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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에서 느끼는 해방감, 현실서도 느끼고파”

해직된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창작과 안태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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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정리하는 12월, <함께걸음>은 올 한 해를 1인 시위로 보낸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올 해 그이는 노란색 체육복에 빨갛고 하얀 삐에로 분장을 하고 거리에 서 있었다.
뺨에는 파란색 눈물 한 방울을 그린 채….

그이는, 장애 때문에 해직을 당했다고 호소하며 거리에서 1인 시위를 한, 전 청강문화산업대학교(이하 청강대) 만화창작과 교수 안태성 씨(49, 청각장애 4급)다.
강의실이 아닌 거리에서 말 없는 항변을 하고 있는 안태성 씨.
평생 그림과 함께 해 온 그이의 삶을 들여다봤다.

  ▲ ⓒ전진호 기자   ‘삐에로’와 ‘이소룡’은 나의 우상

서울 동작구에 있는 안태성 씨의 작업실. 오랜만에 보는 연탄난로가 훈훈했고 벽에는 인물들을 표현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함께걸음> 표지 촬영으로 삐에로 분장을 부탁하자, 안 씨는 나무 책상 위에 작은 거울과 물감 몇 개, 붓이 담긴 물통을 준비했다.

붓을 든 안 씨는 하얀색으로 눈두덩을 굵게 칠하고 검은 눈썹을 길게 그렸다. 과장스런 빨간색 입술은 크게 그리고 주먹코도 붙였다. 이윽고 호흡을 가다듬고는 파란색 눈물 한 방울을 뺨 위에 그렸다.
“살아온 시간 돌이켜보면 슬픈 그림자가 많아요. 우리 사회에서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 살면서 항상 슬프고 우울했어요. 삐에로는 이런 시대를 표현할 수 있는 자화상입니다.”
그래서 안태성 씨는 과거에도 삐에로를 작품에 담아왔다고 한다. 그이가 1인 시위를 위해 삐에로를 선택한 것은 이런 사연 때문이다.

“삐에로 분장을 하다보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때가 있어요. 피나는 노력 끝에 여기까지 왔는데, 결국 장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가 싶어서….”

안 씨는 분장을 하면서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착잡한 마음을 뱉어냈다.
이런 속사정을 모르는 행인들은, 안 씨가 삐에로 분장을 하고 1인 시위를 하고 있으면, 호기심에 다가와 코를 만지거나 손을 잡아보기도 한단다.
안태성 씨가 1인 시위를 위해 삐에로 분장과 함께 선택한 의상은 이소룡을 연상시키는 노란색 체육복.
이 옷에도 사연이 있다.

“학교 다닐 때 친구들에게 엄청 맞았어요. 졸업 후 공장 다닐 때도 툭하면 맞았죠. 가난 때문에 못 먹어서 늘 영양실조 상태였어요. 중학교 때 몸무게가 15㎏일 정도였으니까. 몸집도 작고 잘 듣지도 못하니까 제가 만만했나봐요.”

이런 안 씨에게 희망을 준 것이 바로 이소룡이었다.
“하도 얻어터지니까 이소룡이 부러웠어요. 맞는 게 지긋지긋해서 고등학교 때는 태권도, 봉술 등을 배웠어요. 그 시절, 이소룡은 제 우상이었어요.”

이렇게 안태성 씨는 삐에로와 이소룡이 돼 거리에 섰다. 안 씨의 시위를 언론들은 ‘슬픈 삐에로’라며 보도했다.
“어쨌든 보는 사람은 즐겁겠죠. 내 억울함도 더 독창적으로 전달할 수 있고. 이 사회에 대항하는 일종의 연극이죠. 체육복이 쫄바지라서 좀 민망하지만(!), 괜찮아요, 괜찮아져야죠.”

  undefined       ▲ ⓒ전진호 기자     “아따, 우리 동네 화가 나겄네!”

안태성 씨는 어릴 때 앓은 열병 때문에 청력을 잃었다. 그이는 보청기에 의지한 한 쪽 귀로만 세상을 들을 수 있다. 사람들은 안 씨를 ‘귀먹쟁이’라며 놀렸단다. 어린 안 씨가 세상과 소통할 방법으로 찾은 것이 바로 그림이다.

