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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이야기] “제 소원은 아이들과 뒹굴며 사는 거예요”

장애우 공동체 ‘작은자리’ 운영하는 강동택 씨

본문

 간판 없는 공동체 작은자리

  앞으로 이 사내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겠다. 왜냐구? 그이는 다른 것은 제쳐 두더라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장애우 수용시설의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 혼자 고군분투하는 사람이니까. 대형 시설의 문제점을 비판에만 그치지 않고 묵묵히 현장에서 대안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니까. 그이의 고독한 실험은 현시점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질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올해 나이 서른다섯 살인 강동택 시가 운영하고 있는 서울 불광삼동에 있는 작은자리에는 그 흔한 간판 하나 내걸려 있지 않았다. 겉은 물론 작은자리 내부에도 간판이 없다. 그래서 주택가 연립주택 이층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자리는 시설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평범한 가정집이다.
  하지만 이 집에 사는 사람들 면면을 보면 작은자리가 장애우 공동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작은자리에는 현재 많게는 열네 살, 적게는 태어난 지 이십육개월 된, 한 가지 장애만이 아니라 두 가지 이상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중복장애아 아홉 명이 살고 있다. 이들을 돌보는 교사 세 명과 강동택 씨까지 더하면 열세명의 대식구가 한 집에서 사는 셈이다.

  그런데 서두에 힌트를 주자면 식구들 아홉 명이 모두 장애가 심한 중복장애아라는 점, 그리고 교사 세 명이 상근하며 이들을 돌보고 있다는 점은 작은자리를 다른 장애우 공동체와 구별 짓게 해주는 요소이다.

  이는 단순히 아이들 아홉 명에 교사 세 명이라는 인원 구성이 독특해서가 아니다. 작은자리가 이런 인원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은 거창하게 말하면 그이의 운영 철학이 짙게 배어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뒤에 가서 하기로 하고 먼저 강동택 그이를 처음 만난 이야기부터 해보자.

  장애우 시설을 취재할 때 시설 운영자를 신격화하고, 대신 수용되어 있는 장애우들은 한없이 불쌍한 사람들로 묘사하는 언론의 잘못된 보도 관행 때문에 언론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그이를 어렵게 설득해 만난 곳은 서울 지하철 삼호선 지축역 부근에 있는 한 허름한 비닐하우스 안이었다. 뜻밖에도 그이는 그곳에서 닭꼬치를 만들고 있었다. 공동체 운영자가 공동체에는 없고 낡은 비닐하우스에서 닭꼬치를 만들고 있다? 뭔가 범상치 않은 사연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이는 부지런히 닭다리 뼈를 발라 살만 꼬치에 끼우고 있었다. 그이 말에 따르면 닭꼬치 도매업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만든 닭꼬치를 싼 값에 노점상들에게 납품한단다. 이어진 그이의 설명에 따르면 그이가 이 일을 시작한 것은 작년 초부터이다. 작은자리 운영비를 대기 위해 이 일을 시작했는데 닭꼬치를 만들어 작은자리 한 달 운영비 사백만원의 반 이상을 조달하고 있단다.

  이 점이 그이가 다른 장애우 공동체 운영자와 다른 점 중의 하나다. 즉 그이는 전적으로 후원금에 기대 시설을 운영하지 않고 스스로 돈을 벌어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그이를 주목하게 하는 것은 그이가 작은자리를 만들게 된 이유이다.

  그이를 처음 만나 물어본 것은 늘 그렇듯이 왜 장애우 공동체를 만들게 됐냐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그이는 담담하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와 작은자리를 만들기 전 큰 시설에서 일했던 경험을 털어놨다. 비장애우인 그이는 어떻게 장애우와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팔 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그이는 갖은 고생을 하며 자랐다. 안 해본 일이 없고 안 해본 장사가 없을 정도로 고생 끝에 스스로 학비를 벌어 대학을 다는 그이는 과부 사정 홀아비가 안다고 본능적으로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 대한 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애정은 그이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더 강하게 분출됐다. 청소년기 그이는 성당에 다니면서 성당에 나오는 장애우들과 대화를 나누는 게 큰 기쁨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장애우들의 휠체어를 밀어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고, 그러면서 “건방진 생각인지 모르지만 내가 결혼을 한다면 장애를 가진 여성과 결혼을 하겠다.”는 마음까지 먹었단다. 하지만 그것 뿐 그이는 생활에 쫓겨 더 이상 장애우들과 구체적인 인연은 이어가지 못했다.

  그랬던 그이가 장애우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팔십구년 대학 재학 중 서울에 있는 한 중복장애아 시설에 자원 활동을 하러 다니면서부터였는데 심성 탓이겠지만 그이는 “시설에서 장애아들이 똥 싸고 노는 게 너무 아름답게 보였고, 똥 냄새가 달콤하게 느껴졌다”고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이렇게 똥냄새가 달콤할 정도로 장애아들이 좋다보니 그이는 시간 날 때마다 한 번씩 시설에 들르는 게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이때 장애아들과 평생을 같이 살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장애아들과 피부를 맞대고 같이 뒹굴며 평생을 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그이 내부에서 꿈틀댔던 것이다.

