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야기] 묵향의 빛이 세상의 그늘에 비추이도록 > 세상, 한 걸음


[사람 사는 이야기] 묵향의 빛이 세상의 그늘에 비추이도록

장애우에게 무료 서예 강습하는 청각장애 서예가 이미영 씨

본문

  부산에서 여고를 다니던 이미영은 그 당시 꿈이 있었다. 국어과목만큼은 반에서 최고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고 글을 잘 쓴다는 칭찬을 자주 받곤 했기 때문에 나중에 대학을 졸업하면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한 학생들에게 재미있게 국어문법을 가르치고 시를, 소설을 이야기 하는 국어교사가 되리라 생각했다. 반에서 십 등 안팎을 기록하고 있는 성적만 조금 더 올리면 언니 오빠들처럼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자신의 꿈이 실현될 그날이 곧 올 것 같아 그냥 공부에만 열심히 매달렸다.
  그런데 이학년 무렵의 어느 날 그 신문기사를 보게 된 것이다. ‘대졸 여성장애우 취업 안돼 비관 자살’. 이런 내용의 제목 아래 한 여성 장애우가 갖은 노력 끝에 대학을 졸업했지만 장애 때문에 임용고시에도 떨어지고 다른 곳에 취업도 못한 채 집안에서 세상을 비관만 하다가 결국 자살했다는 기사가 실려있었다.
  그 사실이 얼마나 이미영이란 학생에게 충격이 되었던지, 그 다음날부터 학교에 아예 안 나가버렸다. 그도 실은 청각에 완전한 장애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음악, 체육시간, 방송수업시간마다 반 친구들 사이에서 완전한 이방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그 극심한 소외감을 애써 아무렇지 않게 넘기며 키워갔던 소중한 꿈을 세상은 그렇게 애당초 허락하지 않을 터였다. 아등바등 대학을 졸업해봤자 자신에게 다가올 앞날이 자살한 그 여성장애우가 거쳐 갔던 절망스런 인생터널과 그다지 다를 것 같지 않은 두려움에 아득해졌다. 그렇게 처음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담벽을 느꼈다.


 “넌 합창반 그만 나와도 돼”


  충북 청주시 사직2동에서 이제 근원서예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영미 씨(40)는 여고시절 겪었던 그 충격어린 경험을 조금은 담담하게 되돌아볼 수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완전히 청력을 잃었지만 여전히 훌륭하게 수화를 구사하는 그이는 이렇게 반문한다. “청각장애 학교에서는 청각장애우도 교사가 될 수 있다구요? 아, 그런가요. 그래서 너무 쉽게 꿈을 포기한 걸 후회하지 않느냐고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원했던 국어선생님은 아니지만 이제 서예를 가르치는 저를 다들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부르거든요.”

  그의 어머니는 영미 씨가 천식약을 잘못 먹어 초등학교 이학년 무렵부터 청신경이 서서히 마비돼 간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무척이나 상심했지만 세세하게 학교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챙겨볼 수가 없었다. 사업 실패 후 병석에 있는 남편과 중풍으로 쓰러진 시어머니를 돌보면서 여섯 남매의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느라 너무도 고단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어머니를 더 이상 힘들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학교생활도 문제없기 해나가고 있다는 듯 영미 씨는 집에서 늘 밝은 모습만 보여주려 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삼학년 때 그 때까지 즐겁게 참여했던 합창반에서도 지도 선생님이 너는 그만 나오라는 얘기를 해오고 친구들도 동문서답을 해대는 그를 서서히 따돌리기 시작했을 때 극심한 외로움과 혼자 싸워야 했다.

