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 한 방울이 떨어져도 태평양 물은 달라지죠” > 세상, 한 걸음


“잉크 한 방울이 떨어져도 태평양 물은 달라지죠”

한국의 마더 테레사 박청수 원불교 교무

본문

  22억 7천만 4백만 원이라는 돈을  모금해  36개국 어려운 이들을 도와준 원불교 강남교당의 박청수 교무, 1956년 출가한 이후 지금까지 약30여 년을 국경, 인종, 종파를 초월해 빈곤과 질병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한국의 마더 테레사라고 불리는 박청수 교무를 만나 보았다.


  “시집, 그까짓 시집 뭐 하러 갈 것이냐. 다른 길이 있는 줄을 모르면 여자로 태어나서 시집을 안 갈 도리가 없지만, 더 좋은 길이 있는데 뭐 하러 시집을 갈 것이냐. 너는 이제 커서 꼭 교무가 되어라. 기왕이면 한평생 많은 사람을 위해 살고 큰살림을 해라.”

  박청수 교무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교무가 되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고 한다.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한 그이 어머니는 딸이 당신과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다행히 박청수 교무 역시 세 살 때 처음 본 교무님이 평화롭고 점잖고 환해 보여서 어머니의 뜻대로 교무가 되기로 마음먹고 열아홉 되던 해 출가하였다고 한다. 그 후 박청수 교무는 세계 45개국을 다니며 발에 밟히는 대로 어려운 중생들에게 자선을 베풀어 왔다.

  캄보디아 지뢰제거 후원, 인도 히말라야 설산 라다크 사람들을 위한 학교 건립, 카루나 병원 설립, 아프리카 12개국에 의약품 보내기, 소말리아 난민 돕기, 베트남 라이따이한 돕기, 아프가니스탄 지뢰피해자에게 의족 제공, 이란 지진피해 이재민 돕기 등 그이의 손길이 닿은 국가는 총 36개국이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펼친 자선사업도 다양하다. 한국보육원과 이리보육원 후원, 성 라자로 마을 나환자 돕기, 성분도 장애인 직업재활원 돕기, 농촌 영세가정 돕기, 기독교 사랑의 쌀 나누기, 불교 맑고 향기롭게 운동모임 후원, 미아샛별 저소득층 탁아시설 운영, 소년소녀 가장 돕기, 소년원 출소자 선도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게다가 한 번 도움을 준 곳은 지금까지 계속 도움을 주고 있어 박청수 교무의 관심과 애정이 결코 일회적인 것이 아님은 알 수 있다. 이렇게 그 동안 그이가 모금해서 국내외 어려운 사람들에게 보낸 기금만 총 22억 7천만 4백만 원이라고 한다. 그 밖에 각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직접 모아 보낸 것도 수십 컨테이너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박청수 교무는 이 모든 일을 후원회도 지로용지도 없이 혼자서 해냈다. 그래서 그이가 세운 목표액을 달성하기까지 그이는 남몰래 애간장을 태우는데 그 통증이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 겪는 통증과도 같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목표액을 달성해 어려운 이들을 돕고 나면 그 통증이 씻은 듯이 다 가신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법정스님은 '보살의 병‘ 이라고 하는데 중생이 앓기 때문에 나도 앓는다는 그런 증상이라는 것이다.


종교인의 사명이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고 하지만 박청수 교무님은 다른 종교인에 비해 유달리 참 많은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종파, 인종, 국경에 개의치 않고 어려움에 처한 세계 각국 사람들을 돌보신 까닭이 아닐까 싶은데요. 어떤 계기로  세계 각국 사람을 형제자매처럼 돌볼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가슴이 뜨거워지면 1000˚의 열기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자들이 자기애가 없으면 조카도 안 기른다고 하지만 저 같은 사람은 세계 광범위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죠. 아프리카에 갔을 때도 물이 귀해서 물 한 동이 가져오는데 일곱 시간 걸리는 것을 보고는 미얀마에 가서 1백95개 마을에 우물을 파줬어요. 또 중동에 가서는 그렇게 훌륭한 석조건축물이 와르르 무너진 걸 봤을 때 너무 안타까웠어요. 제가 직접 보지 않고 신문이나 뉴스 통해 그 소식을 접했다면 누가 죽던 지지니 나건 상관 안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걸  제가 봤으니까, 아니까 가슴아파하고 도울 수 있었던 거지요.” 박청수 교무의 말처럼 그이는 참 많은 나라를 다녔다. 1987년부터 그이 나이 51세 때 인도를 시작으로 해서 지금까지 지구촌 45개국을 두루 찾아다녔다고 한다. 해외를 다니는데 있어 필수인 영어공부를 그이는 나이 50세에 시작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연설문 없이도 강연을 할 수 있을 정도다. 그이 말처럼 많이 보는 것이 중요하지만 세계 사람을 끌어안기 위안 그이의  의지와 노력 또한 대단하다.