  그이는 삼년 군복무를 마치자마자 마음먹은 대로 자원활동자가 아니라 장애아들과 같이 살기 위해 다시 그 시설을 찾았다. 그 곳에서 원 없이 장애아들과 뒹굴다가 그이는 그 후 강원도 춘천에 있는 규모가 큰 장애우 수용시설의 직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렇지만 중복장애아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잊을 수 없었던 그이는 구십사년 다시 장애아들과 처음 인연을 맺었던 시설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시설총무라는 직함을 가지고 시설에서 일하게 됐는데, 그렇게 시설에서 일한 지 일년여, 어느 날부터 그이 내부에서 회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시설에 장애아들이 늘어나면서 단순 수용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자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설이 커지면서 아이들이 늘어나고, 그러다보니 장애아 개개인에 대한 관심은 어려워지는 상황이 펼쳐졌다. 중복장애아일수록 한 아이 한 아이 애정 어린 손을 더 내밀어아 하는데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그게 불가능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회의 끝에 이건 바람직한 시설 형태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 그이는 스스로 바람직한 시설을 만들어 보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런데 그 결심은 당시로서는 정말 무모한 결심이었다. 무엇보다 그이에게는 시설을 만들 재원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람직한 시설은 이런 것이다 라는, 장애아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모범 답안을 꼭 만들어 보고 싶었던 그이 열망은 누구도 막지 못했다. 그이는 구십오년 초 시설을 그만둔 다음 꼬박 삼개월을 준비해 작은자리 설립기금 마련을 위한 일일호프를 열었다. 거기서 얻은 수익금으로 서울 연신내와 구파발 사이에 있는 박석고개 산동네에 보증금 천만원에 월세 삼십오만원짜리 방을 얻어 그이가 작은자리 문을 연 것은 구십오년 유월 일이었다.


 열 명이 넘으면 시설이 아니라 수용소

  그이는 작은자리 문을 열면서 작은자리에 들어올 수 있는 대상을 중복장애아로 한정지었다. 중복장애아는 시설에서 장애가 심하다고 잘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그러다 보니 시설에서 받아주는 조건으로 부모에게 수천만원을 요구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그 부조리를 목격한 그이는 시설에서 받기를 꺼리는 중복장애아들만 받아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다.

  당연히 첫 번째 공동체 식구는 중복장애아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그이는 장애아가 한 명뿐이었던 초기에 이미 아이 교육을 위해 월급을 주는 특수교사를 채용했다는 점이다.

  특수교사가 있는 공동체? 낯설기만 한 조치를 취한 이유를 그이는 “저는 아이들이 아무리 중복장애를 가졌어도 인지능력만 있으면 교육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에 대한 일차적인 교육은 스스로 밥을 먹게 하고 대소변을 처리하게끔 하는 게 가장 중요하죠. 그 교육을 위해서라도 교사를 채용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라고 반문한다.

  하지만 내막인즉슨 그이는 작은자리를 처음 시작할 무렵 교사를 채용할 여건이 전혀 된지 않았다. 오죽하면 쌀을 사먹을 돈이 없어 봉천동 한 가정집에서 상한 쌀을 가져다가 빡빡 씻어서 아이들과 밥을 해 먹었을까. 그럼에도 그이가 교사 채용을 고집한 것은 교육이 없는 단순 수용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예의 그 바람직한 시설 모델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교육에 집착하다 보니 생각지도 않은 문제가 생겼다. 신변처리가 가능해지고 나자 이번에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했던 것이다.

  “저는 솔직히 처음에는 학교까지 보낼 생각은 안 했어요. 그냥 데리고만 살려고 그랬는데 막상 학교 보낼 나이가 되고 보니 학교 교육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지요.” 지금 작은 자리 아이들 중 세 명은 특수학교에 다니고 있다.

  이야기를 다시 처음으로 돌려 그렇게 어렵게 시작한 작은자리는 문을 연 지 일 년여 만에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지금의 불광동 연립주택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이는 열두 평짜리 집을 빚을 얻고 은행 융자를 껴서 마련했다. 그리고 지금 식구는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중복장애아 아홉 명과 교사 세 명이다.

  그러면 작은자리에 있는 장애아들은 어떤 아이들일까?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정확하게 구십육년 유월 오일 그이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 누가 태어난 지 삼일밖에 되지 않은 핏덩어리를 작은자리 문 앞에 놓고 사라졌던 것이다. 다운증후군 장애아였다.

  그이는 직감적으로 근처 동네 사람이 키워달라는 뜻으로 버리고 갔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이는 경찰서에 신고한 후 자신이 낳은 아이처럼 서류를 꾸며 출생신고를 마친 후 그 아이를 호적에 입적시켰다.

  올해 다섯 살인 한 장애아는 부모가 이혼하면서 어렵게 할머니가 키우던 것을 데려다가 입양아로 역시 호적에 입적시킨 경우이다. 그리고 지금 열 네 살인 자폐아 승규는 국립의료원 응급실에 버려진 것을 데려다가 강승규라는 이름을 만들고 호적을 만들어줬다.

