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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이야기1] “이제 믿음이 아빠라고 불러주세요”

70년대 인기가수였던 오상식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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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통계에 따르면 장애우 열 명 중 여덟 명은 중도에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이라고 한다.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산업재해, 공해, 교통사고 때문에 전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병으로 장애우가 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중도에 장애를 갖게 되는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혹은 어려서 장애를 갖게 되는 경우보다 훨씬 적응과정이 길고 정신적 고통도 대단하다. 그래서 중도장애를 입은 사람들은 병원에서 퇴원할 때쯤 정신적인 질병을 가지고 퇴원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잘 넘긴 사람들은 오히려 전보다 더 성숙된 마음가짐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과 같이 어려움을 겪는 이웃에게 관심을가지고 돌보는 일을 나서서 하기도한다. 지금부터 소개하려는 가수 오상식 씨가 바로 그런 경우다.

  올해 나이 마흔아홉인 오상식씨는 유복한 가정의 삼남 오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많은 형제 중 막내로 부모님께 온갖 귀여움을 받으며 자란 탓에 부모님이 용돈을 안주면 부모님한테도 욕을 하며 대드는 버릇없는 아이이기도 했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동네에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상록수라는 불량학생 조직을 만들어 학생들에게서 돈을 빼앗기도 했다.

  그러다 엠비씨에서 성우로 일하는 친구의 소개로 그이는 작곡가 박춘석 씨를 소개받고 노래공부를 시작했다. 얼마 안있어 오아시스레코드에서 주최하는 전국 신인가수 선발대회에 참가해 일등을 하고 그이는 드디어 가수가 됐다.

  그 때 당시에는 비틀즈나 엘비스 프레슬리같은 외국가수의 노래와 또 그런 팝송을 부르는 가수가 인기가 있었던 때라 그이도 대중가수가 아닌 팝재즈가수로서 친구들 다섯명과 함께 화이브 핑거스라는 그룹사운드를 만들어서 미군부대에 공연을 다녔다. 반응이 좋다 솔로 가수로 독립해 화니보이라는 예명으로 일반극장쇼 무대에서도 서게 됐다.

  당시 인기절정이었던 남진, 나훈아 같은 가수들과 함께 공연도 다니면서 그이에게도 소위 여성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수에게는 팬이 얼마나 많은가가 인기의 척도였는데 잘생긴 용모에 춤 잘추고 노래도 잘 하는 그이에게 여성팬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여성팬 중에는 그이 주변을 맴돌면서 시계며 반지, 무대의상 등을 사주고 용돈을 대주는 경우도 있었다. 또 하루저녁 무대에 서고 받는 출연료도 꽤 돼 그이는 향락과 사치에 빠져 그야말로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그이 말로는 그 때 당시 속옷도 외제가 아니면 입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이는 마음에 드는 아가씨와 결혼도 했다.

  그러던 그이에게 첫 번째 시련이 다가왔다. 팔십년대에 접어들면서 계엄령이 선포되고 깡패들을 검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검거된 깡패는 악명높기로 유명한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는데 잘 알다시피 삼청교육대란 곳은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당해 살아나오는 이가 거의 없다는 얘기가 들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이도 삼청교육대에 잡혀가게 된 것이다.

  “그 날도 강동구에 있는 강동캬바레에 친한 친구가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어 친구를 만나러 갔죠. 갑자기 들이닥친 형사가 다짜고짜로 저를 연행해 파출소로 데려가는 거예요. 처음엔 제 옷차림도 화려하고 카바레 앞에 서있다 보니 제비족으로 오해한 거지 내 신원을 알게 되면 곧 풀려나겠지 했는데, 어떤 놈이 절 고발해 잡아가는 거라고 하더군요. 정보가 새어나가 진짜 불량배들은 다 도망가고 저처럼 한 때 나쁜 짓을 했던 사람들이 억울하게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셈이죠.”

  하여간 그이는 심사결과 사주 훈련 후 육개월 근로봉사라는 판정을 받고 경기도 문산에 있는 제 일사단으로 끌려가 그야말로 막노동보다 더 심한 일을 사주 동안 혹독하게 하고서 모범수로 풀려나게 됐다.

  사회에 나온 그이는 다시 가수활동을 재개했다. 당시 일본에서 건너온 스탠드바 문화가 전국에 퍼져 가수들에게는 출연업소가 늘어나 도시, 지방 할 것 없이 하루에 일곱여덟군데씩 뛰어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이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업소에 나가기 위해 일어서려는데 오른쪽 발끝이 너무 앞아 발을 디딜 수가 없어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무대에 한 번 서면 보통 이십분 가량을 격렬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그 때 혹시 다리를 삐지 않았나 해서 그이는 바로 침술원에 가 보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오른쪽 엄지발가락 끝이 새까맣게 썩어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부랴부랴 큰 병원에 가보았더니 그 당시에는 듣도 보도 못한 ‘버거씨병’에 걸렸다는 진단이 나왔다.

