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빈민장애우 심의섭<3> > 세상, 한 걸음


[사람사는 이야기]빈민장애우 심의섭<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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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무려 다섯 번에 걸친 가출은 그를 좌절하게 만든다. 빈털터리로 다시 거리에 선 심의섭씨. 그는 그럼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오늘을 산다.

 하던 각이 있어서인지 벌이는 괜찮았다. 그는 하루 수입으로 평균 만오천원에서 이만원을 벌어서 혜원이가 사달라는 것도 사주고 살림에도 보탰다. 무엇보다 그 수입 덕분으로 그가 걸인 생활을 한 몇 달 동안 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어 그는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이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아내가 집을 나갔다 어느 날이었다. 그가 평상시처럼 동냥을 나가기 위해 집을 나서자 아내가 아프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많이 아프냐, 약을 지어올까?"라고 물었다. 아내는 "이미 약을 사먹어서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래, 그렇다면 나가서 약값이라도 벌어와야 겠군." 그는 웃으면서 집을 나섰다.
 저녁에 돌아와서 보니 혜원이는 울고 있고 방안에 편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아내의 편지내용은 이랬다. "인생은 연극이다. 세상은 무대고, 눈물이 앞을 가려서 떠날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떠납니다. 당신 나를 원망하고 저주해도 좋습니다. 이다음에 혜원이가 못된 엄마가 나를 버렸다고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 당신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서, 내가 없으면 당신이 동냥을 안 나가도 될 텐데, 내가 있음으로 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애쓰는 모습을 저는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사람이라도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저는 떠납니다. 혜원이는 당신이 알아서 처리하시고 아무쪼록 행복하십시오."
 그의 가슴에 있던 무엇인가가 빠져나간 듯해 그는 진한 허탈감을 맛보아야 했다. 그렇다고 낙심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아내를 찾기 위해 사방으로 수소문했다.
 때는 십일월 달이었다. 거리에 부는 바람은 그를 더 춥게 했다. 그는 간간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오던 아내의 몇 안 되는 친구들을 먼저 찾아 나섰다. 그러나 찾느라고 애쓴 보람도 없이 아내의 친구들은 한결같이 아내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잡아뗐다.
 
아내와 안내양 생활을 같이 했던 미스리라는 여자를 만나서야 그는 겨우 아내가 어디로 갔는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가 매달리자 여자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걔 성격이 원래 그래요. 예전에도 기도원으로 가버리곤 했어요. 지금도 틀림없이 기도원에 가 있을 거예요. 염려 마세요. 며칠 지나면 제풀에 지쳐서 돌아올 테니까요."
 여자의 말을 듣고 나자 그는 짚히는 데가 있어 부산 큰처남 집에 전화를 걸었다. 역시 아내는 부산에 있었다. 전화를 받은 처남이 화를 벌컥 내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 혜원이 엄마 여기 들렀다가 지금 기도원에 가 있어. 도대체 자네 사람이 왜 그래. 결혼할 때는 전세방 얻는다고 큰소리치더니 겨우 사글세방이나 얻고 말야. 혜원이 엄마 탓할 거 없어. 다 자네 잘못이지. 그렇게 고생하는데 누군들 집 떠날 마음이 안 생기겠어. 이제 어떡할 거야? 살 자신 없으면 일찌감치 갈라서라구."
 그가 말을 받았다. "처남, 부부싸움 안 하는 부부가 어딨어? 살다보면 이런 일도 생기는 거구 저런 일도 생기는 거지. 그걸 가지고 갈라서야 한다면 이 세상 부부는 다 갈라서야 하겠네. 알았어. 내가 잘못한 게 많은 줄은 알아. 그러니 어떡하겠어? 혜원이도 있는데, 더 말하면 나도 속이 상하니까 아무 말 말고 혜원이 엄마 올려보내. 알았지."
 처남이 힘을 썼는지 아내는 가출한지 정확하게 일주일만에 다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온 아내에게 단 한마디의 싫은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아내가 가출할 수밖에 없었던 일차적인 원인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가출 소동이 있은 이 해말, 그는 아내도 달랠 겸 사는데 필요한 정보도 얻을 요령으로 방송을 통해 알게 된, 장애우 동료들이 많이 모이는 상봉동 신망애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동냥을 얻으러 다니는 것보다는 간단한 생필품을 파는 게 더 벌이가 괜찮다는 정보를 접하고 주저 없이 그 일을 시작했다. 일명 수세미장사로 나선 것이다. 이때가 팔십팔년 초였다.
 그는 수세미, 좀약, 고무장갑, 목욕타올 등을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오백원짜리는 천원을 받는 식으로 곱장사로 물건을 팔았다. 어차피 구걸을 하기는 마찬가지였고 가정집은 경계가 심해 문을 잘 열어주지 않아 애를 먹었지만 그래도 물건을 판다는 자부심 때문에 그는 떳떳하게 벨을 누를 수 있었다. 그는 다리가 부르트게 서울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그렇게 해서 일주일에 삼사일 장사를 나가 하루 순 수입으로 이만원에서 이만오천원을 벌 수 있었다.
 그가 이렇게 장사에 열중하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나절 아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당신 지금 하는 일 당장 집어치우고 신학공부를 하는 게 좋겠어요." 그는 아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영문을 몰라 멀뚱히 아내를 처다 보았다. 아내가 말을 이었다. "이래도 살기 힘들고 저래도 살기 힘든 건 마찬가진데 어차피 같은 고생을 할 바에는 하나님의 일이나 하자는 거예요."
 
