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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기획 ④] 고엽제 피해로 장애인 된 베트남 2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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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 30일, 공산 월맹군이 사이공을 함락시키면서 기나긴 전쟁의 막이 내리고 통일 베트남이 탄생했다.
전쟁의 포화가 지나간 지 어언 32년, 시대는 철천지원수였던 미국과 무역투자 기본협정을 맺을 정도로 시대는 변했지만 전쟁이 남긴 상처는 여전하다.

가장 큰 상처는 ‘피아 식별을 위해 밀림지역을 없앤다’는 이유로 무차별로 뿌려댄 고엽제, 일명 ‘에이전트 오렌지’로 인한 피해.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독극물 중 하나인 다이옥신이 다량 함유된 고엽제로 인한 피해는 국내에도 4만여 명이 고엽제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로 인한 유전질환으로 인해 2세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

베트남 정부에서 추정하고 있는 자국 내 고엽제 피해환자는 무려 100만여 명이라고. 전쟁 후 3세대까지 고엽제 후유증으로 인한 장애인들이 속출하고 있건만 뚜렷한 대책은 없는 실정이다.

<함께걸음>은 고엽제 후유증으로 인해 장애인이 된 두 명의 베트남 인을 통해 베트남 장애인의 생활상을 살짝 들여다봤다.


 
▲ 전쟁 중 살포한 고엽제는 베트남 사회를 뿌리깊이 흔들어 놓고 있다. 고엽제 피해가 유전이 돼 장애인이 된 도티응아씨 ⓒ전진호 기자  
한베장애인재활센터 최의교 소장의 소개로 고엽제 피해 2세인 도티응아(심신경장애-한국의 정신지체장애에 해당, 24)씨를 그의 집에서 만날 수 있었다.

도티응아씨는 희귀난치성 질환인 터너증후군도 함께 앓고 있었는데, 터너증후군이란 여성에게만 나타나는 성염색체 이상 증후군으로, 여성에게 정상적으로 두 개 존재해야 할 X염색체가 없거나 불완전할 때 생긴다고. 키가 작고, 성적발달이 되지 않는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는 베트남에서 만난 고엽제 피해 2세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었던 왜소 장애인인줄 알았으나 나중에서야 터너증후군 때문에 생긴 신체적 특성임을 알게 됐다.

고엽제 피해자, 민간인도 지원제도 있으나 유명무실

도티응아씨의 아버지인 쿠띠엥씨는 지난 1975년 사범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전쟁에 참가해 4년 동안 월맹군으로 활동했다고. 그가 참전했던 지역은 베트남 내에서도 고엽제를 가장 많이 뿌린 곳으로 알려진 꽝찌에 있었다.

전쟁 후 특별한 신체의 변화는 없었으나 약을 안 먹으면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 항상 약을 먹어야 한다고. 이 두통과 어지럼증의 원인이 고엽제 때문임은 나중에 알았단다.

그에게는 3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 중 큰 딸이 도티응아씨다. 동생들은 도티응아씨와 같이 장애인은 아니지만 늘 머리와 근육이 아프다고 호소하고 있다고. 막내동생은 누나와 함께 고엽제 피해 2세로 등록돼 있었다.

알려진 것과 달리 고엽제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은 상이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에게까지 지급하고 있었다.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고엽제 피해 증명서’가 있어야 하는데 조사위원회에 신청을 하면 순번에 따라 군대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종합 진단을 받은 후 진단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이 등록증을 발급 받으면 도에서 지원을 받는데 쿠띠엥씨 가족의 경우 쿠띠엥씨가 37만4천동(한화 약 2만2천원), 도티응아씨가 35만5천동, 막내동생이 18만동씩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가족도 2004년도부터 이런 혜택을 받기 시작했다고. 제도적으로는 고엽제 때문에 피해 받은 이들 모두에게 지원하도록 돼 있었으나 적은 예산으로 인해 상이군인들조차 수혜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민간인 지원은 언제쯤이 될지는 모르는 상황이라고.

