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제 말이 맞았다지만 전 하나도 기쁘지 않네요” > 함께 사는 세상


[사람사는 이야기] “제 말이 맞았다지만 전 하나도 기쁘지 않네요”

한국 사회의 몰락 예견해 화제모은 백현락 씨

본문

 그는 사실 매우 낙천적인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그의 ‘삼 분이 멀다하고 터지는 웃음’에 신기해하며 놀랐을 정도다. 그렇게 잘 웃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코미디방송 작가라는 현재의 그의 직함에서 알 수 있듯이 남을 잘 웃기기도 하는, 매사에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다. 자신의 딸 은채와 아들 승민이를 교수나 검사가 아닌 마라토너와 축구 선수로 키울 생각을 품고 있는 그야말로 무사태평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런 백현락 씨(37)가 지켜본 한국의 앞날은, 그러나 아무리 희망적이고 낙관적으로 봐주려고 해도 결코 그럴 수가 없었다. IMF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대한민국이 망한다’는 일종의 경고성 시사에세이집인 <한국분 한국인 한국놈>이란 책을 쓴 것도 바로 자신에게 절실하게 느껴지는 그러한 위기감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대안을 찾아보고 싶어서였다.

 “원고를 다 써서 책이 나오기 한 육 개월 전부터 출판사를 찾아다녔지만 다들 비약이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출판을 꺼리더군요. 경제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오이씨디 가입한 지가 바로 엊그제의 일인데 ‘대한민국은 망한다’같은 문구들은 너무 극단적인 비관이 아니냐, 그래서 사회적인 호응을 얻을 리가 없을 거라는 거였죠.”

 혹 자신이 장애우이기 때문에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는 게 아니냐는 선입견 때문에 자신의 고언(苦言)을 그냥 흘려 넘겨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공연한 조바심까지 들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의 예언대도 하반기가 되면서 경제가 점점 더 어려워졌고, 아이엠에프 차관도입이 결정되기 바로 십 여일 전에야 뒤늦게 출판사에서 그의 예지력을 새삼 놀라워하며 부랴부랴 책을 찍기 시작했다.

 아직은 당장 아주 잘 사는 나라가 된 것 같지는 않지만 방송을 보면 이제 얼마 안 있어 선진국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선진 한국이 될 것이라는 얘기를 자연스럽게 믿고 있었던 우리나라 국민들. 그런데 갑자기 국내 행정까지 좌지우지되는 치욕적인 외환지원을 받아야 할 정도로 경제가 위기상황이라고 하니 도대체 현재의 위기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 어디서부터 우리 스스로를 뜯어 고쳐야 하는지 차근차근 알고 싶은 사람들에 의해 그 책은 날개 돋힌듯 팔려나갔다.

 그 책 덕분에 그는 적지 않게 언론의 인터뷰 공세를 받기도 했다. 대한민국이 망할 것이라는 극언을 하기도 했지만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하고 있는 그인지라 ‘어떻게 그렇게 예견할 수 있었냐“며 주위에서 호들갑스럽게 그의 안목을 대단하다는 듯이 치켜 세워도 그는 전혀 기쁘지 않다. 그저 어떻게 우리나라가 어두운 이 터널을  빠져나가고 있는지 바짝 가슴을 졸이며 사태를 지켜보고 있다.

 혹 <미국분 미국인 미국놈>이라는 책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저자는 다른데 책 제목을 그 책에서 거의 그대로 따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제목을 따오긴 했지만 저자는 그 책을 쓴 바로 그 사람이다.

 <미국분...>는 2권까지 나올 정도로 많은 인기를 모았다. 어떻게 보면 한국 사람들에게 일본 보다 더욱 가깝게도 느껴지는 미국이다. 그렇지만 백현락 씨가 짧지 않은 미국 생활을 통해 다른 사람들보다 비교적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리고 다시 한국 사람들을 봤을 때 미국의 엉뚱한 부분만을 보고 전체적으로는 너무나 모르는 것 같아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 같아 그 책을 쓰게 된 것이다.

 “처음 책이 나온 후 저한테 ‘선동적 반미주의자’라는 욕과 ‘심증적 친미주의자’라는 비난이 한꺼번에 쏟아졌어요. 나름대로 정확한 비판을 하는 독자들과 십대에서 육십대까지 수많은 격려편지를 받았는데, 우리 국민들이 그렇게 뿌리 깊게 나라를 사랑 하고 있는지 그제서야  알게 됐죠. 혼자 잘난 체를 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서 사과하는 심정으로 후속편인 이권을 냈었습니다.”