  중학교에 올라가니 사정은 더 나빠졌다. 매시간 마다 바뀌는 선생님들의 각기 다른 말투와 입모양을 따라가려니 이해 못하고 넘기는 부분이 절반도 넘었다. 뭐라고 묻는지를 알아야 자신은 듣지 못하는 장애를 가졌다는 얘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적은 뒤에서 세는 것이 더 빠를 정도로 처졌지만 담임 선생님께 자신의 상황을 말도 못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죽어버리자고 생각하고 중학교 이학년 어느 날 밤 혼자 동맥을 잘랐다. 그런데 피가 확 튀는 순간 죽음이 무섭다는 생각 보다 막 화가 났다. 내가 어떻게 태어났는데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하나, 또 다시 자신 때문에 고통스러워 할 엄마 생각도 나면서 곧 바보 같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냉정하게 혼자 수습을 하고 다시 자신이 살 길을 찾아보았다. 다음날 교장실로 찾아가 자신이 이러저러 하니 배려해주실 수 있는 방안을 좀 찾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교장 선생님은 담임선생님께 이 사실을 귀띔했고 담임 선생님은 반에서 일등하는 친구와 그를 짝지어 주면서 노트필기한 것을 보게 해주라는 당부를 하며, 또 맨 앞자리에 앉게 해주었다. 그러자 사십 몇 등하던 성적이 단번에 십이등으로 올랐고 그 성적은 떨어질 줄 몰랐다. 그런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어발음 때문에 영어성적은 바닥이었고 구령을 듣지 못해 늘 빠져있어야 하는 체육과 음악 점수 때문에 성적이 그 이상은 올라가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중학교에서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미리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자신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래서 적응하기는 쉬웠지만 보충수업으로 받게 되는 방송수업이 문제였다. 자신은 그냥 참고서 보며 공부하는 게 나은데도 매일 바뀌는 선생님들한테 일일이 자신을 설명하기도 어려워 시간낭비인줄 알면서도 방송수업에 참여하면서 소외감을 참고 견뎌야했다. 그러던 중에 그 신문기사를 보게 된 것이다.



 생계 위해 동양자수를 배웠지만

  그로 인한 극심한 충격 속에 학교를 그만 다니겠다는 선언까지 해서 가족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그는 이내 평상시처럼 책가방을 들고 등교를 해 가족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학교로 발길을 돌리지 않은 채 영미씨는 골똘히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열심히 장애를 이기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삶을 살고 있는 장애우들을 떠올렸다. 일순간에 헝클어진 인생의 방향을 제대로 잡기 위해 일단 삶이 모델로 삼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전부 남성 장애우들이었고, 헬렌켈러는 이미 죽고 없었다. 그 중에서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가진 운보 김기창 화백을 생각해내고 자신도 운보 선생과 같은 길을 가리라 생각했다. 그 외에는 달리 생각나는, 가능할 것 같은 삶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가까이 있는 화실에 나가 청소나 잡일 등을 하며 동양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동양화란 것이 일단 물감값에서부터 여기저기 스케치여행을 많이 다녀야 해서 돈도 많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 때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서예다. 먹과 벼루, 붓과 종이만 있으면 되니 돈도 그다지 많이 필요하지 않았고, 서예선생님이 해주신 이 말도 큰 격려가 됐다. “서예실력은 소질이 1%이고 꾸준한 노력이 99%의 결실을 낳는다”는 말.

  그렇게 가족들 몰래 학교 안 가고 서예를 배우러 다니던 행각은 졸업식 때 들통이 났다. 그러나 더 이상 가족들이 그의 결심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보다 본격적으로 서예공부에 정진하겠다는 선언을 하고 부산의 서예 선생님이 추천해준 인사동의 한 서예학원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다시 명동의 서예원으로 옮긴 후에도 아침 일곱시부터 학원에 나와 청소등을 하며 오후 다섯시까지 계속 서예공부를 했다. 점심시간이면 밖에 나가 사먹겠다고 하고선 혼자 명동성당으로 가 수돗물로 배를 채우기도 했다.