“시골 마당에 호랑이, 말, 사람 등을 그려놓고 혼자 상상을 하며 놀았어요. 종이나 붓은 꿈도 못 꿨고 돌멩이로 그리기 시작했죠. 호랑이를 그리면 호랑이에게, 강아지를 그리면 강아지에게 마음을 주고 말을 걸며 놀았어요. 그림은 유일한 친구였죠. 후후.”

이야기를 듣자니, 흙마당에 쪼그려 앉아 그림을 그리는 어린 안 씨의 안쓰러운 작은 등이 보이는 듯했다.

“일곱 살 때였을 거예요. 제가 마당 가득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다 보고는 ‘아따, 우리 동네 화가 나겄다’고 한마디씩 했었죠. 그즈음에 동네 어른이 제 그림을 사셨어요. 군인과 민간인이 악수하는 모습을 그린 거였는데, 200원이나 주셨어요. 당시 1원이면 눈깔사탕 10개 사던 때였으니까, 처음 치고는 꽤 받은 셈이죠. 하하.”

안 씨는 성장하면서 그림뿐만 아니라 독서에도 빠져들어 마을문고의 책을 죄다 몇 번씩 빌려다볼 정도였다고 한다.
부모님마저 일찍 여읜 안 씨는 학비를 벌면서 야간고등학교에 다녔고, 졸업 후에는 먹고 살기 위해 기계를 조립하는 공장에 취직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며 공업고등학교나 공장을 장려했었어요. 당시 쇠를 연마해 선반이나 기계를 조립하던 공장에서 일했는데, 그 때도 느닷없이 많이 맞았지요. 불렀는데 대답 안한다고 말이죠.”

영세한 공장들은 자주 문을 닫았고 안 씨는 여러 공장을 전전했지만, 실업자 신세 면하기 어려웠다고 회상했다.

“네가 못 듣는 건 비밀로 해!”

그러다 교회 목사 소개로 그림을 배우러 전남 무등산으로 간 것이 스물한 살 때다.
동양화를 그리는 스승의 제자 중에서 제일 막내였던 안 씨에게 허락된 것은 먹을 갈아주면서 어깨 너머로 그림을 보는 것이었다고.

“무등산 간 지 한 달 쯤 됐을까, 하루는 스승님이 완성한 김삿갓 채색화를 벽에 걸어두고 외출을 했어요. 그림을 보다가 ‘나도 이 정도는 그릴 수 있겠다.’는 말이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 나왔어요. 선배들이 낄낄대며 한 번 그려보라고 하더군요. 제가 다 그린 그림을 벽에 걸었더니, 순간 조용해졌죠.”

그림을 본 스승은 “너는 재주가 있으니 서울 가서 본격적으로 배우라.”며 이른바 하산(下山)을 명했다고.
이십대 중반의 안 씨는 서울로 온 후 미술학원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4개월 후인 1983년도에, 지금으로 말하면, 수학능력평가시험에 응시해 홍익대학교 미대에 입학했다.

입학한 안 씨는 생계 때문에 각종 공모전 출품에 몰두했는데, 미술대전, 국선 등에서 입선한 것만 해도 십 수번, 주변에서는 그이를 ‘입선 제조기’라고 했단다.
그러나 학비와 생활비의 압박에 안 씨는 ‘은하철도 999’, ‘천년여왕’ 등의 일본 애니메이션 하청 작업을 하는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하며 대학원에 진학했다.

안 씨는 “나중에 깨달았지만, 제가 배고팠던 시절에 쌓은 만화 경력이 교수가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요.”라고 말했다.
강의를 들을 수 없던 안 씨는 진학을 했어도 계속 독학하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할 수 없이 혼자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는데, 책을 좋아했던 그이는 미술 이론은 물론 동양철학까지 섭렵했단다.
안 씨는 장애 때문에 불편했지만, 장애를 밝힐 수는 없었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장애를 알게 된 교수나 선배들은 드러내지 말라고 강요했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게 문화예술계는 이미지, 특히 ‘있어 보이는’ 이미지를 원하거든요. 장애가 알려지면 그야말로 ‘병신’으로 찍혀요. 다시 말해서 장애인이 그린 그림은 후원 명목으로 어쩔 수 없이 사주는 그림으로 치부된다는 거예요. 재주나 실력이 있어도 장애가 있으면 예술로 인정받기 어려운 것이 현주소예요.”

  undefined       ▲ ⓒ전진호 기자     “만화도 승산이 있습니다”

안태성 씨가 전공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IMF 이후라고 한다.
“동양화로는 생계를 꾸리기 어렵겠다고 생각했죠. 만화 작업을 했던 실무 경력을 바탕으로 다시 학교에 가고 싶었습니다.”