 팔십 이년 미국으로 유학가 구십 이년 대선으로 김영삼 문민정부가 탄생하는 것을 보고 기대에 차서 그는 다른 유학생 출신 교포들과 함께 귀국러시에 동참했다. 그러나 아무리 오이씨디에 가입했다 어쨌다 해도 사회 전반적으로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한국을 다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지난해 초부터 서서히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그 결심이 서서히 굳어갈 무렵, 한국을 떠나기 전에 우리나라가 어느 정도까지 안으로 곪아 터져서 이렇게 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없을 정도가 돼버렸는지 마지막으로 설명이나 해주고 싶어서 다시 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전 책에서 물론 미국사회가 잘하고 있는 점을 소개하기도 했지만 이런 저런 미국 사회의 실패담을 소개하면서 미국 사회가 곧 망할 것 같다고 흉을 본 게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 살면서 지켜보고 또 직업상 자료 취재차 혼자 또는 다른 기자들과 함께 사회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살펴보니까 어느 한군데 빠지지 않고 구석구석이 병들어 있었어요. 우리나라가 미국 보다 두 배는 빨리 몰락할 것 같더군요.”

  그러나 그는 떠나지 못했다. 책을 쓰며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입에 쓴 말도 한다면서 한국 사회에 대해 거센 비판을 했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니 사랑한다면서 자신만 훌쩍 떠나버리는 것은 아무래도 잘하는 것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란다.

 “사랑은 함께 있는 것이라는 ‘임마누엘’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 말도 자꾸 생각나고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어 죽게 생겼다면 응급실로 데려가야지 ‘아무 것도 해줄 게 없군. 그렇지만 사랑해’라고 말하면서 떠나 버릴 순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그 생각이 들기 전까지는 정말 솔직히 한국과 미국을 열두 번도 더 왔다 갔다 했다니까요.”

 사실 그가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물었다.

 “왜 돌아왔어요? (살기 좋다는 미국에서 계속 살지)”

 더군다나 장애우의 천국이라고 하는 미국이 아닌가. 그와 가까운 사람들도 그의 귀국을 반가와 하면서도 제대로 편의시설도 안 돼있고, 장애우라고 친절하게 배려하는 사람 찾아보기

힘든데다 아직도 동정 아니면 무시하는 시선으로 빤히 쳐다보는 한국에서 장애우로 살아가야 할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기도 했다.

 육십 일년 부산에서 이남이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한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막내라고 특별히 소아마비예방접종까지 맞았는데 일이 그렇게 돼버렸다. 아버지가 십여 년간 부산맹학교 교장을 역임하기도 하셨으니 장애와의 인연이 남다르기도 하다. 장애 상태가 심해 부산고등학교 일 학년 때까지 남의 등에 업혀 다녀야 했을 정도다. 다행히 그해 말 한 해 휴학을 감행하고 시도한 수술이 성공적이어서 그 다음부터는 지팡이만 짚고 다닐 정도가 됐다.

 다른 동기들보다 일년을 까먹긴 했지만 그럭저럭 공부를 잘 했던 그는 내심 법대를 지원하려고 했다. 법관으로서의 거창한 꿈이 있었다기 보다 ‘공부 잘 하는 장애우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삼학년 때 연세대에 미리 가서 신체검사를 받아본 결과 입학할 수 없다는 통고를 받기도 했지만 그 시기에 법관들이 하는 짓도 마음에 안 들어 방향을 선회, 결국 고려대 정외과에 입학했다.

 대학 신입생으로서 신나는 나날을 보내게 됐다는 기쁨도 잠시, 단 십 분의 시간여유를 두고 멀리 떨어져 있는 건물로 이동해 수많은 계단을 올라 수업에 참석해야 하는 현실의 반복은 한 마디로 악몽이었다.

 “어찌어찌해서 은행에서 융자받은 삼륜차를 사서 건물과 건물 사이는 왔다 갔다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계단, 그 계단들은 정말 어쩔 수 없더라고요.”

 매번 수업 시작 후 헐떡이며 늦게 들어서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다 결국 그래도 조금 장애우가 공부할 여건이 낫다는 미국으로의 유학을 결심하게 됐다. 장애우가 아니었으면 유학 안 갔겠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말하는 그이다.

 유학생활은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다른 유학생들처럼 수퍼마켓 계산원, 도서관 근로장학생, 세탁소 메니저 등 가리지 않고 많은 아르바이트를 해 용돈을 버는 한편 회계학으로 바꾼 전공공부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한국에 남겨놓고 왔던 여자 친구를 미국으로 불러 결혼도 했고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마친 후 대학원 경영학과에 진학하기도 했다.

