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걸음이 만난사람] 통일대사전 완성은 민족적 소명입니다 > 세상, 한 걸음


[함께 걸음이 만난사람] 통일대사전 완성은 민족적 소명입니다

우리말 연구가 박용수 선생

본문

  청각 장애를 가졌으나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과 연변까지 세상 전역에 퍼져 살아있는 우리말을 모으고 그 뿌리를 다듬는 작업을 20여 년간 해온 한글문화연구회 박용수 회장.
최근 천만리의 소를 북한에 안겨준 정주영 씨의 방북 사건으로 상징되는 남북한 화해무드 속에 통일에 대한 기운이 새롭게 솟고 있다. 그 과정과 앞으로의 상황을 좀 더 진지하게 우리말에 연구가 얼마나 소중한 지 깨닫게 된다.
  박용수 선생을 만나 통일대사전등 최근의 연구 작업에 대한 근황과 우리말의 중요성에 대한 그이의 의견을 들어 보았다,


“정주영의 소몰이 꾀 , 아름답더라.”

  박용수 선생을 만나기로 한 전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북한 방문을 통해 따낸 금강산 개발 건이 발표됐다. 텔레비전과 신문 에서는 온통, 이르면 올 가을부터 남한 사람들도 금강산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며 원산 인근 페리호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다음날 금강산에 오른다는 구체적인 관광코스까지 상세하게 소개해댔다.

 인터뷰를 앞두고 박 선생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던 터라 그랬는지 몰라도 왠지 정주영 씨와 박 선생이 닮았다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누구 못지않게 고집스러운 점이 그렇다는 데에는 박 선생의 면면을 아는 사람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동의를 해줄 듯도 싶다.

 해빙의 수준을 넘는, ‘햇볕론’까지 들먹여지는 요즈음의 이런 저러한 남북한 관계를 둘러싼 소식을 접한 박 선생의 심경은 어떠할까. 정작 그이의 관심은 그 동한 남한과 북한의 다라진 언어문화의 차이로 인해 생경한 만남을 해야 할 상황에 더욱 관심과 우려가 모아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게 그 문제가 우리의 최대 과제에요. 우리가 북한에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민족의 동질성을 하루 빨리 찾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언어가 통해야죠. 그렇지만 우리 언어문화만 강요할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의 방언을 수용해자는 기본 틀에서 해외교포의 말씨까지 받아들인 뒤에 예컨대 남북한과 연변 등 지연적으로 중심 틀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우리말 원형을 찾아야 해요. 이런 필요성은 반드시 어떤 근거가 있어야 전개가 가능하거든요. 그 바탕이 되는 자료를 만드는 것이 내가 하려는 일이지요.”


 - 정주영 씨의 방북을 보신 감상은 어떠십니까?

 “사람이 늙으면 가고 싶은 게 고향이죠. 여우처럼. 그렇지만 사람이 여우가 아니어서 분단선을 넘을 수 없고 그러니 사람 나름의 온갖 궁리를 다한 끝에 얻어낸 것이 금강산 개발 아이디어였을 게고 이것이 상극의 두 체제에 걸려 성사될 기미가 좀체로 보이지 않으니까 소몰이 꾀가 떠오른 것일 겁니다. 누가 봐도 미워할 수 없는 꾀죠. 그런 정주영씨의 의도를 볼 때 저의 이런 눈을 통해 굳어진 선입견 때문에 심장이 좀체로 뜨거워지지 않지만 보아서 아름다우니 아름답다는 느낌은 듭니다. 다만 정 씨가 더 꾀를 썼다면 수십 마리 소가 쟁기질 하는 꼴이 때때로 TV에 나왔을 건데 아쉬운 점은 그거예요.