  다행히 조금씩 조금씩 실력이 향상되는 것이 느껴졌지만 당장 자신의 붓글씨작품이 밥벌이는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앞날을 예약할 수 없는 멀고도 먼 길이었기에 우선 오후 다섯시부터는 한남동에 있는 직업훈련원에서 동양자수를 배웠다. 거기서 점심 겸 저녁으로 먹은 밥 한 끼는 정말 꿀맛이었다고 그는 기억한다. 그렇게 삼년이란 시간 동안 명동과 한남동을 오가는 고개길에 낯설기는 한 눈을 맞으며 또 미끄러지면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드디어 동양자수 자격증을 따고 일단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솜씨도 빠지지 않은 편이어서 일자리 얻는 일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많은 한복집에서는 단지 자수만 놓을 사람을 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손님오면 접대하며 차도 내오고 또 전화도 받을 자수기술자를 다들 원하는 것이었다. 몇십 군데를 쫒아다녀도 소용이 없자 결국 생계가 급해 당장 돈이 되는 일을 찾느라 병원에서 피빨래 같은 험한 일도 마다 않고 해나갔다.

  집에 와서는 또 붓글씨 연습, 그리고 연습이었다. 힘겨울수록 자신의 꿈을 되돌아보면서 그 시간을 버텨나갔다. 열심에 서도에 정진해서 서른다섯 쯤 국선에 당선되고 또 마흔쯤에 초대작가전을 열기도 하고 개인전도 열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쌓으리라. 그때쯤 자신과 같은 장애우들에게 베풀며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되새기며 샘터 잡지에 자신의 인생계획을 담은 글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그 글을 보고 학원으로 한 남자가 찾아왔다. 당신의 꿈을 이루고 살도록 해줄테니 결혼해 달라는 것이었다. 타향살이의 서글픔에 배고픔까지 감수하며 서예를 계속하느라 심신이 지쳐있기도 했고 자신을 볼 때마다 늘 눈물바람인, 홀로 되신 어머니의 걱정도 덜어드릴 수 있겠다 싶어 그 남자를 받아들였다.

  두 딸이 태어나고 남편을 따라 청주로 내려와 자리를 잡는 와중에 결혼 전처럼 붓글씨에 집중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붓은 놓지 않았다. 다행이 아는 분이 자신의 연구실 한켠을 내주며 와서 연습하라고 해 아이들을 소파와 재워놓고 저녁무렵까지 또다시 열심히 연습을 했다.

  그러던 89년 충청휘호대회에서 이영미씨가 대상으로 입선했다는 연락이 왔다. 당시까지 그 서예전에서 나이 젊은, 그것도 청각장애 여성이 당선된 예는 없었기에 그이의 사연은 한 신문 사회면에 대서특필됐다.

  이런 그의 사연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그이 집에는 자신들의 아이들을 좀 가르쳐달라는 이웃들의 전화가 심심치 않게 걸려오곤 했다. 이영미 씨가 그의 두 딸에게 서예를 가르치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온 사람들이라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한 명, 한 명씩 가르치게 된 것이 열명 넘게 늘어나자 은행에서 돈을 대출받아 일단 독립된 서예원 공간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이제 마흔, 불혹의 나이를 넘기도 있는 그이는 평소 생각해왔던 대로 자신이 가진 것을 사람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수많은 상을 받았을 정도로 남부럽지 않은 실력도 쌓았기에 그들을 가르치는데 손색이 없을 터였다.

 


 “가진 것 없어도 서예는 가능해요”


  그래서 하루는 혜원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또 하루는 인근 주성대학 사회교육원에서 강좌를 마련해 장애우들에게 무료로 서예를 가르치고 있다. 방학등이 이유로 장소 사용이 여의치 않게 되면 자신의 서예원 공간을 내주고 있다.

  서예원이 계단이 있는 이층에 있는지라 휠체어장애우를 이동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자원활동자도 무료로 가르쳐주고 붓과 벼루같은 것도 다 제공한다.