비로소 의미를 알아챈 그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먹고 살 대책이 있어야 신학공부를 하지.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데 어떻게 맘 편히 공부를 할 수 있겠어?" "먹고사는 거야 다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실 거예요. 그만한 믿음도 없이 무슨 일을 하겠어요." 울컥 짜증이 난 그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이나 확실히 공부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라구! 나는 먹고사는 게 우선이니까."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집을 나섰다.
 그런 일이 있은 그 날 그는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아 일찍 장사를 마치고 집으로 행했다. 예감대로 방문을 열자 그를 반긴 건 울고 있는 혜원이와 낯설지 않은 편지 한 장이었다. 아내는 편지에서 두 번째 가출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당신 처음 결혼할 때 저랑 약속한 걸 잊으셨나요?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했잖아요. 저는 당신이 신학 공부를 안 하면 도저히 살 수 없어요. 당신하고 살아봐야 저 때문에 당신은 죄만 짓게 되고 저도 짜증이 나서 역시 죄를 짓게 되고, 서로를 위해 헤어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떠납니다. 저를 찾지 마세요…"
 그는 고민 끝에 이광훈 목사를 찾아갔다. 이광훈 목사는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 "이게 다 형제를 부르기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반아 들이고 신학공부를 하세요. 그러면 얘기 엄마도 돌아올 거 아닙니까." 그는 목사의 말이 끝나자 설움에 복받쳐 울음을 토해냈다. 별수 없었다. 그는 목사 앞에서 "신학공부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집에 돌아와 그는 역시 울면서 부산 처남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내 뜻대로 공부를 하겠다"고 통고하자 거짓말처럼 아내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가출한 지 이십 여일 만이었다.
 
