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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의식으로 충만한 힘, 바로 국민이 희망입니다

[사람사는 이야기] 국회의원 곽정숙

본문

“어떻게 오셨습니까?” - “미리 예약은 하셨습니까?” - “네, 들어가십시오.”

국회 정문을 통과하는 동안, 경비를 담당하던 이들과 주고받은 대화의 전부이다. 멋진 표지 촬영을 위해 국회 내 의원동산 구석구석을 미리 답사하는 수고(?)까지 더했었는데, 실제 취재일자로 정해진 건 하필 2008년의 장마가 시작된 날이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의원회관에 들어섰다. 출발하기 전 옷을 갈아입는 와중에, 지갑을 두고 나왔다는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다. 신분증이 없어 신원확인이 안 되니 이를 어찌할까…. 몰래 감추려던 난감한 표정을 읽었는지, 안내 담당 직원이 미소 지으며 “다음엔 꼭 가지고 오세요.”라며 한마디 거들어 줬다.

   
▲ ⓒ채지민 객원기자

대한민국 국회 의원회관 228호실.

출입구에서 처음 귓가에 울려 퍼진 건 맑은 웃음소리였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사무실 내의 모두가 수화기를 귀에 대고 내지르는 웃음꽃이 만발했다. 나름 신기한 일이었다. 무심한 척하며 내용을 들어 보니, 민원을 처리하는 통화도 있었고 의정활동과 관련된 통화도 여럿 있었다. 그런데 그 모두를 어떻게 반가운 목소리로 전달하는 걸까?

여담이지만, 개인적인 글쓰기나 대화중에 ‘되는 집’이란 표현을 가끔씩 사용하곤 한다. 뭔가가 ‘되는 집’에서는 긍정적인 사고(思考)가 항상 실현되지만, ‘안 되는 집’에서는 부정적인 결말부터 등장한다는 게 체험으로 익숙해진 인생의 진리였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집은 ‘되는 집’이 분명했다. 오케이!

잠시의 기다림 뒤에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곽정숙. 제18대 국회에 입성한 비례대표 1번의 초선의원.

한국 장애계의, 특히 여성장애인의 권익과 인권 향상을 위해 큰 발자취를 남긴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다. 시민사회현장에서 국회로 활동영역을 옮긴 그에게,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설계하고 실천할 것인지, 그리고 그의 지난 삶은 어떠했는지를 함께 들어 보기로 했다.

곽정숙 의원은 다섯 살 때 결핵성 척추염을 앓게 되어 장애를 갖게 됐단다. 척추에 결핵균이 들어가서 뼈를 갉아먹는 염증을 일으킨 건데, 뼈를 잘라내고 새롭게 연결하는 대수술을 거쳤지만, 연결 부위가 제대로 치유되지 않아 뼈가 앞뒤로 나오는 후유증을 앓게 됐다 한다. 그럼 그 이전에는 잘 걸었는지, 그 증상은 어떻게 발견하게 된 건지 질문을 이었다.

“그 전에는 잘 걸었다는데… 저의 어머니가 어느 날 보니까, 친구들하고 같이 걷고 뛰던 제가 굉장히 지체되고 힘들어하는 느낌이 들었대요. 그래서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병원에 갔는데, 그런 진단이 나와서 곧장 치료를 시작했답니다. 굉장히 빠르게 발견한 거래요. 그래서 그나마 지금 걸을 수 있게 된 거죠.”

그때 곧바로 치료를 하지 않았다면 척추하체가 마비돼서, 아예 걷지도 못하게 됐을 거라 한다. 그럼 학교 문제는 어떻게 했냐고 물으니까, 장애를 갖게 됐지만 여덟 살부터 초등학교는 또래들과 똑같이 다녔다고 한다.

“제 증상이 결핵성이었기 때문에, 치료하는 과정이 수년이나 걸렸죠. 약물치료와 수술치료를 번갈아 계속해야 하는 거라서, 신체적으로는 늘 병약하고 허약했어요. 늘 샛노랗고, 틈만 나면 누워 있고, 학교 가다가 길에서 쓰러지고, 소풍은 물론 엄두도 내지 못했죠. 체육이라는 것도 해본 적 없이 지냈으니까요.”

   
▲ ⓒ채지민 객원기자

굉장히 힘들게 학교를 간다고 가면, 뒤에서 사람들의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게 일상이었단다. “휴우, 저 몸으로 공부해서 뭐하려고. 쯧쯧쯧….” 학교에서도 체육시간만 되면, “너는 아예 교실에 있어!”가 정해진 말이었던 모양이다. 나름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지만, 성적표의 ‘수수우수’ 중간에 ‘미’나 ‘양’으로 적힌 건 늘 체육 과목이었단다.