시를 쓰다 보니 우리말 연구 하게 돼

 인터뷰 자리에 동석한 자칭 새내기통일군은 통일을 바라던 사람들이 얼마나 넘고 싶어했고 그 이유로 감옥으로 보내졌던 판문점인데 저 사람은 저렇게 쉽게 가나 해서 속상했다는 얘기도 한다. 박 선생도 어떤 면에서는 마찬가지로 씁쓸함을 느낀 듯하다. 그러나 그 소목이가 전 국민들에게 ‘나도 통일을 위해 기여할 바를 창안해야겠다.’는 공통된 문제의식을 깔아준 면에서 높이 평가한다고 말한다.

 “문 목사님이 살아 계셨으면 술 한 잔 앞에 두고 크게 웃었을 일이지요. 저랑 문 목사님이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을 만들 초기에 부닥쳤던 문제점 가운데 하나였거든요. 통일은 정치인에게 맡겨 둘 문제가 아니라 칠천만 겨레가 모두 떨치고 일어서서 서울의 미화원이 평양거리를 쓸어주는 일을 우리가 꾸며 낼 때에라야 통일이 온다는 판단에서 ‘칠천만...’이라는 이름을 넣게 된 것인데 소가 소 나름의 통일운동을 했다는 점에서 무척 중요한 진전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기쁘게 생각합니다만 슈사인보이들이 집단적으로 평양에 가서 평양 사람들 구두를 닦아 주는 통일운동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떠나버린 문 목사가 아쉬울 분이에요.”

 박용수 선생이 <우리말갈래사전>과 <겨레말용례사전>, <글짓기갈래사전>에 이어 <통일대사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17세때 장티푸스에 걸려 열병이 지난 후 청력을 잃어버린 박 선생의 경우 우리가 자랑하고 따를 수 있는 장애우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함께걸음 편집진은 특히 박 선생을 주목해왔다. 90년과 93년, 우리말갈래사전 발간에 즈음해 인터뷰 기사가 나가기도 했고 91년부터 <박용수의 세상보기>,93년 10월 부터는 <사랑, 그 짓궂은 이야기>와 같은 칼럼을 통해 함께걸음 독자들에게 자신의 지난 삶의 조각들과 민족사와 이 땅의 현실에 대한 고견을 이미 여라 차례 드러내기도 했다.

  그래서 사실 이번 호 함께걸음이 만난 사람 코너에서 박용수 선생을 모신다는 건 조금 쑥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요즈음 박 선생이 온 정신을 쏟아 몰두하고 있는,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과 연변까지 세상 전역에 퍼져 살아있는 우리말을 모으고 그 뿌리를 다듬어가는 통일대사전 발간작업의 진척 상황이 부쩍 궁금해진다.

 - <우리말갈래사전>과<겨레말용례사전>에 이어 <글짓기갈래사전>과 <통일대사전>으로 이어지는 우리말의 전체적인 취합, 분류작업을 진행하고 계신데, 그렇게 작업이 확대대신 계기는 무엇이셨나요, 그리고 제일 처음 우리말에 관심을 가진 계기도 알고 싶은데요.

 “관심이 확대되기보다 꼬리가 달린 일에 손을 댄 업보라고 해야겠죠. 문제는 이런 일에 관심을 둔 단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계기는 내가 원래 시를 썼기 때문이에요.

 시를 즐겨 읽다가 시를 지어보고 싶은 시기를 거쳐서 직접 시를 쓰면서부터 줄곧 따라다닌 말썽이 바로 시어를 찾아 쓸 사전이 없다는 점이었어요. 시를 짓겠다는 욕구가 솟구치던 1975년께 시 하나를 위해서 진주에서 무작정 상경한 다음에 정작 밥벌이는 사진 기사를 했습니다만 이 무렵 만난 한 떼의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뭔가를 하자고 뜻을 모은 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이었어요. 이 떼거지들한테서 받은 자극이 시심을 들쑤셨지만 정작 시를 쓸 수가 없었어요. 쓰다가 보면 알맞은 낱말을 몰라 사전을 들고 끙끙해야 했거든요. 견디다 못해서 나 스스로의 편리를 바라고 낱말 모으기를 시작했는데, 그 첫 성과를 낸 것이 8백매 분량의 ‘바람소리’였습니다. ‘자실’사람들이 모두 참고할 수 있게 그 노트를 책으로 내자고 했는데, 말만 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한길시를 들쑤셔서 출판계약을 맺도록 해가지고 또 몇 년 고생해서 갈래사전을 편집했는데 그게 그러니까 지금까지 하고 있는 작업의 시작이 됐어요.“