막상 공부를 하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여건은 그가 신학교에 갈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생각다 못해 그는 신망애 선교회 김양원 목사를 찾아갔다. 당시 신망애 선교회는 구리시 갈매리에서 재활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가 사정 얘기를 하자 김양원 목사는 "마침 재활원 안에 부부가 같이 살 수 있도록 숙소를 지어논 게 있으니까 거기 들어와서 살도록 하라"며 편리를 봐줬다. 그래서 그는 재활원에서 살게 됐다.
 재활원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그는 시장바닥을 기면서 물건을 파는 기바리 이를 하게 됐다. 자동차 타이어를 몸에 끼고 역시 좀약, 수세미 등 간단한 생필품을 손수레에 싣고 노래를 부르며 바닥을 기는 이 일은 같이 사는 장애우 동료들이 수입이 월등히 낫다고 해서 선택한 일이었다.
 그는 거의 매일 봉고차에 실려 이문동에 있는 기바리 장애우들의 본부인 "광명자립회"로 출근을 했다. 장사는 주로 성북, 도봉, 노원구 관내 시장을 돌며 했는데 의외로 수입이 괜찮아서 그는 기사들 수송비로 육천원을 떼 주고도 하루 평균 삼사만원은 족히 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주고객이 주부들이다 보니 제일 많이 나가는 물건은 수세미였다. 명절 때는 하루에 십만원을 넘게 벌기도 했는데 그렇게 수입이 늘어날 수 있었던 것은 주부들이 거스름돈을 받아가지 않는 등 사람들 인심이 무척 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열심히 장사를 했다. 그리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모두 다 신학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즈음 팔십구년 여름, 그는 생각지도 않았던 횡재를 하게 된다. 공돈 구백만원이 굴러들어 온 것이다. 돈이 생기게 된 내막은 이렇다. 하루는 같이 장사를 하는 동료가 "어이 심집사, 서울 문정동에 장애인 아파트를 분양하는데 신청해 봐"라며 일러주는 것이었다.
 그는 정색을 하며 "집 살 돈이 없는데 무슨 소리냐"며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동료가 면박을 줬다. "사람이 답답하긴. 아, 이거는 돈이 없어도 되는 거라구. 장애인 수첩 복사하고 무주택증명만 내면 되는 거야. 운 좋게 당첨되면 프리미엄 받고 팔면 되는 거고 밑져야 본전인데 무슨 걱정이야."
 그는 돈이 없어도 된다는 말에 솔깃해 동료 말대로 서류를 갖춰 아파트 분양을 신청을 했다. 일이 되느라고 그랬는지 그는 얼마 후 당첨자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연히 아파트를 살 돈이 없었던 그는 입주권을 구백만원을 받고 복덕방에 넘겼다. 그 돈으로 중고차를 한 대 구입하고 처남에게 이백만원을 떼 주고 나머지는 그와 아내의 신학교 등록금으로 썼다.
 
