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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전을 없애버립니다”

[사람사는 이야기] 시각장애우에게 정보 전하는 조성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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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삼육에 육천번(서울)을 누르고 다시 오번, 사서함 방을 눌러보시라. 거기서 다시 고유번호 사삼사삼, 혹은 사삼사사를 누르면 시각장애우에게 도움이 되는 각종 소식을 들려주는 힘찬 목소리를 만나게 된다. 한국시각장애인선교회에서 운영하는 종달새전화도서관에서 국립 맹학교, 출신 동문들의 모임인 백송회의 사서함방을 맡고 있는 조성재 씨(46세)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안내를 들어 보면 알겠지만 현재 종달새전화도서관에서 제공하는 서비스 내용은 이렇다. 일번은 신구약 찬송가 오백오십팔곡 전곡이 들어있는 ‘복음의 메아리’, 삼번은 약 백오십 권 정도가 수록된 독서의 광장, 그리고 오번이 사서함이고 육번은 동아리서비스, 칠번이 교육의 광장이다. 구십일년도부터 시작된 이 서비스는 이용자가 갈수록 급증하고 있는데 초기에는 한국통신측의 이해부족으로 일오이, 일오삼 등의 번호로 계속 옮겨 다녀야 했다. 급기야 부가사용료까지 포함해 삼분 통화료로  삼백이십원까지 내야할 때도 있었다. 결국 오천만원을 투자해 전국 각지에서도 손쉽게 통화할 수 있는 에이알에스시설을 마련하고 칠백삼십육국에 육천번이라는 번호를 개통한 것이 지난 구십구년 삼월의 일이다.

 

 고정 청취자 구천여 명

 사서함에는 각 맹학교 동문회나 시각장애우 관련 모임 등 모두 사십 개 단체가 모여 있는데, 사서함을 통해 주로 중요한 모임 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가 맡고 있는 백송회 사서함을 찾는 사람들의 수가 자그마치 하루에  칠천에서 구천여 명을 헤아린다니 새삼 놀라운 일이다. 그의 정확하고 유익한 뉴스가 입소문으로 퍼져나가 육백 여 명의 백송회 회원들만이 아니라 그렇게 많은 수의 시각장애우들이 찾고 있는 것이다.

 그 명성은 물론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연하게 사서함을 맡아 첫 방송을 시작한 구십삼년 유월 이십삼일 이후 팔년 여의 기간 동안 결방도 거의 없이, 수많은 뉴스와 정보 가운데 꼭 시각장애우들에게 필요한 내용으로만 채우려는 그의 남다른 노고의 결실이다. 그것도 한 푼의 대가 없이, 오히려 녹음을 하고 재생해서 확인하느라 한 달에 이십만 원 이상의 전화비를 물어가면서 말이다.

 그는 장애우 관련 신문이나 관련 단체들의 움직임을 체크하고, 매일매일 인터넷을 뒤지면서 새로운 뉴스를 찾아 나선다. 일반 뉴스들 가운데 시각장애우들의 필요하겠다 싶은 내용들은 청취자인 시각장애우들의 눈높이에 맞춰 맛깔스럽게 재구성하는 것이다.

 물론 그의 본업은 따로 있다. 바로 침구사, 인터뷰를 위해 그가 운영하는 시흥물리시술소(02-802-6520)를 찾았을 때 역시 그는 환자들을 보는 짬짬이 방송 원고를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매일 오전 열한 시 정도까지 그날 치 뉴스녹음을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열심히 방송 원고를 정리하고 있는 점자지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흔히 보는 하얀 지질이 아니라 각가지 색깔의 광고지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듯하게 잘린 그런 광고지 한 뭉치가 책상의 아래편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제가 환경청 장관한테서 상을 받을만하지 않냐고 스스로 자부하고 싶은 게 바로 이렇게 종이를 재활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광고지 한 장은 너무 얇아서 구멍이 뚫리거나 점자가 금방 지워져서 안 되지만 이렇게 두세 장을 꼭 맞춰 쓰면 손색없이 쓸 수 있어요. 보통 쓰는 하얀 점자지는 한 장에 약 삼십원에서 오십원 하니까 경제적으로 도움이 돼죠.”

 이것이 다른 시각장애우들에게도 많이 퍼져 있는 종이재활용 방법이냐고 묻자 아무래도 시각장애우 스스로 하기는 어렵고 다른 사람이 종이를 규격에 맞게 잘라주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번거롭게 생각한다고 했다. 다행히 그는 간호사가 업무 중 빈 시간을 이용해 종이를 그렇게 마련해 준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선거 한 번 치르고 나면 한 삼 년치 쓸 종이가 마련된다는 그의 얘기였다. “바로 얼마 전까지도 지난 국회의원 선거 당시 홍보물로 나온 광고지를 사용했다”며 웃었다.

