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비리 없는 세상을 위하여 > 세상, 한 걸음


시설비리 없는 세상을 위하여

아름다운 청년 김형수 이경훈 군

본문

  지난 3월 국민과의 대화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에바다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요청하는 장애우에게 진상을 알아보고 조속히 해결하겠다고 다시 한 번 약속한 일이 있다. 그 여파로 에바다재단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 결과가 서둘러 발표됐고, 곧 이어 진행된 6.4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현 시 ․ 도지사 뿐만 아니라 다른 후보들도 이전과는 사뭇 다르게 관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도 그 때뿐이고 처음 농성이 시작된 지 6백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에바다 사태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처음 한동안은 적지 않은 관심을 보이던 시민단체와 정부기관, 언론에서 이제 더 이상 에바다 사태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성세대들의 무관심과 무책임으로 인해 에바다 농성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에바다농장을 다른 장애우 시설 비리 척결의 선례로 남기겠다면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밝힌 두 청년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인 1996년 11월 27일, 에바다복지재단의 비리 사실을 폭로하며 농성을 주도한 뒤 이제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서도 아직 재단 정상화를 위해 뛰고 있는 이경훈 군과 사건 발생적후로부터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 지난 8월 ‘에바다 정상화를 위한 대학생비상대책위원회’ 2대 의장으로 선출된 연세대학교 94학번 김형수 군이 그들이다. 에바다 사태는 이 두 청년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고 세상 사람들에게 이들이 하고픈 말은 무엇일까.


경훈이 이야기

  부산이 고향인 경훈(21)이는 청각장애가 있다. 어려서 열병을 앓은 후 청각장애를 갖게 됐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초등과정부터 고등학교까지 줄곧 특수학교만 다녔다. 경훈이는 공부를 잘했다. 또 운동오 잘해서 반에서 늘 1등을 하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경훈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어느 날, 부산 모 학교 체육선생님 한 분이 경훈이를 보려 찾아왔다. 그 분은 장애아 탁구팀을 결성하기 위해 여러 학교를 다니며 학생을 찾고 있던 중이었는데 경훈이 담임선생에게서 경훈이란 학생이 운동신경도 발달됐고, 승부욕도 강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만나러 온 것이었다. 그 분이 바로 현재 해아래집 농성교사 대표이며, 그 결과 에바다 학교 ‘전’ 교사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 권오일 씨다. 경훈이가 시합하는 모습을 지켜본 권오일 씨도 첫눈에 경훈이가 운동선수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강한 체력과 리더쉽을 가졌음을 알아보고, 그를 한 번 키워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때부터 경훈이는 본격적으로 탁구훈련만 하게 됐다. 워낙 운동신경이 발달해 있어서 훈련에 들어간 지 얼마 안돼 또래 중에는 경훈이를 상대할 선수가 없어 자신 보다 덩치가 큰 중학생과 훈련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1년 후 전국장애우체전에 참가해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권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꾸준히 탁구훈련에만 열중했다. 그런데 경훈이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권 선생님이 평택으로 전근을 가게 됐다. 경훈이가 훈련을 잘 따라오는데다 실력도 있어 좋은 선수로 키워보려고 마음먹었던 권 선생님 입장에서도 여간 아쉬운게 아니었다. 워낙 권 선생님에게 정이 많이 들었던 경훈이의 상심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새 선생님에게 적응을 하지 못하고 실력도 향상되지 않고 시합에 나가도 전처럼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권 선생님이 떠난 후 계속 방황만 거듭하던 경훈이는 어느 날 부모님께 권 선생님이 계신 곳으로 전학을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부모님은 경훈이의 뜻을 받아주지 않았다. 탁구도 좋지만 아직 나이도 어리고 부산에서 경기도까지 그것도 장애가 있는 아들을 혼자 보내는 것이 여간 마음에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경훈이는 그것이 너무나도 절실했다. 단지 권 선생님과의 정 때문만이 아니라 초등학교때부터 시작한 탁구가 어느새 경훈이의 전부가 되었던 것이다. 부모님이 쉽게 허락을 해주지 않자 경훈이는 급기야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결국 부모님도 경훈이의 뜻대로 권 선생님이 있는 평택 에바다학교에 전학가는 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에바다학교는 경훈이가 전에 다니던 학교와 달리 재단에서 운영하는 농아원이 있어서 연고자가 없거나 집에서 통학하기 어려운 학생들이 기숙생활을 했다. 그러나 경훈이는 부모님의 걱정이 컸고 탁구연습을 하는데도 권 선생님과 함께 생활하는게 낫겠다 싶어 학교 근처에서 선생님과 함께 자취를 하게 됐다.

