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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이야기]“넝마를 모아 사랑을 나누죠”

으뜸가는 자원재활용주의자, ‘넝마공동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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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이 끝나고 얼마 돼지 않아 먹을 게 없던 시절 우리 나라는 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았다. 긴 나무 통에 담긴 옥수수나 감자가 주요한 구호물자였는데 그 구호물자마저도 제대로 받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은 빈 감자통을 등에 짊어지고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 다녔다. 찢어진 옷이나 깨진 유리병, 먹다 남은 찌꺼기 등을 미제 감자통에 주워 담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을 흔히들 ‘넝마주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살기가 좋아져 그런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지난 해 겨울, 사람들의 기억 소겡서 사라져 가던 넝마주이라는 말이 또 다시 언론에 보도되었다. 넝마공동체의 윤팔병이라는 사람이 그 동안 모아 온 헌 옷 1만벌을 북한 동포들에게 보내 달라고 모 신문사에 기증한 것이다. 넝마주이가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도 새롭지만 서울에서 부자들이 가장 많이 산다는 부촌 강남의 한복판에 공동체를 형성하고 13년째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넝마공동체가 어떤 곳인지 그 곳을 찾아가 보았다.

 

여성장애우에게서 배운 나눔과 사랑의 정신

 넝마 공동체를 찾아가기에 앞서 공동체를 설립한 윤팔병 씨를 찾아가 공동체를 설립하게 된 배경부터 들어 보기로 했다. 약속시간이 점심 때라 조금 일찍 식사를 하고 약속장소로 갔는데 한 50M쯤 앞에서 윤팔병 씨 같아 보이는 사람이 걸어왔다. 한 손에는 컵라면을 사 들고 이 쪽을 향해 걸어 오면서 “아직 점심 식사 안했지?”라며 우선 점심부터 먹자고 했다.

 혹자는 처음 본 사람에게 컵라면을 대접하련느 윤팔병 씨가 성의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요즘같이 경제가 어려운 시기엔 넝마주이 공동체 구성원들에게는 이 라면도 참 소중한 음식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식사는 이미 했기 때문에 바로 취재에 들어갔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허허벌판이었던 강남에 갑자기 개발 붐이 일면서 여기저기 새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어. 넓은 공터에 건축 자재며, 쓰레기등이 여기저기 많이 나왔지.

 그 때 넝마주이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 거야. 대부분 공터 주변에 막사를 지어 거주하면서 낮에는 건축자개, 유리병, 파지 등을 줍고 저녁엔 그런 것들을 고물가게에다 파는 거지. 워낙 쓰레기라는 게 지저분한 물건이잖아. 그러다보니 변변이 씻을만한 곳도 없어 좀 역한 냄새도 나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들을 피하곤 했지. 결혼도 못하고 사는데 그들이라고 그런게 뭐 좋겠어? 그저 별다른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사는 거지.

 그 당시 난 강남 영동에서 헌 책방을 하나 하고 있었어. 거기서 문태만이란 사람을 만난 거지. 보아하니 이 생활 꽤나 한 것 같아 물어봤지. ‘이 생활 얼마나 했냐’고, 그랬더니 ‘한 45년 했다’고 하는거야. 그 쯤 했으면 안해본 것 없이 다 해봤을 텐데 남은 인생도 별볼 일 없겠다 싶어 ‘그럼 이제부터 남을 위해 살아보지 않겠냐’고 꼬았지. 그렇다고 문태만이가 그 때 바로 공동체를 하겠다고 한 것은 아니고 한 3년쯤 내가 계속 쫓아다니면서 설득을 해서 마음을 바꾸게 된거야.”

 도대체 윤팔병 씨는 헌 책방을 하기 전에 어떤 생활을 했기에 처음 본 사람에게 당신 인생도 종친거나 다름없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윤 씨 표현대로 이미 종친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 무슨 생각으로 남을 위해 살아보자는 얘기를 3년씩이나 쫓아다니면서 했을까?

