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맞설 수 있는 힘,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 세상, 한 걸음


“세상과 맞설 수 있는 힘,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김복자 오재석 부부

본문

  undefined  
 
  ▲ ⓒ 전진호 기자  
 
‘나 혼자’일 때는 무섭기도, 외롭기도 하지만 ‘우리’가 되면 두려움도, 외로움도 떨칠 수 있는 묘한 힘이 생긴다.

여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가족에게서 떨어져 온전히 나만 의지한 생을 살아오다 때로는 지지자로, 때로는 동반자로 서로에게 기대며 새로운 삶을 출발한 신혼부부가 있다.
특별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 부부를 <함께걸음>이 남다르게 바라본 이유는 가족과 떨어져 홀로 시설에서 생활하다 평생의 동지를 찾았다는 것, 반려자와의 새로운 미래를 일구기 위해 거친 세상으로 나와 도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강원도 철원의 한 요양원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가고 있는 김복자(29, 지체장애 1급), 오재석(32, 지적장애 2급) 씨 부부를 만나봤다.

강추위로 얼어붙은 서울 한복판, 전경버스와 방패들에 둘러싸인 도심 한가운데에서 김 씨 부부를 처음 만날 수 있었다.

이들 부부가 살고 있는 경기도 시흥에서 집회가 있던 서울 여의도까지 오는 데만 두 시간. 갈아타고, 들어 올리고를 반복해야 올 수 있는 이곳에 엄동설한을 무릅쓰고 온 이유는 ‘억울하게 당했던 세월에 대해 증언하고 싶어서’ 그리고 ‘배우고 싶어서’라고.
어떤 상처가 이들 부부를 이곳까지 오게 만들었는지 궁금해졌다.

끔찍했던 시설에서의 추억

복자 씨가 처음 시설에 들어가게 된 것은 3살 되던 해인 1979년.
“어렸을 적 뇌성마비로 인해 삼육재활원에 입소해 열두 살까지 생활했어요. 이곳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는데, 학교가 지방으로 이사 가면서 ‘자기 스스로 몸을 움직이기 힘든 사람은 퇴소조치’시키더라고요. 그 덕분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죠.”

부모, 형제가 일정정도의 나이가 들 때까지 한 지붕 아래에서 생활하는 게 일상적인 가족의 모습이라면 아쉽게도 복자 씨는 누릴 수 없는 기억이었다.
집에서 생활한 지 얼마 안 돼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줬던 아버지가 간경화로 세상을 뜨고 만 것.

복자 씨는 할머니와 오빠, 언니와 함께 생활하던 짧은 시간을 뒤로한 채 경기도 광명시에 위치한 ‘사랑의 집’이라는 미인가 시설에서 생활하게 됐다고.
“가장 끔찍했던 기억이에요. 삼육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목발 짚고 혼자 걸어 다닐 수 있었는데, 그곳에 가게 되면서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돼 버렸어요.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누워있는 게 전부였죠. 그나마 많이 의지하고 따랐던 자원봉사자 분마저 더 이상 오시지 않게 되자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우두커니 있게 됐죠.”

그러던 중 복자 씨는 당시 전도사였던 시설장에게 끔찍한 경험을 당했다.
“이렇게 사느니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 싶었는데, 어느 날 시설장과 부인이 함께 외출하더라고요. 그 사이 몰래 집에 전화해서 이 사실을 이야기한 후 ‘집에 데려다 달라’고 울부짖었어요.”

그 전화를 받자마자 할머니가 달려왔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생활도 3년밖에 유지되지 못했다. 자신을 끔찍이 아껴주던 할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됐고, 할머니의 부재는 또 다시 시설 행을 예고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시설에서 생활하며 겪었건만, 또 다시 시설에 갈 수밖에 없게 된 것.

“사실 언니, 오빠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죠. 움직이는 것도 불편한데, 아무도 모르는 공간에서 낯선 이들과 생활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우길 수 없었던 게 아무리 언니, 오빠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삶이 있잖아요. 제가 집에 있으면 하루 종일 제 뒤치다꺼리를 해줘야 하는데 그게 형제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기에는 어렵더라고요. 절 보며 불편해하는 모습에 속도 상했고… 그래서 다시 시설에서 생활하기로 마음을 먹었죠.”

그때가 벌써 10여 년 전, 법적 성인이 될 나이에 또다시 시설로 향했다.
구청소개로 찾아간 곳은 강원도 철원에 위치한 은혜요양원이었다.
복자 씨와 가족들이 은혜요양원을 선택했던 이유는 물리치료실이 있다는 구청직원의 말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그곳에는 물리치료를 받을 시설도, 물리치료사도 없었단다.