 “제 장애, 영양실조 때문입니다”

 밝고 기운찬 그의 목소리에 실려 나오는 흥미로운 이야기(그와 대화를 나눠보면 모든 얘기가 다 흥미롭게 들릴 것이다)를 듣느라 정신이 팔려 채 목이 마르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그가 음료수를 권했다. 그저 자신의 공간을 찾은 손님에게 마실 것을 권하는 의례적인 인사려니 하고 괜찮다고 사양하려는데, 그는 꼭 음료를 마tu야 한다며 다양한 메뉴를 열거했다. 그러면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덧붙였다. “제가 영양실조 때문에 장애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 맛있는 것 먹이는 게 제 즐거움 중의 하나죠. 더구나 손님은 절대 맨입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이제껏 수많은 시각장애우들을 만나봤지만 사실 영양실조로 장애를 갖게 됐다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한국전쟁의 후유증으로 전국 곳곳이 피폐했던 오십육년 오월, 그때 하필 그가 한 생명체로 움틀댄 것을 그의 불운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정말 너무나도 가난한 살림에 임신한 몸으로 영양실조에 걸렸던 그의 어머니는 피골이 상접한 몸에 성재 씨까지 힘겹게 낳고는 석달 동안 눈멀고 귀가 먼 증상을 보이기도 했단다. 석 달 후 어머니의 몸은 회복되었지만 갓 태어난 성재 씨의 손상된 시신경은 이미 어쩌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날 때부터 그는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가난 탓이라는 걸 알면서도 장애를 가진 큰아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은 복잡한 것이었다. 그의 밑으로 건강한 남동생이 태어났을 때 “이제야 진짜 아들이 생겼다”고 몇 번이고 되뇌던 부모의 말은 어쨌거나 어린 성재 씨에게는 상처가 되었다.

 고향인 영종도를 떠나 다섯 살에 부모님을 따라 현재의 시흥으로 옮겨와 살았고, 진학할 맹학교를 수소문하다가 아홉 살이 되어서야 국립서울맹학교에 들어갔다. 또래의 아이들이 기역, 니은을 따라 쓰면서 한글을 익힐 때 그도 점자로 한글을 떼고 흰 지팡이를 사용해 길 걷는 법을 배우면서 시각장애우로서 살아갈 최소한의 생활 수칙들을 익혀나갔다. 늘 잔병치레를 하던 그는 한때 뇌막염에도 걸려 이년간 휴학까지 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곧 중등 과정에 올라가 실업계, 인문계로 나누어야 하는 시기가 됐을 때 그는 갈등없이 침구사의 길을 걷기로 했다. 어차피 이 땅을 사는 시각장애우에게는 직업선택의 폭이 그리 넓지 않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방문한 친척들은 조언을 구하는 그의 부모에게 “침구사면 사람 병을 고치는 사람인데, 시각장애우가 무슨 침구사냐”면서 서울역 앞에 용한 시각장애 점쟁이가 있는데 그 사람 밑으로 보내서 점치는 일을 배우게 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다들 한 마디씩 했다. 다행히 부모가 결국 그의 뜻을 존중해줬기에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해 침구사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지만 그때 친척들이 그를 놓고 한 말 또한 그에게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가수 이용복 씨와의 못말리는 추억

고등부 3년. 침구사로서의 한 길을 가기 위해 나름대로 차근차근 준비해 간 기간이었지만 그는 조용하게만 그 시기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의 타고난 끼가 감출 수 없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이 고등부 기간 동안 기숙사에서 그와 한 방을 쓴 사람이 훗날 가수로 유명세를 얻은 이용복 씨였다는 사실이다. 그 시절부터 노래 좋아하고 기타 잘 쳤던 그 두 사람이 기숙사 한 방에서 뭉쳤으니 밤 열시만 되면 불을 끄고 자라는 기숙사 규칙은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기숙사 각 방마다 큰 장이 있었어요. 이불이랑 각종 잡다한 용품을 집어넣는 굉장히 큰 장이었죠. 불 끄고 자는지 돌아다니는 사감 선생님을 피하기 위해서 일단 그 장에 둘이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 안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죠. 당연히 들통이 났죠. 처음엔 긴장해서 조그맣게 부르다가도 점점 신이 나서 노랫소리가 점점 커졌으니 말이죠.”

