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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이야기] 세상 부부가 다 이들과 같다면...

부부활동가 김창수 정경란 씨

본문

  올해 서른다섯 동갑인 김창수 정경란 씨. 이들은 부부활동가이다. 김창수 씨는 통일맞이 칠천만겨레모임에서 자료실장으로 일하고 있고, 정경란 씨는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현재 유학준비로 사임)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지난해 발족한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에서 각각 정책국과 총무일을 맡고 있는데, 학창시절 학생운동을 계기로 만나 결혼 후에도 시민단체에서 맹렬히 활동을 해 오고 있는 이들을 만나 부부활동가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광주 열혈청년과 문학소녀가 운동하게 된 사연

  김창수 씨가 운동을 하게 된 것은 광주 민주화운동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팔십년 오월 광주, 당시 창수 씨는 고등학교 일학년이었다. 오월 십육일 하루 종일 광주 상공에 헬리콥터가 다니면서 시장인지 도시산지가 “시민여러분, 지금 광주 인근에서 군부대가 이동하고 있는 것은 현재 광주에서 발생한 사태와 전혀 상관없이 일상적인 군부대 훈련입니다. 그러니 시민여러분은 전혀 동요하지 마십시오.”라고 방송을 했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군부대가 들어왔다.

  창수 씨는 “진압군이 들어오게 하기 위해 그렇게 거짓말하고 다니는 어른들의 수법이 당시 저에게는 무척이나 분노스러웠어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진실도 저버리는 저런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학교나 사회에서는 그게 옳다는 거예요. 텔레비전에서는 맨날 대통령이 나와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이야기하고, 분명히 잘못됐는데 저는 왜 나쁜지 설명을 잘 못하겠는 거예요. 그런 게 사춘기의 반항심과 결부되면서 내내 우울하게 보냈죠.”

  그래서 창수 씨는 데모 잘하는 대학교에 가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들어간 곳이 고려대학교 철학과. 대학교에 입학하지마자 창수 씨는 신입생 환영회 때부터 운동하는 선배들의 눈에 띄었다.

  다들 술에 취해 파장분위기였는데 갑자기 창수 씨가 앞에 나가서는 “여러분, 광주를 아십니까. 팔십년 오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러분 아세요.”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것이다. 그런 그이의 모습을 본 선배들은 속된 말로 ‘쓸 만하다’싶었고 그 때부터 그이를 찾아다니며 같이 공부할 것을 권유, 창수 씨는 자연스럽게 운동권써클에 가입할 수 있었다.

  반면 경란 씨는 좀 다른 경위로 학생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경란 씨는 고등학교 때까지 문학소녀였다고 한다. ‘정치나 과학 이런 건 다 필요없다. 인간은 죽으면 끝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경란 씨가 국문과가 아닌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가게 된 것은 일년을 재수하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기 때문이다.

  경란 씨 역시 운동권써클에 가입하게 된 것은 신입생 환영회 때 한 선배의 권유에서였다. 경란 씨는 선배가 자기를 믿고 먼저 공부하자고 해 준 것이 너무 좋아서 바로 하겠다고 약속을 했단다. 그런데 공부를 하자던 선배는 학교 도서관이 아닌 학교에서 한참 떨어진 어떤 레스토랑에 경란 씨를 데려가는 것이었다.

  “부담이 됐죠. 오픈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선배가 절 믿었다는 것을 떨쳐버릴 수 없었어요. 특히 선배에게 못하겠다고 말할 논리도 없었기 때문에 그만 둔다고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계속하게 됐죠.”

  수동적으로 운동권써클에 결합한 경란 씨는 이후에도 많은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이런 경란 씨의 고민을 풀어준 사람은 일학년 겨울 엠티 때 처음 만난 선배 창수 씨였다. “엠티를 가기 전 아는 선배가 잠깐 보자고해서 과학도서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웬 남자가 남자화장실에서 머리를 털면서 나와요. 그 날 눈이 펑펑 왔었는데 그 모습이 참 황당하더라구요. 만나자고 한 선배가 우리랑 같이 엠티갈 선배라고 소개를 하는데 검은 가죽 잠바에 청바지를 입은 선배 모습이 황당하면서도 한편으론 소박해 보였어요.”

  “그 때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수돗물이 잘 안나오니까 학교 와서 머리를 감은 거죠. 저는 경란이를 합숙 가서 처음 만나고 그 뒤로 학교 다니면서 몇 번 봤어요. 학생운동이란 게 기본적으로 순수한 열정과 동기를 가지고 시작하는 거지만 일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로 찌들게 되고 솔직히 ‘잔대가리’ 굴리는 경우도 많은데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줘서 순수하게 운동을 하는구나 하고 생각을 했죠.”


