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이야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이외다” > 세상, 한 걸음


[공동체이야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이외다”

출소 장기수들이 함께 살아가는 만남의 집

본문

  서울 관악구 낙성대 근처에는 장기수 열 분이 모여 사는 ‘만남의 집’이 있다. 대통령이 공약한 양심수 석방이 8.15 광복절을 맞아 대대적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보도가 이어지면서 양심수에 대한 새로운 눈길이 쏠리고 있는 요즈음, 만남의 집을 찾아 감춰진 역사의 뒤안길에서 꼿꼿하게 살아온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 친구 얼굴은 하나도 안 늙었지. 난 아들 딸을 다섯씩이나 낳느라고 힘을 많이 써서 얼굴이 이렇고, 근데 그래서 그런지 이 김 선생은 세상 물정을 아무 것도 몰러!”

  이런 홍경선 선생의 농 섞인 가벼운 구박에 “저인 만날 저 소리지. 근데 저 홍 선생은 곧 죽어도 ‘괘기’가 표준말이래.”하고 볼멘소리를 튕기는 김선명 선생.

  그러나 아들딸이 다섯이나 있다는 홍 선생이 그 가족들과 떨어져 살고 있는 이유나 남보다 빠질 것 없는 집안에 학식에 인물을 갖춘 김 선생이 칠십 평생을 새파란 총각으로 늙어가야 했던 이유를 누구보다 서로 잘 알고 있는 분들.

  그래서 이들의 농은 잔물결만 잘싹잘싹 일으키는, 띠앗정 함빡 묻어나는 토닥거림으로 들린다.

  동갑나기 이 두 선생의 이러한 농지거리가 이어지는 동안 순종 진돗개 흰둥이가 간간이 그 사이에서 재롱을 부리면 말허리를 끊어놓기는 해도 서울 관악구 봉천6동의 이층 양옥집은 웬일인지 이 8월에도 생각보다 조용하다.


 8.15특사 소식에도 조용하기만 한 이유

  이 곳이 바로 출소한 열 분의 비전향장기수들이 생활하고 있는 ‘만남의 집’. 그런데 대통령이 약속한 대대적인 광복절 특사를 통해 드디어 삼사십년만에 닫힌 옥문을 열고나올 옛 동지들과 가슴 뜨거운 만남을 앞둔 이들이 왜 이렇듯 무덤덤한가.

  “사상전향제도를 폐지한다고는 했지만 준법서약을 해야 나올 수 있다지 않아요? 단언컨대 그걸 쓰고 나올 장기수들은 한 명도 없을 게요.”

  그나마 70세 연령규정 때문에라도 나오게 될 장기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놈의 준법서약제’ 때문에 전국의 각 교도소에서 몇 분이나 나오게 될지, 자리를 같이한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회장도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젓는다. “얼마 전에 한 장기수 분을 면회 가서 뵈었더니 준법서약제 같은 것에 대해서 딴 말씀은 안하시고 그냥 ‘교도소에서 잘 해주니까 계속 여기서 살라요’라고만 말씀하시더구만요.”

  “사상전향을 하도 안하니까 얼마 전까지는 출소 후에 이렇게 이렇게 살겠다는, 말하자면 생활계획서를 쓰는 수준에서 타협책을 내밀더니 이제 머리 속의 사상은 그대로 둘 테니까 대신 국가보안법같은 악법이 엄연히 있는데도 그걸 그대로 두고서도 그냥 법은 지키라는 식으로 더 개악됐어요. 우리가 삼십년 넘게 옥살이를 하면서도 지키고자 한 것이 우리 양심이고 그런 악법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신념인데 그걸 놔두고 아무튼지 법을 지키라고 하는 건, 그건 이제까지의 삶과 자기 존재를 부정하라는 소리요.”

  이러한 준법서약제도의 패악에 대해 만남의 집 여러 선생들이 거듭해서 강조하셨다. “일제시대 때 일본놈들이 독립군들에게 민족 사상을 버리는 전향을 강요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악질적인 제도가 미군정과 박정희 정권을 이어 현재까지도 이름만 바뀌어 왔다.”는 그 역사적 배경까지도 자세히 설명하면서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되고 여러 차례 양심수 석방을 약속해서 기대를 했지만 아무래도 그 사람 아래 있는 보수파들이 자꾸 들고 일어나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조선이 붙는 것 같다고 분통을 터뜨리신다.


