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이야기] “인생의 고비, 이웃사랑으로 넘겼죠” > 세상, 한 걸음


[사람사는이야기] “인생의 고비, 이웃사랑으로 넘겼죠”

노인들에게 무료로 식사대접하는 한나 사랑촌 사람들

본문

 신약성경 사무엘에 보면  나이 사십에 아들 사무엘을 낳은 여인 한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나는 아들을 얻기 위해 하느님에게 끊임없이 기도를 하고 이웃에게도 선행을 베푼 여인이다. 그런데 성경이 아닌 현실에서도 한나와 같이 이웃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 3년째 무의탁 노인과 장애우, 부랑인들에게 무료로 점심식사를 대접해 오고 있는 ‘한나사랑촌’ 사람들이다.

  매일 아침 아홉시가 되면 어김없이 한나사랑촌의 문을 여는 사람들. 그들은 한나사랑촌의 공동 운영자 허용수(58), 유선녀(52), 유영수(56) 씨다. 점심 식사를 하러 이 곳을 찾아 올 노인들을 맞이하기 위해 아침부터 할 일이 많다. 그 일이란 점심식사 때까지 식사준비를 완료하고, 사랑촌의 방구들을 따뜻하게 덥혀놓고, 몸이 불편한 노인들은 직접 가서 모셔오는 일이다.

  이 중 식사담당은 허용수 씨의 아내 유선녀 씨의 몫이다. 사랑촌을 찾는 노인은 하루 평균 오십 명가량 되는데, 유 씨는 매일같이 이 오십 인분의 밥과 찬을 준비해야 한다. 또 먹고 난 식판과 수저를 설거지 하는 것 역시 유 씨의 몫이어서 유 씨 혼자 그 일을 다 해내기에 여간 벅찬 것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유 씨는 점심준비와 설거지를 다 마친 오후 네시쯤 돼야 겨우 점심식사를 할 수 있다.

  그러면 허용수 씨와 유영수 씨는 그 시간에 무엇을 할까? 유선녀 씨가 식사준비를 하는 동안 허용수 씨와 유영수 씨는 몸이 불편해 사랑촌까지 올 수 없는 노인들을 모시러 간다. 노인들은 연로하다 보니 한 가지 이상의 질환을 갖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치매와 중풍, 관절염 등으로 잘 움직일 수 없는 노인들을 봉고차로 직접 모셔 오는 것이다.

  “노인들을 모시러 집에 가보면 너무 안타까운 일이 많아요. 연탄불을 갈아 주는 사람이 없어 밤새 찬 방에서 주무시다 감기에 걸리거나 몸에 이상이 오는 분들도 계시고, 빨래와 설거지가 쌓여 누가 치워 주기만을 기다리고 계시는 분들도 있구요. 어떻게 그렇게 어둡고 찬 방에서 지내나 싶은데 자식 중에 누구 하나 찾아오지도 않는다고 하더군요. 또 본인도 자식들 신세지기 싫어 하시구요.”

  그런 사정을 알게 된 허용수 씨와 유영수 씨는 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모시러 가고 올 때마다 손수 연탄불도 갈아드리고, 설거지와 청소도 해드리는 등 궂은 일을 처리한다. 또 잔병이 많은 노인들을 위해 물리치료기를 직접 구입해 직접 치료도 해 드린다. 병원에서는 십오분 정도 물리치료를 받는 데 치료비가 약값보다 훨씬 비싸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인들은 점심식사 후에도 사랑촌에 계속 남아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이런 저런 얘기도 나누고 물리치료도 받는다.

  그런가하면 칠개월 전 사랑촌에는 낯선 사람들이 찾아왔다. 세상에서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집을 나와 늘 술만 마시고 거리에서 잠을 자는 부랑인들이다. 그렇게 다니다 어딘가에 부딪쳐 성한 곳이라곤 없는 알콜중독자 일곱명이 거리에서 사경을 헤매다 소문을 듣고 찾아 온 것이다. 오자마자 살려달라는 그들에게 사랑촌 사람들은 따뜻한 밥을 주고 치료해주고 잠도 재워주었다. 그렇게 칠 개월 동안 건강도 회복하고 마음도 잡게 돼 지금은 직장까지 얻어 나갔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세상을 비관하고 건강도 나빴던 사람은 이 곳에 나와 다른 노인들에게 봉사하고 있다.