  그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장애우들이 하나둘 찾아왔다. 군사고로척수장애우가 된 후 집에 혼자 틀어박혀 있으면서 우울증이 생겨 화가 나면 가족들에게 물건을 집어던지기도 하던 한 사람은 이제 서예를 배우면서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여유로워졌다고 한다. 또 한 팔에 장애가 있는 아가씨는 집에서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으로 치부되면서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해 가나다라도 몰랐다. 그래서 서예원에 나오면 서예를 배우기에 앞서 이영미씨에게 한 시간 동안 국어와 산수를 배운다. 그렇게 조금씩 세상과 만나기 시작해 컴퓨터를 배웠고, 최근에는 취업도 했다.

  “저는 서예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삶을 풍요롭게 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그것이 근본적인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걸 알아요. 서예를 배우기 시작하는 장애우들에게 단순히 붓글씨만 쓰는 서예가가 되라고는 안해요. 다만 서예로 넉넉한 마음의 여유와 안정을 찾게 되면 다른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으니까 제 나름대로 돕는 거죠. 서예가 세간에 고급취미로 알려진 것이 사실이지만 돈도 별로 안드니까 원래 없는 사람들한테 더 좋은 취미가 될 수 있어요. 서예가 하나의 빛이라고 할 때 그 빛은 사회적으로 그늘에 놓여 있는 사람들, 가진 것 하나 없는 사람이나 장애우들에게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새삼 깨닫게 돼요.”

  그래서 그는 자신의 근원 서예원을 ‘묵향의 빛뜨락’이라고도 부른다. 그 묵향의 빛은 일주일에 한 번씩 청주교도소에도 가득한데 그 까닭은 그이가 재소자들에게 서예를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여성재소자들에게 서예를 가르쳤는데 이제는 그와 같은 처지의 남성 청각장애 재소자들에게 강습을 한다. 이들에게 수업은 일단 기역, 니은 디귿을 가르치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글자를 모르는데 어떻게 붓글씨를 배울 수 있을까, 사뭇 궁금해지는데 그는 일단 교통수단 중에 아는 것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한다고 했다. 십여년이 넘게 옥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택시나 지하철도 모르고 배나 기차같은 대답만 나온다. 그러면 배를 그려주고 그 옆에 ‘배’라고 써주는 것이다. 출소 후 가장 가고 싶은 곳을 말하라고도 한다. 다들 집이라는 답이 나온다. 그러면 집 모양을 그려주고 집이라는 글자를 써준다. 가고는 싶은데 돌아갈 집이 없다는 재소자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잘 아는 뇌성마비아주머니가 있는데 나오기만 하면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며 한바탕 서로 웃기도 했다.

  “청각장애우들 중에 죄를 짓고 교도소에 간 사람들이, 사실 많더군요. 그렇지만 그게 그래요. 나도 청각장애우지만 청각장애우들이 대부분 배움이 짧아요. 그래서 깊게 생각을 안해요. 그러다보니 세상이 정한 죄라는 것의 구부도 못하고 그래서 죄책감도 없이 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많아요. 그렇지만 그들 가운데 대부분이 나쁜 비장애우들 한테 일방적으로 이용당하는 거예요. 저도 그렇고 청각장애우한테는 남의 말을 쉽게 믿는, 좋게 말하면 순수한 면이 있어요. 그런 면을 어떻게 사회가 이끄느냐가 중요하죠. 청각장애 재소자들이 자신이 쓴 이름을 보면서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는 얘기를 하며 울 때 사회의 더 많은 관심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세상 곳곳에 스미는 묵향의 빛

  이렇게 나눔의 삶을 시작한 지난해에서야 비로소 자신은 세상에 나왔다고 그이는 생각한다. 낮시간은 다른 사람들에게 내주고 밤에만 자신의 작품에 몰두할 수 있는 형편이어도 오히려 그를 괴롭히던 잔병치레도 사라졌을 만큼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삶의 기쁨이 충만하다. 그 동안 우여곡절이 많아 배우 기회를 갖지 못했던 수화도 서예를 배우러 오는 청각장애우들에게서 조금씩 배우고 있다. 더듬더듬 수화를 하면서 말을 걸었을 때 너무도 반가워하며 쉽게 마음의 문을 여는 농미회 회원들은 보며 자신의 또 다른 언어인 수화도 더 열심히 배우려고 애쓴다.