 “그래도 세상 많이 좋아졌지”

  그렇다고 해도 이번 광복절 특사 때 누가 어디서 출소하게 되는 지 미리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해 보였다. 그 까닭은 홍경선 선생의 경우에서 알게 된다.

  가장 최근인 올해 3월 13일 석방된 홍 선생은 나오기 두어 시간 전에야 자신의 석방소식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연고자가 없다는 이유로 다른 장기수분들과 함께 교도소 뒷문으로 돌려져 갱생보호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갱생보호소라는 데는 좁은 곳에 많은 사람이 우글대고 있어 교도소 안보다 더 참혹한 여건이었다. 마중 나오기로 한 친척과 연락이 닿지 않아 몹시 불안해하며 홍 선생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편지교환을 하면서 손녀딸처럼 마음을 의지하게 된 양심수후원회원 김성희 씨에게 연락을 했다. 김성희 씨는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먼 길을 마다 않고 달려왔고, 그를 따라 신혼집인 그이네 집에 도착한 것이 새벽 1시가 다 된 때였다.

  같은 날 출소해 먼저 만남의 집에 와 있던 최하종 선생은 “우린 그 때 가진 돈 하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당장 그날 점심은 어디서 해결하며 잠은 어디서 잘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전한다.

  그나마 지금은 후원회가 조직돼 전국 각 지역의 교도소에서 나오는 장기수들을 위해 연이 닿는 신부님과 목사님이 나서서 장기수분들을 ‘인수’한다. 그리고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만남의 집’과 같은 공간으로 안내되는 것이다. 만남의 집은 89년 구로에서 처음 마련돼 92년 수유리와 낙성대로 나뉘어 있다가 현재의 집으로 모두 합쳐진 것이다. 그나마 이렇게 방 네 개짜리 양옥집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여러 곳에서 보내온 적지 않은 후원금 덕분이다.

  그러나 89년 사회안전법이 폐지되면서 세사에 나온 이종(88) 선생과 최남규(87), 김석형(85), 유운형(78) 선생들은 만남의 집에서 살기 전까지는 곧바로 양로원으로 옮겨지거나 갱생보호소를 전전하며 고물상과 같은 날품팔이로 하루하루 먹고 살 일을 걱정하는 처참한 생활을 이어가야했다. 교도소 안과 비교해 결코 덜하지 않는 ‘빨갱이’라는 주위의 천시를 받으면서 모처럼 갖게 된 자유의 참맛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 한 채 말이다.


 살아있는 역사와 만나는 ‘만남의 집’

  아무튼 만남의 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곳에서는 여러 형태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먼저 출소한 다른 장기수들과도 만나 이제 노쇠해진 손을 굳게 맞잡기도 했고, 타임머신이라도 탄 듯 훌쩍 흘러가버린 삼십 여년을 뒤늦게 채워 넣기 위해 출소 후 한 동안은 ‘사회선배’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버스와 지하철 타는 법, 공중전화 거는 법도 배워 가며 낯선 사회와의 설익은 만남을 익히기도 했다.

  홍경선 선생은 “처음엔 택시 요금은 뭘 보고 내는 지 텔레비전은 어떻게 켜는 지도 모르고, 세상 모든 게 낯설었는데... 이제 출소한 지 다섯 달 정도 되니까 거의 알겠어요. 그 동안 안다닌 곳 없이 다 다녀 봤습니다. 최루탄 연기 날리는 곳에도 갔었고 젊은이들 많은 곳도 갔었지. 이젠 기운이 막 나요.”

  만남의 집 거실의 한 쪽 벽에는 돌을 맞은 듯한 웬 아이 사진이 걸려 있다. 이북에 가족을 두고 내려 왔거나 고향이 이남이어도 자신으로 인해 온갖 고초를 당해 그나마 있던 친인척들과도 철저히 연락이 끊긴 분들이기 때문에 그 사진에 얽힌 사연이 궁금해진다. 알고 보니 매월 후원회원끼리 가는 산행 행사에서 ‘눈이 맞아’ 결혼한 부부가 낳은 아이라고 한다.