그가 엉뚱하게 자동차를 산 것은 일명 나라시라고 부르는 자가용 영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우선 깨끗하고 밤에만 일을 나가면 됐고 남들에게 천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는 불법인 줄은 알았지만 그 일이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한동안 종로에서 취객들을 상대로 자가용 영업을 해 먹고 살기도 했다.
 그가 바라던 대로 신학교에 들어간 것은 구십년 초이다. 학력이 문제가 됐지만 장애우 선교를 한다는 특혜를 인정받아 이광훈 목사가 설립한 체육선교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내도 이해 기독교장로회 여자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가 공부에 열중할 즈음 호사다마라고 난처한 일이 일어났다. 그가 살고 있는 신망애재활원에 불이 나서 졸지에 길가에 나앉게 된 것이다. 그는 살림살이 하나 건지지 못하고 신망애 재활원을 나와야 했다. 다행히 김양원 목사가 보상금으로 이백만원을 줘서는 그는 재활원이 있던 자리 근처 공릉동에 보증금 이백만원에 월세 팔만원짜리 사글세방을 얻을 수 있었다.
 오전에는 학교에 가고 오후에는 먹고살기 위해 다시 기바리 일을 나가는 고단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다시 아내의 짜증이 시작됐다 아내는 "당신 사고방식이 틀렸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 것도 다 당신 고집 때문이다. 내 말 듣고 미리 이사 갔으면 화재를 만나지 않았을 것 아니냐, 그렇게 융통성이 없다 보니 당신 때문에 내가 죄를 짓는다"고 그를 몰아세웠다. 그는 그때마다 못들은 척 자리를 피해야 했다 그는 어떡하든 아내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는데 그의 마음과는 반대로 아내의 짜증은 날이 갈수록 강도를 더해갔다. 그 끝에 아내는 또 집을 나갔다.
 구십년 십이월 중순이었다. 하루는 안면이 있는 어떤 여전도사가 집으로 찾아와서 기도를 했다 그가 기도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니 아내가 유학을 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내심 섭섭해 기도가 끝나자 전도사에게 말했다. "아이 전도사님 어떻게 기도를 그렇게 하실 수 있어요? 다같이 유학을 가면 가는 거고 안 가면 안가는 거지 혜원이 엄마만 유학가면 우리 혜원이와 나는 어떡합니까. 섭섭합니다. 전도사님."
 그 날 저녁 아내는 그가 속이 좁다고 내내 면박을 줬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내는 방안에 누워있는 그와 혜원이를 놔두고 학교 가는 척 하면서 집을 나갔다. 아내가 부엌에 남긴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간단하게 적혀있었다.
 "살다보니 이젠 정말 한계점에 이른 것 같군요. 모두 다 당신이 머리를 잘못 써서 이렇게 됐어요. 저를 자유롭게 해줬으면 돈 있는 사람한테 환심을 사서라도 잘 살수 있었는데 당신 고집 때문에 앞길이 막혀 버렸어요. 더 이상 저는 할 말이 없어요. 아무쪼록 저를 잊고 행복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그는 이번에는 맥이 빠져 아내를 찾을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 있어야 했다. 며칠 후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가 "어디냐? 없었던 일로 할 테니 집으로 돌아와라"고 하자 아내는 "우리 이혼해요. 이혼하잔 말이에요!"라고 소리를 지르더니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다시 아내가 전화를 걸어 왔다. 아내는 대뜸 "당신이 잘했냐"고 면박을 줬다. 그는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다구.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유교사상 속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라다 보니까 여자를 우습게 본 게 사실이야. 앞으로는 이런 점 고칠 테니 제발 돌아와." 아내를 달랬다. 아내는 "알았다"고 대답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또 아내가 전화를 걸어 왔다. 아내의 태도는 눈에 띄게 유순해져 있었다. 아내의 첫마디는 "밥은 먹었냐"였다. 그는 "목 먹었다"고 대답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요?" "그냥 세월만 보내는 거지뭐." "저 있는 데로 내려오시지 않을래요?" "거기 어딘데?" "광주예요." "거기서 뭐하고 사는 거야?" "옷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어요."
 그는 그 날 밤차를 타고 광주로 내려가 아내를 데려왔다. 해를 넘긴 구십일년 일월, 그는 "내가 가출한 사실을 모르는 동네에서 살고 싶다"며 아내가 보채 신림동으로 이사했다. 역시 사글세방이었다. 그곳에서도 그는 기바리 일을 계속했다. 아내는 아내대로 살림에 보태겠다며 우유배달을 시작했다. 그런데 일이 안 되려고 그랬는지 아내의 우유배달은 얼마 못가 보증금만 떼이고 그만둬야 했다. 두산우유를 취급했는데 때마침 페놀사건이 터져 두산제품 불매운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수금 한번 못해본 것이었다.
 일이 그 지경이 되자 아내는 또 집을 나갔다. 이번에는 그가 술을 먹고 방탕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 가출 이유였다 아내 말대로 그가 술을 입에 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는 아내가 우유배달을 시작한 후부터 피로에 시달려야 했다. 새벽에 일어나 아내의 우유배달을 도와줘야 했고 오전에는 신학교에 가야 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시장 바닥을 기며 장사를 해야 했다 이런 힘든 나날이 이어지다 보니 그에게는 저녁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극도의 피로 증세가 나타났다. 약을 지어다 먹어도 몸살기가 가시지 않았다. 그는 잠을 자기 위해 술을 마시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내가 집을 나간 날은 오월 십사일이었다. 아내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을 했는지 옷가지와 화장품을 챙겨 집을 떠났다. 그는 망연자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한동안 애를 태워야 했다. 그러나 아내의 가출기간이 길어지자 한편으로는 섭섭한 마음도 들어서 그는 결국 아내를 찾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혜원이를 처갓집에 데려다줬다.
 그런 다음 그는 혼자 빈방을 지키며 의욕이 생기지 않아 쉬는 날이 많았지만 기리비 일을 계속했다. 그러던 그 해 구십일년 연말 어느 날 그가 다니던 행복한 교회 교인 한 명이 "내가 개봉동에 있는 에덴하우스를 잘 아는데 맘도 돌릴 겸 거기 가서 전도사로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제의를 해왔다. 그는 선뜻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한 후 에덴하우스를 찾아갔다.
 그가 찾아가자 정아무개 원장이 말했다. "마음놓고 여기서 일하게. 학교 가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가고, 월급은 쓰레기봉투를 팔아오는 대로 수당 식으로 줄 테니까 오십만원이든 백만원이든 능력대로 가져가게. 내가 장담하는데 자네 학비는 충분히 될 걸세."
 그는 정원장의 말만 믿고 에덴하우스에서 육개월을 기거했다. 그러다가 견디지 못하고 에덴하우스를 뛰쳐나왔다. 갈등과 회의가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키는 대로 쓰레기봉투를 팔러 다니긴 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찜찜했다. 수익금은 장애우 복지를 위해 쓴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년을 근무한 나이가 사십이 다 된 장애우가 월급으로 고작 구만원을 받고 열일곱 살 된 장애우는 사만원을 받으며 혹사당하는 실정을 그는 납득할 수 없었다.
 