 잠시 윤팔병 씨 개인의 이야기를 하자면 윤팔병 씨는 열 살 되던 해, 육이오 전쟁으로 부모님과 위로 일곱이나 되는 형들을 한꺼번에 잃고서 어린 동생 구병이의 손을 잡고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다. 그 때는 모두가 없이 살았던 때라 이 어린 형제가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을 발견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그렇게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다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윤팔병 씨는 남의 집 개밥까지 빼앗아 먹게 되었다. 그 때 당시는 너무 배가 고파 부잣집 개의 신세가 부러웠다는 윤씨는 그 때부터 살기 위해 도둑질, 동냥, 구두닦이, 넝마주이, 창녀촌 심부름꾼 등 도덕이란 것을 따지기에 앞서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그렇게 살던 윤팔병 씨가 넝마공동체라는 것을 구상하게 된 jt은 기창에서 만난 한 여성장애우에게서 받은 감동때문이었다고 한다.

 “며칠을 굶다 고향으로 내려가기 위해 목포행 기차를 탔을 때 보이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어. 그 와중에 다리를 다쳐 무릎 아래를 절단한 한 여자가 눈에 띄더라고. 치료도 받지 못하고 절단부위를 헝겊조각으로 간신히 싸서 자전거 고무튜브로 묶고는 기차 바닥을 기면서 동냥을 하고 있었어. 헝겊에는 피고름이 뭉쳐 있고 며칠 째 씻지도 못했는지 머리며 얼굴이며 땟국물이 흘러 내렸지. 순간 그 여자와 내 눈이 마주쳤지. 아직도 기억이 나는 건 그 여자의 눈이 아주 맑았다는 거야. 그 여자가 ‘얘야, 이거 먹어라’하면서 동냥해서 얻은 인절미 두 개를 전부 내게 주는 거야. 난 그 여장에게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는데 그 여자는 내 눈빛을 보고 내 배고픔과 고통을 읽었던 거지. 옷을 깨끗하게 차려 입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날 피하고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그 거지 여자가 내미는 떡을 받으면서 순간 내눈에 눈물이 핑 돌았어. ‘아 이게 바로 사랑이구나, 결코 많이 가졌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지만큼 남을 이해하고 나누며 섬기고 사는 삶이 바로 이런 거로구나’하고 말이지.”



넝마공동체에는 양아치가 없다?

 녕마공동체는 1985년 6월 5일 강남구 삼성도에 처음 설립됐다. 그러나 2년만에 무허가 건물이라는 이류로 강제철거당하고 그 당시 강남구 대치동에 있던 제 2직업장으로 옮겨 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제 넝마공동체 구성원들이 살고 있는 강남구 대치동 영동5교로 자리를 옮겼다.

 넝마공동체 입구에는 손수 만든듯한 ‘자원재활용연구소’라는 간판이 하나 걸려 있다. 다리 밑 넓은 공터에 울타리를 쌓고 그안에 콘테이너 세 개로 방을 만들었다. 지붕은 따로 만들지 않고 위에 있는 다리가 지붕 역할을 하는데, 비가 와도 샐 염려가 없었다. 한 쪽에는 주워온 헌 옷들이 수북히 쌓여 이고, 다른 한 쪽에는 저울과 고물, 리어카 등이 있다. 그리고 누런 털이 복슬복슬한 작은 개 한 마리가 사람 뒤를 이리저리 따라 다녔다.

 기자가 공동체를 찾아간 시각이 오후 4시였는데, 다른 구성원들은 모두 일을 나가고 일명 ‘켈로’라고 하는 김경배 씨 혼자 연구소를 지키고 있었다. 색깔있는 썬그라스에 가죽잠바를 입고 모자까지 쓴 김경배 씨의 인상이 꽤 강해 보였다. 그가 방으로 안내해서 콘테이너로 만든 방안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의 방안은 한마디로 만물상 그자체였다. 텔레비전, 라디오, 옷장, 재떨이, 수십게의 비디오테이프 등 없는 게 없었고 그 중에는 아주 오래돼 보이는 골동품같은 물건도 있었다.

 어떻게 해서 이 곳에 오게 됐냐고 묻자 김씨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한 때는 유디티대원이었지. 북한에서 남한에 침투하듯이 우리쪽도 북한에 침투하곤 하거든. 북한에서도 우리를 무장공비라고 부르는데 침투해서는 북한군인을 죽였다는 증거로 북한군인의 귀를 베어왔지. 그리고 70년대에는 종로 기마대에서 활동을 했어. 그 당시 종로 기마대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힘이 막강했는데, 다 옛날 얘기야. 그 때 친구들은 지금도 투전판에서 노름하면서 흥청망청 살지. 가끔 그 친구들 만나러 가보면 같이 살자고 하지만 난 여기서 생활하는게 좋아.”