“아무리 어리다 해도 사람은 누구나 독립의 욕구, 선택의 욕구라는 게 있잖아요. 집안 생활에서도 저는 저의 옷을 직접 가서 눈으로 보며 골라서 사 입고 싶었죠. 그런데도 ‘너는 힘드니까 그냥 집에 있어.’ 하며 모든 걸 다 사다 주는 거…. 물론 저에 대한 가족의 배려였지만, 선택을 할 수 없다는 게 정말 싫었다는 기억이 새삼 떠오르네요.”

바로 위의 언니와 늘 똑같은 옷을 쌍둥이처럼 입으며 지냈던 게, 참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풍경으로 어렴풋이 떠오른단다. 장애를 갖고 병약한 나날을 보냈기 때문에, 어린 마음의 장래희망은 자기처럼 아프고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의사가 되겠다.’ ‘변호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한다.

“공부는 그런대로 잘했기 때문에, 공부 잘하는 아이들 위주의 리더 그룹에는 늘 들어가 있었어요. 그런데 당시 사람들 생각은 장애를 굉장히 절망적이고 좋지 않은 걸로 바라보기만 했죠. 저 스스로도 가족이나 사회에 부담스럽고, 불필요한 존재 같다는 생각들이 저를 굉장히 힘들게 만들곤 했어요. 청소년기에 특히 심했었죠.”

무언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세상에 필요한 존재로 살아가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하는 현실과 환경이 청소년기에는 심각한 절망이었고 힘에 겨웠으며 슬픔 그 자체였단다. 그렇게 절망과 슬픔의 늪에 빠져 있던 인간 곽정숙에게 결정적인 변화의 상황이 찾아들었다는 말이 뒤를 이었다.

“제 나이 스무 살 때… 제 몸이 아주 심하게 계속 아팠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 아픔에 빠져 있다 보니까, 저의 존재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했다고 해야 할까요? 정말 내가 불필요한 존재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가, 왜 내가 태어난 걸까…. 이런 걸 정말 진짜로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성경책을 읽게 됐는데….”

   
▲ ⓒ채지민 객원기자

사실 인생에서는 누구한테도 동일하게 ‘삶의 전환점(Turning Point)’이라는 게 한두 차례씩 존재한다. 그 전환점의 희소성을 확실히 알고 체득(體得)하는 사람한테는 새로운 삶이 구체적으로 펼쳐지지만, 그 중요성과 의미를 간과하는 이들한테는 평생의 한으로 그 기회가 영원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스무 살 당시의 인간 곽정숙은 그 터닝 포인트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승부를 걸었다고 한다.

“인간을 창조했던 창조주가 ‘나’라는 사람을 이 땅에 창조했고, 바라보고 있고, 뭔가 기대감을 가지고 있을 거다. 그런 사실이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창조주의 눈으로 저를 봤어요. 비로소 저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된 것이죠.

그런 눈으로 보니까, 아! 장애를 가지고 있는 저의 자체 모습이 참으로 괜찮은 사람, 오히려 멋지고 소중하다, 창조주가 나를 굉장히 좋아했다, 이런 생각을 제가 갖게 된 거예요.”

그래서 스스로가 너무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고,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이거 괜찮은 거다. 뭐, 어때?’ 하는 관점의 대전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큰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를 정말 적나라하게 다시 바라봤단다.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모든 것을 새로운 눈으로 새롭게 바라보는 순간… 인생의 해답이 결정됐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끄럽고 슬펐던 모든 것들 때문에, 제가 대중목욕탕을 한 번도 가지 못했어요.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그랬는데, 그 시점부터는 ‘아, 괜찮다. 누가 나를 보면 어떠냐. 손가락질하면 어떠냐.’ 그렇게 전혀 개의치 않는 마음이 들어서 비로소 대중목욕탕에 갔고, 그 안에서도 혼자 노래를 할 수가 있게 됐죠.”

그 이후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으며, 스스로의 삶을 만족스럽게 받아들이게 됐다고 한다. 삶 자체가 당당해졌기에 해야 할 일도 많아졌고, 너무 즐겁고 행복해진 과정 속에서 인생의 두 번째 전환점이 실현되기 시작했단다.