  그리고 지금 그는 ‘묵향으로 여는 사랑의 세상’이라는 이름의 더 큰 나눔잔치를 준비하고 있다. 십이월 이십육일부터 삼십일까지 청주 예술의 전당에서는 그의 개인전 뿐만 아니라 농미회 초대전과 그동안 실력을 가다듬은 충정지역 장애우들의 서예전이 개최된다. 원래 청주시는 그의 개인전만 지원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그가 그 돈을 나누어 보다 많은 장애우들이 새로운 격려의 기회를 갖도록 해주고 싶어 판을 더 크게 벌였다.

  그래서 일복이 터졌다. 농미회 회원들이 작품 사진을 받아 도록을 만들고 장소를 대여하고 장애우들에게 제대로 된 낙관을 직접 파서 주는 일도 직접 그가 다 챙겨야 한다. 정작 전시회를 앞두고는 못하겠다며 자신없어 하는 장애우들에게 느긋한 마음으로 작품을 완성하라고 독려하면서도 실은 그도 속이 탄다. 이번 개인전 작품 준비도 해야 하고 내년 일원까지 청년작가전에 전시할 작품도 제출하려면 상당한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분주한 가운데 잠시 숨을 돌릴 때면 이제 그는 자신의 또 다른 꿈을 떠올려본다. 묵향의 빛을 생활 속에 깊이 뿌리 내리게 장애우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는 자그마한 독립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혹 더 많은 장애우들에게 묵향을 전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서예를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할 수도 있다고도 생각한다.
 


  묵향의 빛뜨락의 동안의 도인

  일단 듣는 것 보다 한번 보는 것이, 그리고 보는 것 보다는 한번 쓰는 것이 뇌리에 더 오래 남는 법이라고 했던가. 붓글씨를 통해 좋은 글귀들만 반복해 쓰다보면 그 글귀에 담긴 뜻도 함께 계속 되새기면서 어느 수준에 가서는 세상이치를 모두 헤아릴 수 있는 도의 경지에도 오르게 되는 지 모른다. 붓글씨 쓰는 일을 서도(書道)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 까닭이리라. 근원 이미영 씨도 어느 새 도인의 경지에 오른 듯 한 마디 한마디 내뱉는 말이 예사롭지 않다.

  그이가 알고 있는, 가끔 팩스로 반가운 안부를 전하기도 하는 농촌에 사는 시인 한 사람이 어느 날은 무척이나 씩씩거리며 육두문자를 섞은 글을 보내왔다. 자신이 애써 모아둔 고추며 깨, 콩 같은 곡식 등을 누군가 다 훔쳐가 버렸다는 것이었다. 망할 놈의 세상이라고 저주하며 한탄을 늘어놓는 그 시인에게 그는 이런 글을 써보냈다.

  “곡식이란 것이 누구든지 입에 들어가기 마련인데 내가 걱정스러운 것은 도둑이 시인선생의 마음을 벌써 반은 훔쳐간 것 같아요. 나머지 반은 간수 잘 하세요.”

  그러자 곧 답장이 왔다.

  “근원 선생 말 듣고 보이 어쨌든 곡식은 자시 본문 다 한 거군요. 그래서 금방 내 마을 반을 다시 찾아왔어요.”

  그이를 조르면 이렇게 재미있는 일화를 여러 개 들을 수 있다.

작성자한혜영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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