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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기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인권운동가 송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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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3km.
‘그 사람’을 만나러 달려간 거리이다. 몇 차례나 약속 장소가 변경되는 과정 끝에 ‘그 사람’을 만났다. 휠체어에 의지한 몸으로 지난 18대 총선에서 지역구에 직접 출마해, 전국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인물이기도 하다. 인터넷을 통해 먼저 확인한 그의 모습은 여린 듯 작은 체구인,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우리의 이웃 같다는 느낌부터 앞섰다.

   
▲ ⓒ채지민 객원기자
송정문. 37세의 인권운동가. 지난 총선에 출마했다는 그 사람. ‘아구할매’라는 대명사가 생길 만큼 인기 있는 방송작가로 활동했다는 거 - 미리 알고 있던 사전 지식이나 정보는 부족해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는 기대감은 지리적인 거리가 줄어들수록 증폭되는 법이다.

약속 장소에 차를 세우고 인근 공원으로 향했다. 잠시 기다리자 저쪽에서 손을 흔드는 누군가가 눈에 확 들어왔다. 초면인 만남인데도 손을 흔들며 서로를 반길 수 있다는 건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반갑게 인사 나누며 가까운 벤치로 향했다.

앉자마자 그의 몸 상태를 확인하려는 눈길이 잠시 이어졌다. 지난 주 첫 연락을 주고받을 때, 부상을 당해서 입원하고 있다는 소식을 맨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디를, 어떻게, 왜 다쳤다는 걸까? 그것도 입원을 해야 할 만큼이라고 했던데.

“작년에 장애인 이동권 보장과 활동보조인과 관련해서, 창원시청과 합의를 본 게 있어요. 장애인 권리가 보장되는 조례를 만들기로 합의했는데, 이후 협의 과정 중에 우리들의 의견을 계속 묵살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입법예고가 된 거예요. 장애인에게 꼭 필요한 권리는 다 빠지고, 공무원들한테 편한 내용만 담긴 것이었죠.”

그래서 기자회견을 하고 농성을 위한 천막 설치를 진행하던 과정에, 저쪽 교통과에서 협상을 하자 해서 천막 치는 걸 잠시 멈추고 기다렸단다. 그런데 느닷없이 행정과 쪽 사람들이 몰려나와 설치 중이던 천막을 강제로 철거하는 과정에서 장애인들이 많이 다쳤고, 뼈까지 부러져 수술하게 된 경우까지 생겨났단다.

그래서 이렇게 할 거라면 시장을 직접 만나야겠다며 들어가다 제지당하는 과정에서, 송정문 씨를 막으려던 시청 관계자들이 그의 휠체어를 계단 밑으로 집어던져버렸다고 한다. 잘못 들은 것 같아서, 말을 끊고 다시 한 번 되물었다.

“네, 저의 휠체어를 계단 밑으로 던져버리고, 문을 잡은 채로 버티던 저를 밀치면서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어요. 그래서 문에 끌려가다가, 문 아래쪽으로 손이 끼어버렸죠. 손목과 손등에 부상을 입어서 입원했는데 보상하겠다고, 치료비를 주겠다는 말로 무조건 덮으려 하더군요.”

휠체어를 탄 여성 장애인의 휠체어를 내던지다니, 그가 문을 잡고 있는 게 분명히 보였을 텐데도 그대로 문을 닫아 부상을 입히다니…. 이게 1960년대나 70년대가 아닌, 2008년 봄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갑자기 그 만행의 현장에 같이 서 있는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 이런 일이 비단 이 곳에서만 벌어지는 건 아닐 게 아닌가. ‘복지’ 운운하는 표어 뒤에 숨어든, 낡은 사고방식의 생생한 현장을 목격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몇 마디 더 주고받다가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오늘은 ‘그’를 만나러 왔지, ‘그들’을 성토하러 달려온 게 아니니까 말이다. 가장 기본적인 질문부터 건넸다.

