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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힘들지만 열심히 살아야죠”

장애와 질병 속에서도 꿋꿋이 사는 장애우 부부의 아름다운 삶

본문

부부는 서울 방화동에 있는 영구 임대아파트 십이평 작은 공간에서 산다. 올해 마흔 다섯 살인 남편 한상철 씨는 중증 뇌성마비장애우이고, 마흔 한 살인 아내 정영자 씨는 다리에 장애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다 남편은 결핵을 심하게 앓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고, 아내는 수시로 의식을 잃고 눈이 침침할 만큼 중한 당뇨병을 지금도 앓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직업이 없어 나라에서 주는 생계보조수당에 기대어 사는 어려운 살림살이지만 부부는 슬하에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 아름이를 키우며 오순도순 산다.

 그런데 직업은 없지만 부부가 공들이며 하는 일이 있다. 그 일은 바로 같은 처지의 장애우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다. 매주 목요일 부부의 보금자리에는 하나 둘, 주로 뇌성마비장애우들이 찾아온다. 이렇게 열댓 명이 모여서 장애우로 살면서 겪게 되는 서러운 이야기들을 털어 놓고, 위로를 받는다. 부부는 이들에게 모임 장소만 제공하는 게 아니라 결혼 상담을 해주고 짝을 맺어 주기도 한다. ‘여호아시니선교회’, 부부는 모임에 이런 간판을 달았다.

 사실 모임 명칭이 나왔으니까 하는 얘기지만 지금 부부는 전적으로 신앙에 의지해 살고 있다.

 부부의 신앙은 백 번 얘기해도 제 삼자가 가타부타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다른 시각에서 보면 신앙만이 전부인 삶은 믿음이 돈독함 여부를 떠나 한편으로는 이들 장애우 부부의 삶이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으로 다가올 수가 있다.

 물론 생활이 어렵다는 것과 신앙심이 깊다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사는 형편이 넉넉한 사람들 중에서 신앙신이 깊은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부부의 어려운 삶의 형편과 신앙을 결부 짓는 것은 기자가 보기에 신앙을 제외하곤 부부가 사는 낙이 전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또 그 소리냐 하겠지만 중증장애우로 세상을 사는 건 참 고단한 일이다. 고단할 뿐만 아니라 막막함 그 자체이다. 우리가 숨을 쉬는 사회에서는 누가 뭐라든 중증장애우가 사람답게 살기는 애시 당초 글른 일이다. 이건 결코 비관이 아니다. 많은 중증장애우들의 삶이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면 남편이 중증장애우이고, 아내도 당뇨병은 앓아 중증장애우인 이들 부부의 삶은 어떤가.

 한마디로 지금 사는 형편도 그렇지만 살아온 과정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먼저 한상철 씨의 얘기를 들어 보자.

 한상철 씨는 전북 정읍이 고향이다. 사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이는 뇌성마비장애와 가난 때문에 우울한 유년을 보내야 했다. 그이가 기억하는 유년은 어머니 아버지가 거의 매일 치고 받으며 싸우고, 그 모습을 옆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며 마음 아파해야 했던 상처로만 각인되어 있다.

 설상가상으로 그이가 열네 살이 됐을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갔다. 그러자 아버지는 매일 술타령이었다. 그래서 쌀은 구경도 하지 못하고 보리죽으로 그것도 이틀에 한 끼 씩만 먹으며 연명하다시피 하루하루를 지내야 했다.

 집도 없어 산 밑에 천막을 쳐놓고 살던 집 형편에 그이 나이 열아홉 살 때 아버지마저 어머니를 찾겠다며 집을 나가버리자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다. 당장 끼니를 잇기가 힘들어 지면서 그이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서울로 올라가서 어머니도 찾고 어떻게든 살아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결심 끝에 주위 사람들에게 서울에 데려다 달라고 매달리며 부탁했지만 그이의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리 저리 고민하던 그이 앞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산에 놀러 왔다가 우연히 그이가 살고 있는 천막집에 들른 이 사내는 그이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자 “너 같은 장애우는 서울이 아니라 어느 대도시에 가든 거리에서 구걸하면 잘 살 수 있다”고 꼬드겼다.