  어떻게 가족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해냈느냐고 묻자 허 씨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들에게 단지 먹이고 재워주기만 한 건 아니에요. 그건 가족들도 다 해 줄 수 있죠. 마음이 아픈 그들에게 제 과거 이야기를 해줬어요. 그리고 제가 밟은 길을 다시 밟지 말라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니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늘 감사하며 살라고 했죠. 그리고 매일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기도만큼 좋은 것은 없어요.”

  이렇게 말하는 허 씨도 그들이 이렇게까지 변할 줄 몰랐다며 자신도 그들의 변화에 크게 감동받았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정말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람만 가지고 이 일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일도 하루 이틀이지, 자기 주머니 털어가면서까지 삼 년 동안이나 이 일을 해 올 수 있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남들처럼 자식 다 키우고 이제 호강하면서 살아도 좋을 그런 나이에 무보수로 식사까지 걸러 가면서 이 일을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성도 싶다. 지금부터 이 세 사람이 어떻게 해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 들어 보자.

  허용수 씨는 강원도 영월군 쌍용리가 고향이다. 친가가 동네에서 소문난 갑부였지만, 노름을 좋아하는 아버지 덕분에 그이는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저 기억나는 건 노름 하는 아버지와 그 때문에 늘 어머니와 싸우는 것이 보기 싫어 자주 집을 나갔었다고만 말했다.

  그러다 그이 나이가 이십대 초반쯤 되자, 그이는 결혼을 했다. 상대는 강원도 정선에 사는 유선녀 씨. 친척의 소개로 중매로 결혼한 것이다. 유 씨는 소문난 부잣집 외동딸로 허 씨에게 시집오기 전까지는 곱게만 자랐었다. 그러다 방랑끼가 있는 허 씨를 만나 오랜 세월 혼자 독수공방 하면서 보내야 했다. 특히 허 씨는 집안살림에 나몰라라 해서 시부모를 모시면서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그 중 가장 큰 고생은 맘고생이었다. 허 씨가 군대에 가고 나서 어떤 여자를 알게 됐는데, 그 후 한동안 바람을 피웠던 것이다. 또 나쁜 친구의 꼬임으로 도박에 손을 대 팔 일만에 논 열마지기를 다 날려 버렸다. 허 씨도 부인 볼 면목이 없었는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방안에 누워서는 죽어버리겠다고 며칠째 밥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남편에게 그 당시 유 씨가 할 수 있는 말은 “여보, 내가 다 해결할테니 죽지만 말아줘요”였다고 한다. 결국 이 사실은 시어머니도 알게되고, 시어머니는 어디서 돈 삼만원을 구해와 “이 돈 가지고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노름을 해라. 그리고 다시는 노름 하지 말아라”는 말을 남기셨다. 어머니의 역설적인 말을 듣고 그 의중을 이해한 허 씨는 그 이후 정말 도박에서 손을 떼게 됐다.

  그리고 나서 허 씨는 새로 일을 시작했다. 인도네시아정부와 로비를 해서 어업권을 따 새우잡이를 한 것인데, 이 일에 허 씨는 꽤 많은 돈을 투자를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회사는 유령회사였다. 허 씨는 이 년간 투자한 돈을 졸지에 또 모두 날려 버렸다.

  “그 때는 열심히 일할 생각은 안하고 어디 일확천금 벌 데 없나, 이렇게 뜬구름만 쫒아 다녔던 것 같아요. 그렇게 다 잃고 나니까 그제서야 힘들더라도 땀흘리면서 일하며 살아야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 후 허용수 씨는 그런 자신의 의지를 모질게 시험해보기 위해 강원도에 있는 광산에 들어갔다.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는 탄광안에서 매캐한 가스냄새와 십미터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두움 속에서 수없이 떨기도 했지만, 그이는 정말 이를 악물고 일했다. 처음엔 몸이 허약해 보인다고 반대했던 노무과장도 그이의 성실함과 지독함에 두손 두발 다 들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곳에서 오래 일할 수는 없었다. 한 일 년쯤 탄광근처에서 생활해 보니 아이들의 건강과 교육에 좋지 않아 그이는 부인 유선녀 씨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인천에 올라가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이도 그 곳에서 한 육 개월쯤 더 일한 후 인천으로 올라왔다.

  시골보다는 도시에서 사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인천에 올라오기는 했지만 아는 사람도 없고 일자리도 쉽게 구해지지 않아 허용수 씨는 한동안 무척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된 친구 소개로 대우중공업에서 하청을 받은 건설 공장에 취직을 하게 됐다.