도티응아씨가 고엽제로 인해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출생 직후.
그의 어머니에 따르면 “출생당시의 몸무게가 2킬로그램밖에 안될 정도로 발육상태가 안 좋았고, 많이 아파서 자주 입원했다. 어렸을 적에는 입이 돌아가거나 이빨이 새까맣게 썩었는데, 나이가 들며 이런 증상은 사라졌다.”고 설명했다.

도티응아씨의 장애를 유형으로 굳이 따지자면 심신경계장애, 우리나라로 따진다면 정신지체장애와 비슷한 장애에 해당한다.
그의 어머니는 “어렸을 적부터 항생제를 맞아왔다. 잘 안 먹으려고 해서 항상 입맛 돋우는 약을 먹고 있으며 비타민과 안정제를 먹어야 한다”며 “밤에는 두통 때문에 잠을 못자 꼭 수면제를 먹는다”고 전했다.

그가 한 달에 지출하는 병원비는 대략 40만동. 다행히 나라에서 도티응아씨가 받는 지원금이 40만동 가량 돼 가계에 큰 부담은 없다고 했다.

  undefined       ▲ 도티응아씨 가족에게 고엽제로 인한 베트남 현지의 피해상황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전진호 기자     베트남도 특수학급에 대한 선입견 심해

도티응아씨의 학창생활은 어땠을까.
베트남에는 특수학급만 존재할 뿐 특수학교는 없다고. 특수학급에 대한 선입견은 베트남도 심해 당연히 특수학급에 들어가야 했지만 차별받을 것을 걱정한 어머니의 강한 요구 때문에 일반학급에서 다른 비장애인 친구들과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공부에 큰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가방만 메고 다니는 수준이었고, 그러면서 두 번의 유급을 당했지만 한국과 같은 왕따를 경험한 적은 없다고. 오히려 학창시절부터 친한 친구가 두 명 있는데, 아직까지도 주말이면 만날 정도로 절친한 사이라고 도티응아씨의 어머니는 설명했다.

그의 하루일과는 아침 8~9시부터 시작된다. 아침을 먹고 나면 어머니가 운영하는 노점 좌판에 앉아 있기도 하고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놀다가 저녁 9시경 잠자리에 든다고.
졸업 후 하릴없이 집에서 생활하는 도티응아씨의 모습은 특수학교나 학급, 보호작업장 등을 졸업하고 나면 갈데없는 한국의 정신지체장애인의 상황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런 유사함이 느껴지자 24살인 도티응아씨의 결혼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이에 대해 도티응아씨의 어머니는 “우리가 데리고 있을 것”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역시 장애 때문. 터너증후군 특성상 임신을 할 수 없는데다가 혼자 힘으로는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결혼은 꿈도 못 꾼다고 그의 어머니는 설명했다.

그렇다면 부모 사후의 도티응아씨의 인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쿠띠엥씨는 “우리 딸은 고엽제 피해자임이 확인됐기 때문에 우리 부부가 죽더라도 고엽제 피해자를 위한 시설 입소 등 국가로부터 최소한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돈만 있으면 굳이 시설에 들어가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부지런히 돈을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최 소장은 “도티응아씨의 경우 중산층에 해당하기 때문에 다른 베트남 장애인들에 비해 훨씬 나은 상황”이라고 귀띔해줬다.

그의 아버지는 하노이에서 월 300만동을 받으며 물리와 컴퓨터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어머니 역시 음료수 장사를 하고 있어 풍족한 생활을 하고있기 때문에 도티응아씨가 아무 일을 하지 않더라도 살아가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거라는 게 최 소장의 생각이다.

  ▲ 생존을 위해 직업생활시설에서 수를 놓으며 생활하고 있는 응오티화씨를 교류대회 컨퍼런스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하루종일 일하고 버는 한달 수입은 60만동(한화 약 3만5천원)에 불과하나 그나마도 일자리가 없다고. ⓒ전진호 기자   고엽제 피해 2세, 대부분 수놓거나 그림 그리는 공장에 취직

반면 교류대회 컨퍼런스 장 앞에 마련된 기념품 코너에서 열심히 수를 놓아 판매하고 있던 응오티화(왜소증, 20)씨의 경우는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고엽제 피해를 입은 상이군인의 딸이라고 자신을 설명한 응오티화씨는 “고엽제로 인해 나처럼 왜소장애가 있는 친구들이 우리 공장에도 꽤 많다.”고 전했다.

