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 나는 병원이 저희 설립 취지에요” > 세상, 한 걸음


"적자 나는 병원이 저희 설립 취지에요”

실로암 안과병원 김선태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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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 있는 실로암 안과병원의 병원 관계자들은 매년 2~3억의 적자를 보는데도 태평하다. 시각장애우와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진료뿐만 아니라 녹내장, 백내장 등의 개안수술까지 무료로 해주는 곳으로 잘 알려진 그 병원은 적자가 나는 것이 오히려 설립취지에도 맞다는 것이다. 병원 출범 이후부터 10년이 넘는 병원의 역사를 함께 해온 김선태 원목을 만나 보았다.

  신체에 장애를 가졌다는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장애우가 발견되면 언론들은 흔히 ‘인간 승리’라는 관용구를 들먹이며 온갖 미사여구로 그 장애극복담을 큼지막하게 보도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장애 극복담을 마주하게 되는 장애우 당사자들의 시각은 복잡 미묘해 진다.

  그 사람이 걸었던 성공의 길에 또 한편 얼마나 많은 걸림돌이 있었을 것인지 잘 알기 때문에 같은 장애우의 입장에서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음은 물론일 것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또 사회에서 쉽게 거부당하고, 가장기초적인 외출부터 가로막힌 현의시설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사회 지원도 받을 수 없는 현실은 여전한데 ‘저 사람을 보라’고 가리키는 그 손가락 끝이 너무도 아득해 보인다.

  앞서의 이유와 작업상 성공한 장애우들을 비교적 자주 만나게 되는 기자로서는 이제 웬만한 인간승리담에는 쉽게 감동받지 않을 만큼 무뎌졌다. 그런데 이번에 찾아 읽게 된 실로암안과병원 김선태 (57)원목의 인생이력을 보고 나서는 진정으로 경하의 박수를 마음 속으로 보내게 되었다. 열 살의 나이에 전쟁의 포화속에서 부모와 두 눈마저 잃은 소년이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인간 김선태가 걸어온 길은 다른 사람이 쉽게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가 출범 때부터 함께 하면서 운영이사장, 원목실장, 상임이사 등을 두루 역임해온 실로암안과병원(서울 강서구 등촌동 소재)은 꽤나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 병원이다. 백내장, 녹내장 등 여러 이유로 시각에 장애를 갖게 된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무료로 치료를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로로 김 목사는 올해 호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를 만나 10여년이 넘게 계속해온 개안수술사업과 굴곡 많았던 그의 인생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 목사는 음성다중방송처럼 영어와 우리말로 번갈아 답하며 활발하고 유쾌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우선 개안수술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데요. 흔히 심봉사가 심청을 만나 눈을 번쩍 뜨듯이 전맹이었던 사람이 수술을 통해 완전히 시력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만.

  “예. 전부 그렇지는 않아요. 녹내장, 백내장, 망막박이 등 때문에 보는 데 불편함이 있었던 사람들이 보다 잘 볼 수 있도록 하는 수술인데, 시각장애우라면 전부 개인수술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시신경이 상하지 않고 살아 있어야 수술이 가능합니다. 각막이식수술도 있지만 각막은 기증을 받지 않으면 쉽게 구할 수 없어서 활발하게 이뤄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아무튼 20만 시각장애우와 5백만 저시력자 가운데 수술만 받으면 빛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숫자가 전체 15~20%나 되는 걸로 추산이 됩니다. 그 가운데 단순히 처치를 잘못해서 시각장애를 갖게 된 경우는 100% 회복이 가능한테 이전에 얼마나 신경이 살아 있었나, 혹은 망막이 어떤 상태였는지에 따라 수술 후에 시력이 1.2도 나오고 0.8도 나오는 등 수술 효과는 여러 가집니다. 대신 부모가 매독 같은 병에 걸려서 아이한테 선천적으로 시각 장애 유전자가 생긴 경우는 치유가 좀 불가능해요.

  암튼 시각장애우의 경우는 다른 재활프로그램도 중요하지만 수술을 해서 볼 수 있는 사람은 빛을 찾는 게 무엇보다 좋겠죠.

 

  결막염인줄 모르고 소변을 눈에 넣어주면 좋다고 해서 그대로 했다가 아예 시력을 읽게 된 사례도 목사님이 목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밖에도 무지와 가난으로 인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실명을 막지 못해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하는 안타까운 사례가 많이 있던가요.