표준말, 언젠가는 평양의 문화어와 맞설 판

  그때 그 사전원고를 2백자 원고지에 옮겨 담으니 원고지 높이가 키높이가 됐다고 했다.

  원고지 정리는 끝냈지만 민통련 활동으로 여기 저기 경찰서며 구치소를 덧나느라 교정에 전념하지 못해 결국 책이 햇빛을 보게 된 것은 5년 뒤인 89년의 일이다. 그런데 문 목사가 방북할 당시에 당시 그 사전을 김일성 주석한테 선사한 것이 외신을 타고 바깥으로 소문이 난 것이었다.

  그 외신을 받아본 국회의원들이 증보 ․ 개정의 필요성에 합의해서 국고 보조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고 그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 성과로 겨레말갈래 큰 사전을 내고 여기서 찾은 낱말을 효과적으로 쓰도록 돕는다고 겨레말용례사전을 만들게 된 것이었다.

  글짓기갈래사전은 그가 시를 쓸 당시 느꼈던 막막함을 토대로 글짓기를 할 때 보다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 사전이다. 예를 들어 바퀴의 경우 바퀴하나를 놓고 바퀴축, 바퀴살 등을 그림과 함께 각 부귀의 이름들을 자세히 적어놓았다.


― 맞춤법 규칙이 몇 년 마다 바뀌는 탓에 사실 남다른 관심을 갖고 살지 않는 한 혼돈스러울 때도 많습니다. 그러한 맞춤법과 표준말 지정에 대해 이견을 밝히신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요, 전혀 새로운 지적이시던데요.
 
  “처음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사정할 때 우리말과 글의 특질인 음소체계를 따르지 않고 형태소를 취한, 이른바 첫 단추를 잘못 끼운데 서 빌미합니다. 그 배경은 일본 제국대학 출신인 이희승 등이 일어식 형태소를 주장한 논서를 반박할만한 이렇다 할 이론의 정립이 없었던 당시의 국어학계의 단순한 애국심에 원인이 있다고 추측되는데, 뒷날 국어학계가 이희승을 친일학자라고 폄하하는 까닭도 이것입니다. 그렇지만 맞춤법 문제는 누구 한 사람을 욕한다고 해결날 것이 아니라 음소체계의 이론정립이 따라야 하는데 독재정부로 이어져 오는 정치구도에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매장되는 짓을 애국적으로 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우리말에 맞지 않는 형태소를 따라 국어를 발전시켜 왔던 겁니다. 그러니 마치 침대에 맞도록 발모가지를 자르는 희랍신화의 얘기처럼 우리말이 완전해지지 않게 된 거죠.

  표준말이란 것도 서울의 중류층 이상이 사용하는 말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엄밀히 보면 사대부들이 쓰는 말인데 이들이 예전에 한글을 쌍글 이라고 업신여기고 내쳐 사실상 국어를 죽이기에 앞장섰던 계층 아닙니까. 이들이 쓰는 말이란 것도 한자에 이두의 토를 단 반국어였단 말입니다. 그렇지만 표준말은 아무래도 평양의 문화어와 한번 크게 부딪칠 운명이고, 그시기를 위해 대비책을 잘 세우면 우리 고유의 토박이말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어 보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그때를 위해서 내가 부지런을 더 떨어둘 필요가 있겠다 싶어 통일사전을 만드는 것이죠. 이 사전이 내용적으로 우리 사전을 대표하게 되면 내 주장을 안 따를 수 없을 게다 하는 나름의 믿는 구석도 있습니다.”