더욱이 원생들 식사는 개도 먹지 않는 형편없는 것으로 나왔다. 김치 하나 국 하나가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원장은 끼니때마다 따로 영양가를 계산해서 진수성찬으로 먹었다. 또한 원생들 숙소는 악취가 진동하는데 원장의 집무실은 호화롭게 꾸미는 것을 보자 그는 허탈감마저 맛봐야 했다. 때마침 사업부장이라는 원장의 측근이 "전도사님, 여기는 그냥 먹고 자는 곳이 아니에요"라며 왜 매상을 올리지 못하냐고 힐난하기도 해 그는 "더 있지 그러냐"고 붙잡는 정원장을 뿌리치고 사표를 썼다.
 구십이년 오월, 에덴하우스를 나온 그는 딱히 갈 곳이 없어 차안에서 잠을 자는 노숙생활을 시작했다. 차를 신림동 살던 동네 부근에 세워놓고 낮에는 여기저기 아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밥도 얻어먹고 기름 값도 얻으며 지냈다. 궁핍했지만 기리비 일은 하지 않았다. 사는 데 의욕이 생기지 않아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불현듯 혜원이 목소리가 듣고 싶어 예산 처갓집에 전화를 걸었다. 장모와 통화를 하다가 그는 뜻밖에도 아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아내가 그동안 있던 공장에서 나와 지금 혜원이를 데리고 온양 작은오빠 집에 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반가워 전화를 끊자마자 온양으로 달려갔다.
 그가 처남 집 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이미 연락을 받았는지 아내가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그는 일부러 화난 표정을 지으며 "혜원이 얼굴만 보고 그냥 가겠다"고 말했다. "그놈의 고집은 여전하군요"라면서 아내는 말끝에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그는 의외의 아내의 태도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해야 했다. 잠시 후 아내가 다가와서 그를 이끌었다. "우리 나가서 음료수나 같이 먹어요." 그는 아내 손에 이끌려 온양시내로 나왔다. 음료수 대신 식당에서 아내가 사주는 밥을 먹으며 그는 아내가 없는 동안 혼자 고생한 얘기를 구구절절이 털어놨다. 아내는 안 됐는지 연신 눈물을 훔쳐댔다. 그러나 아내는 끝내 다시 합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날 그는 혼자 올라와야 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는 다시 온양 처남 집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아내가 내려오라고 했다. 그래서 그 날밤 그는 아내와 온양시내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됐다. 자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부는 속삭였는데 "지난 일은 다 꿈으로 돌리고 이제부터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헤어지지 말고 우리 같이 삽시다"라는 것이었다.
 그는 아내를 데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았던 그는 예전 신망애재활원에 있을 때 알게 된 퇴계원에 살고 있는 아무개 전도사를 찾아갔고 전도사가 "집 얻을 때까지 살라"고 방 한 칸을 내줘 그곳에서 살게 됐다.
 그는 퇴계원에서 서울을 오가며 한동안 신학 공부에만 매달렸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뭔가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그는 이때 장애우 공동체를 세워 운영하겠다는 야심에 찬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수중에 돈이 없었던 그는 아는 목회자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아내를 데리고 부지런히 목회자들을 만나러 다녔다.
 아내의 짜증이 다시 시작된 것은 이즈음이다. 아내는 울면서 "당신이 얕보이니까 내가 사람들한테 모욕을 당하고 수모를 당한다"며 그에게 화를 냈다. 그는 그때마다 "조금만 참아달라"며 아내를 달랬다.
 