  의사말에 따르면 버거씨병이란 발병원인이 담배인데 담배 니코틴이 혈관을 막아 막힌 부분이 썩어 들어가는 병이라고 한다. 이 병은 팔다리에만 퍼지는데 발병하면 달리 치료방법이 없고 삼년마다 재발해서 나중엔 팔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무서운 병이다.

  오상식 씨는 처음 의사의 말을 듣고 ‘오진이겠지. 혹 삼청교육대에서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 것이겠지’ 하고는 다시 큰 병원으로 가 보았으나 한결같이 똑같은 진단이 나왔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해보면 낫겠지 하는 생각에 대학병원에 입원을 했다. 그러나 아무런 차도가 없고 의사는 다리가 더 썩어 들어가기 전에 절단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그이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안됩니다. 다리를 절단하고 병신이 되어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습니다.”

  그이는 수술을 거부하고 퇴원을 해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으로 내려가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웃 중에 누가 고양이 고기를 삶아서 먹으면 낫는다고 해서 고양이를 삶아 먹기도 하고 인분을 끓여서 그 김을 쐬면 뼈 속에 박힌 고름을 빨아들여 낫는다고 하면 그렇게도 했다. 또 형수가 사람뼈를 먹고 바르면 낫는다고 해 장의사하는 친척에게 부탁을 해 뼈를 구해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좋다는 것은 다 해보았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그이의 병은 계속 진행돼 나중에는 통증 때문에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황이 되기 도 했다. “다리힘줄이 썩어 들어가는 통증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죠. 사람들은 암에 걸리면 그 고통이 심하다고 하지만 이 병의 통증에 비하면 십분의 일도 안될 겁니다.”

  그이는 통증 때문에 밤마다 한숨도 못자고 비명만 질렀다. 그러다 보니 눈은 충혈되고 살도 몰라보게 빠져서 그야말로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가족들 역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그이를 그냥 쳐다봐야 하는 안타까움에 나중에는 “단 하루를 살아도 고통없이 살아야지, 어떻게 그 엄청난 고통을 참아내며 살 수 있냐”며 다리 절단을 권유했다.

  그 당이 그이는 가족들의 그 말이 너무 야속했다. 그래서 “당신들은 자기 일이 아니니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다리를 절단하고는 살 수 없다. 앞으로 형이고 누나고 나한테 한 번만 더 다리를 절단하자고 하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이가 통증을 못이겨 정신을 잃었을 때 그이를 붙잡고 강제로 차에 태워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그리고 그이가 깨어났을 땐 이미 그이의 오른쪽 다리 무릎과 하퇴부가 절단돼 있었다. 너무나도 기가 막혔다. 그이는 “내다리, 내다리”하며 온 병원이 떠나가게 소리치면서 벽에다 머리를 들이받고 머리칼을 쥐어 뜯으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의사와 간호사의 치료도 모두 거부하고 손에 잡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던지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 때 그이는 처음으로 자살을 결심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동정어린 눈초리로 그이를 바라보며 병신이라고 업신여기며 무시하고 놀릴 것을 생각하니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고 한다. 그렇게 살아서 뭐하나 싶어 차라리 약을 먹고 죽을까 목을 매어볼까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할까 등등 많은 생각을 해보았지만 다리가 없다 보니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왼쪽다리마저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시 엄지발가락과 새끼발가락 절단 수술을 했다. 수술한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기 위해 병원에서는 진통제를 주지 않아 통증은 더욱 심했다. 그이는 휠체어를 타고 화장실에 갔다 오다가 간호실에 들려 오른쪽 다리도 다 낫지 않았는데 왼쪽마저 절단하면 어떻게 하냐며 통증을 덜 수 있는 조취를 취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간호사가 하는 말이 “뭐 어떻게 되긴요, 앉은뱅이 되는거지”라며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이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분노가 왈칵 치솟았다고 한다. 눈에 핏발이 서며 “뭐 앉은뱅이가 돼? 야, 아무리 앉은뱅이가 된다고 그래도 그렇지. 간호사가 어떻게 그런 말을 환자한테 함부로 할 수가 있어. 내가 앉은뱅이가 되면 너는 참 좋겠다”라며 그이 역시 간호사에게 욕설을 퍼붓고 휠체어를 타고 계속 따라다녔다. 나중엔 그 간호사도 그이의 저주어린 욕설에 질려 “내가 말을 심하게 했고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결국 그이는 병원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히고 독종이라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아무도 그이를 상대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정형외과 과장님이 그이를 조용한 곳으로 불러서 하는 말이 “오상식 씨, 비록 다른 사람들 보다는 못하겠지만 치료를 받고 의족을 착용하면 얼마든지 걸을 수가 있고 걷는 연습만 잘하면 의족인 것이 표가 나지 않게 걸을 수가 있으니 치료 받으시죠. 새로운 삶은 찾아서 살아보세요. 가수생활이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할 일이 많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고 우리 서로가 병원에 있는동안 잘 지내봅시다”라고 충고를 했다.