 수배 중인 선배에게 건네준 돈 만원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의 관계는 이후 경란 씨가 고민이 있을 때마다 선배인 창수 씨를 찾아가면서 진전하게 된다. “선배가 너무 쌈박하게 정리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 뿐만 아니라 다른 후배들도 머리가 복잡하면 선배를 많이 찾아갔어요. 그렇지만 운동하는 사람은 연애도 안하고 평생 그렇게 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은 없었어요. 게다가 창수형은 연애 못할 사람으로 꼽히는 사람이었거든요.”

  “사람들에겐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이 있어요. 집안, 연애 문제가 비적대적 모순인데 이것을 대화와 토론으로 풀지 못하면 적대화되는 거죠. 도중에 운동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집안문제나 연애문제 때문이죠. 그런데도 다들 연애문제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죠. 그래서 저는 후배들한테 연애를 권장했어요. 단 조건이 하나 있었죠. 몰래하지 말고 공개화시켜라. 그래서 누가 연애한다 싶으면 제가 먼저 누가 누구하고 좋아한다고 소문을 내기도 했죠. 물론 소문내야 할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할 줄은 알죠.”

  그 후 팔십육년 건대사태가 생기고 연이어 애학투련 사태가 터지면서 고려대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구속됐다. 창수 씨도 수배령이 떨어졌다. “팔십칠년 삼월즈음, 저 친구를 자주 만났죠. 애학투련 사건으로 정외과 사람들이 많이 잡혀가서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저 친구를 만난 어느 다음날 제 뒷주머니에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이 있더라구요. 처음엔 무슨 돈인지 몰랐죠.

  나중에 얘기 들었는데 술 마시고 헤어질 때, 제가 수배 중이었으니까 저 친구가 만원을 줬대요. 제가 안받겠다고 하다가 나중에 정주고 싶으면 저를 껴안아주면 받겠다고 했대요. 진짜 껴안았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제 주머니에 돈이 있더라구요.”

  그런 일이 있고 얼마 후 창수 씨도 구속됐다. 당시 단식 중이었던 창수 씨는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었기 때문에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들이 많이 생각났다고 한다. 그래서 교도소에서 나오면 후배들이랑 김세진 열사 무덤에 가서 봄이면 이 꽃, 가을이면 저 꽃을 심어 무덤에 사시사철 꽃이 피어나게 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교도소에서 나와 창수 씨는 다짐한대로 후배들이랑 같이 김세진 열사 무덤에 가 꽃을 심었다.

  그 때 같이 간 후배 무리에 경란 씨도 있었다. 어느 덧 ‘경란이 같은 여자라면 평생을 같이 해도 되겠다.’라는 생각을 갖게 된 그는 팔십칠년 가을쯤 경란 씨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형이 가을에 편지를 갖고 왔죠. 흰 백지 다섯 장에 일종의 사랑을 고백한 거였어요. 창수 형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그 동안 만나서 기억나는 걸 다 정리하고서 절 좋아하는 다섯 가지를 쓰고 앞으로 어떡하면 좋겠다는 것까지 써왔더라구요. 그런데 저는 사랑이란 불꽃같이 하다 죽든지 아니면 영원히 안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특히나 연애를 하면 곧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배한테 연애편지를 받고 무척 부담스러웠죠. 그렇다고 창수 형 성격에 그냥 싫다고 하면 안되겠다 싶어 줄까지 쳐가면서 조목조목 반박들을 썼죠. 그런데 싸우면서 정든다고 어느 새 창수형이 제 마음에 들어오게 된 거예요.”

  졸업 후 경란 씨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창수 씨는 평화연구소에 들어갔다. 그 당시 운동권 학생들은 졸업 후 대부분 노동운동 쪽으로 나갔는데 창수 씨는 우연찮게 평화연구소를 알게 돼 남들이 안 하는 평화 통일운동을 하게 된 것이다. 졸업 후 각자 자기 일을 하면서 차츰 결혼에 대해 이야기가 양가에서 구체적으로 오갔다. 구십이년 시월에는 양가 부모님께 정식으로 인사도 드렸다.

  그러나 이들이 결혼을 한 것은 그로부터 오년 후인 구십오년도였다. 갑작스레 창수 씨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장애우 된 후 더 깊어진 사랑

  경란 씨가 사고 소식을 전해들은 건 다음날 새벽 여섯시. 병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다른 선배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는데 다들 긴장상태였고 의사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때 경란 씨는 솔직히 많이 고민이 됐다고 한다.