“장애 때문에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슬프다 하며 마냥 머물러 있던 저의 시선에, 처음으로 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마음의 여유라고 할까요? 제가 가지고 있던 장애만 집중해서 보는 게 아니라, 저처럼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있던 또 다른 사람들이 그제야 눈에 띄었던 거죠. 아, 저 사람들도 나처럼 슬퍼하고 절망하며 살겠구나. 그래선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는 건데….”

그럼 그 이전에는 다른 사람들이 정말로 안 보였냐고 물으니까 진짜로 안 보였단다. 그 이후로 아픔을 가진 사람들, 장애 때문에 마음을 다친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괜찮습니다. 실은 나도 그랬는데, 알고 보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뭐, 어떻습니까? 다 괜찮습니다.” 비장애인이나 다른 사람들이 말했다면, “니가 뭘 알아?” “니가 내 마음을 알아? 너하고 다르잖아!”라고 했을 법한 이들이 인간 곽정숙의 말에 공감대를 형성하며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단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던 인식을 하나씩 바꿔 줬어요. 초등학교 시절에 부모님이 학교까지 업고 가서 교실 의자에 앉혀 주면, 마지막 수업이 끝날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던, 그런 이들이 대부분이었죠. 움직이지 않는 것, 자신을 감추려는 것, 그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마음만 바꾸면 새 세상이 보인다는 걸 말씀드렸습니다.”

곽정숙 의원은 직접 여성장애인 생활공동체에 들어가서 같이 생활했단다. ‘곽정숙’이란 이름 곁 항상 연상되는 ‘실로암재활원’이란 이름이 그 시점에서 등장한다. 모두의 마음을 열면서 함께 생활한 결과로, 모두 함께 대중목욕탕에 갔다는 대목에선 그의 실천력과 생명력이 읽혀진다. “사실은 제가 끌고 같이 간 거예요.”라는 부연설명에서는 인간적인 면모가 미소와 함께 흘러나온다.

“그들한테 가장 하고 싶은 게 뭐냐 물었더니 공부를 하고 싶다 했어요. 그런 욕구가 모두 다 아주 강했죠. 그래서 공부를 했어요. 야간학교를 개설해서 가르쳐 주고, 낮에도 하고 싶다 하기에 낮에도 공부를 했죠. 기술도 배우자 해서 다양한 기술을 익히기도 하면서, 삶으로써 서로를 알아가고 배워갔던 거죠. 그런 변화를 통해서 얻어졌던 게 저의 인권활동의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나이는 우리 계산으로 마흔아홉. 스무 살 무렵부터 장애인의 인권과 인식개선을 위해 뛰었으니까, 거의 삼십 년 가까운 삶을 그렇게 살아온 것 같다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시설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매김을 하기 위해, 많은 이들을 격려하고 이끌며 밀어 주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눈빛이었다.

   
▲ ⓒ채지민 객원기자

그런 삶의 과정 속에서 여러 장애인연대 및 단체의 대표 입장으로 활동하다가, 국회 의원회관 안에 그가 자리를 갖게 됐다는 점이 그제야 상기됐다. 화제를 바꾸는 의미로 이젠 새 생활에 적응이 됐는지를 질문했다. 아직 100%는 아니지만, 자신감 같은 게 생긴 것 같다며 현재와 미래의 각오를 밝혔다.

“국민과 따로 떨어져 있을 때는 몰랐지만, 저는 첫 의정활동을 거리정치부터 시작했고, 개원되지 않는 동안 촛불의 현장에 있는 걸로 계속 이어갔죠. 국회의원으로서 정치를 하며 이 나라 안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니까, 국회의원 하나만으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답이 나오더군요. 절대다수인 국민의 뜻을 얼마나 깊이 헤아려야 하는가, 말뿐 아니라 깊은 마음으로 그 뜻을 들여다봐야만 한다는 게 절대적 명제로 다가온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도 국민의 뜻을 깊이 헤아리겠다는 그 각오로 나아갈 겁니다.”

국회의원이라는 기대치와 스스로 느끼는 부족함과의 거리감, 신뢰 받지 못하는 정치권과 자신의 의욕을 어떻게 조화롭게 융합시켜야 할지 많은 고민을 거친 모습이었다. 그 해답을 가장 단순한 데서 얻었다는 게 역설적이기도 하다. 가장 기본적인 정답인데도 뒤집어봐야만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 그게 우리 정치의 현주소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곽정숙 의원은 그 답을 얻었단다.