  “예, 특히나 농촌이나 섬지역에 그런 사례가 많아요. 말씀하신 그 결막염이 걸린 아이는 마음에서 무면허로 침놓는 할아버지가 빨개진 눈을 소변으로 계속 씻어주라고 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2,3개월 동안 그렇게 했더니 아이의 눈이 점점 작아지고 말하는 것, 듣는 것에도 장애가 생기게 된 겁니다. 나중에서야 저희 병원을 알게 돼서 저희 의사들이 진료를 해봤더니 시력은 뭐 완전히 상했고 뇌성마비증세까지 오고 있던 거예요. 그리고 또 한 번은 당진에 갔더니 한 가족 11명이 모두 시각장애우여서 마을 사람들이 저주받았다고 손가락질 하는 집이 있었는데, 막상 진찰을 해보니까 3명은 불가능하지만 나머지 8명은 개안수술이 가능한 것으로 밝혀졌어요. 이 밖에도 홍역 후유증이나 농사일 하다가 벼나락 같은 것에 눈이 찔려 상처가 났는데 병원 한 번 가려면 돈도 없고 병원을 찾아가기도 너무 힘이 드니까 그냥 좀 지나면 낫겠지 병원 한 번 가려면 돈도 없고 병원을 찾아가기도 너무 힘이 드니까 그냥 좀 지나면 낫겠지 생각하고 내버려 둬서 실명 직전의 위기까지 간 경우도 너무 많더군요. 서울에 우리 병원 같은 곳이 있다고 해도 선뜻 올라오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저희가 이제 직접 군면 단위까지 찾아가고 있죠.”



  밖에 오다 보니까 ‘움직이는 실로암안과 병원’이라고 쓰여진 큰 대형버스가 있던데 그게 그 때 이용되는 차량인가 봐요.

  “농촌과 섬지역에는 의료진이 크게 부족한 것은 사실인데 문제는 기동성있게 그곳으로 오고 갈 수 있는 차량과 장비가 없다는 것이었죠. 모든 장비를 갖추는데 6억원 가량 들기 때문에 쉽게 시작을 못하고 기금만 조금씩 모아가고 있었는데 다행히 1년 후에 SBS 방송문화재단에서 차량을 기증하고 또 이후에 삼성에서도 대형버스를 기증해줘서 진료실과 수술실, 특수검사실까지 갖춘 ‘움직이는 실로암안과병원’을 운영할 수 있게 됐습니다. 96년 9월부터 전국을 순회하면서 현지에서 무료진료나 개안 수술을 이 본원과 똑같이 실시하고 있어요. 주로 전국 맹학교나 농촌과 섬지역 같은 의료취약지구를 찾아다니죠.”

   이 움직이는 안과병원 진료팀은 국내 뿐만 아니라 중국 연변과 방글라데시, 필리핀에까지 오가며 사랑의 의술을 펼치고 있다. 중국에 갔을 때는 조선족 뿐 아니라 한족 환자들에 대한 진료도 했는데,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본격적인 개안수술사업을 위한 현재 실로암안과센터를 건립 중에 있다고 한다. 보통 이동진료 때는 전문의와 간호사가 8~12명 정도 함께 나가고 있는데 다른 병원의사들의 도움은 받지 않고 있다. 병원 전체 규모상 5명의 의사면 운영이 가능하지만 이동진료 때문에 3명을 더 두고 직원도 2명을 더 채용해서 기민하게 진료에 나서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실로암안과병원은 대단히 의미있는 마음들이 모여서 설립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구체적인 설립 당시의 배경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주세요.

  “맨 처음에 충북대에 이정순 교수님이라고 계시는데 그 분이 아드님의 결혼자금으로 준비했던 돈 중에서 당시로는 큰 돈이 4백50만원을 제가 일하고 있던 맹인선교회에 내놓으셨어요. 청주맹학교 학생들 눈에 하얀 것이 끼어 있는 걸 봤는데 혹시 그것만 제거하면 그 아이들이 다시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셨다는 거예요. 그 돈을 가지고 성심병원 안과 구본술 박사가 개안수술을 시도해서 처음 성공한 것이 최초의 개안수술이었습니다. 그러다 81년에 세계장애우어머니들로 조직된 단체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각장애우들을 돕기 위해서 12월에 자선음악회를 열었었어요. 그 음악회 중간에 개안 수술을 받고 빛을 찾은 소년이 그 소감을 청중들에게 소상하게 얘기했는데 거기 모인 청중들이 큰 감동을 받은 거예요. 고려합섬 장치혁 회장도 그 곳에서 특별한 감동을 받아서 그 다음해에 저와 만나서 개안수술 전문병원을 세우자고 얘기를 했죠. 그래서 한경직 목사님을 중심으로 하고 몇몇 기업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러니까 86년 2월에 드디어 실로암안과병원이 문을 열었습니다. 우선 설립 취지대로 실명위기에 놓인 시각장애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반인들이 무료로 진료와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대답을 듣게 되면 자연히 ‘그럼 운영은 어떻게 하나’하는 의문이 생길 법하다. 당연히 매년 2~3억원 대의 적자가 난다고 한다. 한 번 수술하는데 30만원, 그리고 시력이 더 잘 나오도록 삽입하는 인공 수정체는 25만원 정도 하는데, 여기다 식사비, 입원비를 모두 무료로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자를 보는 것이 이 병원의 설립목적에 맞다며 병원 관계자들은 태평하게 생각한다. 진료비로 들어오는 약간의 수입 외에는 모두 교회나 단체, 개인과 기업들의 후원을 받고, 8명 의사들의 월급도 거의 봉사비 수준에서 지금하면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목사님이 계신 이 사무실이 실로암안과병원과 연결되는 부속시설인 ‘빛의 집’에 있던데요. 이 빛의 집은 또 어떻게 운영되는 시설인가요.