 대학원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냐 그냥 미국에 남을 것이냐를 고민하다 전두환, 노태우대통령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정치상황에 실망해 그냥 미국에 남기로 했다. 경영학 석사출신 공인회계사로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다 사업을 시작해 두 번이나 재산을 몽땅 날리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자리를 잡아 귀국 전까지 그림같은 저택에서 부부가 외제차를 타며 그럭저럭 안락한 생활을 누렸던 그이다. 그러니 사업으로 망해 빈털터리가 돼서 한국행을 결심한 것이 아니냐는 오해는 곤란하다.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초창기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정책에 정말 큰 기대를 걸고 ‘다시 한국으로 가자’고 가족들을 설득했죠. 그런데 김 대통령의 개혁도 금방 시들해져 버리고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같은 각종 인재사고나 한보사태 같은 뿌리 깊은 부패상을 보면서 슬슬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 후회되기 시작하더군요. 그리고 아닌 게 아니라 미국에서는 장애우로서 정말 공주처럼 지냈던 것 같아요. 갖가지 혜택과 귀빈대접 받다 한국에 와보니 한 순간에 식모 보다 못한 존재로 한 순간에 낙하산 타게 되더군요. 참, 하하”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잠실 롯데호텔 정문 앞에서 길을 건너려고 하다가 봉고차가 저 멀리서 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도 충분한 시간이 있는 것 같아 건너고 있는데 과속을 하던 그 차량은 거침없이 그리고 쏜살같이 와서 미처 길을 다 건너지 못한 그가 백미러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는 당연히 중심을 잃고 길가로 넘어졌고 그것을 보고 운전수가 차에서 내렸다.

 “그때 그 사람이 저한테 ‘정말 미안하다. 어디 다친데 없느냐’고 말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웬걸, 저의 행복한 착각이었죠.”

 다짜고짜 와서는 ‘xx새끼. 눈 똑바로 뜨고 다녀야지! 누굴 살인자로 만들 작정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무척 황당하고 화가 나려고 했지만 “아저씨 호텔 구내에서 과속을 하면 어쩝니까? 보행자를 우선하고 안전거리도 확보하셨어야죠. 그리고 설사 제가 잘못했어도 사람이 다쳤으면 먼저 사람을 살펴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이성적으로 따졌다.

 그러나 구경꾼들 앞에서 조목조목 잘못이 들춰진 것이 기분 상했는지 갑자기 그 운전수는 그의 멱살을 잡고 뒤로 밀쳐 버렸다. 그러면서 “xx새끼 지랄하네. 주제에 입만 살아가지고”라는 말로 그에게 결정타를 먹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욱하고 분노가 치밀어 올라 “그래, 너도 한번 xx돼봐”하며 차를 타려는 그 운전수의 등을, 갖고 다니던 지팡이로 힘껏 내리쳤다.

 잠시 후 누군가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의해 두 사람 모두 연행됐다. 어느 새 지팡이에 맞은 팔꿈치를 들이대며 전치3주의 진단서까지 갖춰놓은 그 운전수는 피해자가 그리고 백현락 씨는 가해자가 되어 있었다. 상황을 들어본 경찰관은 괜히 크게 문제를 만들지 말고 합의를 보라고 종용하는 가운데 법대로 치자면 그의 입장이 더 불리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경찰서 유치장안에서 불편한 하룻밤을 보내면서도 그는 그 운전사와 타협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이번에 본때를 맛봐야 그 사람이 다른 장애우에게 막 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결국 그의 강한 기세에 눌린 그쪽에서 꼬리를 빼 그 사건은 거기서 끝났지만 아직도 그에게는 정말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우리나라 어떤 유명한 신부님은 소외된 자들을 우리 사회가 따뜻하게 보살피지 않으면 전쟁이나 다른 위기상황에 놓였을 때 적에게 쉽게 포섭되거나 동조할 소지가 많으니까 사회가 그들을 따뜻하게 보살펴야 한다고 쓰셨더군요. 그건 한 마디로 소외된 이들을 위험인물로 보는 시각일 뿐이죠. 아직도 사회지도층 인사 중에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현실입니다.”