  “저희 아버지가 창수형을 처음 본 게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서였어요. 평화연구소 김창수가 이적표현물 소지죄로 오늘 잡혔다는데 걔가 걔 맞냐고 하셨죠. 부인할 수 없어서 맞다고 했는데 아버지께서 아무 말씀 안하시는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좋다고 해서 양가 부모님이 만났는데 한 달 있다가 이렇게 크게 다치니까 무슨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우리 부모님도 창수형 상태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걸 아셨죠. 내색은 안하셨지만 저로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그 때 저는 대학원 논문을 쓰는 중이어서 부모님한테 자세한 말씀은 못 드리고 논문 쓴다는 핑계로 집에서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죠. 생각을 거듭해서 내린 결론은 사람이 죽을지 살지 모르는데 우선 사람을 살리는 게 중요하다, 그 다음 문제는 차후에 결정하고 사람 살리는데 최선을 다하자는 거였어요.”

  창수 씨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다친 데가 없었다. 특히 무릎 아래로 신경, 인대, 근육도 없이 뼈만 남았고, 연골도 반이 파손되고 무릎 관절과 발목 관절이 마비된 데다가 고관절도 많이 손상돼 의사는 수술이 잘 돼 살아도 구십 퍼센트는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했다.

  그 후 창수 씨는 좀 더 튼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병원과장이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또 레지던트들은 그이가 서울대 의대 학생회에서 통일강연을 했을 때 청강했던 사람들이어서 창수 씨의 다리를 절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 씩 치료를 계속 했다고 한다.

  “창수형은 의지가 강한 사람이에요. 병원에서는 다친 부위와의 투쟁이잖아요. 마취도 안하고 생살을 찢어내고 소독약으로 닦아내고 가위나 칼로 긁어내고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렇게 오십일을 보내고 다시 수술을 했어요. 그 동안 유동식만 먹다 보니 사람을 몰라보겠더라구요. 수술을 하고 나면 춥다고 해서 방에 데려와서 몸을 주물러 주는데 그이가 ‘엄마, 나 울어도 돼?’ 그러는 거예요. 제가 그 때 참 놀랐는데 보통 사람들은 너무 고통스러울 때 자연스럽게 울기마련인데 자기 때문에 고생하시는 어머니가, 자기가 울면 민망해하실까봐, 눈물은 나올 것 같고, 그냥 울 수는 없고 해서 미리 말한 거예요.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는 거죠. 도리어 우리가 눈물이 나오려고 해서 참느라고 혼났어요.”

  뿐만 아니라 창수 씨는 자신이 아프면서도 다른 환자들한테도 체력단련 하라고 조언해주고 아파 누워있는 꼬마환자들하고 놀아주기까지 했다. 또 워낙 사람관계가 좋았던 창수 씨가 입원하자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친구, 선후배, 심지어 수배중인 사람까지 왔다 갈 정도였다고 하는데 경란 씨는 “그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기를 불어넣어줘서 창수형이 빨리 낫지 않았나.”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창수 씨는 퇴원 후에도 약 육개월 동안 보조기를 착용하고 다녔다. 지금은 보조기를 안하지만 컨디션이 안 좋을 땐 다리를 심하게 전다. “걷다가 갑자기 무릎이 쑤셔 길바닥에 앉아있을 때고 있고 계단 오를 때와 전철 갈아탈 때 정말 힘들죠. 저 정도의 장애로도 이렇게 힘든데 장애정도가 심한 사람들은 적응하기가 정말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생활에서 접하는 영역에서 장애와 관련된 문제는 명확히 지적을 합니다. 예를 들어 고속도로 휴게소에 갔는데 장애우 주차장에 비장애우가 주차해놓으면 ‘여기는 장애우 주차장인데 선생님이 주차를 해놓아서 다른 장애우분들이 주차를 못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대놓고 얘기하죠. 사실 전 매몰찬 사람은 아닌데 이 문제에 한해서는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해요. 우리 사회에서 장애우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창수 씨의 사고로 경란 씨 역시 많은 것을 배웠다. “평소에 창수형을 사귀면서 계속 운동할 사람이니까 교도소에 계속 갈 것이고 그러면 당연히 경제적으로도 어려울 것이란 생각은 했지만 다치니까 그런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란 걸 알게 됐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건강이라는 걸 느꼈어요.”


 출산예정일에도 참석한 대인지뢰발족식

  구십육년도에 미국 의회에서 대인지뢰 관련 법안이 다뤄졌다. 쟁점이 한반도에서 대인지뢰를 예외로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창수 씨는 당시 대인지뢰와 관련된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구십칠년도 구월 오슬로에서 대인지뢰협약 초안을 만들기 위한 회의가 열렸을 때 창수 씨는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 한국정치연구회 정희구 박사를 만나서 대인지뢰 운동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이가 총대를 매기로 하고 여러 시민단체를 찾아다니면서 오슬로 회의에 보낼 성명서도 만들었다.