  “산에서의 인연으로 태어났다고 이름도 ‘산하’에요. 우리 모두의 손주지.”라고 설명하시는 선생들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가득하다.

  만남의 집이 얼마간 세상에 알려지면서, 더욱이 요즈음과 같이 양심수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평가가 더해지는 가운데 이들 선생들의 일정도 조금씩 바빠지고 있다. 고단했던 긴 인생살이 끝에 처음 맛보는 듯한 햇볕, 그 가운데에서 무엇보다 장기수분들이 즐거워하는 일은 젊은이들과의 만남을 가질 때인 것 같다. 그들과의 소중한 만남 뒤에 방문객들이 짤막한 소감을 기록하고 사는 방명록도 소중히 챙기신다. 가끔 와서 저녁식사를 준비해서 같이 나눠먹고 가는 관악청년회 친구들에 대해서는 “우리랑 한 식구들”이라고 자랑할 정도로 이 분들에게는 찾아오는 사람이 반갑다.

  쓸쓸한 칠순을 넘길 즈음 교도소 안으로 배달된 한 보따리의 과자꾸러미를 받았다거나 처음 보는 젊은이가 면회를 와서는 대뜸 큰 절을 올리더라는 얘기는 홍 선생이 몇 번을 반복해온 그의 자랑이다. 김인수 선생은 수전증이 심해 글자 하나도 제대로 쓰기 어려운 몸이기에 동료들에게 부탁해 담장 바깥의 젊은이들과 편지를 주고받을 때 느꼈던 기쁨의 크기도 다른 사람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또한 89년에 나온 선생들에 비하면 정말 엄청난 호사다. 면회 오는 사람도, 빌려 읽을 수 있는 책도 없고 집필을 금지당해 자신의 심경을 글로 옮겨 써볼 수도 없는 천상고독의 세계에서 몸부림치는 갈등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그것은 어쩌면 선생들의 뼈를 바스러뜨리고 심장과 피를 멎게 한, ‘말로 다 할 수도 없는’ 사상전향공작보다 더 무서운 시련이었는지도 모른다.

  독거수 생활이라 “혀가 잘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무거운 침묵을 감당해야 했던 이종 선생은 혼자 시구를 입 속으로 다듬고 또 다듬는 것으로 그 시간을 이겨냈고, 그 언어들은 출소 후에야 비로소 종이에 옮겨져 <독방>이라는 두툼한 두 권의 시집으로 태어나기도 했다.


 마지막 빨치산 여전사 정순덕 여사

  4시에 일어나 차례대로 냉수마찰을 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시는 이 분들은 이곳에서도 감옥 안과 같이 철저하게 절제된 생활을 하고 있다. 서로를 꼬박꼬박 ‘선생’이라고 부르면서 끼니도 6시 30분, 12시 30분, 저녁 6시 30분, 이렇게 정해진 시간에 드시고 밤 아홉시면 잠자리에 든다. 이종 선생은 최고령이지만 아직도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하루 종일 독서와 집필에 전념한다. 전직 지리학 교수였지만 이제 귀도 거의 안 들리고 거동도 가장 불편한 최남규 선생은 이층에 있는 방을 오르내릴 때 다른 선생들이 도와주거나 약을 챙겨주면 꼬박꼬박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많은 신경을 쓰는 듯하면 자신은 괜찮다고 웃으면서 도리질을 치신다.

  이렇듯 자신의 일상은 남 신세 안 지고 자기 스스로가 모두 챙기려는 의식이 너무 강한 탓도 있다. 금재성 선생이 자신의 병마를 끝내 췌장암 말기까지의 지경으로 키워간 것은, 지난 5월 췌장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게 될 때까지 남에게 통증도 호소하지 않고 꼿꼿하게 참고 견딘 탓인데 동료들이 그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챘을 때는 암세포가 수습할 수 없는 단계까지 퍼져버린 뒤였다. 그래서 현재 보라매병원에 입원해 있는 금재성 선생을 간병하는 일은 이곳 선생들에게 중요한 일과로 추가됐다.