  몇 달 동안 못한 일까지 만회하기 위해 그이는 열심히 일했다. 낮에는 땅을 파고 밤에는 경비를 서는 등 오로지 일만 했다. 어느 날은 일하다 사고로 다리가 부러진 적도 있었는데, 그때도 그이는 다리를 절면서까지 출근을 했다. 그렇게 해야만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과 아내를 굶기지 않고 먹여 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곳에서도 그의 그런 성실함이 인정을 받아 그이는 만수동에 있는 대우중공업에 취업을 해 거기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이십 년 동안을 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정말 미련을 떨었죠. 마음이 잡히지 않으니까 일만 계속했던 거예요.

  하여튼 덕분에 저는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됐죠. 제 손을 거치면 그 어떤 고장난 기계도 다 고쳐서 나갔을 정도로요. 그리고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을 다 가르치고 결혼까지 시켰어요.”

  그러나 이런 행복감은 오래 가지 못하고, 또 다시 그이에게 크나큰 시련이 닥쳐왔다. 조금만 일을 해도 몸이 쉽게 피곤해 지고, 변을 볼 때면 피가 묻어 나오는 것이었다. 그이는 곧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본 결과 췌장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미 암이 퍼져 수술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젠 돈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

  순간 허용수 씨의 뇌리에는 지나간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십대는 헛된 꿈을 쫓다가 재산을 다 날리고, 삼십대와 사십대엔 일만했고 이제 좀 쉬어보려고 했건만 그에겐 죽음이 먼저 찾아 온 것이다. 지금 죽기엔 너무나 억울했다.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길래 이런 시련이 다가오는 걸까?

  허용수 씨는 밤낮없이 기도만 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몰라도 다시 살 수만 있다면 하느님이 하라는 건 뭐든지 하겠다고. 그러다 문득 그는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것은 자신만을 위한 삶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이는 결심했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이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다고. 예수님이 행했던 것처럼 가진 것 없고 병든 이웃을 위해 남은 인생 다 바치겠다고,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이의 몸에 퍼져 있던 암세포는 꼭 일 년만에 사라졌다. 그리고 약속한대로 그이는 그 때부터 철저한 하느님의 종이 되었다. 매일같이 철야예배에 나가고 그 동안 번 돈을 교회에 헌금하고, 교회에서 여는 모임에는 다 참여했다. 그래서 그이는 교회에서 주는 상까지 받고 장로라는 직함까지 얻게 됐다.

  몸과 마음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그이는 다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전부터 사업을 한 번 해오고 싶었는데, 마침 농산물을 현지에서 직접 떼다 소매점에 파는 공판장일을 하게 됐다.

  그러나 공판장일을 시작한지 채 이 년이 못돼 이번에는 수입농산물이 개방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 충격으로 그이는 한 일년간을 끙끙 앓으면서 방안에만 누워 지냈다. 자연히 교회에도 잘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그이를 그렇게 칭찬하던 교회마저도 그이에게 신앙심이 부족하느니 교회에 충성을 하지 않는다는 등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한 그이를 비난하고 나섰다. 다른 곳은 몰라도 자신의 처지를 뻔히 아는 교회마저 자신을 그렇게 매도하고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때 그이는 교회의 세속화된 모습을 보고서 크게 실망을 하고 이후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됐다. “교회에서도 헌금 잘 내고, 모임 잘 나오는 성도를 좋아하지 돈 없고 어려운 사람은 받아주지 않는구나. 이것은 예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길이 아니다.”

  그렇게 다시 방황하게 된 허용수 씨에게 얼마 안 있어 또 한번의 고비가 찾아왔다. 이번엔 중풍이 왔다. 그것도 네 번씩이나. 그 때문에 허 씨는 한동안 완전히 누워 생활하게 됐다.

  그리고 그에게 또 한 번의 깨달음이 있었다. 믿음과 사랑이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한다는 것은 물질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내 예수님이 행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된 허용수 씨는 곧장 동인천으로 나갔다. 당시 그이는 일 관계로 동인천을 여러 번 지나갔는데, 그 때마다 역 근처에서 오갈데 없는 노인들과 걸인들이 하루종일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서 있던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났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이는 가지고 있던 택시비를 그들에게 빵이라도 사먹으라고 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후 허 씨는 동인천에 가게를 하나 얻어 무의탁 노인들에게 점심이라도 대접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아내 유선녀 씨와 조카 유영수 목사에게 이 뜻을 알렸다. 평소 하느님의 일을 해 오고 있던 이들 역시 그의 뜻에 동의했다.