 솔깃해서 그이는 앞 뒤 재지 않고 “나도 직장 때려 치고 너를 돌봐 줄 테니까 나랑 같이 전주로 가자”는 사내 등에 업혀 전주로 갔다. 이 때가 그이 나이 스물한 살 때였다.

 이 때부터 그이의 거리에서 뒹구는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됐다. 먼저, 눈치 챘겠지만 그이를 데려간 사내는 일종의 포주였다. 대상이 여자가 아닌 장애우라는 게 다른 점이었지만 그이 등에 붙어 피를 빨아먹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주에서 사내와 여인숙 방을 얻은 그이는 바로 거리에서 구걸을 시작했다. 그렇게 구걸을 해서 하루에 이삼만 원을 벌었는데, 지금으로부터 이십 여 년 전이니까 당시로서는 큰 돈이었다. 그이는 그 수입의 반을 사내에게 떼 줘야 했다. 그것뿐 아니라 여인숙비며 식비도 그이가 지불해야 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래서 항의를 하지 않았다. 그이가 사내가 나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부산으로 가서였다.

 전주에서 구걸을 하며 지내던 어느 날 불쑥 아버지가 찾아 왔다. 아버지는 “왜 창피하게 내가 아는 사람도 있는 고향에서 구걸하느냐”고 그이에게 면박을 주면서 “집으로 가자”고 했다.

 집에 돌아가 봤자 하는 일없이 방에 처박혀 지내야 했기 때문에 그이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했다. 아버지를 그냥 돌려보낸 후 다시 아버지가 찾아오면 집에 잡혀가야 할 것 같아 그이는 사내에게 부탁해 부산으로 갔다.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구걸을 시작한 그이. 그이는 시장 한복판에 앉아 있다가 수입이 신통치 않으면 시장을 헤집고 무릎으로 기어 다니면서 구걸을 했는데, 그러다보니 하루에 옷을 세네 벌이나 닳아 없앴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그이는 사내가 그이 몰래 돈을 ‘짱박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돈으로 사내는 색시 집을 드나들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그이는 사내 몰래 전주로 도망을 갔다.

 하지만 사내의 집요한 손길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전주에 나타난 사내는 늦은 밤 그이를 불러내 “왜 나를 배신하느냐?”며 그이를 두들겨 팼다. 그이는 “내가 언제 형을 배반했느냐, 형이 나를 배반했지. 왜 내가 힘들게 벌어온 돈으로 색시 집 가고 그러느냐”고 대들었다. 그러자 대든다고 그이는, 그이 표현에 따르면 ‘개패듯이’ 맞았다. 마침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서 살아났지 그렇지 않았으면 그때 사내에게 맞아 죽었을 것이라고 당시를 회사하고 있다.

 사내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그이는 “형이 잘못했으니까 갈 길로 가라”고 사내를 떼어 보냈다. 그런 다음 무작정 전주 역으로 가 역무원에게 서울로 가는 차표 한 장 끊어달라고 해서 서울로 올라 왔다. 그이가 서울에 온 것은 부산에서 구걸을 하며 알게 된 같은 처지의 장애우가 서울 가면 구걸이 더 잘된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열차 종착역인 서울 역에 내린 그이는 바로 서울역 앞에서 구걸을 시작했다. 잠은 한데서 자고, 밥은 시키면  갖다 주니까 구석진 곳에서 발로 떠먹으며 말 그대로 부랑인 생활을 했다. 그렇게 가을을 보냈는데 겨울이 되자 슬슬 걱정이 됐다. 날이 추워지면서 얼어 죽을까봐 걱정이 됐던 것이다.