  그러나 그이는 다시 걸을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평소에 의족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본 적이 없고 의족을 착용하고 걷는 사람을 본 적도 없으니 믿기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서 그이는 의사의 설득에게 불구하고 치료를 받지 않다가 어차피 죽을 거 의사 말 한 번 믿어보고 따르는 것도 손해볼 거 없겠다 싶어 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얼마 후 퇴원할 수 있게 되었다.

  퇴원하는 날 가족들이 그이를 데리러 봉고차를 몰고 왔다. 차 안에서 큰 형님과 작은 형수, 누나들이 그이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모두 그이를 책임질수 없다며 서로 데려가지 않겠다고 옥신각신 다투는데 옆에서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는 그이는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배신감을 느꼈다. ‘결국 이 세상에 나 혼자 밖에 없구나’하는 생각을 뼈저리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장애를 극복하고 오뚝이처럼 일어서야겠다는 결심을 독하게 했다.

  그이는 누구한테도 신세를 지지 않을테니 걱정말라고 하고 시골로 내려갔다. 거기서 한 육개월동안 걷는 연습만 했다. 처음에는 목발을 짚고 걷다가 나중에는 클러치라는 지팡이를 짚고 걷다가 육개월 후에는 의사 말처럼 아무 것도 짚지 않고 자유자재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이는 다시 서울에 올라 왔다. 그이가 전처럼 춤을 추며 무대에 설 수 없기 때문에 후배 가수를 무대에 올리고 여자 무용수도 네 명을 모집해 그이는 팀단장과 매니저로서 다시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다. 전에 모아두었던 돈으로 강동구 천호동에 사십평 상당의 기획 사무실도 차렸다. 어느 정도 이름과 얼굴이 알려졌었기 때문이 그이는 직접 무대에 서지 않아도 그럭저럭 팀을 운영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물론 무용단 출신인 아내의 도움도 컸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전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연예계 선후배동료들을 만났을 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 사람들이 먼저 ‘참 안됐다, 불쌍하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냐’고 동정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나를 위로해주려고 애쓰는 거예요. 그리고 병신이란 말을 흔히 쓰는 데가 연예계인데 나랑 대화하다가 병신소리를 했다가는 ‘아차, 실수했구나’라면서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할 때 괴롭고 견디기 힘들었어요.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사람들이 나를 옛날처럼 대해주면 좋을텐데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렇지만 일일이 대놓고 그러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이는 속으로만 ‘나는 신체적으로 장애가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너희들과 다를 게 없다’는 말을 되씹으며 그럴수록 더 열심히 일했다.

  삼년 후 어김없이 왼쪽다리와 양손에까지 병이 재발했다. 그런데 이번에 또 수술을 하면 그 간호사 말대로 정말 앉은뱅이가 되겠구나 싶어 수술하기까지 마음의 갈등이 컸다. 게다가 당시 그이의 아내는 만삭의 몸이었다. 아내가 가여웠다. ‘나 같은 사람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살 수 있었을텐데 그 동안은 의족이라도 착용하고 다닐 수 있었는데 앞으로는 무얼 해서 아내와 아이를 먹여 살릴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적으로 아내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내에게 아이를 지우고 새출발하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아내는 자기 혼자라도 키울테니 걱정 말라고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며 그 무거운 몸으로 그이의 팔다리 치료와 병수발은 물론 생활비 마련까지 하느라 생고생을 했다. 진통제를 살 돈이 없어 여기 저기 뛰어다녔고 누님집으로 약값을 얻으러 갔다가 마음에 상처를 받아 돌아와서는 남몰래 울기도 했다. 그러나 그이 역시 고통에 시달리다 보니 아내의 고생에 대해 어떤 것도 해줄 수 없었다.

  어찌어찌 마련한 돈으로 결국 그이는 다섯 번째 수술을 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아내는 아이를 낳았다. 건강한 사내아이였다. 그러나 병원비도 지불할 능력이 없고, 생활비를 벌어야 하기 때문에 그이와 아내는 많은 고민 끝이 자식을 포기하기로 했다. 결국 입양기관을 통해 아이를 입양시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도 홀연히 떠나가 버렸다.