  전학을 온 경훈이는 다시 전처럼 훈련에 몰두할 수 있었다. 매일같이 새벽 6에 기상해서 연습을 하고 수업을 마친 후 또 다시 밤 9시 40분까지 연습을 했다. 드디어 고등학교 1학년 때 전국장애우체전에 출전해 최연소 금메달수상자가 되는 영광을 차지 했다. 뿐만 아니라 에바다학교 탁구팀도 갈수록 실력이 향상돼 체전에 나갈 때마다 좋은 성적을 거뒀고 금메달도 세 차례나 따냈다.

  그러나 학교측에서는 탁구팀의 성적이 좋아진 것에 만족해하면서도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권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그런 사정 얘기를 할수도 없었는데 또 경훈이는 경훈이대로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간혹 훈련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권 선생님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했다.

  “선생님, 우리 학교는 참 이상해요. 도서관도 없고, 화장실 문이 고장나도 고쳐주지도 않고 유리창이 깨진지 1년이 지나도 갈아 끼우지 않고, 교실바닥에 비가 새 들어와서 누전사고가나도 그냥 그대로 놔둘 뿐이고 운동장엔 철봉 하나 없어요. 왜 이렇게 엉성한게 많죠?”

  정말 그랬다. 수업 도중 누전이 됐지만 보수공사를 제대로 하려고 하지는 않고 그냥 학년이 다른 학생들과 합반을 하라고만 했다. 탁구를 배울 욕심에 전학을 오긴 했지만 전에 다니던 학교과 너무나도 다른 학교환경을 보고 경훈이로서는 그 동안 쌓인 분만이 많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권 선생님은 경훈이에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차츰 경훈이도 학교생활에 적응을 하면서 학교 속사정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농아원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도 우연히 듣게 되었다. 농아원 최실자 원장이 나라에서 주는 돈을 빼돌린다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경훈이는 원에서 생활하지 않고 따로 나가 생활했기 때문에 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는데 친구들의 말을 들으면서 차츰 에바다 재단에 근본적인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그런 사실을 자신들끼리 이야기하면서도 어떻게 해 볼 힘이 없었다. 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 얘기를 한다해도 과연 믿어줄 지 의문이었다고 한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96년 11월 무렵, 어려서부터 농아원에서 자라온 한 친구가 최실자 원장이 학생들에게 농아원내 자립작업장에서 일을 시키고도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고 장애인수첩과 주민등록증을 위조해 공금을 횡령한 사실을 세상에 폭로하고 최실자 원장을 몰아내자며 먼저 제안을 한 것이다. 워낙 최실자 원장과 재단에 대해 쌓인게 많았던 학생들은 곧바로 농성에 가담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학생 60여명이 1996년 11월 27일 새벽 집단농성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에바다 문제가 길어지면서 당시 고 3이었던 그 친구는 대학진학 문제로 오래 버티지 못하고 그보다 한 학년 아래인 경훈이가 농성의 실질적인 주체가 되어 집회가 있을 때마다 앞에서 발언을 하고 기자들을 상대로 비리를 고발하는 일을 하게 됐다고 한다.


형수이야기

  역시 부산이 고향인 형수(24)는 뇌성마비 장애가 있다. 형수는 경훈이와 달리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일반학교에 다녔다. 형수 부모님이 장애우도 일반학교에서 비장애 친구들과 함께 자라야 커서도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뇌성마비복지회 부산지회 발기인 중 한 분이기도 하세요. 편의시설이 부족한 학교에 편의시설 설치를 요구하고, 어디서 장애우시설문제가 터지면 누구보다 앞장 서서 활동하시는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제가 무사히 일반학교에 다니지 않았나 싶어요. 어머니는 한 번도 제 장애에 대해 신세한탄을 하시거나 원망하시지 않으셨어요. 그저 어려운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어떻게 하면 잘 해결할 수 있을까만 고민하셨죠. 그런 어머니의 삶의 방식을 자연스럽게 저도 따라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형수 군이 고등과정을 마칠 즈음 장애우 특례입학제도가 생겼다. 편의시설도 마련되지 않은 채 특례입학만 시킨다고 장애우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비난의 여론도 높았지만 어찌됐건 들어가 보자고 어머니가 적극 권하셔서 형수는 연세대 국문학과에 진학하게 됐다.