 그때 그이 머리에 떠오른 것이 영등포였다. 영등포에 가봤자 별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영등포는 예전에 집 나간 어머니를 찾겠다며 아버지와 서울에 올라왔을 때 한 번 들렀던 인연이 있는 곳이었다. 말하자면 서울에서 그이가 기억하는 유일한 지명이었다. 그 인연에 기대 그이는 영등포로 옮길 결심을 했다. 그런데 혼자서는 도무지 움직일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리어카 꾼에게 부탁해 돈 삼천 원을 주고 리어카에 얹혀 그이는 영등포로 갔다.

리어카 꾼이 그이를 내려준 곳은 영등포 시장이었다. 그이는 그 후 영등포 시장에서만 내리 십 육년을 지내게 된다. 시장상인 중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그이는 상인 모두가 기억하는 유일한 장애우였다.
 그러면 영등포로 옮긴 후 그이는 어떻게 살았나. 뛰어봤자 벼룩, 아니 뛰어봤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구걸밖에 없었다. 서울 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데서 자며 그이는 구걸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장 상인 중 시계방 아저씨가 그이를 불러 세웠다. “나도 어려운 시절을 겪었다”고 운을 뗀 아저씨는 “잘 곳이 없으면 시계방에서 자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마침 한뎃잠에 넌더리가 났던 그이는 아저씨 제의를 받아 들였다. 그렇게 해서 그이는 다음날부터 시계방에서 자며 구걸을 했는데 결론은 그게 함정이었다.

 그이는 구걸을 해서 번 돈을 품안에 가지고 있었다. 은행을 가자니 은행 문턱이 높아 드나들 수 없었다. 그리고 구걸을 하면서 몸도 더럽고 냄새가 났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줄까봐 그이는 번 돈을 은행에 예금할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이는 번 돈을 족족 고맙게도 잠자리를 제공해 준 시계방 아저씨한테 맡겼다. 그러나 결국 그 돈을 떼이고 말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시계방아저씨는 그이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그이를 이용해서 실속을 챙기고 있었다. 아저씨는 다른 상인들에게는 얘는 내 아들이라고 선전하고, 시장 한복판에서 그이에게 밥도 먹여줬는데, 그러면 지나가던 사람들은 발길을 멈추고 그 모습을 구경하면서 “좋은 일 하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아저씨를 치켜세웠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아저씨의 시계방은 유난히 손님이 많았다.

 아저씨가 그를 이용했다는 사실은 헤어지는 과정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그이는 일년을 시계방에서 잠을 잔 후 “시계방 문을 닫아야 가게에 들어올 수 있으니까 불편해서 이제 독립해야겠습니다. 그동안 맡긴 돈을 주십시오.”라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아저씨는 “네가 나한테 돈을 얼마나 맡겼는지 증인을 대라. 그리고 어떻게 네가 나한테 돈 달라는 말이 나오냐. 그동안 씻겨주고 밥 먹여주고 그랬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라면서 맡긴 돈을 주기는커녕 화를 냈다.

 별 수 없이 그이는 돈 한 푼 돌려받지 못하고 시계방을 나와 지금의 한강성심병원 담벼락에 사람을 사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는 하꼬방을 짓고 살았다.