교무님은 지뢰문제가 국내에서 미처 부각되기도 전이 1995년부터 캄보디아 지뢰제거는 물론 아프가니스탄의 지뢰피해자에게 의족을 제공하셨는데요. 대인지뢰에 관심을 갖게 되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영국의 MRA 지도자 데이비드 영 씨가 제게 캄보디아 지뢰 제거 문제를 처음 제안 했죠.

  당시에는 지뢰제거는 유엔 같은 데서나 하는 일이지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엄두나 내볼 수 있는 일인가 하고 마치 태산을 옮겨 보라는 주문처럼 여겼어요. 그러나 오랜 내전을 겪었던 캄보디아를 돕기 위해 스스로 정해 두었던 과제물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면서, 그 중 가정 큰 문제가 지뢰제거 문제임을 알게 되었죠.”

  이후 박청수 교무는 1995년부터 1997년 12월까지 영국 할로재단을 통해 캄보디아 지뢰제거 후원금으로 9천 1백만 원을 보냈고 96년 3월부터 매달 한 개의 지뢰제거 비용 1천 달러를 내놓고 있다. 그리고 1996년 6월부터는 지뢰로 다리를 잃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 1천5백95명에게도 의족을 만들어줬다.

  “보통 지뢰 하나를 제거하는데 1백20만원(1천 달러)이 들어요. 그에 비하면 의족 한 개 제작비가 1만6천8백 원이니  아주 싼 편이죠. 목발을 하고선 아기가 기어가도 안지 못하지만 의족이라도 하면 목발을 던지고 아기를 품에 안을 수 있으니 내 자식을 품에 안아 보는 행복감이 얼마나 큰가 이거죠. 그런데 그들은 의족을 살 돈이 없어요. 우리가 도와줘야죠.”

  그러나 박청수 교무는 올해부터 지뢰제거 기금을 더 이상 보내지 못하고 있다. 작년 말 우리나라가 IMF체제에 들어감에 따라 지뢰제거 기금을 모으는 게 어렵게 돼 일시적으로 중단한 상태라고 한다. 박청수 교무는 이점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교무님께서 지금까지 모금한 돈이 약 22억이라고 들었습니다. 한 개인이 그렇게 많은 돈을 모금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을 줄로 압니다. 어떤 방법으로 모금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제까지 저 혼자 한 게 아니라 이름 없이 도와주시는 분과 우리 원불교 교도들의 도움이 컸죠. 3백 명도 다 안 되는 교도지만 이제는 돈 내는 선수가 됐어요. 또 교무가 되면 매달 활동비가 10만원씩 나와요. 우리 후배 교무들은 그중 2만원씩을 후원금으로 내놔요. 그 2만원이면 히말라야 어린이 한 명이 한 달 동안 먹고 배우고 소풍도 가고 할 수 있는 돈이에요.

  저 역시 제가 활동해서 버는 수익금을 모두 내놓죠. 이 달만해도 4백만원을 입금했어요.

  케이비에스 라디오 ‘나의 인생 나의 보람’ 5개월 출연료 2백17만5천원, 홍익여고 강연료 9만4천5백 원, ‘나를 사로잡은 지구촌 사람들’ 인세 일부 240만원, 웅진출판사 강연료 60만원.

  내 것이라는 생각 없이 다 알알이 내놓는 거죠”

  박청수 교무는 심지어 신체의 일부를 바치기까지 했다. 처음 성라자로 마을을 도울 땐 엿을 팔았다고 한다. 원불교에서는 종교인들도 돈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직접 체험하기 위해 기부를 받지 않고 봉사해야 하는 시기가 있는데 그 때 박청수 교무는 엿 장사를 한 것이다. 엿이 연한지, 맛을 보느라 너무 많이 씹어서 그 때 이빨이 다 바스러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 때도 돈이 없어서 뭘 많이 바칠 수 없었던 자신이 신체의 일부라도 바치게 됐다는 생각에 좀 위안이 되었다는 그이다.