 그것에 관한 한 미국인의 사고는 어떤 면에서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주고 나중에 받기’라는 것이다. 현재 장애우, 빈민, 노인 같은 사람들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사고가 나면 장애우가 되고, 나이가 들면 노인이 되며, 사업을 하다 망하면 한 순간에 빈민이 되고, 그리고 한순간의 실수로 자신도 어느 날 전과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 소외계층들을 위한 다양한 복지정책을 입안하거나 자원 활동을 적극적으로 할 뿐만 아니라 작은 친절 하나도 자신의 앞날을 위해 일종의 보험처럼 해두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들은 우리나라 장애우 제소자들인 것 같아요. 제가 무슨 사업을 하려다 우리나라 법규를 잘 모르고 결국 법을 어긴 게 돼서 딱 열흘 동안 ‘큰 집’에 잠시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장애우 제소자들의 살아온 얘기를 듣고 옆에서 좀 지켜보니 재범을 저지르는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출옥을 해도 사회가 장애우를 더군다나 전과자를 인간적으로 대접해주지 않고, 그래서 다시 그곳으로 돌아오는 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죠. 안타까운 모습을 참 많이 봤어요.”

 열흘간 구치소에서 생활하다 나온 뒤 그곳에서 만난 한 제소자의 부탁을 받아 그의 가족을 찾아갔다. 그런데 정말 그들의 생활 모습은 처참했다. 아이들은 굶주려 힘없이 집에 누워있었고 그 부인은 시장에서 막일을 끝내고 늦게서야 휑한 얼굴로 돌아왔다.

 너무나 보기 딱해 그는 자신이 가진 유일한 귀중품이었던 결혼반지를 앞 뒤 재지 않고 당장 빼주고 왔을 정도였다.

 또 그곳에서 친해진 한 강도 십범의 장애우 재소자에게 거의 이년 동안 안부편지와 영치금을 보내기도 했다. 출옥한 지 한 달도 안돼 그 친구는 또 다시 잡혀 들어가서 그를 슬프게 했지만.

 참, 미국에서 공인회계사를 하다가 사업도 하고 그랬던 백현락 씨가 어떻게 지금은 방송작가를 하고 있는지 조금 의아해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 같다. 사연을 들어보니 그의 인생전환은 아주 우연하게 이루어졌다.

 <미국분 미국인 미국놈>의 첫 번째 책을 펴냈을 무렵에는 한 미국인 회사의 한국지사장으로서 일하기도 했지만 정작 그의 꿈은 사람들을 즐겁게 웃게 하는 재미난 코미디를 쓰는 것이었다. 그런 희망을 밝힌 책 내용을 본 한 방송국 피디가 그의 글 솜씨를 보고 방송작가로 발탁했다. 그래서 현재까지 작가로 일하며 그동안 <LA 아리랑>이나 <코미디 전망대>등의 프로그램에 대본을 써왔다. 그리고 짬짬이 <쓰레기통에서 건진 내 영어>나 소설을 쓰기도 했다.

 “영화 쪽에서도 같이 일하자는 사람들이 몇 명 있어요. 앞으로는 시나리오를 좀 써볼까 합니다.” 방송작가를 계속할 거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었다.

 그의 일과는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화장실에 잠시 ‘문안드리고’ 와서 텔레비전을 통해 미국 씨앤앤 아침 뉴스를 한 시간 동안 본 뒤 여섯시부터는 한국 방송 뉴스와 각종 조간 신문을 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정보화 시대를 사는 세계인이 되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 습관처럼 하고 있다고는 말하지만 그런 뉴스 속에 비추어지는 한국의 모습이 그의 관심의 주된 초점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언젠가 그이 딸이 물었다.

 “아빠. 우리는 왜 미국에 살다가 이리로 왔어? 미국이 한국보다 잘 살잖아?”

 “아빠는 어릴 때부터 여기서 살아서 그런지 여기가 좋아. 그리고 우리나라도 앞으로 미국보다 더 잘살게 될 거야.” 그러자 딸 은채는 “피. 거짓말, 저번에 뉴스 보면서 우리나라는  망할 거라고 해놓고선”이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자신이 울화가 터져 무심코 했던 말을 딸아이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는 “그래. 니 말이 맞아. 하지만 너 나중에 아빠가 늙고 병들었다고 버리고 도망 칠거니, 아니면 힘들더라도 함께 살거니?“라는 물음으로 넘겼지만 그는 정말 바란다.

 그야말로 우리나라가 잘 사는 나라가 되기를.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전 문화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말이다. 그래서 “아빠 말이 맞았구나”라는 딸의 말을 듣고 싶다.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우리는 아직도 늦지 않았다는 것과 이 위기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어요. 이 위기를 이십일 세기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에서 우리나라가 보게 된 자격시험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현명하게 잘 넘겼으면 좋겠어요. 저의 이러한 ‘애국적 자아비판’이 많은 분들에게 그 해결책을 찾는데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진심입니다.

 

글/  한혜영 기자

작성자한혜영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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