 한 번, 두 번, 세 번까지 경고를 주던 사감은 어느 날인가는 화가 나서 이들에게 매를 들었다. 그러나 그 사감도 한창 나이의 학생들의 이런 처지가 안쓰러웠는지 결국 돌아서서 우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다음부터는 기숙사방에서 노래를 불러서 다른 아이들 자는 데 방해하지 말고 사감실에 와서 노래를 하라고 특별히 허락해 주었다.

 고등부시절 밴드부원으로 활동하며 피아노, 기타, 클라리넷까지 능수능란하게 다루던 그는 그때 이미 와이엠씨에이 등에서 기타를 가르칠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코드를 틀리게 잡는 수강생에게 잘못을 지적하면 아니 어떻게 그걸 아냐면서 혹시 보이는 건 아니냐고 물어요. 소리로 다 되는 건데 그걸 모르고 말이죠. 그래서 내가 뒤돌아서 가르쳐볼까 하고 장난스레 묻기도 했어요.”

그런 그에게는 또 다른 에피소드도 있었다. 어느 날 학교에 숙명여대 학생들이 ‘위문공연’을 왔다. 그는 ‘아니, 병자도 아닌데 무슨 위문이냐. 장애를 가진 게 위문 받을 일이란 말이야?’하는 생각에 못마땅했지만 일단 그들이 하는 공연을 보러 강당에 들어갔다. 자기네 딴에는 위문공연이라고 해온 떡도 돌리고 이중창, 사중창도 들려주며 구색을 맞추더니 마지막으로 맹학교 학생들의 소감을 듣고 싶다고 했다. 그때 손을 번쩍 든 사람이 (독자들이 예상했듯이) 조성재 씨였다. “위문공연을 해줘서 고맙지만 사실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위문 받을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삼천구백만 인구 중에 시각장애우 숫자가 십만 정도 밖에 안 되니까 숫자가 묻혀서 이상한 사람 위급을 받는 것일 뿐이다. 원한다면 우리 실력도 한 번 보여주고 싶다. 그러면 과연 누가 위문 받아야 할 사람들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독창으로 윤형주의 ‘바보’를 불러 환호를 받았는가 하면 친구 몇 명을 불러내 즉석에서 수준급의 밴드공연을 이끌어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그 자리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숙대생들은 나중에 정식으로 공문까지 보내 사과의 뜻을 전해왔다.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돕는 일이 될 것인지도 공식적으로 물어왔다. 그 대답을 마련하는 과정에 교장선생님은 학생회장도 반장도 아닌 그를 제일 먼저 찾아 어떤 답신을 보내야 할 것인지를 물어왔다. 결국 그의 의견을 대폭 반영해 첫째, 낭독 혹은 녹음봉사 둘째, 나들이 봉사 셋째, 동아리간 교류 등을 그들에게 제안했고, 이후 토요일마다 숙대생 사십여 명이 대거 맹학교에 찾아드는 기현상이 벌어지곤 했다.

 “사실 당시 기숙사생활이라는 건 감옥 생활과 비슷했어요. 학교가 청와대와 가까우니까 주위에 수도방위사령부 소속 군인들이 있었는데 새벽 여섯시에 거기서 기상나팔이 울리면 맹학교 학생들도 같이 일어나서 체조하다가 일곱시에 아침 자습, 여덟시 식사, 아홉시 이십분부터 네시까지 수업, 다섯시 반까지 특별활동, 다섯시 오십분 저녁식사, 여덟시 삼십분까지 자유시간을 갖다가 열시 취침이거든요. 이러니 주말이라도 좀 자유롭게 외출도 하고 그래야 할텐데 그러기도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숙대생들이 와서 같이 나들이도 가고 또 자연스럽게 인근 고등학교하고 교류를 하면서 저도 사실 그때 여자친구 여럿 사귀기도 했었죠.(웃음)”

 서울맹학교에 유도부가 신설된 것도 그가 학교에 다닐 당시의 일이다. 그런데 그의 부모님을 비롯해 주위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눈에 뵈는 것 없는” 자신의 자녀들이 남을 다치게 하거나 혹은 더 쉽게 다칠까봐 걱정이 된다는 것이 반대이유였다. 그래도 성재 씨를 비롯한 많은 학생들은 열심히 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었다고 생각되자 와이엠씨에이에서 주최하는 고등학생 유도대회에 나가기로 했다. 대회 주최 측에서는 “당신네 학교가 참가해서 상대팀에 지면 더 보기 불쌍하고 이겨도 (시각장애우들한테도 졌다는 조롱을 듣게 된) 상대팀 학교를 괜히 문 닫게 하는 일”이라면서 아예 참가신청 접수 자체를 거부했다. 그러나 맹학교 학생들은 시위까지 해가며 결국 참가를 했고 준결승까지 올라가, 사위의 성적을 올렸다. “그래도 목이 잘렸다는 감독은 없었어요.” 이단 자격증까지 따고 졸업했다는 그가 덧붙인 말이다.


