기대를 갖지 말라”고 사실상 사망선고를 내렸다. 그래도 그녀는 그 일퍼센트 가능성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 실려간 지 근 한 달만에 남편은 뇌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의을 회복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병원비가 문제였다. 엄청난 수술비며 입원비를 그녀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생명에는 이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눈을 머금고 남편을 병원에서 퇴원시켜 집으로 데려왔다.

집에서 간호하다가 남편 이십일 동안 기도원에 보냈다, 그런 다음 서대문에 있는 한 개인병원에 남편을 입원시켰다. 하지만 남편은 뚜렷한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병원에서 치료라는 게 거의 전부 물리치료였는데 치료실이 지하에 있고, 엘리베이터가 없다 보니 입원실이 있는 오층에서 지하까지 남편을 업고 내려 간다는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정신이 돌아온 남편은 자꾸 집으로 돌아가자고 채근해댔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한 환자 가족이 “머리 다친 사람은 집에 가서 인내로 걸음마 운동시키는 게 낫다”고 조언하자 입원 삼개월만에 남편을 퇴원시켰다.

 집으로 왔지만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다. 사고 후유증으로 남편은 왼쪽 발과 다리를 거의 사용하지 못하는 반신불수의 심한 장애을 가지게 됐고, 때문에 집안 생계를 꾸려가는 것은 전적으로 그녀 몫이었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남편, 그리고 두 아이의 생계가 그녀 어깨에 무겁게 얹혀 있었다.

 그녀는 혼자서 만화가게와 오방떡 가게를 꾸려갔다, 그러면서 틈틈이 마치 어린애 같아진 남편에게 걸음마를 시켰다. 그렇게 살면서 이 시기 그녀는 경제적인 고통 뿐만 아니라 심적 고통까지 경험하게 된다. 그녀는 당시 고통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나도 사람이니까 힘든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던 때가 있었어요. 그게 언제였냐면, 남편이 집으로 돌아온 후 나 보고 집을 나가라고 소리 칠 때였어요. 남편은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들었는지 너는 결국 신발 거꾸로 신을 사람이니까 이왕 집을 나갈 거면 빨리 나가라고 그러는데 남편이 그럴 때마다 혼자서 화장실에서 많이 울어야 했지요. 남편이 하도 그러니까 실제로 집을 나가려고 맘을 먹어본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

 회상하는 그녀 눈가에 어느새 이슬이 맺힌다.

 “자식이 뭔지, 애들 때문에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라구요. 그리고 우리 친정 엄마가 한 얘기가 있어요. 친정엄마 말이 너 절대 딴 생각 하지 마라, 네 신랑이 명이 길어 살면 너 팔자니까 할 수 없고, 명이 짧아 하늘나라 가면 너 젊은 나이에 그 집에 안 놔둔다. 내가 데려올테니까 절대 딴 생각 먹지 말고 좌우지간 이년 동안만 참고 살으라고 하시더군요.그런 친정 엄마와 아이들 때문에 참고 살았죠.”

 그랬는데 불행이 또 다시 그녀를 덮쳤다. 남편이 조금씩 회복돼 만화가게 일을 도와줄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만화가게에 불이 나는 사고가 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해서 불은 가게 안쪽에 딸려 있는 주인집에서 났다. 그때 그녀는 대여해간 무협지를 회수하기 위해 외출해 있던 중이었다. 남편은 혼자 가게를 보고 있다가 사고를 당했다. 안집에서 불이 나 연기가 가게로 밀려들고 있었는데 몸이 부자연스러웠던 남편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연기에 휩싸인 상태로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남편을 이웃집 사진관 아저씨가 들쳐 업고 나와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그녀는 전신의 맥이 탁 풀리는 아찔한 경험을 해야 했다.

 잇단 악재를 겪게 되자 그녀는 만화가게를 옮겼다. 근처 삼십평 공간을 얻어 다시 만화가게를 연 그녀는 이때부터 미싱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남편은 만화가게에 나가 있고 그녀는 집에서 수출용 홈패션 만드는 일을 했다.

 “그럭 저럭 살만했죠. 그런데 만화가게를 하다 보니 불량 청소년들이 가게에 들끓는 거예요. 남편 혼자 가게를 보는데 저 아저씨는 몸 불편한 사람이니까 우리가 뭐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라면 끓여 먹고 만화책 본 돈을 내지 않고 도망치는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어요. 그러니 내가 죽겠어요. 공장에서는 제품 빨리 시간 맞춰서 해오라고 그러지 나는 만화가게도 신경을 써야지. 그러다보니 내가 몸이 두세 개라도 못 견디겠더라구요. 결국 만화가게를 정리하고 미싱일만 했죠.”

 그녀가 미싱일을 시작한 팔십년대 후반은 마침 수출경기가 좋아서 미싱일만으로도 수입이 괜찮았다. 열심히 하는만큼 수입이 보장되자 그녀는 남편에게 집에서 몸 관리에 전념하라고 당부하고 본격적으로 미싱에 매달렸다. 그녀는 보통 새벽 두 시까지 일을 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며 지내던 어느 날 그녀가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다.