 김경배 씨는 이 곳 사람들이 양심적이어서 좋다고 한다. 같은 일을 하는데도 다른데 사람들은 열에 아홉은 저울을 속여서 물건값을 깍기도 하지만 자원재활용연구소에서는 본인이 가져온 물건은 본인이 직접 저울에 달아 값을 매긴다고 한다. 이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경력도 얼마 안돼고 양심적이지도 않으면서 겉멋만 내는 사람을 쉽게 말해 ‘양아치’라고 들 한다. 김경배 씨 말에 따르면 넝마 공동체에는 그런 양아치는 없다는 것이다. 아마 공동체 설립 당시부터 공동체운영을 구성원 모두가 직접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김경배 씨도 이 곳에서 운영위원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공동체에서 처음 맛본 인간애, 동료애

 김경배 씨와 한참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밖이 소란해졌다. 보통 다섯시쯤 되면 밖으로 일나갔던 구성원들이 하나 둘 연구소로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노가다’를 하고 왔다는 김차균 씨가 술을 한 잔 했는지 상기된 얼굴로 방안에 들어왔다. 김차균 씨가 방안에 들어오자 윤팔병 씨가 김차균 씨에게 장애우관련지에서 나온 기자라고 기자를 소개했다.

 그 동안 몇몇 언론사나 방송사에서 넝마공동체를 취재해 갔으나 그 쪽 의도대로만 편집을 해서 공동체 사람들은 마치 로봇이 되버린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방송사든 언론사든 인터뷰를 일체 거절해 왔다고 하는데 장애우관련지라고 해서 특별히 구성원들끼리 의논을 해 이번만 취재에 응항기로 했다고 김차균 씨가 설명을 해주었다.

 김차균 씨도 김경배 씨와 같은 연배로 초창기부터 공동체서 함께 생활해 온 구성원이다. 그이 역시 김경배 씨 만틈이나 험한 인생을 살았던 것 같다. 남달리 왼쪽 주먹의 펀치가 강해 주먹자랑하느라고 많은 사람을 때려 눕히기도 했고 그래서 삼청교육대도 갔다 왔다고 한다.

 그러나 공동체를 알고 부터는 다시는 싸움하는데 주먹을 쓰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본인이 직접 왼손의 힘줄을 끊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김차균 씨 왼쪽 손목에는 그때 그 칼자국이 남아 있다.

 김차균 씨는 밖에 나가서 있었던 얘기를 동료들에게 풀어놓았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인근의 아파트에 나가 재활용품을 수집하러 나갔는데 물건을 가져 내려 오느라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는데 수위가 하는 말이 ‘어이, 엘리베이터에 흠집 나’ 하면서 뭐라고 하는 거야. 옛날 같았으면 당장 한판 붙었을지도 모르는데 ‘네, 조심할테니 염려마세요’하고 수고하시라는 말까지 하고 왔어. 아, 김차균 성질 많이 죽었다.”

 그 말을 하던 김차균 씨는 한 때 잘나가던 시절이 그리웠던지 “형님(윤팔병) 때문에 내 인생은 조졌소. 내가 북한에 끌려가 공산당에게 세뇌를 당했어도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텐데. 괜히 공동체니 뭔지를 하자고 해서 이렇게 나이 오십을 넘기도록 장가도 못가고...”라며 옆에 앉은 윤팔병 씨에게 화살을 돌리려 하자 윤 씨가 “너는 나가서 리어카 좀 더 끌어야 돼”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러자 김차균 씨가 “그만큼 했으면 됐지. 왜 나만 리어카를 끌라고 해요? 난 다른건 몰라도 리어카는 이제 절대 안 끌어요”라며 큰소리를 쳤다. 순간 두 사람이 진자 싸우는 것인지 오래된 그들 나름의 대화법인지 잠시 혼동스러워졌다. 말 끝마다 섞여 나오는 욕설과 그들만의 은여, 반말 등이 좀 어색하기도 했지만 “밖에 나갔다 연구소 문을 열고 들어서면 집 나간 손주라도 돌아 온 듯이 모든 동료들이 일해 온 물건을 서로 챙겨주며 따뜻한 난로가로 인도해 주는데 이것이 동료애가 아닌가 생각하며 뭉클한 가슴에 하루의 피곤함도 절로 잊는다”는 김차균씨의 말 속에서 따뜻한 동료애가 묻어잇음을 느낄 수 있었다.