  “지방에 사는 분들의 경우 저희 병원으로 와서 수술을 받고 치료를 받는 동안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고 돈도 없어 곧 다시 집으로 내려가 버리더라구요. 그래서 수술 효과를 제대로 얻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보호자도 같이 이 빛의 집에 거주하면서 충분히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려고 해요. 또 수술을 통해서도 완전히 빛을 찾지 못한 분들은 이곳에서 일정한 재활훈련을 받고 사회에 나가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줄 계획입니다. 그렇지만 아주 최근에 건물이 완공됐기 때문에 아직 개관식도 안해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묘하게도 김 목사는 빛의 집과 이전에도 인연이 있었다. 전쟁통에 부모를 잃은 김 목사는 다른 고아들과 함께 거지 생활도 2년 반 정도 해서 “지금도 장타령은 잘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다 부산 송도에 있는 시각장애아동시설인 ‘빛의 집’에서 한 동안 생활하기도 했는데, 불행히도 그 곳에서의 어린 시절은 쓰라릴 기억밖에 없었다. 당시 시설 선생님들은 주말에 집에 갔다 오면서 선물을 가져오는 학생들만 총애하고 천애고아인 김선태에게는 ‘까불기나 하지 도무지 희망이 없는 놈’이라는 극언을 하며 이유없이 때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산맹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무런 애정이 없는 그곳을 나와 무작정 서울로 올라오게 됐다.



목사님은 일찍이 맹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를 다니신 걸로 아는데, 스스로 선택하신일입니까.

  “제가 맹학교 초등부를 다니면서 점자를 배웠는데, 특히나 저와 같은 고아들은 초중고 12년의 과정을 대부분 학교기숙사에서 보내야 돼요. 그런데 다른 시각장애우들을 봐도 그런 생활이 제 눈에는 암담해보였어요. 세계관이 너무 좁아질 것 같다고 할까, 그래서 일반학교에 가고 싶다는 결심을 밝히니까 저를 늘 도와주셨던 곽안전 선교사님이라고 계세요. 그 분이 도와주시기도 하고 학교 쪽에 계속해서 열심히 사정을 했더니 결국 시험케이스라며 학교에서 입학을 허락해주더군요. 그렇지만 사실 3천명의 학생 중의 시각장애우는 저 혼자였기 때문에 다른 일반학생 중심으로 진행되는 수업을 따라가기가 무척 힘들었어요.

  당연히 칠판에 쓰는 글씨도 볼 수 없고 점자교과서도 없어서 20개나 되는 교과과목을 전부 제 손으로 점자로 찍어서 공부를 했습니다. 아무 친구나 붙잡고 영어사전 찾아달라고 하고, 교과서 읽어달라고 부탁해서 간신히 수업내용을 머리 속에 익혀나갔죠. 늘 한 손에는 가방, 다른 한 손에는 공병우타자기를 들고 다니면서 시험볼 때는 타자기로 답안을 작성했고요. 그래도 숭실 학교가 기독교정신의 바탕위에서 세워진 학교라 그런지 나를 이상하게 대하는 친구는 한 사람도 없었어요. 그런데 미국 유학할 때 가서 봤더니 미국에는 시각장애 특수학교가 전국에 딱 하나만 있을 정도로 모두 통합교육을 받고 있더라구요. 근데 우리 나라는 여러 가지 여건상 아직도 그렇게 분리돼서 살고 있잖아요. 그런 분리 교육을 오랜 동안 받으면 사회에 나와서도 분리된 사회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김 목사가 고등학교 졸업 후에 숭실 대학교에 들어갈 때도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마침 그 때 교육제도가 바뀐데다 시각장애우라는 이유로 대학입학 시험을 치를 자격 기회를 달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마침 문교부에 출입하던 기자들이 이 장면을 사진을 찍어 각 언론마다 대서특필되는 바람에 김 목사는 문교부장관 특명으로 간신히 응시자격을 얻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앞으로 맹인양로원 설립도 희망하고 계신 것으로 입니다만 시각장애 노인들의 생활실태는 어떠한가요.