“장애요? 세 살 때의 일이에요. 예전에는 시장 같은 데 흙으로 쌓아놓은 둔덕이 많았잖아요. 기둥이나 굴뚝같은 걸 지탱하기 위해 흙으로 볼록하게 쌓아놓는 거 말예요. 거기에 올라가서 놀다가 뒤로 굴러 떨어졌는데, 둔덕이다 보니까 외상은 없었대요. 그런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말이, 그 이후로 애가 갑자기 걷지 못하고 울면서 집으로 기어서 갔다 하더라고요.”

집 주변에서 뛰어놀다가 둔덕에서 굴러 떨어지며 탁 주저앉았는데, 뼈에는 이상이 없는 상태로 신경만 상하게 된 거란다. 당시 병원에선 전혀 상관없는 소아마비 진단을 내려서, 엉뚱한 약만 먹기도 했었단다. 17살 때 큰 병원에 가서, 요추를 다쳐 요추 아래가 마비된 거라는 판정을 최종적으로 받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사회운동의 길, 진보의 길에 왜 몸을 담게 된 걸까. 무엇이 그를 인권운동이라는 가시밭길 세상으로 이끌어 낸 것일까.

   
▲ ⓒ채지민 객원기자
“이런 말을 하면 다들 웃지만… 저의 예전 소망은 현모양처였어요. 그랬던 사람이 어떻게 여성운동을 하느냐 말씀하시는데,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건 평범해지고 싶었기 때문이었죠. 세 살 때 장애인이 되고 여덟 살부터 시작되는 의무교육도 못 받으며 집에만 계속 있는데, 주변 얘기를 들어 보니 학교에 가고 시험을 치르고, 고3이 되면 대입 걱정 취업 걱정 등등, 모든 게 다 시간대별로 단계라는 게 있더라고요. 그런데 저한테는 그런 게 하나도 주어지지 않으니까, 결혼해서 평범하게 아이 낳고 사랑 받으며 살고 싶다는 게 최고의 소망이 됐던 거예요.”

그렇게 지내다가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게 되자, 인생 목표의 절반을 이루게 된 행복을 느꼈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는데, 못 낳을 줄 알았던 아기를 갖게 됐단다. 주위로부터 임신이 안 될 거라는 말만 들었는데, 실제 아기를 갖게 되니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를 갖고 나니까, 주위에서 전부 다 낙태를 권하는 거예요. 저는 어떻게든 낳으려 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을 피해 다니느라고 임신 중에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했어요. 당시 남편은 신학생이었기에, 외지에 나가 있다가 주말에만 오곤 했죠. 그렇게 있다가 애를 낳기는 낳았는데….”

송정문 씨의 인생이 변환(變換)되는 대반전은 이 시기에 시작되고 있었다. 그 첫 계기는 오히려 아주 단순한 부분이었다. 직장에 다니기에 분유로 전환해 먹이면서, 항상 여분의 분유를 하나씩 준비하고 있었단다. 언제든 나가서 구입해 올 입장이 아니었기에 여분으로 꼭 챙기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것마저 없다는 걸 발견했단다. 사다 놓는다는 걸 깜박했다는 뒤늦은 후회와 함께.

“배고프다고 애가 자지러지게 우는 거예요. 정말 그렇게 우는 걸 처음 봤을 만큼…. 그래서 쌀을 푹 끓여 미음을 묽게 만들고 있는데, 엄마로서 그런 울음소리를 계속 듣고 있어야 한다는 건 정말 진짜로 힘들더라고요. 그렇게 같이 울면서 미음을 먹이고 난 뒤, 저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됐죠.”

남들이 하는 걸 다 못하며 살아온 장애인이라 해도, 인생을 살아온 생명인데 애 낳으면 도움을 줄 만한 제도가 안 있겠나…. 그래서 여러 기관으로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동사무소에 연락하니까 그런 게 없다고 해서, 시청으로 문의를 했단다. ‘내가 장애인인데, 애를 낳아서 키우기에 도움이 될 제도가 있는지 알고 싶다.’ 그런데 전화를 받았던 그 시청 공무원은 대뜸 이런 한마디를 던졌단다. ‘중증장애인이 어떻게 애를 낳느냐?’