  그 밖의 일상을 묻는 질문에 김석형 선생이 “우리들은 일과랄 것도 없이 지내지만 저기 저 정 선생은 하루 종일 열사람 분의 매끼 식사를 책임지고 빨래하고 텃밭 가꾸고, 정말 새벽부터 밤중까지 바쁘게 지낸다.”고 가만히 얘기를 듣고 앉아 있는 조그마한 여인을 턱으로 가리키며 귀띔하신다.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 여사다.

  자유당 시절 ‘신출귀몰하는 여자 공비’ 또는 ‘최후의 빨치산 여전사’라는 신화를 남겼던 이 정순덕 여사는 우리들의 상상과는 동떨어지게도 150cm남짓키의 정말 자그마한 체구의 보통 할머니였다. 그리고 그의 오른쪽 다리, 친구의 밀고로 들이닥친 경찰의 총격을 받고 잘려진 후 평생 끌고 다녀온 의족. 더구나 22년의 수감 기간 동안 절단된 다리에 의족도 없이 겅중거리고 다녀야 했던 그 삶의 무게가 퇴행성관절염이 되어 오늘날 그를 괴롭히고 있다.

  “비가 오면 절단한 부위가 쑤시지만 성한 이 왼쪽 다리도 너무 (무리하게) 써서 물렁뼈가 다 녹아버렸대.”
  그렇지만 현재 만남의 집의 가사를 책임지는 ‘이깟 일’은 정 선생에게 그야말로 즐거운 비명거리에 불과하다. 선생들 가운데 제일 먼저인 85년에 세상에 던져져 지금껏 식모살이에 가방공장, 물수건공장, 옷걸이공장과 같은 영세공장을 전전하다 이곳에 자리를 잡기까지 헤쳐 와야 했던 세월에 비하면 말이다. 93년 주민등록증을 손에 쥘 때까지는 자리를 좀 잡을만하면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지난 행적을 조롱당하는 따위의 모멸의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다.

  정 여사를 제외한 다른 분들은 나이 칠십을 넘기고 세상에 나왔으니 사실 건강이 허락하더라도 일거리를 얻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그래서 식구들 중에 그야말로 안정된 일자리를 갖고 있는 사람은 김선명 선생이 유일했다. 이전부터 그 곳에서 일하던 다른 장기수 분의 소개로 치과기공소에 나가 이리저리 관련물품을 운반하는 일을 하고 계셔서 다른 동년배 선생들에게는 어쨌든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올해 3월 13일에 석방돼서 새 식구로 들어온 홍경선, 김인수, 최하종 세 분은 비교적 정정하신 편이었지만 당장 김 선생과 같은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 취로사업을 나가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고 하시며 표정 없는 웃음을 흘린다. 더구나 비전향 장기수들은 일반 재소자들이 교도소 내에서 받을 수 있는 직업훈련에서도 제외되고 해서 아무런 기술도 배우지 못한 상황이었다.

  “보기에도 제가 건강해 뵈지요? 그러니 기자 선생이 일자리 좀 알아봐주세요. 근데 우리가 구식이 돼서 컴퓨터도 못하고 IMF라 어디든 일자리가 더 귀해져서 어렵게 됐지 뭐예요.” 이렇게 말하며 쑥스러운 듯 웃는 최하종 선생은 김책공군사관학교를 나온 군인 출신으로 가장 체격이 건장한 분이었다. 한 번은 직업소개소에 전화를 걸어 경비일같은 자리를 찾았더니 대뜸 나이부터 물었고, (칠십이 세지만) 그래도 머리를 써서 ‘칠십 정도 됐다’고 했더니 그럼 안 된다며 그냥 전화를 끊더라는 것이다.