  이렇게 저마다 모두 사연을 가지고 있는 아홉 명 장애아들의 법적인 보호자는 물어볼 것도 없이 그리다. 두 명은 친자식으로 그이 호적에 등재돼 있고, 일곱 명은 동거인으로 그이가 세대주인 주민등록에 올라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다시 의외의 사실 하나를 언급해 보자. 그이는 누가 보기에도 버려진 장애아들을 데려다 키우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이는 정부에서 주는 생활보호제도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다. 만약 그이가 자격이 안 된다 해도 아이들은 생활보호 혜택을 받을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공동체 운영이 어려워 따로 일을 해야 하는 그이 형편으로서는 충분치는 않지만 정부가 주는 혜택을 받을만한 데도 그이는 정부가 주는 혜택을 받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한 달 의료보험비 삼 만원을 매달 꼬박꼬박 내면서 자력으로 작은자리를 운영하겠다고 버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적지 않은 수의 후원자가 현재 작은자리를 도와주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어차피 운영비 마련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 그이 입장을 볼 때 후원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그이의 고집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어떤 다른 이유가 있을까?

  그이는 정부의 장애우 시설정책에 강한 불신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작은 것이라도 정부 지원 받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이는 열 명 이상의 장애우가 있는 시설은 복지시설이 아니라 수용소에 지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장애우들이 조금이라도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 속에서, 구체적으로는 주택가에 작은 시설을 지어 살게 해줘야 하는데 이와는 반대로 인적 드문 외진 곳에 장애우 시설을, 그것도 대형 시설을 늘려가는 정부 형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이는 속히 기존 시설들을 쪼개야 한다고 다소 과격해 보이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월급 받는 총각 아빠

  마지막으로 그이의 새로운 장애우 공동체에 대한 실험은 작은자리를 회사처럼 운영하고 있다는 데에서 기존 공동체와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현재 작은자리 운영비 중 태반은 교사들 인건비다. 한 달 사백만원 운영비에서 교사 한 사람당 팔십만원씩 세 명 인건비로 이백사십만원이 지출된다. 이 인건비 마련은 전적으로 그이 책임이다. 그러다 보니 교사들 인건비가 적지 않은 부담이 될 때로 있다. 하지만 그이는 오히려 교사들에게 더 많은 급여를 지급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기존 시설들은 직원들에게 희생과 봉사만 강요해요. 물론 교사들에게 자원활동하라고 하면 몇 개월은 가능하겠죠. 그렇지만 지속될 수는 없어요. 저는 교사들에게 여기는 하나의 직장이니까 프로의식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엄마 경 이모 겸 어떤 때는 선생님이 돼야 한다고 강조하죠. 이렇게 헌신을 강요하면서 월급을 안 준다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저는 어떤 직장보다 우리 교사들에게 월급을 더 많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퇴직금도 지급해야죠,”

  그런데 또 하나 특이한 점은 그이도 월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작년부터 그이는 한 달 월급으로 오십만원을 책정해 저축하고 있다. 자신이 벌어 자신에게 월급을 주는 셈인데, 그이가 월급을 받겠다고 결심한 것은 노후를 대비해서이기도 하지만 만약 혹 자신이 병들었을 경우 아는 사람들이나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이유를 밝힌다.

  저금통장은 그이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있다. 아이들이 아프거나 목돈이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서 그이는 아이들 앞으로 통장을 만들어 매달 일정액을 저금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어렵긴 하지만 앞으로 장기적으로 봤을 때 후원금과 내가 버는 수입이 오십대 오십이면 작은자리가 충분히 유지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만남 말미에 그이가 내비치는 자신감이다.

  그렇다고 그이에게 힘든 일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이는 사람들의 오해를 가장 힘든 점으로 꼽았다. “나는 솔직히 이 일에 제 청춘을 다 바쳤습니다. 그런 나를 두고 뭔가 문제가 있어 저런 일을 한다. 저러다 결혼하면 끝 아니냐고 정말 쉽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진짜 외롭죠.”

  작은자리를 만들면서 명절이면 아이들과 지내기 위해 집에 안가는 연습을 의도적으로 해 이젠 식구들 얼굴까지 잊어버릴 지경이라는 그이, 그이는 “이 생활이 정말 즐겁습니다. 아이들이 재롱 피우는 걸 보면서 모든 시름을 다 잊죠. 제 소원이 뭐냐면 여건만 마련된다면 아이들과 하루 종일 뒹굴며 사는 거예요. 아이들과 같이 자고, 아이들 좋아하는 음식 만들어 주고, 같이 노는 게 제 소원입니다.”라고 강조한 후 말을 맺었다.

  덧붙이자면 강씨는 아침에 아이들과 같이 밥 먹고 일을 나갈 수 있어서 행복하고, 다행이 일하는 곳이 작은자리에서 가까워 아이들과 같이 생활하는 시간이 많아 그게 기쁘고, 일을 마치고 퇴근해 작은자리에 들어서면 아빠라고 부르며 달려드는 아이들 재롱에 감격하는 그이는 주목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한마음으로 격려해 줘야 할 요즘 보기 드문 총각 아빠이다.

 

글/ 이태곤 기자

작성자이태곤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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