 그 무렵 그이는 색다른 경험을 한다. 바로 갱생원에 잡혀간 것이다. 그때는 겨울과 봄에 걸쳐 부랑인 단속이 심했다. 겨울에는 부랑인들이 얼어 죽을까봐, 봄에는 거리환경 미화를 이유로 구청 직원들은 거리에서 생활하는 부랑인들을 단속해 갱생원에 수용했다. 때는 봄이었는데 단속에 걸려 그이는 꼼짝없이 갱생원에 잡혀갔다. 갱생원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연고자가 없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곳이었다. 그이는 갱생원 직원이 “보호자가 있느냐?”물어보자 궁리 끝에 시장에서 인형 장사를 하는 한 아주머니 연락처를 댔다. 그 아주머니 도움으로 그이는 갱생원을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갱생원에 갔다 온 후 그이의 삶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한 번 더 갱생원에 잡혀가면 그때는 연고자를 대도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이는 단속반이 구걸하는 부랑인만 잡아가고 장사를 하면 잡아가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해 구걸 대신 신문과 볼펜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이는 장사를 시작하면서 거리에서 기어 다니지 않았다. 대신 세발자전거를 마련해 개조해서 타고 다녔다. 그리는 자전거를 타고 라이터장사도 하고, 장갑 수세미 장사도 하면서 세월을 견뎠다. 나중에는 복음성가 테이프 장사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이십년이 넘게 장사를 했지만 수중에 모아놓은 돈은 없었다. 번 돈을 같은 처지의 장애우들이 훔쳐가기도 했고, 빌려줬다가 떼이기도 하면서 지금 그이의 아내인 정영자 씨를 만날 무렵 그이 수중에는 월세방 보증금인 이백만원밖에 없었다.

 그렇게 실속 없이 세월을 견딘 한상철. 그이가 정영자 씨를 만난 것은  도저히 장사로 먹고 살 수 없어 다시 거리에서 구걸을 시작한 팔십 팔년이었다. 

 그 해 좀 편하게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러간 기도원에서 그이는 처음 정영자 씨를 만났다. 그러면 그이는 그렇다 치고 정영자 씨는 기도원에 왜 갔나?

 정영자 씨가 기도원에 가기까지 정 씨의 살아온 삶도 한상철 씨와 똑같이 기구하기는 마찬가지다.

 정영자 씨는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고아로 자랐다. 남의 집에서 가사 일을 도와주며 살던 정 씨는 나이 서른에 사고로 한 쪽 다리가 부러져, 심하지는 않지만 장애를 가지게 됐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심한 당뇨병을 앓게 돼 정씨는 자실하려고 음독까지 한 경험이 있었다. 이렇게 험한 세월을 정 씨는 오직 신앙심으로 버텼다. 정 씨의 신앙심은 무척 깊어 교회에 나가는 것만으로 부족해 정기적으로 기도원을 찾았고, 그렇게 찾은 기도원에서 한상철 씨를 만나게 된 것이다

 한상철 씨는 처음 만난 정영자 씨에게 사진을 같이 찍고 싶다고 접근했다. 그런 다음 사진을 정 씨에게 보내주면서 한 씨는 “나는 아침 아홉시에 나가서 저녁 아홉시에 들어오는데, 내가 집에 있는 시간에 전화 좀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동봉했다. 정 씨는 동정심으로 별 생각 없이 전화를 했고, 그게 인연이 돼 한 씨를 사귀게 됐다.

 두 사람은 일요일 여의도 순복음교회 앞에서 만나 남자는 자전거를 타고 여자는 자전거를 밀어 주며 한강고수부지에 나가 이야기꽃을 피웠다. 삼 년을 그렇게 친하게 지냈지만 여자는 그때까지도 도와야겠다는 동정심만 들었지 남자에게 사랑을 느낀 건 아니었다. 그때 여자는 신학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장애우를 돕는 건 신학도로서 의무였다

 그런데 남자는 여자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여자와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남자는 마침내 여자에게 청혼을 했다.

 “자매님,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습니다. 그러나 자매님 마음만큼은 편하게 해드리겠습니다. 나는 육신적으로는 불편하고 힘들게 하겠지만 마음만큼은 편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앵벌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앵벌이가 뭔지 몰랐던 여자는 “앵벌이가 뭐예요?”라고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힘없이 “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순진한 여자는 그 뜻도 몰라 “구걸이 뭐예요?”라고 되물었다. 남자가 한참 설명을 해주자 여자는 비로소 구걸이 무슨 일인지 알았다. 그런데 눈에 뭐가 씌었는지, 아니면 결혼하게 될 운명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여자가 남자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남자의 구걸이었다.