  유영수 목사는 몇 년 전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었다. 아내가 없는 사람은 교회에서 정식으로 목회를 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목사인데도 목회를 열지 못했던 유 목사는 불우한 노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 일에 쉽게 동의했던 것이다. 또 죽은 아내 역시 양로원을 세워 노인들을 돌보는 것이 꿈이라고 평소 말해 왔었기 때문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 이 일을 맡기시려고 그 동안 그런 시련을 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이 일을 시작하려고 하자 마자 여기 저기 뜻이 맞는 사람들을 세워 주셨거든요. 또 유 목사님이 강원도 태백에 있는 모 기도원에서 목회를 하던 시절, 사업에 실패하고 기도원에 와 지내던 사업가가 한 분 있었는데, 그 분이 어떻게 알고 연락을 해 와 지금까지 우리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내놓으신 후원금은 사랑촌을 이끌어 가는데 아주 큰 보탬이 되고 있습니다.”

  그 사업가가 누구냐고 묻자 허용수 씨는 그 분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을 원치 않아 한다며 다만 서울에서 모 식품회사를 운영한다고만 말해줬다.

  이렇게 준비가 착착 진행되던 어느 날 인천 동구청에서 전화가 왔다. 동인천에는 복지재단도 있고, 성원의 집이라는 복지시설도 있으니 복지가 낙후돼 있는 송림동에서 일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송림동에서 그 일을 한다면, 전에 송림5동 사무소로 쓰였던 건물을 빌려주겠다고 제안을 해 와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이렇게 멀고도 험한 고비를 거쳐 문을 열게 된 것이 바로 지금의 ‘한나사랑촌’이다.

  결국 한나사랑촌의 설립 목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꼭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더라도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고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수요일과 금요일 점심식사 이후 사랑촌에서 열리는 예배에 참석을 한다. “찬송을 크게 부르면 노인들에게 오는 치매도 예방할 수 있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죽은 후에도 하늘 나라에 가서 편히 살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니냐”며 원래는 무신론자였는데 지금은 예배에 꼭 참여한다는 할머니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유 목사도 노인들이 그 동안 살아 온 삶을 정리하고 다음 세상을 준비할 수 있는 내용으로 설교를 준비했다. 그리고 이러한 선교방법은 노인들에게 아주 호응이 좋았다.

  “보통 교회에서는 예수 믿고 선행을 베풀라고 하지만 우리같은 노인들이 가면 좋아하지도 않아요. 근데 이 곳은 우리에게 음식도 주고, 치료도 해주고 기도도 해주지. 내가 잘은 몰라도 아마 이런 곳이 천국 일거야.”

  그러나 요즘같이 아이엠에프 등으로 나라 사정이 어려울 때는 한나사랑촌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허용수 씨는 이 일을 시작한 지 어느덧 삼 년째에 접어 들었는데 가장 어려운 때가 바로 요즘이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지난 해 겨울엔 사랑촌을 운영하기가 너무 힘들어 문을 닫을 생각까지 했었다고 한다.

  “전에는 한 달 연료비로 십오만 원이면 족했는데 기름값이 올라 이제는 딱 두 배가 드는 거예요. 기름뿐만이 아니죠. 국수값, 설탕값 안오른 게 없죠. 그래서 두 달 전에 사랑촌 문을 닫을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노인들이 밥 안줘도 괜찮으니까 문을 닫지는 말아달라고 우시면서 집으로 돌아가시는 거예요. 그때 저희들도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그저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만 드렸죠.”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을까? 며칠 후 허용수 씨의 막내아들이 찾아와 “아버지 힘 내세요”라며 돈 육십만원을 허용수 씨 앞에 내놓았던 것이다. 그 때 그들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가 이 일을 하는 것은 영리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어려운 사람들의 이웃이 되기 위해 이 일을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돈이 없다고 해도 이 일을 그만 둬서는 안된다.’

  이렇게 생각을 가다듬은 그들은 이튿날 그 돈으로 다시 국수를 사 와 노인들에게 점심식사를 대접했다. 그리고 사랑촌은 지금도 노인들에게 점심을 대접하면서 갈 곳 없는 노인들의 보금자리임을 자처하고 있다.

  유난히 많았던 삶의 고비에도 불구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를 잘 넘긴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삶이란 자물쇠는 사랑이란 열쇠로만 열릴 수 있다는 것을.

작성자노윤미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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