  김인수 선생은 “최 선생하고 나하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취로를 나가기 시작했는데 누구는 ‘아니 왜 취로같은 일을 하느냐, 가만 몇 달 쉬다가 사회 돌아가는 것 보고 천천히 일을 시작하지’하는 얘기도 해요. 하지만 취로일이면 어때요. 지금 우리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잖아요. 그렇다고 남의 신세만 지고 살 수는 없고 그 일이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이들 세 사람을 제외한 일곱 분에게는 현재 무연고 거택보호자로서 받는 월 16만원 상당의 수당과 노령수당이 유일한 수입이다. 그리고 후원회에서 조금 보태는 약간의 돈으로 생활하고 있다.

  취업이나 취로를 통해 버는 돈은 각자 관리한다. 이들 선생들이 고단한 육체노동의 대가로 돈을 받아 쥐면서 갖는 소망은 만남의 집을 나와 자립하는 것. 물론 만남의 집이 불편해서가 결코 아니다.

  “이 곳에 있는 것이 한없이 편하기는 하지만 언제까지 남의 도움에 의존해서 살 수만은 없잖아요. 그래서 전봇대에 붙은 월세 얼마 하는 광고문도 유심히 보고 다니면서 얼마쯤 더 모으면 되겠다. 이런 가늠을 해보지요.”

  그것은 앞으로 나올 장기수 분들, 특히 자신의 힘으로 생활하기 어려울 정도로 병약한 몸으로 나올 다른 장기수들을 위해 이 곳을 비워주어야 한다는 ‘걱정’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취로사업을 하며 버는 그 돈은 절대 허투루 쓰지 않고 꼬박꼬박 모아가고 있다.


 고난에 찬 삶 스스로 선택해야 했던 사회주의자들

  정신대 할머니들의 오늘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낮은 목소리’ 중에서 감독이 할머니들께 다시 태어나면 뭘 하고 싶냐고 묻는 대목이 있었다. 군인이 되어서 일본놈들 꼼짝 못하게 만들고 싶다는 할머니도 계셨지만 후세대들의 마음을 가장 아리게 했던 것은 “평범하게 아들 딸 낳고 살고 싶지”라며 수줍게 웃던 할머니의 말씀이었다.

  장기수분들에게도 그런 삶의 회한은 없을까.

  “우리는 정신대 할머니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에요. 우리는 어쨌든 자발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됐고 그래서 그 대가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지만 나의 의지로 선택한 삶이니까 후회는 전혀 없어요. 내 양심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왔으니까.”

  정신대 문제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감춰진 역사적 사실이 드러나고 재평가 작업도 이뤄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들 장기수 선생들에 대한 진정한 가치평가가 이루어지는 날은 언제일까. 전투 중에 또 살을 찢는 고문으로 한 마디 말도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간 동지들을 생각하면 자신은 그 사실을 알리고 후대에 그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책무를 절절하게 머리 속에 새기고 있기에 선생들은 앞으로 다가올 죽음을 생각하며 남다른 감회에 젖기도 하리라.

  김선명 선생이 녹음기를 사서 자신의 살아온 이력을 남기려고 시도했던 것에서도 그들의 역사의식을 짚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은 중단되고 말았다. 혼자 중얼중얼 거리다 보니 미친 사람같아 그만 두었다는 것이다. 하려다 못한 그 얘기들을 들어 줄 이는 누구일까. 우리들 젊은 세대 모두여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바라는 것이 있다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오”라고 말하는 이 분들에게 “특히 고향이 이북이신 분들은 올 가을 금강산 유람선이 뜨면 가장 먼저 달려가고 싶으시겠어요.”라는 말은 아픈 상처를 덧내는 어리석은 물음이었음을 곧 알게 됐다.

  “우리는 그 명단에서 제일 먼저 제외될 사람들이에요. 사회안전법이 없어졌지만 보호관찰법이 또 판을 치고 있으니. 국내 여행도 제약이 많은데...”

  이들 장기수 선생들은 ‘단 한 명의 사람 목숨을 죽여도 사형감인데, 국가 체제를 전복하려 했던 자들이 어떻게 이 체제에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느냐’고 말한 어떤 이의 논리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굴욕적인 안위를 바라지 않고 다만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될 그 날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 날의 큰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 이들 ‘만남의 집’ 선생들은 오늘도 그렇게 세월을 고이 감싸 안는다.

 

글/ 한혜영 기자

작성자한혜영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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