안 씨는 교수 초빙 공고가 나는대로 응시했지만 계속 떨어졌다. 생계를 잇기 위해 신문이나 잡지의 삽화나 만화, 시간강의까지 가리지 않고 일했지만, 실질적인 생계는 아내 몫으로 돌아갔다.

안태성 씨는 14년이나 미술학원을 운영하며 뒷바라지를 한 아내와 소중한 아이에게 안정적인 울타리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애를 이유로 받는 차별이나 배제를 학교에서는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고진감래(苦盡甘來)처럼, 드디어 안 씨는 1999년 청강대 애니메이션과 만화전공 교수로 발탁됐다.

안태성 씨는 “정말 열심히 했고, 잘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동료 교수들에게 독학한 사주 관상을 봐주며 친해지려 노력했고, 마이크 잡고, 푼수도 떨고, 노래방에도 갔단다.
대수롭지 않은 것 같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마이크로 떠들거나 노래를 부르는 일은 썩 내키지도, 그리 쉽지도 않은 일이다.

“저는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아는 노래가 없어요. 가사를 아는 노래가 있어도 리듬이나 가락에 맞춰 부르기도 어렵죠. 한번은 행사 후에 교수들과 노래방에 같이 갔는데 노래를 강요하기에 어쩔 수 없이 가사를 알고 있는 애국가를 불렀어요. 처음에는 ‘시조 시인 나왔다.’며 킬킬거리다가 분위기 싸해지더군요. 다음에는 같이 가자는 소리조차 아예 안하던데요. 남들이 화합이라는 명목으로 친분을 다질 때, 저는 방에서 책을 볼 수밖에 없었죠.”

안 씨는 애니메이션과에 포함된 만화전공을 독립시키기 위한 준비도 꾸준히 했다.
“만화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어요. 애니메이션에 묻혀 있으면 고유의 특성을 살릴 수 없다고 생각했죠.”

안태성 씨는 학장을 설득했고, 2000년 가을 학기부터 애니메이션과 만화전공에서 만화창작과로 분리해 학생들을 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안 씨의 생각은 적중해, 다른 학과 미달 사태에도 불구하고, 만화창작과는 최고 10대 1의 경쟁률을 보일 정도였단다.

마침내 안 씨는 2001년 만화창작과 초대 학과장을 맡으며 실력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 ⓒ전진호 기자     “저는 그 곳에서 투명인간이었습니다”

그즈음은 아마도 안태성 씨의 삶에서 빛나는 시기였을 것이다. 힘들게 독학으로 공부해 원했던 자리에 왔고, 거기서 인정받아 승진을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안태성 씨는 문제의 발단도 거기부터였다고 했다. 만화창작과 교수임용을 둘러싸고 마찰이 빚어졌다는 것이다.

“2002년 1학기에 만화창작과 교수초빙 공고를 냈죠. 그런데 기준에 미달하는 교수를 밀기에 반대 했습니다. 방관하던 학교 측은 결국 그를 교수로 채용했어요. 저는 이에 대해 계속 항의를 했고요.”

안 씨는 이후부터 학교 측 태도가 돌변했다고 주장했는데, 만화창작과 초대학과장을 역임했던 그이는 2004년에 계약제로, 2005년에는 강의만 전담하는 교원으로 좌천(?)됐다.

“정년이 보장된 교수에서 2~3년마다 계약해야 하는 계약제 교원으로 떠밀더니, 급기야는 허울 좋은 강의 전담까지 몰아낸 겁니다. 강의전담교원은 학과 운영 전반에서는 손을 떼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도 안 씨는 떠밀린 자리에서 묵묵히 일했다. 한 가정의 생계를 꾸려야 했고, 오랜 시간 뒷바라지 한 아내에게 또 그 짐을 지울 수 없었기에 그이는 어금니를 물며 참았을 것이다. 재계약 때는 상황이 나아지기만을 소원하며 말이다.
그러나 2007년 학교가 제시한 재계약 내용은 2년도 아닌 1년짜리 강의전담교원이었다.