  창수 씨가 열심히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경란 씨도 대인지뢰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란 씨는 기독교 쪽 단체들을 알아보았다. 그로부터 두 달 후,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를 공식적으로 발족했다. 그리고 올 초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조디 윌리암스를 국내에 초청함으로써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한국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몇 안 되는 젊은 사람들이 매달려서 그만큼 한 것에 대한 뿌듯함 같은 게 생겨요. 그렇지만 그 정도라도 했다는 것에 대한 흐뭇함이지 그 자체가 잘됐다는 건 아니에요. 우리나라에서 평화문제가 아니라 인권문제 차원에서 봤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인권은 씨알도 안먹히니까요.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가 팔십년대부터 거대담론 중심으로 운동을 해와서 대인지뢰운동같이 작은 부분에서 접근하면서 큰 영역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한다는 거죠.

  한반도 핵문제나 대인지뢰나 출발만 다르지 결국은 같은 문제인데 대인지뢰에 관심을 안 가지는 건 인식상의 문제라고 봅니다.”

  경란 씨도 출산예정일까지 한국 대인지뢰대책회의 발족식에 참여한 것을 비롯해 출산휴가가 끝나자마자 조디 윌리암스 초청 실무까지 보게 돼 감회가 남달랐다. “임신했을 때 열심히 다녀야 애 낳기도 쉽다고 해서 열심히 한 건데 애 낳고 사무실에 나와 보니까 조디 윌리암스를 부르긴 했는데 기사연이 그 실무를 맡게 됐다고 해서 무척 당황했어요. 우리나라에 그렇게 단체가 없나 싶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조디 윌리암스가 와서 국내보다는 국제적으로 엄청난 반향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그 결과 올해 세계기독교협의회 총회에서 아시아지역 문제로 대인지뢰문제를 다룰 예정이라고 하니까 앞으로 교회 차원에서 관심이 좀 더 확산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좀 더 나은 활동가 되라고 아내를 유학 보내는 남편의 동지애

  부부활동가들은 가사 및 육아문제를 어떻게 분담할까? 맞벌이 부부들의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부부활동가들은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제 원칙은 첫째 여성의 사회활동을 보장한다. 둘째 가사를 분담한다. 셋째 육아에 대해 책임진다인데 다른 건 옆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저희는 어머님이 반찬같은 것도 해주고 쌀도 사주세요. 원래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하는데 그 점이 우선 죄송하구요. 또 하나는 가사는 우리가 삶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요.

  상황에 따라서 내가 좀 더 할 수 있고 남편이 더 할 수 있어요. 다만 가사노동을 여성이 해야 한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주입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저조차도 사정이 있어 일을 못하게 되면 죄책감을 느낄 때가 있거든요.”

  가사문제보다 육아문제에 있어서 어려운 점이 한층 더 많았다. “초기에는 임신우울증도 있었어요. 주변 여성을 보면서 육아문제 때문에 사회활동을 못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에 위기감 같은 게 있었죠. 지금 시부모님이 광주에서 애를 키우고 계시는데 애도 할머니한테서 더 안정을 찾는 것 같고 그런 걸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죠. 엄마로서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나 자책감도 들고 육아와 사회생활을 어떻게 병립해야 될지 사실 지금도 부담이 많이 돼요.”

  기사연에서 오년째 실무를 맡고 있는 경란 씨는 요즈음 전문성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올 초 국제여성평화조직에서 인턴을 뽑는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지원을 한 것이다.

  평화와 관련한 국제관계를 배우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지원을 했는데 이달 말에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한다. 채용되면 제네바에서 일년간 머물면서 제네바 군축회의라는지 유엔회의에 참석해서 리포트를 쓰게 된다.

  이제 낳은 지 팔개월밖에 안된 어린 아이를 두고 경란 씨가 해외유학을 가면 세 식구가 앞으로 일년은 더 떨어져 살아야 하는데도 창수 씨는 “운동하는 사람들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본적으로 경란 씨가 유학을 가는 것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이다. 물론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데 대한 아쉬움이 없지 않았지만 창수 씨 역시 경란 씨가 없는 동안 나름대로 자기분야에 대한 공부를 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어려서부터 인문학, 철학, 사학 이런데 관심이 많았는데 세상이 통일이라든가 북한, 군축 이런 쪽으로 관심을 가지게 했어요. 앞으로는 통일이나 평화문제도 문학, 철학, 사학과 연결시킬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볼 계획입니다.”

  서로의 정체성을 지켜주면서도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하는 이들 부부의 지혜로움과 순수한 사랑이 보는 이로 하여금 따스한 웃음을 짓게 한다.


글/ 노윤미 기자

작성자노윤미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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