― 직접 북한을 방문해서 통일대사전 준비를 마무리 짓고 싶다고 늘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그런 준비를 하고 계신가요?

  “사실 오래 전부터 준비해오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겨래 말 통일’이라는 막걸리잔 을 젓가락을 휘적휘적 휘젓는 짓에 지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죠. 가장 근본적인 일은 통일사전을 정식사업으로 인가받아 착수하는 일이고 사전이 발간될 때까지 모든 작업은 통일 사전과 관련지어 계획되고 추진 될 겁니다. 하지만 어느 시기에 그것이 이뤄질 것인지는 앞ㅇ로 희망을 갖고 지켜봐야죠.

  사람이 죽으면 황천으로 가는 길이 딱 하나 뿐이듯 겨레말을 살리는 한글문화운동의 길은 7천만 겨레가 두루 쓸 수 있는 우리 고유의 토박이말을 찾는 외길뿐입니다. 다행인 것은 비록 한자문화와 갖은 외래어로 많이 다치기는 했지만 우리 고유의 겨레말의 원형이 보전되어 있는 상태라 큰 어려움은 없다고 봅니다. “


남한의 방언이 북한에서는 문화어

― 예전 남북한 교환방문 때에 북한 어린이가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라고 말해 남한사람들이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만, 그것은 어찌 보면 얼음보숭이가 아니라 아이스크림이라고 굳이 강요할 수 없는 상황인 만큼 북한 사람들의 우리말문화가 섬뜩한 충격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남북한 간의 우리말에 대한 인식의 근원적인 출발을 어디서 잡아야 할까요.

  “북한 문화어 속에 우리 토박이말이 많이 살아남은 것은 사실이죠. 그런데 그 가운데는 남쪽에서 방언이라고 못 박은 낱말이 많아서 이를 우리 표준말로 수용하려면 상당한 진통이 예상됩니다. 곧 우리 표준말 사정기준을 전면 수정해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겁니다. 북한은 산이 많아요. 양강도는 거의가 2천미터가 넘는 산악지대고, 장강도, 함경도도 마찬가지로 높은 산이 많죠. 산이 많다는 것은 깊은 골이 많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는데 이런 생활권에서 나타나는 말은 서울이나 전라도에서는 좀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언어 본래의 생성풍토를 중요시해서 찾아서 문화어를 수용할 길을 터주어야 논란의 소지가 없어질 겁니다.

  제주도도 아예 외국어나 다름없이 아래아자(․)를 쓰지 않으면 나타낼 길도 없는 단어도 많죠. 이는 곧 언어공동체 울타리를 벗어난 언어 군이 우리나라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죠. 한글 스물 넉자로는 나타낼 수 없는 말이 존재한다는 것은 제주도는 한글 문화권에 들 수 없다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니 겨레말 통일이란 이런 대상 언어 군을 우리 언어권속에 수용할 길을 구체적으로 찾아내는 일인데 현재로서는 아래아 자를 되살리는 길밖에 없으니 이 또한 스물여덟 글자에서 넉자를 버린 사대부와 같은 선조들의 단견이 빚어낸 말썽거리죠. 근본적으로 아래아자나 △따위는 우리말을 나타내는데 없어서는 안 될 글자니까요. 앞으로 정치적인 측면에서 남북통일을 얘기할 때 언어문제도 그 문제만 심도 깊게 다룰 특별 위원회를 만들어서 통일 말 사정에 거쳐야겠죠.“


― 선생님이 한때 청각장애우라는 이유로 정부에서 여권을 안내주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나는 중학 때부터 민족이 어떠니 하는 시를 써왔어요. 그렇지만 사실 구체적인 국가관 민족관은 없었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특히나 70년대 초기에는 더욱 그런 의식이 없어서 잠시 이민을 생각했습니다만 그냥 좋은 곳에 가보자는 생각이었는데 나라에서 청각장애우라고 여권을 내주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화가 났지만 그냥 또 쉽게 잊고 다른 일에 몰두했죠.”