  대학에 입학한 형수는 원래 수화동아리에 들고 싶었다. 얼핏 보기에 수화동아리엔 장애우들이 있을 것도 같고 다른 동아리에 비해 장애우를 더 잘 이해해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선은 대학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싶어 동아리 가입은 한 학기 뒤로 미뤄놓았다. 그러나 막상 2학기가 되어서는 마음이 바뀌어 수화동아리가 아닌 적십자동아리에 가입했다. 수화동아리가 장애우 문제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수화공연만을 위해 장애우의 언어를 이용하는 것 같아 싫어졌다고 한다. 대신 적십자동아리는 장애우시설을 직접 방문해서 아이들을 돌봐주는 것이 마음에 들어서 처음에는 열심히 참여했는데 역시 몇 번 다녀보고서는 그만두었다. 같은 장애우 입장에서 장애우문제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없이 그저 시간 날 때 잠시 찾아가 봉사하고 오는 것이 결국은 자기위안밖에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장애우문제를 바라보는 형수의 시각이 이렇게 대학 입학 당시와는 확연히 달라지게 된 계기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1년에 두차례 열고 있는 ‘장애우대학’ 강의를 수강했던 탓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때부터 장애우운동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사회복지학도 부전공으로 택해 공부하고 있다.

  적십자 동아리를 그만 둔 형수는 이번에는 장애우문제를 본질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동아리를 직접 만들 결심을 하게 된다. 당시 학내에는 특레입학으로 입학한 장애우가 여러 명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중증 장애를 가진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친구와 이런 저런 자신들만의 고민을 나누면서 처음엔 두 명이서 동아리를 창단했다. 그게 바로 ‘게르나카’다.

  게르니카는 결성 첫 해부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1996년 5월 대동제 기간 동안 게르니카는 특례입학제도가 신설된 지 2년이 지났음에도 대학 내에 편의시설이 설치할 것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인 것이다. 이 사실이 한겨레신문에 보도되자 게르니카는 순식간에 전국에 알려지게 됐다. 그 후 다른 대학에도 게르니카와 유사한 장애우동아리가 창단되기도 했다.

  형수는 게르니카 활동 뿐 아니라 총학생회나 과에서 하는 집회에도 빠짐없이 참여했다. 과 분위기나 워낙 통일운동이나 학원자주화운동에 적극적이기도 했지만 집회에 참여하는 학생들을 상대로 장애우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함이었다. 집회에 참석하는 학생들이라면 나름대로 의식있는 학생들일 텐데 따로 시간을 내 장애우 문제를 알리는 것보다 장애우가 직접 집회에 참여함으로써 장애우문제가 곧 전체 학우의 문제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형수처럼 목발을 짚거나 휠체어를 탄 학우가 집회에 나가면 사람들 눈에 더 잘 띄어 홍보효과도 컸다고 한다.

  에바다재단 농성사건은 형수가 본격적으로 결합한 첫 번째 장애우 인권 운동이 됐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 들렀다가 우연히 에바다 사태를 알게 됐죠. 그 때 소장님께서 평택시민토론회에 참석하신다며 같이 가자고 하셔서 따라갔고, 그 후 다른 장애우단체들이 주최하는 여러 집회에도 계속 따라다녔는데 사태는 쉽게 해결이 나지 않더라구요. 장기화되니까 처음엔 열의를 보였던 단체들도 하나둘 빠져나가고 나중엔 에바다 학생들과 선생님, 부모님들만 싸우시는 거예요. 이래선 안되겠다 싶었죠. 대학생을 조직해야겠다는 생각을 그 때 하게 된거죠.”

  해마다 장애우 시설문제가 터지지만 장애우단체들이 시작할 때만 관심을 보이다 마는 모습에 적잖이 실망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비판할 세력마저 장애계에는 없다는 것이 더 안타까웠다. 단체들과 기관을 자극하고 비판할 비판세력의 절실함을 느낀 형수는 학생들이 비판세력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침 단국대 특수교육과 학생회장인 이희경이란 친구가 에바다 관련 문건을 가지고 연세대에 들어와 강의실을 돌며 에바다사건에 대해 알리는 선전작업을 했다. 에바다사태 해결을 위한 대학생비상대책위를 결성하자는 것이었다. 곧 뜻을 같이한 형수와 그 친구는 장애우관련 동아리와 관련 학과를 조직해 지난 해 겨울부터 평택역 텐트농성에 돌입하기도 했다.


