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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장애우 택시기사, 윤영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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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장애우 택시기사 윤영배씨

 

  ▲ 장애우 택시 기사 윤영배씨

 

  자식들이 가져온 가정통신문의 보호자 직업란에 "무직"이거나 노점상을 그냥 "상업"이라고 적어야 할 때 아비로서 느끼는 자괴감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수업준비물을 사야 한다는 자식 놈에게 돈을 주려고 주머니를 뒤져봐도 먼지만 잡혀 "학교에 그냥 가라"고 말해야 했던 심정, 다른 아버지들처럼 가족들의 인사를 받으며 아침에 직장으로 나가지도 않고 초췌한 모습으로 느지막이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으며 하루 동안 또 어떻게 돈을 만들어 오나 하는 걱정으로 한숨만 늘어가던 기억, 그렇게 불혹의 나이도 넘겼었다.
  이제까지 몇 개의 직업을 전전했는지 윤영배씨 자신도 셀 수가 없다. 표구 제작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카센터 운영이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 직업이었고, 계란장사, 화장지 장사, 구두닦이……. 한때는 앵벌이장애우와 계약을 맺고 일당 이만오천원에 차에 태워가고 태워오는 일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 엄연한 택시기사가 된 그는 직업란에 당당히 "운수업"이라고 쓴다. "가끔 일하다 하루 쉴 때가 있는데 정말 시간이 안가요. 괜히 놀았다 싶으면서 지금 이 시간에 어디쯤으로 가면 손님이 많을 텐데 하는 생각만 들고요. 사실 그렇죠. 이날 이때까지 남들 일할 때 제대로 일을 못하고 지냈으니 이제부터는 그만 놀아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정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아니 진작 그 일을 하지 왜 노점상을 하고 그랬을까"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 소아마비인 그는 "법적으로" 그 일만은 못하게 됐었다. 장애우에게 2종 운전면허가 허용된 것이 겨우 11년 전의 일이고, 택시기사를 할 수 있는 1종 면허는 장애우들의 애타는 진정과 문제제기로 94년 9월에야 취득이 허용될 수 있었으니까 도대체가 택시기사가 될 수 있는 길이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었다.
  오십사년도에 강원도에서 태어난 그는 전쟁통에 위로 다섯 있던 형제 중에 누나만 빼고 네 형제를 잃었다. 아버지는 그가 얼굴도 못보고 일찍 돌아가신 상황이었다. 그나마 집안의 기둥이 되어야 할 그도 다섯 살 때 소아마비를 앓고 장애를 입었는데, 어머니는 그나마 있던 집재산을 아들 다리병 고친다고 다 쏟아 넣어버렸다.
  "아홉 살 때까지 목발도 구할 수 없고 그래서 기어다녔는데 그때 다른 친구들이 게다짝 같은 나무신발을 신고 내 바로 위에서 계단 올라가는 걸 기어서 따라가다 보면 뒤축 부분이 제 코 부분에 닿아 무진장 코를 다쳤습니다. 아직도 코가 안 좋은 게 그때 하도 많이 맞아서 그렇죠."
  걸어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고 남들 하는 건 다 해보겠다는 막연한 오기가 있어 주위에서 나무로 돈 지팡이를 짚고 다니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빨갛게 달구어진 연탄집게에 다리가 닿아 살타는 냄새가 나도 내 다리인줄 몰랐을 정도로 다리의 마비가 심했던 사람인데 이제는 신경이 많이 살아났어요. 등산을 취미로 삼으면서 더욱 좋아져 경기도 일대 산은 안다녀본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공부는 그에게 별다른 취미가 생기지 않았다. 빨리 다른 기술을 배워야 될 것 같은 생각에 결국 중학교를 끝으로 "가방끈"과의 인연은 포기했다. 