  한번은 본지의 편집자문위원이기도 한 박 선생과 이영호 선생이 한자리에 하게 됐다. 청각장애를 가진 사람과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이 마주앉아 대화를 이어가는 데에는 주위 사람들의 필담과 통역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두어 시간이 두 선생이 대화를 이어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박 선생께 물었다.


젊음과 시를 앗아간 우리말 연구

― 만약 청각이 아니라 시각장애를 가졌다면 어떠셨을 것 같습니까.

  “나는 청각장애를 가져서 오히려 편해요. 말아닌 말 안 들어도 되고 순진무구했던 유년시절의 소리를 지켜 간다는 것은 행복이죠. 과거의 소리를 잃지 않기 위해 수화를 배우지 않고 말을 해 와서 내 의사를 표현하는 데에도 별 문제는 없습니다. 반면 시각장애는 굉장히 심한 장애라고 생각돼요.”

  물론 이영호 선생은 그 같은 질문에 모든 문화도 결국 언어를 통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라며 주류의 언어문화에 끼일 수 없는 청각장애가 더 중한 장애라고 답하긴 했다. 어찌됐건 분명한 사실은 박 선생이 청각이 아닌 시각장애를 가졌다면 물론 ‘민중의 길’과 같은 역작의 사진집이 세상의 빛을 보기는 불가능 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기자가 대학시절에 ‘민중의 길’이라는 사진집을 처음 접했을 때 한사람이 그 사진들을 모두 찍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곧 덮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단 한 점을 빼고는 오롯이 박용수, 한 사람이 찍은 작품들을 모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다. 그 사진집은 민주화투쟁의 열기가 솟던 70,80년대 당시 온 몸을 다 던져 행했던 사진작업도 우리말 연구와 함께 접었다고 한다. 한 가지만 제대로 하기 위해서다.

  인터뷰 자리에 우연히 동석했던 박 선생의 이십년지기 벗인 유순녀 여사(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 여성 공동체 회장)는  “그렇게 한 평생을 한가지 일에 쏟았으면 이제 그 후광을 좀 받으면서 살아야 할 나인데, 여전히 혼자 애쓰는게 안쓰럽다”고 말한다.

  박선생은 89년 세상에 나온 우리말 갈래 사전이후 어린이들이 우리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획된 교재인 <겨레말 바른말>을 환경편과 생활편에 나누어 수록하는 작업도 진행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들의 의미와 성과가 더 널리 퍼지지 못하고 박 선생 혼자만의 외로운 작업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를 쓰기 위해 적당한 단어들을 찾다가 혼자 노트에 정리했던 우리말 연구 작업이 결국 20년 동안 스스로를 옭아매는 탈을 만들었고, 그 시간 동안을 생각해보면 잃은 게 많다고 박 선생은 얘기한다.

“가장 큰 잃음은 젊음이고, 그 다음 잃음은 시입니다. 내 젊음을 위해 시를 썼는데 그것이 우리말 연구로 이어졌고 그것이 다시 젊음을 잃어버리게 했으니 이런 일을 두고 팔자소관이라고 해야겠죠. 그렇지만 나라말의 실체를 알고 난 뒤부터는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업보라고 웃어버립니다. 모든 여건이 사전을 마무리하도록 짜여져 있기 때문이죠. 이 나이에 돋보기를 쓰지 않고 작은 사전 글씨를 읽는 비정상적인 시력도 이일을 위해 마련된 신체조건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도 어보도 아닌 이 땅에 태어나 시를 쓰기로 운명잡힌 사람이 아니면 손을 댈 수 없는 일이 나에게 지워진 민족사적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옷깃 여미면서 남은 생을 마지막 일 마무르는데 바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성자한혜영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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