  “시각장애우들 직업이라는게 대부분 안마사나 점술사같은 일에 한정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 기술도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태반이기 때문에 젊을 때는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었을 지 몰라도 나이가 들면 젊은 사람들도 다 떠나고 정말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오갈 데 없는 시각장애 노인들이 와서 편히 살 수 있는 양로원을 설립하겠다는 것은 오랜 동안 저의 꿈입니다. 저도 15년쯤 뒤에는 그 곳으로 가야할 몸이구요. 양로원에 치과나 내과 병원도 만들어서 치료도 적절히 받을 수 있도록 하고 계속해서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만들어서 편안하게 그 곳에서 살다가 하늘나라로 갈 수 있도록 할 생각입니다.” 물론 또 많은 기금이 필요한 사업이지만 저의 마지막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개안수술 사업이나 그러한 양로원 건립 계획 외에 평소 시각장애우복지 전반에 있어서 개선이 필요하다고 느끼신 부분이 있으십니까.

  제가 어릴 적부터 하나님께 약속하기를 열심히 해서 지도자가 되겠다고 기도했고, 열심히 노력해서 박사학위까지 받았습니다만 사실 학비와 생활비를 구할 때 참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중학교 때부터 어느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는데, 학비는 다른 분들도 도와주셔서 간신히 마련할 수 있었지만 신학대학원 다닐 때까지도 배고픈 고통을 면하기 어려웠죠.

  그리고 교과서 교재나 건강 때문에도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같은 처지의 불우한, 그러나 삶에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자 하는 시각장애 학생들에게 남다른 애정이 갑니다. 그래서 신학생을 포함한 대학생, 외국 유학생들한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죠. 제 손으로 장학금을 전달해서 훌륭한 시각장애우들의 지도자로 커온 사람만 9백명이 넘습니다. 물론 그 돈의 대부분은 뜻있는 여러 분들이 헌금을 통해서 마련된 것이니까 저는 전달자의 역할만 한 것이지만 앞으로도 장학사업은 계속할 겁니다.”

  그러면서 김 목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다른 장애우분들이 사회에서 자신들을 무시한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것을 많이 봐 왔는데,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일단 우리 장애우들부터 인격이나 지식같은 기본적인 소양을 다 갖춰놓아야 그런 시선을 떳떳하게 반박할 수 있다고 봅니다. 노력, 꿈, 용기 이 세 가지 생활자세와 순교한다는 정신을 가지고 한 가지 목적을 놓고 인생을 걸면 반드시 보답을 받게 됩니다. 행복은 자신이 창조하는 거니까.”



  올해 6월호부터 저희 함께걸음은 기사 전체를 녹음해 수록한 소리잡지를 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함께 걸음 10년의 역사에 비춰 볼 때 시각 장애우 분들에게 너무 늦게 다가간 감이 없지 않은데요. 시각장애우로서 평소 ‘정보’에 대한 부분은 어떻게 해소해 오셨고, 일반 매체들에서 시각장애우들을 위해 어떤 점이 개선되어야 할것인지 끝으로 한 말씀 해주시지요.

   “저는 아내가 매일 아침 신문을 읽어주는 것을 듣고 짬짬이 방송 뉴스를 들으면서 정보를 얻어나가고 있습니다. 책도 다른 사람이 잘 읽어줘서 부족하다는 느낌없이 독서욕을 채워가고 있습니다만 다른 시각장애우들도 조간과 석간 신문과 건전하고 좋은 잡지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꼭 읽었으면 좋겠어요. 또 일반적인 철학, 문학서적도 어려움없이 시각장애우들이 구해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점이 아직 많이 부족하죠. 다행히 함께걸음은 그렇게 시각장애우들을 위해서 녹음 서로 받아 볼 수 있다고 하니까 참 반갑네요."

  왜 자신은 개안수술을 받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게 되면 눈을 뜨게 되면 교만해질까봐 두렵고 현재의 상태로도 행복하고 만족하다고 답한다는 김선태 목사. 시각장애우를 위한 재활용품 산업이 발전하게 되면 어떤 것이 개발됐으면 좋겠냐고 묻자 "앞으로는 운전자가 특별히 운전을 하지 않아도 자동운전시스템으로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실어주는 자동차가 개발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게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인터뷰 내내 활달하게 답변하는 김선태 목사를 만나고 나오는 길에는 그 활기와 밝음이 전염되는 듯 했다.

작성자한혜영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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