전태일을 닮고자 하는 두 청년

  경훈이와 형수는 이렇게 에바다 농성을 계기로 알게 됐지만 사실 농성초기만 해도 서로를 에바다학교 농성학생과 자신들을 지지해주는 대학생 형으로만 알고 안면을 익히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들이 본격적으로 가까워지게 된 것은 텐트농성이 끝난 후 3월이 되면서부터다.

  3월이 다가오자 텐트농성을 함께 했던 대학생들이 모두 떠날 준비를 했다. 곧 개강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수는 개강준비를 하지 않았다. 4학년으로 진급하지 않고 휴학을 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겨울 부모님이 하시던 일이 잘 안돼서 학비마련이 어려워졌어요. 이 참에 에바다 농성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 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장학금을 받아서 등록금을 직접 마련해온 형수였지만 올해는 IMF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기도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수는 학생들이 텐트농서을 철회한 이후에도 한동안 해아래집에서 에바다농학교 학생들과 함께 숙식가지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올해 평택공과대 생활체육과에 입학해 대학생이 된 경훈이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훈이의 꿈은 권오일 선생님과 같이 자신과 같은 장애우들에게 탁구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용인대 특수체육학과에 진학하는 것이 경훈이의 목표였다. 성적 또한 초등부부터 고등부까지 줄곧 1등을 해왔기 때문에 특수체육학과에 진학하는 데 별다른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에바다 농성이 시작되면서 70여일간 수업을 받지 못한데다 그 이후에도 계속 농성을 하느라 진학준비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경훈이는 원하던 용인대에 진학하지 못하고 평택공과대에 특례입학으로 입학하게 됐다.

  자신보다 3살이나 어린 경훈이가 대학 진학준비까지 미루고 농성을 해 결국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었다는 이야기는 형수에게 새로운 충격이었다.

  “해아래집 학생들은 에바다재단으로부터만 소외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번 농성과정에서도 소외돼 있었습니다. 에바다 문제를 세상에 처음 알린 것도 해아래집 학생들이었고 자신의 꿈마저 미루고 농성을 왔던 것도 그 아이들인데 정작 에바다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우리 대학생들조차도 그들을 단 한번도 동지로 생각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저 집회 때 수화공연이나 하고 구호나 외치는 애들 정도로, 그들을 따돌리고 대상화시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저 스스로 꽤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때부터 형수는 해아래집 학생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선배가 후배를 대하듯, 좋은 행사가 있으면 같이 가서 보기도 하고 좋은 책이 있으면 선물해 주기도 했다. 올 여름엔 전국특수교육과 연합수련회에 같이 참가하기도 하고 경훈이에게 전태일평전을 선물하기도 했다. 형수가 선물한 책 겉장을 넘기자 형수가 친필로 쓴 다음과 같은 글귀가 눈에 띈다.

  ‘정의와 진실은 늘 지각하지만 결석하는 법은 없다.’ 아마도 형수가 그 동안 장애우운동을 하면서 느낀 사실을 정리한 문장이 아닐까 싶다.

  많은 책 중에서 왜 전태일 평전을 선물했냐고 형수 군에게 묻자 전태일과 경훈이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노동운동이 미비했던 그 시절 목숨을 바쳐서까지 열악한 노동현실을 알린 전태일처럼 어린 나이에 장애문제에 뛰어든 경훈이가 에바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장애우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라고 한다.

  그렇다면 형수의 꿈은 어떤 것일까?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어요. 전철을 탈 때 무임승차할 수 있고 고속도로 통행료 50% 할인되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장애우가 주인공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20대에는 많이 다니면서 이론과 실무를 배우고 싶고 30대에는 조직에 들어가서 활동하고 싶어요. 그렇다고 젊은 혈기에 감정만 앞서는 엉성한 운동이 아니라 이론과 함께 활동력을 갖춘, 운동에 있어서 프로가 되고 싶어요.”

  형수가 바라는 세상, 언제쯤 그런 세상이 올 지 모르지만 그 세상은 분명 에바다와 같은 시설비리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 세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아직 그런 세상은 아니다. 다만 그런 날을 위해 단 한 번 뿐인 청춘을 땀 흘리며 보내는 경훈이와 형수같은 청년이 있을 뿐이다.

작성자노윤미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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