“앞이 캄캄하더군요. 학교가 이렇게 악조건을 내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더 어이가 없었던 것은 임용과 관련해 ‘교수들과 인화(人和)를 잘 해야 한다.’는 조건이 더 있었다는 겁니다. 인화라는 것이 사실상 의사소통인데, 청각장애를 배려 받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란 말입니까.

게다가 저는 이미 강의만 하는 교원인 처지고요. 그래서 계약 조건을 수정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학교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때문에 저는 도저히 서명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학교 측은 안 씨가 계약을 거부했기 때문에 임용할 수 없었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 씨는 학교에서 자신은 ‘투명인간’이었다고 말했다. 분명 존재하지만,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이 말을 좀 더 들어보자.
“어느 날 갑자기 학생들이 연구실에 오더니 졸업 사진 찍을 건데 왜 안 오냐는 거예요. 나는 그런 줄도 몰랐으니 평상복 차림이었죠. 사진 찍으러 갔더니 다른 교수들은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다 정장 입고 왔더군요. 이 사건이 구전이 돼, 이젠 학생들이 먼저 연통을 줘요.

이런 일도 있었죠. 학장은 연례행사로 학기 초에 학과 운영 상황을 점검하는 회의를 하거든요. 작년도 3월에 했는데, 당시 저는 참석하겠다고 회신을 했고, 당일 날 늦을까봐 평소보다 일찍 출근을 했습니다. 제가 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연구실 문을 열어놨더니 3월이라 춥더군요. 그래서 문을 닫고 음악을 크게 틀어놨어요.
그 때도 이미 학과회의나 기타 다른 정보도 알려주지도 않았던 터라, 또 배제될까봐 음악을 틀었던 거죠. 9시 30분에 시작한다고 들었는데 11시가 다 되도록 아무 연락이 없는 거예요. 그러다가 다른 학과 교수가 들어와 옆에서 학장과 회의 하는데 이렇게 시끄러우면 방해될 것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허겁지겁 회의장으로 갔더니, 다과 접시가 반 이상 비었을 정도로 이미 시간이 지났더군요. 정말 민망하고 처참했습니다. 그래서 학과 교수에게 역정을 냈죠. 저는 회의 참석자들에게 제 장애 때문에 당일 아침에 겪었던 상황을 구구절절하게 메일로 보냈습니다. 이에 대해 학교 측은 제가 회의에 참석하기 싫다고 화를 냈다고 주장하더군요.”

안태성 씨는 “학교 측은 내가 해직된 후에 나의 장애를 알았다고 둘러대지만, 그건 말이 안됩니다.”며 강하게 항변했다.

“2001년에 학과장이 됐을 때 학장과 신임교수들과 같이 회의를 한 적 있었어요. 회의 중에 말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는 거예요. 보청기 건전지가 다 됐던 거죠. 하는 수 없이 ‘죄송합니다. 보청기 약이 떨어져서 잘 안들려서요.’고 말하고 그 자리에서 보청기를 빼서 건전지를 갈아 넣었습니다. 늘 보청기를 착용했고, 연말정산도 장애인카드로 했고, 메일로도 숱하게 제 장애를 밝혔습니다.”

안태성 씨는 우리 사회가 최소한 장애를 알아주기만 해도 배려 아닌 배려가 시작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청각 장애가 있는 사람은 오해를 많이 받습니다. 우선 장애 유무를 금방 알 수 없기 때문에 사교성이 없다고들 재단해버리죠. 의사소통이 어려우니 그럴 수 밖에요. 허나 소통은 쌍방간에 이뤄지는 겁니다. 학교 측은 제가 잘 어울리지 못한다고 계약 조건으로 인화를 내걸기까지 했는데, 이것은 이미 학교가 청각 장애인의 고통을 정확하게 읽어낸 것이기도 합니다.

지원요? 지원은 둘째치더라도 제가 듣지 못한다는 것만 이해해줬어도 최소한 배제 당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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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진호 기자  
 
안태성 씨는 그저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았다. 그림은 그이가 가장 잘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싶었고, 덜 차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해 학교를 선택했다. 학과를 창설하며 헌신했지만, 그토록 원했던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그이는 좀 더 뻔뻔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야 버틸 수 있을 것이란다.
그리고 안 씨 곁에는 ‘그림’이 있다. 그이에게 그림은 현 사회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돌파구일지도 모른다.

“그림은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출입구입니다. 그림에는 억압도, 차별도 없습니다. 손끝으로 느끼는 해방감을 현실 속에서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작성자최희정 기자  prota102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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