“처음 오자마자 ‘이곳은 내가 살 곳이 아냐’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주변에 있는 이들 대부분이 지적장애인이라 대화할 상대도 없었고, 간호조무사나 보모들한테 욕먹는 것도 싫었고… 함께 있던 이들 대부분은 가족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전 가족도 있는데 이곳에서 이런 대접을 받으며 살려고 하니 서럽기도 하고, 집에도 가고 싶고 그랬죠.
그렇게 3~4년을 고생했어요. 또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나니 그곳에서의 생활도 그냥저냥 살아지더라고요.”

재석 씨 역시 은혜요양원에 오기까지 많은 사연을 안고 있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집을 나가버렸어요. 누나 두 명이 있는데 어디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몰라요.”라고 담담히 말했다.
그렇게 고아원에 맡겨진 재석 씨는 14살 되던 해 고아원을 나와 종로통에서 껌팔이를 시작했다고. 그렇게 생활하던 중 주민등록증이 필요해 찾은 곳이 은혜요양원이었고, 그렇게 십여 년을 생활했다.

미래에 대한 아무런 기약 없이, 그냥 숨 쉬고 있으니 그곳에서 또 하루가 가는 생활을 해온 것이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가족에게 버림받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맡겨졌다고는 하지만 이미 이들 기억 속에서는 사라져 버린 사람들, 생각과 의지를 갖고 있고, 하고 싶은 꿈도 있지만 획일적으로 정해놓은 규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관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반항할 수 없다는 이유로 모든 것이 눌린 채, 살아 숨 쉬지만 보이지 않는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이 시설이고, 시설 생활임을 이들 부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한번 절감하게 됐다.

추운 날씨 때문에 얼어 죽고, ‘손버릇이 안 좋고 말을 안 듣는다’는 이유로 맞아죽어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고, ‘손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개밥 주듯 섞어 주거나 김치인지 배추쪼가리인지 알 수 없게 다진 반찬이 나와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곳, 아무리 폭압적인 교도소나 군대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지만 가족이 찾아주거나, 가족마저 없으면 그 희망마저 없이 죽을 때까지 살아가야 하는 곳이 복자 씨 부부가 경험한 시설 생활이었다고.

체념의 공간에서 찾아온 ‘사랑’

어제와 오늘이 똑같고, 내일 역시 똑같을지 모르는 시설 생활이지만, 가슴 뛰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고 싶은 꿈마저 삭힐 수는 없었다. ‘사랑 바이러스’가 이들 가슴을 뛰게 만든 것이다.
복자 씨의 눈에 재석 씨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어느 정도 시설 생활에 적응했을 무렵인 지난 2003년도 경.

재석 씨를 만나기 전, 자신에게 껄떡(?)대던 동생도 있었고, 좋아했던 오빠도 있었다는 사실을 복자 씨가 고백하자 재석 씨 입이 한 움큼 튀어나온다. 그렇게 삐칠 것 같더니만 이내 활짝 웃는 표정으로 “그래도 내가 제일 좋지?”, “내가 평생 동안 지켜줄거야”라며 ‘한 수다’하는 재석 씨의 모습에 복자 씨는 반한 것 아닐까.

  undefined  
 
  ▲ ⓒ 전진호 기자  
 
어떻게 복자 씨의 마음을 사로잡았냐는 질문에 “남자는 남자답게, 좋아하면 가서 딱 ‘너 좋아한다’ 이렇게 해야 해요.”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복자 씨는 조금은 마음 아픈 이야기를 털어놨다.

“처음 (재석)오빠가 좋아한다고 했을 때만 하더라도 ‘오빠’라고 부르지 않을 정도로 무시했어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좋아하기도 했고요.(웃음) 제가 스스로 몸을 움직이기 불편하다보니 처음에는 비장애인과 결혼하기를 바랐거든요.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나를 사랑해줄지 모르지만 언젠가 떠나버리고 나면 어떡하나 라는 두려움… 그런데 오빠는 달랐어요.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제 옆에 항상 있어줬죠. 저런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오빠와의 만남을 시작했죠.”

시설이라는 공간에서 만나 4년간 사랑을 키워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벽 역시 시설이었다.
달리 연애할 공간이 없어 하루는 재석 씨 방에서, 또 하루는 복자 씨 방을 오가는 만남을 시작했다고.
어떤 연인이 둘만의 시간과 공간을 안 갖고 싶겠냐만, 이들 시설에서는 용납되지 않았다.