따로 후원회를 만드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우리는 후원회도 지로용지도 없어요. 오로지 절 만나서 제 육성으로 이야기를 듣는 사람만이 도와줄 수 있죠. 그러나 후원회를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려면 직원도 있어야 하고 사무실도 있어야 하고 지로용지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전략을 짜는 것 자체에 돈이 들잖아요. 또 저는 전문 사회사업가가 아니라 교역자에요. 교역자이기 때문에 후원을 만들고 지로용지를 만들기보다 직접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최근 우리나라도 IMF 체제에 들어가면서 우리네 사는 것도 많이 각박해 졌습니다. 올해 실직자만 벌써 1백50만을 넘어선 상황에서 다른 나라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것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을 법한데요. 이럴 때 교무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 분들이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몰라서 그래요. 아시아에만 10억 명이 1달러로 하루를 살아요. 1달러로 입고 먹고 자고 교육까지 다해야 돼요. 그래서 미국 사람 수명과 아프가니스탄 사람 수명이 30년이나 차이가 나는 거예요. 또 이 세계에서 생산되는 에너지 80%를 세계 인구 20%가 다 쓰죠. 인구 80%가 남은 에너지 20%를 쓰고요 빌 게이츠 같은 사람은 캄보디아 같은 나라 4개 온 국민을 먹여 살릴 수가 있어요. 그래서 나눠야 된다 이거에요.

  우리는 자꾸 우리, 우리, 그러지만 웬만한 집에는 선풍기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식량은 안 떨어졌다 이거에요. 네팔이나 아프리카 같은데 가보면 가구도 없이 남편하고 아내하고 아기만 사는 빙이 수두룩해요. 어떻게 아이를 낳았는지, 내일은 어떻게 살건지, 옷은 어떻게 입을 건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지구촌에는 너무나 많다 이겁니다. 그런데 옷을 철철이 두고 입고 음식 냉장고에 넣어 먹고, 그런 사람들을 또 돕자고요? 생각해보세요, 저도 그런 말 정말 수도 없이 많이 들었어요. 그 때마다 난 쪽박이나 깨지 말라고 그럽니다. 우리가 너무 잘 살다 못살려니까 비참하게 여겨지지만 극한상황을 견디듯이 하면 아이엠에프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교무님은 장애우와도 인연이 깊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인연이었는지 말씀해 주시죠.

  “1971년 국립맹학교에 초청강연을 갔어요. 강연 끝나고 학생들한테 질문 있으면 하라고 했더니 어떤 학생이 손을 들어서 ‘나이가 몇 살이냐는 거예요. 너무 뜻밖의 질문이어서 ’왜? 내가 몇 살쯤 먹은 것 같아‘ 했더니 ’19살이요‘ 이러는 거예요.

  강연 후 개인적으로 학생들 을 만나봤더니 많이 위축돼 있더군요. 왜 저렇게 위축이 된 걸까 생각하다 그걸 풀어 주고 싶어져서 기숙사로 가서 ’여러분들 나 왔어‘ 그랬더니 학생들이 어느새 제 목소리를 알아보고 제가 일하는 강남 교당에도 데려오고, 소풍도 같이 가고 그러면서 가까워졌죠.’

  이 일을 계기로 박청수 교무는 시각장애우들을 위해 원불교 교전을 점역하고 도서 도산 안창호를 점역하고 그이의 책 ‘기다렸던 사람들’을 소리잡지로 만들기도 했다. 또 그 즈음 경기도 곤지암에 설립된 성분도 장애인직업재활원에 식판, 이불, 밑반찬 등을 해 가지고 가고, 천주교재단에서 운영하는 중증장애우 시설 천사들의 집도 돕고 있다.


중국 훈춘시에 8천만원을 들여 장애우소학교를 건립해서 이번 8월25일에 개교식을 맞게 되셨다고 들었는데요. 이번에 생기는 장애우소학교가 연변에서는 유일한 장애우학교여서 그 의미가 남다른데 이렇게 뜻 깊은 일을 하시게 된 계기는 어떤 것입니까?

  “장애우소학교 뿐만 아니라 경신기숙학교도 지었는데 그 배경에는 장애우 문제 뿐만 아니라 통일고 우리 동포애가 기본이 된 것이죠. 저는 우리 민족이 조선족에게 사기를 많이 쳐서 참 미안해요. 12억 넘게 사는 중국 대륙 안에서 소수민족으로 살면서 우리 문자와 언어로 대학을 세우고 꿋꿋하게 우리 문화를 잘 유지하는 조선족들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또 제가 1995년 범종단 남북교류추진위원회 부위원장 자격으로 베이징에  가서 북한종교대표자들을 만났어요 .북한 사람들이 어렵게 산다는 애기를 들었는데 가 복길이 없잖아요. 이쪽에서 판문점읖 통해 북한으로 갈 수는 없지만 중국을 통해서 북한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고 싶은데 사회주의국가라 종교계에서 오는 걸 싫어해요. 그래서 경신소학교를 짓고 장애우학교를 짓고 하면서 조선족들에게 기여도  하고 북한으로 가는 길을 닦는 중이죠.