그가 노력한 보람이 있었는지 그는 얼마 안 있어 그가 다니던 행복한 교회 목사의 도움으로 본격적으로 공동체를 추진하게 된다. 목사가 방을 알아보라며 계약금 삼십만원을 줬다. 그는 그 돈을 아내에게 주며 "포천에 알아본 방을 계약하라"고 일렀다. 그가 아내를 혼자 보낸 것은 그날 따라 빼먹을 수 없는 학교 강의가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돈을 가지고 아내는 또다시 가출했다. 이번에는 아무 흔적도 없었다. 편지도 써놓지 않고 옷도 갈아입을 옷 한 벌만 달랑 지닌 채로 아내는 사라져버렸다. 이때가 구십이년 시월 초였다. 그는 헐레벌떡 처갓집으로 달려갔다. 당연히 아내는 거기 없었다. 알아볼 곳은 모두 수소문해 봤지만 아내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날 이후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를 간단하게 언급해보면 대충 이렇다. 장애우 공동체를 세워 운영하겠다던 그의 꿈은 아내의 가출로 산산조각이 났다. 그뿐 아니라 "아내는 시골에 잠시 다니러 갔다"고 거짓말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창피해서 도저히 퇴계원 전도사 집에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거처를 서울 문정동으로 옮겼다.
 문정동 장애우 아파트 단지 앞 공터에는 야시장을 열어 먹고사는 아람회 회장 송아무개 전도사가 세운 즐거운 교회라는 무허가 판자집 교회가 있었다. 송아무개 전도사가 와있으라고 해서 그는 교회 옆에 딸린 사택에서 야시장 업자가 사다준 전기 장판과 전기난로를 끼고 한겨울을 지냈다.
 
그곳에 있으면서 먹고살기 위해 그가 최근까지 한 일은 송아무개 전도사와 함께 야시장을 열 공터를 물색하러 다니는 일이었다. 다니다가 빈 공터가 있으면 땅주인이 누군가를 확인해 사용 승낙을 받아내고 만약 시유지라면 구청에 찾아가서 "먹고살기 힘들어서 장사를 해야 겠으니 장소 좀 빌려달라"고 사정하는 것이 그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야시장을 열 공터를 빌리면 자리가 좋은 곳은 삼백만원, 나머지 자리는 보통 이백만원을 받고 야시장 업자에게 넘겼는데 그 돈도 경비를 빼고 나면 실제로 그에게 돌아오는 몫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렇게 하루 하루를 먹고사는데 급급하다 보니 그는 당장 방 한 칸 얻을 돈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이젠 아내가 돌아온다 해도 살 곳이 없어 합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희망을 가지고 산다. 언젠가는 장애우 공동체를 하나 차려 자신보다 못한 장애우들과 더불어 살겠다는 그 허기진 꿈 하나로 험한 세상을 버티며 오늘도 거리를 헤메고 있는 것이다.(끝)

글/이태곤
        

작성자이태곤 기자  a352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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