표구제작 일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럭저럭 기술을 익히기도 했지만 몇 년 후 싼 가게자리가 났다는 얘기를 듣고 자기 사업을 해보고 싶은 생각에 구멍가게 같은 수준이었지만 카센터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좀처럼 통장에 돈이 모일 새 없는 빠듯한 살림살이였지만 그 시기에 결혼을 했고 딸 둘과 아들 하나를 얻었다. 또 팔십구년에는 중계동 영구임대아파트에 당첨이 되어 입주할 수 있게도 됐다. 그런데 내 집이 생겼다는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임대료 등을 내느라 십년 동안 해오던 카센터를 처분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장애우도 1종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장 마음이 혹했지만 만약 1종이 허용되더라도 과연 어느 택시회사가 장애우를 기사로 채용할 것인가. 이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내릴 수 없었던 그는 아예 포기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마음을 돌려 구두닦이를 이제 마지막 평생의 직업으로 삼아 가장 노릇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중 방송을 통해 장애우면서 택시기사가 됐다는 성우현씨 얘기를 들었다. 아니 장애우를 채용해주는 회사가 있다니, 그는 그 다음날로 면허시험장에 찾아가 1종 신청을 했다.
  "그날 직원이랑 세 시간 동안을 싸웠습니다. 택시기사로 일하는 장애우가 있다는데도 담당공무원은 서울시에서 나온 허용범위표를 보여주면서 2급 소아마비 장애우 같은 중증은 안 된다는 거예요. 규정을 보니 절단장애우들만을 중심으로 한 것 같은데 그 이유 중에 하나가 교통사고가 났을 때 다른 사람들을 힘써서 구하지도 못한다는 거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가서 내가 다리를 잘라버리고 오겠다고 막 큰소리를 쳤습니다. 정말이지 택시기사만 할 수 있다면 다리를 몽땅 잘라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죠."
  정부 규정에 의하면 1종 면허는 다리장애의 경우 양쪽 다리 혹은 한쪽 다리의 무릎관절로부터 아래 부분이 없거나 이와 동등의 기능장애를 가진 사람으로만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담당자를 붙잡고 호소반 협박반으로 얘기를 계속 하다 보니 그 담당자도 안돼 보였는지 서울은 규정상 도저히 안 되고 지방으로 가면 허가를 내준다고도 하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얘기를 해주었다. (그 지방이 어디인지 그는 밝히지 말아달라고 했다. 혹여 그 지역 장애우들한테 피해가 갈 것을 염려해서다.)
  아무튼 그 다음날로 뛰어 내려간 그곳 면허시험장에서는 선선히 신체검사를 받아보라고 했고, 그렇게 지방을 다섯 차례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결국 그는 1종 면허증을 손에 쥐었다.
  그런데 택시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정밀진단도 받고 서울시내 지리를 답하는 등의 시험도 봐야 하는 관문이 남아 있었다. 결국 그 과정도 합격, 그러나 취직이라는 만만치 않은 또 하나의 시험대가 그를 또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의 고심과 수소문 끝에 방송에 나왔던 성우현씨의 차를 쫓아가서 사정을 얘기하고 회사 명함을 얻었다. 그리고 바로 그 덕수콜택시 회사를 찾아갔다. 가슴 떨리며 면접을 보았고, 마침 핸드콘트롤이 장착된 차량을 탈 장애우파트너를 두 달 넘게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있어 운 좋게 바로 그 다음날부터 일하게 됐다. 한 차로 주야간 교대로 일하는 택시회사의 규정상 핸드콘트롤이 장착된 장애우차량은 함께 일할 두 사람이 확보되어야 운행되는 것이다.