응오티화씨에 따르면 “고엽제 피해로 인해 자신과 같이 왜소장애가 있는 이들 외에도 시각, 청각장애인도 많으며 손과 발이 마비 돼 움직이기 힘든 이들도 많다”고 고엽제로 인한 장애 유형을 설명해줬다.

그가 일하고 있는 곳은 박귀앙 성에 위치한 오일 페인트 공장, 작업생활시설에서 일하고 있다.
베트남 관광을 하다보면 장애인들이 수를 놓은 그림이나 도자기, 각종 장식품을 판매하는 일종의 기념품 판매소를 목격할 수 있는데 응오티화씨의 일터가 그런 곳 중 하나라고.

공장에서 수놓는 걸 배워서 일을 하게 된 지 2년째라는 응오티화씨는 “눈이 좋고 손이 꼼꼼해야 이 일을 할 수 있어 처음에는 두려워했다. 하지만 나와 같은 장애가 있는 이들 대부분이 이 일을 하고 있었고, 특별히 다른 일을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놓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잔뜩 허리를 구부리고 한 땀 한 땀 신경을 곤두서가며 수를 놓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장애가 없더라도 이곳저곳 안 아픈 데가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의료보험증이 있기 때문에 몸이 불편하면 약은 사다먹지만, 지방에는 병원 수가 많지않아 진료를 받고 치료받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설명했다.

  undefined       ▲ 베트남 직업생활시설 중 판매소 전경. 관광객을 상대로 한 직업생활시설에서 벌어들이는 하루 수익은 수천달러 내외. 세금도 내지 않는다. '기숙사'라 불리우는 입소시설에서 단체생활을 하는데 작업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들은 휴일에도 나가서 일을 해야 한다. ⓒ전진호 기자     한 침대서 2~3명 씩 자면서 하루 종일 일해 받는 월급이 3만5천원

그의 공장생활은 어떨까.
전쟁에 참가한 상이군인들의 2세들의 일자리를 위해 마련된 공장이기 때문에 50여 명의 직원들 대부분이 고엽제 피해 2세들이라고.

아침 7시부터 일을 시작해 저녁 5시30분까지 일을 하고, 저녁식사를 마친 후 7시부터 9시까지 야근을 하는데, 일이 끝나고 나면 공장에서 마련해준 숙소에서 쉰다.

그가 말하는 숙소생활은 처참했는데 “(공장이) 돈이 없어서 개별적으로 방을 쓰지 못하고 50명이 큰 방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 침대 당 2~3씩, 많게는 5명이 한 침대를 쓰며 생활하고 있다”고 생활상을 설명했다.

이렇게 버는 돈은 대략 60만동(한화 약 3만5천원) 정도. 이 액수도 고정된 게 아니라 판매량에 따라 매달 차이가 난단다.
현지 통역인에 따르면 “60만동이면 농촌에서 생활하면 빠듯할 정도, 도시에서 생활하게 되면 턱없이 모자란 액수지만 그나마도 벌 수 있는 일자리가 별로 없는 걸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도티응아씨와 달리 응오티화씨는 고엽제 피해 증명서를 받지 못해 국가에서 지원조차 못 받고 있기 때문에 더욱 궁핍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가 일하고 있는 오일 페인트 공장과 같은 기념품 판매소는 ‘장애인들이 만든 제품’이라는 명목 하에 시가의 8배까지 폭리를 붙여 팔고 있었고, 적지 않은 숫자가 팔려나가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쭈그리고 앉아 관광객들의 동정어린 시선을 받아가며 일한 대가가 너무도 적은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베트남에 불어 닥친 자본주의의 폐해를, 빈곤 앞에서의 삶은 세계 어느 곳에 가더라도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어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작성자전진호 기자  016272962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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