“이게 지난 99년도의 실화니까, 실제로는 얼마 되지도 않은 일이죠. 그런 소리까지 들어가며 도청에 다시 전화를 하니까, 봉사회 조직이 있긴 있는데 제 남편이 비장애인이라서 해당이 안 된다는 거예요. 최종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답을 듣고 나서, ‘아, 이건 정말 아니다. 내가 아무리 평범해지고 싶고 그렇게 살고 싶다 해도, 나에겐 그런 삶이 없는 거구나.’라는 걸 그때 알았어요. 정말 너무 늦게 깨달은 거죠.”

그런 일을 직접 겪고 난 뒤 주변의 여성장애인들을 만나면서, 자신과 같은 입장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시작했단다. 현모양처를 소망하던 송정문 씨가 ‘인권’이라는 주제를 비로소 떠올리고, 그 운동에 관심을 가지며 뛰어들게 된 계기는 결국 일상생활의 작은 한 부분에서 시작된 셈이다.

이후 인권 공부를 계속하면서 여성장애인운동을 본격화하기 위해, 경남여성장애인연대를 결성해서 초대 대표로서 여성장애인들의 모임을 활성화시켰다고 한다. 그 다음에 경남420장애인차별철폐연대 경남공동실천단을 통해 최초로 지역에서 투쟁을 시작했단다. 그렇게 활동을 펼쳐가다가, 그에게 대중적인 지명도를 안겨 준 방송국 생활이 전개된다. 마산MBC라디오의 정치풍자 시사프로그램인 ‘아구할매’의 작가로 현장 활동을 옮긴 것이다.

   
▲ ⓒ채지민 객원기자
“방송에 있다 보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하고,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어요. 그런데 언론의 한계라는 게 분명히 있더군요. 남을 통하거나 누군가 일을 벌여야 글로 다룰 수가 있지, 작가 자신이 직접 현실을 파고들기란 참 힘든 부분이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장애인이나 인권 분야에는 아직도 직접 일을 해야 할 당사자들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방송을 그만 둔 다음 다시 현장에 뛰어들게 됐죠.”

그래서 맡은 게 경남장애인자립생활센터 협의회의 대표와, 진보신당의 경남도당 공동위원장이라는 위치로 새롭게 말을 갈아타게 됐단다. 갈아탄 게 아니라,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할지도 모를 일이다.

‘송정문’이라는 이름에는 제18대 총선 지역구 출마자라는 부연설명이 항상 따라다니기에, 그 대목을 눈 감고 지나치긴 어려웠다. 정치 얘기는 가급적 배제하고 싶었지만, 들어야 할 내용이 분명 있을 것 같아 질문을 이어갔다. 국가적인, 정당적인 이유 같은 거 말고, 이번 총선에 임한 개인적인 의미는 무엇이냐고.

“휠체어를 타는 지체장애1급 장애인이 지역구에 나온 적은 없었죠. 그래서 시도를 해보고 싶었어요.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일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출마했는데, 단지 중증장애인이란 이유로 다른 평가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장애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실력 있는 후보’로 받아들여질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도전이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겠죠. 저 자신에 대한 하나의 실험이자, 세상에 대한 절규를 하고 싶었다고 할까요? ”

스무 살 전후의 나이였던 시절, 송정문 씨가 휠체어를 타고 길에 나오면, 얼굴도 모르는 어르신들이나 약주 한잔 걸친 분들이 침을 마구 뱉거나 비아냥거리는 말을 내지르곤 했단다. ‘니가 왜 나왔냐? 집에나 있지.’ 휠체어를 보며 그런 모욕과 폭언을 일삼던 시절이 분명하게 기억나기에, 총선에 출마한 휠체어 장애인을 어떻게 대할까 하는 점도 솔직히 그의 머릿속에는 실험대로 존재했다고 한다.

“정당 내에서조차 기대치를 아주 낮게 잡고 있었죠. 그런데 실제 유세에 나가니까 아, 이게 아닌 거예요. 처음 뵙는 어르신들이 막 다가오셔서 저의 손을 잡고, ‘당신 같은 사람이 국회로 가야 된다.’ ‘꼭 가서 장애인 복지는 물론 당연히 하고, 노인 복지 같은 걸 우리 마음 잘 아는 사람이 해야 한다.’ 하면서, ‘내 니 찍어 줄게.’라는 말씀을 참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예전 같으면 저한테 힘겨움을 안겨 줬던 그 연령층이 말이죠. 오히려 제가 놀라고 의아스러웠을 만큼 어르신들의 지지를 많이 받으면서, 예상치를 훨씬 넘는 득표를 하게 됐어요.”