  드디어 95년 12월 13일, 첫 출근을 하기 전날 밤, 윤영배씨 뿐만 아니라 노모를 비롯한 온 가족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날 첫 손님을 면목동에서 태웠는데 지리를 잘 모르는 고대 앞으로 가자는 손님이 타는 거예요. 얼마나 긴장을 하면서 운전을 했던지..."
  그와 같은 차량 짝꿍인 김홍석씨는 장애우 쪽에서는 안정된 자리라고 소문난 모 전자에 있었다. 그러나 요새 세상에서 가장으로서 살림을 꾸려가기에는 그곳도 보수가 턱없이 모자라고 일도 단순작업이라 재미가 없어 그만 두고 나와 버렸다. 15살 때 한쪽 고관절이하를 절단해 한쪽 다리만 있는 1급 장애우인 그는 1종 면허증을 쉽게 따냈지만 다른 택시회사에서는 거절당한 경험을 갖고 있다.
  다들 이런 우여곡절을 비슷하게 겪은 후에 취직을 했으니 덕수콜택시 회사에 있는 장애우 기사들은 정말 악착같이 일한다. 한 달에 최고 일할 수 있는 26일의 일수를 다 채우는가 하면 열두 시간씩 삼백 킬로미터를 뛸 때가 많다. 시동이 걸리면 하루 일한 시간과 거리데이터가 기록되는데 덕수콜택시 이석팔 사장이 자세히 보니 대부분의 장애우 기사들이 점심도 먹지 않고 뛰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일반 기사들보다 장애우 기사들에게는 하루 납입금(오전반 육만사천원) 중에서 점심 값하라고 삼천원은 빼준다.
  윤영배씨도 맨 처음 두 달은 점심도 안 먹고 뛰어다녔다. 주야간으로 나뉘는 교대시간 전까지 납입금을 내야 하는데 그것을 채우지 못할 것 같은 조바심으로 먹을 생각이 잘 안 났었다.
  장애우 기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 차량은 핸드콘트롤이 장착된 차여야 하니까 새 차가 배정되는데, 이것은 택시회사 내 관례에 비춰보면 대단한 특전이다. 대부분 오래 된 고참들 순서대로 새 차가 배정되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다른 일반 기사들이 불만을 갖고 있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또 장애우차량용으로 오토매틱 차량을 구입해 핸드콘트롤로 구조변경을 하는 비용이 대당 이백만원 정도 더 든다. 장애우에 대한 편견도 있지만 그 추가비용 때문에 택시회사마다 장애우를 기사로 채용하는데 난색을 표하는 것이다.
  휠체어 장애우 태우는 일도 장애우 기사들에게는 나름대로 보람스러운 일이다. 그의 차량에는 장애우는 먼저 태우겠다는 생각을 가진 기사들의 마음을 담은 스티커가 붙어있다. 운전을 하다보면 장애우를 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점차 좋아지고 있다는 걸 그는 피부로 느낀다. 그래도 장애우 기사라고 하면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는 것 같다고 한다.
  "어떤 뇌성마비 장애우 택시기사는 처음 영업을 하는데 말하는 것부터 이상해 장애우라는 걸 알고 두 번째 손님까지 그냥 내리더랍니다." 그는 아직 그런 경우까지는 당해보지 않았지만 신기하게 손만 움직여 운전하는 걸 보고 어떤 손님이 이유를 물어 장애우 차라고 설명해주니 대번에 표정이 변하면서 손잡이를 잡더니 목적지에 갈 때까지 손을 놓지 않더란다.
  "95년의 서울시 통계에 의하면 서울에서 운행되어야 할 택시의 적정규모는 칠만오천 대이지만 현재 일만여 대가 부족한 실정이라고 한다. 십일만 명이 택시운전이 가능하지만 그중 사만여 명만 기사로 일하고 있다. 그러니 각 택시회사마다 기사가 모자라서 택시기사 시험을 치고 나오는 순간부터 부족한 인력을 유치하느라 안달이지만 적합한 자격을 갖춘 사람임에도 장애우라는 이유 때문에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거절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 슬픔을 알고 있는 이 회사 소속 26명의 장애우 기사들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함께 어렵게 살고 있는 한 아무개 군을 위해 생활비조로 조금씩 돈을 모아주고 있다.
  택시영업은 운에 따라 하루가 좌우되는 그야말로 운수업. 막연히 기다리지만 않고 자신이 어렵게 만든 행운을 나누기 위해 할머니나 장애우가 보이면 먼저 가서 태우는 그의 신나는 핸들은 오늘도 잘도 돌아간다.

 

글/ 한혜영 기자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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