 “심청전이 바로 시각장애우들을 만친 원흉”

 앞서 숙대생들에게 장애우들에 대한 편견은 단지 장애우들이 소수라는 사실에서 비롯됐다고 일갈한 내용은 그의 평소 지론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각장애우 한사람 한사람이 언제나 행동거지와 용모를 단정하게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그가 늘 주위 사람들에게 강조하는 점이다. 다수인 정안인들이야 별별 사람들이 다 있어도 눈길을 끌지 않지만 시각장애우들은 다 저 모양이구나“하는 이상한 편견을 심어주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통탄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심청전>이다. “시각장애우들은 다 돈 없고 불쌍한 존재라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게 만든 원흉이 바로 심청전”이라며 “누가 심청전을 지었는지 이 다음에 죽으면 만나서 한 판 해야겠어”라고 말하는 폼이 자못 진지하기까지 했다.

 “심청전 자세히 한 번 보셨어? 거기에 심봉사. 그 심학규라는 사람이 얼마나 한심하게 그려져 있는지 몰라요. 앞 안 보인다고 물소리 나니까 목욕해도 되겠다면서 사람 지나가든 말든 옷을 훌렁 훌렁 벗고 들어갔다가 결국 옷을 잃어버리고 울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옷을 갖다 주는 장면도 있어요. 그리고 지는 가만히 앉아서 딸이 빌어온 밥만 얻어먹고 있고(일어나 재빨리 걸어 보이며) 이렇게 걷는 것도 아니고 늘 이렇게 더듬더듬 거리면서 가는 걸로 나옵니다, 그러다 결국 딸이 -자원을 했든 안 했든 공양미 삼백 석에 딸을 팔아먹은 거 아니에요. 아주 심청전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입에 거품이 나요.”

 그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도 그렇게 형편없이 무능력하게 지낸 시각장애우들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 당시부터 시각장애우들이 갖고 있는 앞날을 예측하는 예지력을 높이 사 나라에서는 시각장애우들에게 참봉이라는 벼슬을 내려주었고 국가의 큰 행사가 있을 때도 몇몇 뛰어난 시각장애 복술가의 의견에 충실히 따라 택일을 했다는 것이다.

 “영화 제이에스에이를 그렇게 많은 국민들이 봤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이제 휴전선 근처에서 남북군인들이 오고 가며 술도 먹고 잘 지내다가 걸렸다고 해도 국민들의 저항감이 예전처럼 크지는 않을 거예요. 문화예술이라는 게 그렇게 국민들 의식에 중요한 거거든요. 그런데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접하게 되는 심청전을 통해서 시각장애우들에 대해서 어떤 인상이 굳어질지 생각하면 아주 답답해요. 외국 애들은 시각장애우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헬렌 켈러랍니다. 이 두 사람이 갖게 할 인식의 차이는 엄청난 거죠.”

 그러나 이전의 심봉사 이미지는 만나는 수많은 시각장애 걸인들로 이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에 대한 그의 답변이 이랬다. “얼마 전 몇몇 지체장애우들이 장애를 앞세워 폭력단으로 나서 사회 문제화 될 조짐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같은 장애우들끼리 비교를 하면 좀 그렇습니다만, 차라리 시각장애우들이 하는 구걸은 남에게 혐오감을 줄지는 몰라도 적어도 남에게 그렇게 피해를 주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그런 구걸 행위도 언젠가는 꼭 없어져야죠.”