  그가 있는 강남교당은 통일기금으로 교도들이 매주 만원씩을 적립 중이다. 그는 이미 통일 후 평양교당을 담당하기로 내정이 돼 있을 정도로 통일을 차근차근 준비해 가고 있다.


박청수 교무님은 국외 뿐 아니라 국내 자선 활동도 많이 하고 계신데요. 그중 1990년부터 지금까지 삼성어린이재단에서 설립한 미아샛별어린이집을 위탁운영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외무부에서 미아샛별어린이집을 우리 나라 대표적인 탁아시설로 지정해 외국 손님에게 소개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탁아 및 교육사업에 있어 남다른 생각이 있으신가요?

  “저는 유아교육을 전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유아교육을 한 어머니만 아이를 잘 키웁니까? 부모들이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으로 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저희도 그런 사랑은 아니더라도 아이를 정성껏 키우자. 나중에 이때의 경험이 유익할지언정 나쁜 일이 되지 않게 하자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8년 동안 6천4백명이라는 자원봉사자가 다녀갔죠. 원래 탁아시간이 1시간이지만 꼭 필요하면 14시간도 아이를 돌봐 드렸습니다. 나중에는 뱃속에 있는 아기도 맡아달라고 찾아왔어요. 어떤 사람은 임신 할 테니까 맡아달라고 미리 부탁하기도 했어요. 나중엔 탁아 8학군은 미아라느니, 처녀들 시집가려면 미아리에 방 얻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다는데 실제로 전셋값이 오르기도 했대요.”


교무님께서 그 동안 천주교, 기독교, 불교, 성공회 등 다른 종교와도 연대활동을 많이 해 오신 것으로 아는데 그것이 원불교 교리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원불교 서울 강남교구에서 표방하고 있는 네 가지가 바로 통일교화, 세계주의, 종교간 협력,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것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제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원불교의 교리를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의 근본원리는 다 같겠죠.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는 게 더 중요한 것이죠. 저는 종교의 본분이 자비실천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그 동안의 선행을 저 혼자 하지 않고 법정스님을 통해서 이경재 신부님을 통해서 실현했습니다. 법정스님이 하시면 결국 그 분이 더 힘이 나고, 이경재 신부님이 집중적으로 그 일을 하면 에너지가 모이고 저수지가 차면 그 물이 넘어 갈텐데 그렇다고 그 분이 어디 딴 데 가져갑니까? 그러니까 같이 하자. 서로 양보하고 너그럽게 협력하면 이 세상이 좋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교무님은 1993년에 발표하신 수필집 ‘마음으로 만난 사람들’로 현대수필문학상을 수상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기다렸던 사람들’, ‘나를 사로잡은 지구촌 사람들’등 주로 사람시리즈를 발표하시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전 사람 전문가예요. 종교활동이라는 게 결국은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거잖아요. 믿음이 없는 사람을 믿게 하고, 잘 못 사는 사람을 바르게 살도록 안내하는 것이에요. 천부적으로 부여된 사명이 어려운 사람 불쌍한 사람에게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죠. 저는 반드시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우러러 볼 수 있는 사람, 어려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분의 영향을 받고 또 나보다 못하고 어려운 사람을 돌봐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인생이 자기 혼자 먹고 화장실 왔다 갔다 하면서 끝나는 거죠.”


그 동안 너무 많은 일을 하셨지만 또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도움을 요청해 그 청을 다 들어주시기에는 곤란함이 많을 듯 합니다. 특히나 이제는 국내외로 많이 알려지셔서 더욱 그러실텐데 혹 여기까지 하겠다라는 나름의 기준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요.

  “저는 태평양에 잉크 한 방울이 떨어져도 태평양물이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나 한 사람이 걱정하고 애써서 문제가 해결되면 하자 이거예요. 그리고 그런 거는 다 제 마음의 청소예요. 어려운 걸 보면 그게 해소될 때까지 걱정이 뼈에 박혀있어요. 그러면 옆구리가 터지는 것 같은 통증이 와서 사람들이 절 부축하고 걸을 정도죠. 그래서 초창기에는 신도들이 제가 어디 나가면 ‘이번엔 (일거리 들고 오지 말고) 빈손으로 오세요’ 라고 하더니 이제는 그러지 않아요.

  그렇다고 절 붙잡고 도와달라고만 하면 곤란해요. 제가 더 많이 다니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여러분도 도와주세요. 전 발부리에 닿는 대로 일을 해 왔어요. 땅 밑을 보고 걷다가 근사한 일을 해야지 하는 생각 없이 그냥 발부리에 닿는 대로 일했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글/ 노윤미 기자

작성자노윤미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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