다시 도전할 의향이 있냐고 슬쩍 운을 띄워 보았다. 절반 정도는 당선이 보장된다던 비례대표 아닌, 지역구 출마라는 출사표를 던진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리란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례대표를 강력하게 원했다면 될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지역 사람들의 마음, 서민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봤어요. 그래서 최선을 다해 직접 뛰는 쪽을 택한 거죠. 총선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건 없지만…, 지금 생각은 그래요. 만약에 다시 한다면 국회의원 아닌 시의원이라도 나와서 민심을 직접 얘기하고, 그런 과정이 있어야만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 모든 일정을 도맡아 관리해주는 동료이자 동지인 김정일 사무처장과 함께한 송정문 활동가 ⓒ채지민 객원기자
본인 스스로에게 ‘장애란 어떤 의미인가?’를 물었다. 지금과 예전은 참 많이 달랐던 것 같다며, 잠시 생각을 되짚던 그가 입을 열었다. 옛날에는 장애라는 걸 ‘내가 감당해야 할 짐이구나.’ 하며 살았단다. 어느 날 문득 넘어져서 장애인이 됐기 때문에 내가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부모님도 그 누구를 원망해선 안 된다고 가르치셨단다. 감당하라고 배웠기 때문에 감당하겠다고 하며 살아갈 뿐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인권이라는 대목에 별 관심이 없을 때고 잘 모를 때였으니까.

“그런데 인권운동에 들어가면서, 또한 제가 현 제도를 조금씩 바꿔가는 데 몸을 담고 있으면서, 장애는 우리에게 주어진 또 다른 기회라는 인식을 갖게 됐어요. 이것을 통해서 좀 더 인권을 파헤치게 되고, 이것이 있기 때문에 꼭 저와 같은 처지는 아니더라도 이 땅에서 차별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았나 생각하게 돼요.”

신체적으로 같은 상황에 있을 후배 장애인들, 특히 여성장애인들에게 전해 줄 희망이나 조언 같은 게 있는지를 물었다. 송정문 씨는 열아홉 살 때 처음으로 휠체어를 사서 집 밖으로 나왔다는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그 이전엔 집 안에만 있다가, 세상 밖으로 처음 나온 게 열아홉 살 때라는 것이다.

   
▲ ⓒ채지민 객원기자
“저도 그랬지만 우리 여성장애인들이 많이 여려요. 요즘은 세상이 크게 바뀌어서 자유롭게 외출한다 해도, 그 마음 한구석에는 두려움과 피해의식 같은 게 많이 남아 있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그 분들에게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희망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직시하고 남의 도움이 올 거라는 생각 자체를 안 해야 한다는 점이에요.

저의 예전 소망도 현모양처였듯이, 백마를 탄 기사만 바라고 있었던 거잖아요. 누군가 나를 구원해 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결국 자기가 그 안에서 나오지 않으면, 그 곳이 학교든 취업의 문이든 집 안이든 무엇이든 간에, 거기에서 떨치고 나오지 않으면 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중요해요. 그것을 직시하고 나면, 누구나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증명해 낼 수 있을 거라고 저는 믿게 됐어요.”

사진 촬영을 마치고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눴다. 운전대를 잡고 돌아오는 길 내내, 송정문 씨가 설계하는 세상이 언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될 것인가를 그려보며 재조립해 보았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건립하고 부쉈다가 다시 세우는 과정을 반복하다가, 긴 여행을 끝내며 계기판을 들여다봤다. 왕복 716.3km. 장거리 운전의 피곤함을 툭툭 털어내며 차의 시동을 껐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좋은 인연으로 연결되는 것만큼 즐겁고 기쁜 일은 없기 때문일까? 아구할매가 아닌, 진정한 ‘아구아지매’를 만나고 돌아온 긴 여행의 끝은 아주 상쾌한 마음이었다.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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