 

미군기지 앞에서 시위하는 넝마공동체

 넝마공동체는 대치동의 장원재활용연구소 말고 동작구 사당동에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헌옷가게를 열어 외국인노동자에게 무료로 옷을 나눠주고 있다. 수집해 온 헌옷들 중 일부는 돈을 받고 동남아로 옷을 수출하는 의류회사에 팔지만 그밖의 옷들은 어려운 외국인노동자들에게 무료로 나눠 주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작년 여름, 북한동포돕기운동이 한창일 때는 또 다른 일 하나를 벌였다. 북한동포에게 1만벌의 옷을 보낸 것이다. 외국인노동자에게 줄 옷 중 일부를 그냥 보내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북한에 보낼 옷은 영어가 써있지 않아야 하고 야한 모양의 옷도 안돼고, 수수하고 튼튼한 옷을 일일이 다 골라야 했다. 옷을 받는 사람들의 자존심까지도 배려하는 넝마 공동체 사람들의 깊은 뜻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이 작업을 하는데도 거의 3,4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또 수집한 물건 중 헌 책은 도서지역 어린이들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또한 넝마공동체 사람들은 매주 금요일 용산 미군기지로 시위를 하러 간다. 대학생도 아니고 시민단체도 아닌 이들이 웬 시위를 하러 가나 싶겠지만 서울의 노른자 땅인 용산을 몇십년째 무료로 사용하고 있는 미군의 뻔뻔함과 이를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정부에 대한 분노 때문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서도 가만히 있는 것과 비교해 보면 넝마 공동체 사람들이 벌써 몇 년째 금요시위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가는 것에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노태우 정권 당시 대학생과 시민단체들의 반대가 심해지자 노태우 대통령은 미군기지를 송탄으로 이전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이를 김영삼 정부가 다시 백지화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아주 대조적으로 1988년 강남구청은 공권력을 동원해 삼성동에 있던 넝마공동체 제1작업장을 무참히 철거해 버렸다고 한다. 나라에서도 해결하지 못하는 도시 빈민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보겠다고 세운 1백평도 안되는 작은 건물을 지원해 주기는커녕 하루 아침에 그들을 거리로 내몬 것이 너무 억울해 그 당시 넝마공동체 사람들은 천막을 치고 2달동안 시위를 벌이기까지 했다. 어째서 남의 나라 군대는 우리 나라에서 함부로 땅을 사용하고, 범죄를 저질러도 그냥 풀려나고 같은 민족은 굶어죽든 상관이 없다 말인가? 이래저래 넝마공동체 사람들도 반미의식이 투철해 금요집회만큼은 꼭 참석하고 후원금까지도 낸다고 한다.

 요즘같이 IMF시대에는 사람들이 고물이 있어도 잘 내놓지 않아 한 달에 40만원 정도 밖에 수입이 없다고 하는데 거기서 후원금까지 낸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도 김차균 씨는 그 날 번 돈 10만원을 모두 후원금으로 내놓았다.

 넝마공동체는 요즘 새로운 계획을 준비중이다. 자원재활용연구소를 시작하기 전부터 계획해 오던 것이라고 하는데 세계에서 가장 큰 벼룩시장을 여는 것이라고 한다. 이 벼룩시장을 통해 자원재활용은 물론 실업자 및 부랑인, 넝마주이들에게 제대로 된 직업을 마련해 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넝마공동체가 지나온 지난 십여 년을 되돌아볼 때 그들만의 힘으로 역부족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 최대 규모의 벼룩시장이 무허가라는 이유만으로 또다시 하루 아침에 헐리는 위기에 처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이는 넝마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바람이기도 하다.

 혼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 함께 잘 살기 위한 미래를 계획하고 잇는 넝마공동체는 이제 인생 종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 아니라 다른 이의 인생까지도 밝고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 진짜 멋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작성자노윤미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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