단체생활이라는 이유를 들며 이들의 사생활을 가로막았던 것.
혹여나 둘이 같이 있는 장면이 목격이라도 되는 날에는 어김없이 몽둥이질로 이어졌다고.
“처음에는 죽으나 사나 시설 안에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오빠와 함께 있다 보니 ‘세상에 나가서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얻었죠. 소처럼 일하면서도 늘 두들겨 맞는 오빠의 모습을 보는 것도 너무 마음 아팠고요. 살 집만 어떻게 마련할 수 있다면 남들처럼 취직해 일하면서 우리만의 가정을 꾸릴 수 있겠다 싶어 이런 생각을 언니에게 전했죠.”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살고픈 소박한 복자 씨의 꿈에 화답이라도 하듯 그의 언니가 힘을 보탰다. 그 덕분에 꿈에서만 그리던 시설에서의 독립,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는 일이 현실로 이뤄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핑크빛 미래를 꿈꾸고 있던 복자 씨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같이 퇴소하고자 했던 재석 씨가 행방불명된 것.
수소문 끝에 재석 씨가 시설 측에 의해 경기도 송추에 있는 한 정신병원에 입원된 사실을 알게 됐다.
결국 복자 씨는 혼자 나올 수밖에 없었고, 같은 달 20일 국가인권위원회에 긴급구제를 신청했다. 그리고 27일, 인권위 조사관이 정신병원을 찾자 바로 퇴원시켰다.

당시 상황에 대해 재석 씨는 “시설에 있는 이들이 ‘서울가자’고 저를 데리고 갔어요. 간만에 바람 쐬러 나갈 수 있겠다 싶어 무척 신났는데, 갑자기 ‘송추에 볼일이 있으니 들렀다 가자’고 하는 거예요. 도착하더니만 갑자기 입원시켜서 엄청 무서웠죠. 정신병원에 들어가면 무조건 약을 먹어야 하는데,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나중에는 머리가 너무 아팠어요.”라고 설명했다.

시설 측은 정신질환으로 인한 발작 때문에 보냈다고 했지만 복자 씨 생각은 다르다.
온갖 힘든 일을 마다않고 해온 재석 씨가 자신과 함께 시설을 떠난다고 하니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오빠가 못나오면 어쩌나 마음 졸이고 있다가 인권위 분과 함께 나온 오빠를 꼭 끌어안는데… 그때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약 때문인지 집에 와서도 며칠간 부들부들 손을 떠는 오빠 모습을 보며 어찌나 마음 아팠는지…”라며 당시 상황을 떠올리는 복자 씨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싶어요

이제 시설에서 나와 독립생활을 한지도 한 달 째, 이제 온전히 둘만의 힘으로 거친 세상풍파를 헤쳐 나가야 한다.
많은 것들이 부족하지만, 넘어야 할 산들 때문에 걱정도 많이 되지만 ‘혼자’가 아닌 ‘우리’가 함께 넘을 수 있어 즐겁다고.
요즘 재석 씨는 시설에서 나온 뒤로 식사량이 부쩍 늘었단다.

  undefined  
 
  ▲ ⓒ 전진호 기자  
 
“워낙 먹성이 좋긴 했지만 시설에서 나온 다음부터 그 양이 배로 늘어난 것 같아요. 한밤중에 자다 깨서는 밥 먹고 잘 때도 있다니까요.(웃음) 식사준비는 오빠가 담당하는데 밥을 엄청 잘해요.”라며 깨소금을 뿌린다.

이들의 하루일과는 어떨까, 기자가 묻자 복자 씨는 “둘 다 늦게까지 자요.(웃음) 그렇게 일어나서는 밥해먹은 후 오빠랑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고 그렇게 보내다가 바람 쐬러 마실 나가곤 하죠. 아참, 교회에도 열심히 다니고 있고, 가끔씩 오늘처럼 볼 일 있으면 서울 나들이도 하고요.”라며 웃는 모습 뒤에는 앞으로의 청사진을 그리기 위해 머릿속이 꽉 차 있어 보였다.

“우선 공부를 하고 싶어요. 오빠나 저나 아직 한글을 못 읽는데, 어서 한글을 깨쳤으면 좋겠어요. 오빠는 한글만 알면 중국 음식점 같은 곳에서 배달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싶대요. 전 컴퓨터를 배우고 싶은데, 복지관 같은 곳에서 무료로 가르쳐준다고 들었어요. 자격증도 따고 해서 컴퓨터를 통해 직장도 구하고 싶고, 제가 인형을 좋아하는데 취미생활로 비즈 공예 같은 것도 배워보고 싶어요.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언니 도움을 받아 월세집에서 살고 있는데, 저희 형편에서는 월세 가격이 무척 부담스러워요. 그래서 빨리 임대아파트를 얻었으면 좋겠어요. 지금 있는 집은 계단이 많아 오빠가 항상 저를 업어야 방에 들어갈 수 있거든요. 계단 없고 전동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집, 그래서 편안하게 외출도 하고, 병원도 다닐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이들 부부가 열심히 믿고 있는 종교 용어를 빌리자면, ‘이들의 처음은 미약하지만 사랑으로 똘똘 뭉친 이들의 마지막은 창대하리라’.
평생 자신만을 지켜봐주고 의지할 수 있는 ‘당신’이 있기에 두려움 없이 말이다.
작성자전진호 기자  0162729624@hanmail.net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께걸음 과월호 모아보기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8672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노태호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