 자고 아침에 깨어보니 남편이 밤새 그녀 몰래 베개 커바를 스무장이나 박아논 것이었다. 그녀는 감격했다. 불편한 몸으로 아내를 돕기 위해 꼬박 밤을 새며 미싱대에 낮아 있었을 남편을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녀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돌아 앉아 있는 남편에게 “이젠 됐어요, 여보. 우리는 잘 살 수 있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더디긴 하지만 남편이 일을 도와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됐다는 사실이 못내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이 더 대견스러웠다.

 다음 날부터 부부는 같이 일을 했다. 한 대의 미싱을 더 들여놓고 일을 하게 되자 수입도 그만큼 더 늘어났다. 부부는 정기적금도 들고 아이들 학원도 보내고 결혼한 후 처음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그런데 또 그녀의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의지를 꺾는 일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시아버지였다. “조금 살만하니까 팔십구년에 우리 시아버님이 중풍으로 쓰러지셨어요. 당시 연세가 일흔 세 살이었는데 그 동안 나는 오로지 돈 버는 데만 신경 쓰고 집안 일은 시아버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런 시아버님이 쓰러지니까 남편이 사고 났을 때에도 느끼지 못했던 막막함을 느꼈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정말 캄캄했지요.”

 결국 시아버지도 중풍 후유증으로 거동을 제대로 못하는 반신불수의 장애우가 됐다.

 한 집안에 두 명의 장애우가 생긴 것이다. 시어머니도 연로하셔서 집안 일을 거들지 못하고, 결국 그녀 혼자서 생께와 집안 살림을 동시에 해나가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사년 전부터는 그녀 가정의 주수입원이었던 홈패션 수출일마저 끊어진 상대다. 그녀는 홈패션 일이 끊어지자 옷 만드는 기술을 배워 겨우 생계를 이어 왔는데 작년 시월달에 아이엠에프 한파가 시작되면서 올해 일월부터는 그마저 일감이 없어졌다.

 현재 그녀 시아버지는 중풍이 다시 와 성했던 몸의 왼쪽마저 사용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누워 있다. 아이들은 지금 중학교 삼학년, 고등학교 이학년으로 한참 돈 들어갈 나이인데 뚜렷한 생계대책이 없는 그녀는 걱정이 태산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사면초가 상태에 놓여 있지만 그녀는 여전히 밝다.

 “그래도 내 마음 알아주는 남편이 옆에 있고, 남편이 몸이 불편해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니까 저도 비관적인 생각은 갖지 않아요. 지금 돌이켜보면 참 힘든 일이 많았죠. 결혼하고 잠깐 동안 이년도 채 안 되죠. 몇 개월 행복했던 것 빼고는 힘든 상황의 연속이었어요.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결혼생활은 십팔년이었지만 한 오십년은 산 것 같아요. 하도 신경을 쓰다보니 기억력이 없어졌어요.  지금도 어디 가려면 잊어먹지 않기 위해 손바닥에 써 가지고 다니죠. 과거는 그렇게 힘들었지만 지금은 행복해요. 우린 늘 항상 같이 있어요. 결혼하고 나서 지금까지 제가 바지 만드는 기술 배우러 열흘 동안 출근한 거 빼놓고는 늘 같이 있었어요. 그러니 부부 금슬은 정말 좋아요.”

 그녀와 남편은 지금 미싱일을 하기 위해 얻은 구리시 수택일동에 있는 보증금 천이백만원 전세 지하실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다. 일감이 있건 없건 이 공간은 부부가 하루를 보내는 공간이다.

 힘든 상황에서 그녀에게 유일한 위안은 그녀의 말대로 늘 같이 있는 남편 임종국 씨 존재다. 그녀의 간절한 소망 하나가 남편 건강 걱정일 정도로 그녀는 남편을 끔직이 위하고 있다. “남편이 요즘 신경통이 와서 자꾸 아프다고 그래요. 그래서 가금 아프죠. 남편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남편을 생각하는 것처럼 남편 임종국 씨의 아내 사랑도 각별하다.

 “살다보니 제가 의지할 사람은 안식구 밖에 없어요. 집안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지금까지 겪어 온 것처럼 아내가 억척으로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내 아내같은 여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내가 화를 내도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받아 주고 저한테 말대꾸하는 법이 없어요. 아내가 없었다면 제가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 않았을 거예요.

아내에게 정말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남들은 일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한 남편의 실업, 사고, 장애, 거기다 시아버지 장애와 수발까지 겪으며 십팔년을 살아온 연송절씨. 그에 대한 보상이랄 것도 없지만 그녀는 얼마 전 효부상과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녀 나이 어느새 마흔 네 살, 그녀는 지금 지하실을 비워줘야 하는데 마땅히 옮길만한 공간이 없어 고심하고 있다. 거기다 미술에 소질이 있는 큰 애 학원비를 대주지 못하는게 무엇보다 가슴 아프다. 하지만 열심히 살다보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반드시 있을 거라는 믿음을 그녀는 놓지 않고 있다.

 “어렵지만 제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건 위를 쳐다보지 않고 아래를 쳐다보고 살기 때문이에요.

 한 번 부부의 연을 맺었으면 주례사대로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살아야죠. 그렇게 살다보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거라는 믿음을 모든 장애우 부부들이 가졌으면 좋겠어요.”

 차간 아낙 연송절 씨가 수줍게 당부하는 말이다.         


글/ 이태곤 기자

작성자이태곤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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