 여자는 그때 보광동에 살고 있었다. 시내에 나가려면 이태원을 지나가야 했는데 어느 날 여자는 우연히 버스 창밖으로 남자가 이태원 거리에서 구걸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여자는 “아, 이 사람은 솔직하구나. 비천한 일을 하고 있지만 그것을 숨기지 않는 용기와 솔직함이 마음에 드는 사람이야”라고 감탄을 했다. 물론 그게 여자가 남자와 결혼을 결심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다른 무엇보다 여자의 깊은 신앙심의 발로인 희생정신이 결혼에 이르게 한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두 사람은 구십 일년 칠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결혼을 했다. 시흥에 보증금 이백만원짜리 월세 지하방을 얻은 부부는 정부에서 주는 생계보조수당과 한상철 씨가 장사를 나가 벌어온 약간의 돈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살면서 부부에게 행복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결혼생활에 위기도 찾아 왔다.

 정영자 씨는 결혼 초기 위기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결혼은 현실이었어요. 사는 게 힘 들자 ‘내 반쪽이 이것밖에 안 되나’라는 회의가 들면서 동정심으로 남편을 안아주고 닦아주는 건 좋은데 함께 산다는 것은 힘들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죠. 그런데다가 내 몸이 안 좋았어요. 당뇨병이 심해 쓰러지는 날도 자주 있었고, 더 힘들었던 것은 주위에서 결혼을 반대했던 사람들이 ‘그럼 그렇지. 너 결국 그렇게 살지’ 라고 조롱하는데 정말 못 참겠더라구요. 그래서 남편과 싸움도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결혼한 지 육 개월이 지나면서 내 생각이 바뀌었어요. 남편이 내개 참 귀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왜냐면은 남편은 나 하나만 의지하고 사니까, 세상에서 나만 사랑하니까 그런 남편한테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 씨의 말은 다음으로 이어지다. “남편이 그 동안 거리에서 지니다보니 결핵을 앓게 됐어요. 남편 고생한 얘기를 들으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남편은 지금도 약으로만 살아요. 하지만 지금 나는 남편이 옆에 있어 주기만 해도 좋겠다고 생각해요.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한 내 남편이니까요.”

 옆에서 물끄러미 아내를 쳐다보던 한상철 씨도 아내에 대한 걱정을 털어 놓는다. “집 사람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못 먹고 못 입혔는데 당뇨는 심해져서 이대로 죽을까j봐 제일 안타까워요. 내가 한 시간도 마음을 못 놔요. 길거리에서 쓰러질까봐. 병원에 실려 갈까봐 걱정이에요. 얼마 전에도 쓰러졌어요. 눈 시력도 계속 떨어지고, 그래서 마음을 못 놔요.”

 한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그 침묵을 깬 것은 한상철 씨였다.

 “그래도 사는 날까지 열심히 살아야죠. 김대중 대통령에게 바라는 게 있어요. 우리 같은 중증장애우들이 길거리 가판대에서 장사라도 해서 먹고 살수 있게끔 배려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지하철 각 역마다 편의시설을 설치해서 휠체어를 타고 자유롭게 외출을 할 수 있게 조치해 줬으면 좋겠어요.”

 한상철, 정영자, 한아름 세 식구의 한 달 수입은 생계보조수당과 중증장애우 수당 합쳐 삼십만 원이 전부이다. 그 돈으로 생활을 해나가자면 아무래도 벅찰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 IMF시대에 쥐꼬리만한 돈으로 생활을 이어나가자면 사는데 무척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부부는 자신보다 이웃을 생각하며 산다. 말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부부는 같은 처지의 장애우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

 사회적으로 실업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사는 게 힘들다는 아우성만 난무하는 이 시대에 부부의 사는 모습에서 따뜻함을 느끼는 것은 비단 기자만일까.

 이들 부부처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는 아직 많다.

 

글/  이태곤 기자

작성자이태곤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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