  그 후 이년간 그이는 무력감과 허탈감에 바깥세상과 완전히 소식을 끊고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왔다. 그이 사정을 알고 목사님 한 분도 모시고 왔는데, 기독교 신자가 아닌 그로서는 이들의 방문이 그리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그이를 처음 분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고맙고, 또 미안해서 어쩔 수 없이 그이도 예배드리는 흉내라도 내게 되었고 그이 역시 차츰 신의 존재를 진심으로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이는 찬양음반을 내기로 결심했다. 그 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자포자기하고 있었지만 노래를 통해 복음도 전할 수 있고 이름도 꽤 알려져 있으니 음반을 내면 뭔가 될 것 같았다. 또 주위에서도 한 번 내보라고 부추겨 그이는 구십년 팔월 ‘오상식 은혜의찬양 일집’ 음반을 냈다.

  그리고 어느 교회 집회에 초청을 받아 노래를 부르러 갔다. 출연진을 보니 듣도 보도 못한 복음가수들 뿐이었다. 그이는 내가 몸이 이렇게 돼 노래를 못 불러도 저 분들보다 못하지 않겠지 하는 생각에 이전의 가수로서의 경력만 굳게 믿고 아무 준비도 없이 집회에 참석을 했다.

  사회자의 소개가 있은 후 휠체어를 타고 무대에 나가 ‘주여 나의 병든 몸을’ 이라는 찬양을 부르려는데 갑자기 입술이 바싹 마르고 몸이 몹시 떨려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겨우 입을 떼기는 했지만 숨쉬기가 거북해 음정 박자 모두 엉망으로 완전히 죽을 쑤고 무대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그이는 연예계 생활 삼십년 하면서 그런 망신은 처음 당해 보았다고 한다. 그 이후 그이는 찬양사역자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이의 신앙은 예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자라나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살 것인지도 정하게 됐다.

  “제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저와 비슷한 환경에 처한 장애우들을 여러 명 보았어요. 옛말에 긴 병에 효자없다고, 저처럼 삼 년마다 계속해서 입원하다 보니까 병간호하던 부모형제와 가족들이 다 지켜서 떠나 오갈 데 가 없는 장애우들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니까 ‘그래, 장애우선교가 나의 사명이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장애우들과 한번 살아보자’ 하는 결심을 하게 됐죠”

  그이는 아는 집사님과 함께 빛과 사랑이라는 장애우 선교회를 발족하고 장애우공동체도 만들었다. 방 세 개가 딸린 집에 월세를 얻어서 장애우 열두 명과 함께 믿음생활을 했다. 월세 육십만원과 생활비는 그이가 집회에 나가 간증하고 찬양하면서 번 돈으로 꾸려 나갔다. 그러다가 아이엠에프여파로 생활이 어려워지니까 작년 시월 과천에 있는 허름한 비닐하우스로 이사했다.

  그이가 딱하게 산다는 소식을 듣고 후배가수 설운도 씨가 그이를 돕기 위해 지난 삼월 ‘사랑의 리퀘스트’란 프로에 출연했다. 이 때 설운도 씨는 그이가 직접 작곡한 노래 ‘작은 행복’이라는 노래를 오 씨에게 바쳤고, 그 노래는 지금 사랑의 리퀘스트 주제가로 사용되고 있다.

  사랑의 리퀘스트에 출연한 후 후원금을 받을 무렵 지방에 사는 한 장애우로부터 전화 연락이 왔다. 날 때부터 한 쪽 팔이 없고 그나마 한 쪽 팔에는 손가락도 세 개뿐인 아이를 누가 낳자 마자 버렸다는 것이다. 오 씨는 곧장 지방에 내려가 병원을 통해 아이 친부모를 찾을 수 있었다. 그이는 아이의 친부모에게 우리가 생활비도 대주고 취직도 시켜줄테니 아이를 버리지 말라고 간청을 했다. 그러나 친부모는 끝내 그럴 수 없다고 해서 결국 그이가 아이를 데려다 그이 호적에 올렸다. 그 아이의 이름은 ‘믿음’이다.

  그이는 앞으로 장애가 있는 아이를 두 명 더 입양해 사랑이, 희망이라고 이름지을 예정이라고 한다. 아마도 그이가 키우지 못하고 입양 보낸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하나님께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받아들일 생각인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애를 갖게 되면 많은 것을 잃게 된다고 생각한다. 오상식 씨 역시 열광하는 팬들과 친자식, 아내를 차례로 잃었다. 그러나 그이는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그리고 장애우지만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장애에 대해 쉽게 말할수 없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오상식 씨를 비롯한 많은 장애우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나도 버거운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작성자노윤미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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