 시각장애우계에 궂은 일이 있으면 자신의 지위를 가리지 않고 나서는 것도 시각장애우들에 대한 사회인식이 더 나빠지기 전에 바로 잡으려는 남다른 책임감 때문이다. 올해 이월부터 표면화된 한빛맹아원 재단비리 사태 때 그다지 직접적인 상관은 없지만 만사 제치고 그가 달려간 것도 그 이유에서다. 시각장애 전문교육기관인 한빛맹학교가 시각장애 발생률이 낮아지면서 입학생이 매년 줄자 정신지체, 지체 장애 학생들까지 받겠다고 나선 데 대해 재학생과 한빛맹학교 동문들이 들고 일어나 그간의 잘못된 재단 운영 관행까지 바로 잡아줄 것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 대략적인 한빛맹학교 사태의 골자이다. 재단측과 농성 학생, 졸업생 측의 대립이 팽팽해져 갈수록 파국으로 치달아 간 어느 날 농성현장을 찾은 그는 한 시간 동안 양측으로부터 통수권을 인도받아 양측이 적정선에서 타협하도록 중재를 하면서 사태가 조기에 해결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같은 문제가 목포의 한 맹학교에서도 발생하자 그곳까지 달려간 그이다. 그저 순전히 ‘옵저버’의 자격으로 말이다.

 “우리나라 인구가 사천만 명이 넘은 지 오래고 이제 거의 오천만이라고 봐야죠. 그런데 시각장애우는 백분의 일인 오십만 이거든요. 그런데 솔직히 오십만이 적습니까. 그 안에 별별 사람 다 들어 있게 마련이죠. 그래도 어쨌든 소수니까 한 사람이 잘못하면 전체가 다 욕먹어요. 그러니 가급적이면 정안이들에게 시각장애우들이 잘 보이려면 한사람 한사람이 다 잘해야 해요.”


 슈바이처와 같은 의료인이고자

 이미 부지런히 그의 얘기를 받아 적던 손을 놓고 그저 그의 맛난 이야기솜씨에 빠져든 지 오래였다. 노래도 잘 할 것 같았지만 확인해 보지는 못했고, 타고난 이야기꾼임은 확실해 다른 일을  해보고 싶지는 않았는지 슬쩍 떠 보았다. 그러나 슈바이처와 같은 훌륭한 의료인이 되고자 했던 그는 침술이 가장 재미있었다고, 그 길 외에 다른 길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예전에는 침술원에 빽빽하게 들어찬 손님들 때문에 대기표까지 내주고 간호사도 두 명을 둬야 했을 정도였으나 이제는 환자 수가 많이 줄었다는 점이었다. 한의원에도 의료보험이 적용되면서 오히려 그곳의 침술·진료비가 더 저렴해진 까닭이다. 그래도 학교 졸업 이년 후인 칠십구년부터 지금 그 자리에서 착실히 명성을 쌓아왔기에 그를 찾는 환자들의 수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긴 하다. 그러나 명문 이화여대에서 의상을 전공하고 있는 딸과 올해 수시모집에 이미 합격한 아들의 등록금을 생각하면 가장으로서 적잖이 부담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돈에 연연하지 않고 여전히 환자를 보는 짬짬이 그날그날의 방송 원고를 정리하는 일에 그는 열심이었다. 그가 맡은 사서함의 청취자가 구천 명에 달하게 되니 훨씬 큰 단체나 이전의 사랑의 소리 같은 곳에서도 광고사항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연락을 하는 영향력을 갖게도 됐다. 가장 확실한 홍보 매체라는 사실은 오래 전 청취자가 오백 명에 불과했을 때도 이미 입증된 사실이기도 하다. 삼성안내견센타가 설립 초기 기관 홍보가 덜 돼 안내견 훈련을 맡기는 시각장애우들이 없어 어려움에 빠졌을 때 그가 직접 센터를 찾아가 현장에서 직접 취재한 알찬 정보를 담아 내보내니 당장 안내견 훈련신청이 칠십 건이나 됐다는 것이다.

 맛깔스러운 말솜씨와 누구 못지않은 마당발로서 시각장애 전반의 폭넓은 정보수집과 해석력을 갖춘 그의 사서함은 이제 누구도 넘보지 못할 하나의 확실한 언론매체가 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혼자, 그것도 자비를 들여가며 행하는 그를 보고 인터뷰 도중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역할을 ‘제도화’하는 것이 좋을지 잠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먹을거리도 다양한 차림 중에서 골라 먹는 재미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시각장애우들이 접할 수 있는 정보매체도 더 다양해져야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큰 희생이라거나 봉사라고 생색내지 않고 팔년을 한결같이 즐겁게 일하는 그가 새삼 커보였다. 식사 때 절대 손님을 그냥 보내지 않는다며 애써 기자들을 붙잡은 그에게 그야말로 거한 점심을 얻어먹었다고 해서 하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글/ 한혜영 객원기자 사진/ 이수지  기자

작성자한혜영 객원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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