“저 혼자 그냥 하라고 하면 못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국회라는 의정활동을 국민과 함께 하면 되는 겁니다. 그 분들과 함께 하는 것이기에 제가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국민의 뜻을 듣고, 그 분들의 요구를 헤아려서 대의자(代議者) 역할처럼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되는 거다. 할 수 있다.’ 그런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 곁에 함께 있습니다.’라고 이젠 말씀드리고 있어요. 여러분 곁에 함께 있다는 제 마음을 전달하고, 그 분들의 마음을 제가 전달 받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는 가장 먼저 달려가야 하는 것이죠. 그게 의정활동의 가장 최우선이라고 확신하게 됐습니다.”


다양한 경력을 가지고 있고 각 단체의 대표도 많이 했는데, 본인 스스로는 ‘인간 곽정숙’의 전문 분야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대학 전공이 아니라, ‘이것 하나는 내가 제대로 하며 살아왔다.’ 자신하는 전문성이 무엇인지 말이다.

“제가 잘할 수 있는 전문성은 ‘장애인의 마음을 안다.’는 게 제가 가진 전부예요. 그래서 장애인들을 만나 보면, 처음 눈빛만 봐도 저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되거든요. 한두 마디 얘기해 보면, 무얼 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저의 강점은 바로 장애인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거예요.”

국회의원이 된 입장에서, 대한민국을 밝히고 있는 촛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평가하는지를 물었다. 2008년 정국에서 의정활동을 전개한다는 것은 바로 촛불의 의미를 헤아리고, 촛불의 요구를 해결하며 풀어가는 게 가장 큰 당연과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채지민 객원기자

“두 마디로 정한다면 ‘슬픔과 희망이다.’라고 저는 말하고 싶은데요. 제가 그 자리에 참여하고 앉아 있으면, 정말 마음이 아파서 눈물짓다가 또 힘이 생겨서 웃는 걸 반복하게 돼요.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누굽니까. 청소년들, 아저씨, 아줌마, 아이들, 이 모두가 낮에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일을 하잖아요.

그런 뒤 촛불을 들고 모여서 노래하고 외치는데, 현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면 ‘이래선 안 된다’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여러 수십 날을 이렇게 외치겠습니까. 아무리 문화제이고 국민축제라고 말은 하지만, 개개인은 힘겨운 고통을 안고 나와 있는 거잖아요.”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면, 저렇게 광장에 나와 자기 고백을 모두와 함께 하겠냐는 말을 곽정숙 의원은 몇 차례나 반복했다. 촛불을 드는 것도 노동이고, 노동의 현장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라 했다. 힘겨운 고통을 안고 나와서 고치라고, 바꾸라고, 다시 하라며 지적하고 항의하면서, 권리를 외치는 국민의 상처를 볼 때마다 너무너무 마음이 아파진단다. 우리 모두가 처한 바로 지금의 현실이기에.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나라가 잘못 가는 것에 대해 나 몰라라 하지 않고, 주인이 되어 나와 있는 모습들을 보세요. 그것을 비폭력적인 문화로 보다 즐겁게 표현하려 하고 축제로 만들며, 주인의식에 충만한 책임감을 모두의 의견으로 표출하려는 걸 보며, 저는 대한민국이 살아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어요. 마음속에는 딱 한마디 문장이 새겨집니다. ‘국민이 희망이다!’ 우리는 지금 생생한 희망의 현장을 마주대하고 있는 겁니다.”

어느덧 편하게 나누던 대화의 자리를 정리할 시간이 됐다.
그래서 곽정숙 의원의 포부와 다짐을 되새길 만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이제 막 의정활동을 시작했지만 시점을 4년 후로 돌려서, 의정활동을 마무리하는 입장이 됐다는 가정 하에 물었다. 지난 4년의 임기 동안 국회의원으로서 무엇을 했고,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내릴 수 있겠는가.

“저는 지난 4년 동안 무조건 약자 편에 서 있었습니다. 장애인, 농민, 서민, 노동자, 소수자, 여성, 이렇게 정말 어렵고 힘든 사람들 편에 늘 서 있었습니다. 정말 무조건적으로 그들과 함께 서 있었고, 그들 편에서 최선을 다하며 함께 있었고, 그렇게 4년을 살아왔습니다. 라고, 저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겁니다.”
말이 나온 김에 또 하나의 가정법을 꺼냈다. 지난 4년 동안 입법했던 여러 법률안 중에서, ‘내가 이 법 하나는 정말 제대로 잘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법은 무엇인가?

곽정숙 의원은 질문을 듣자마자,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지체하는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저는 ‘여성장애인채용법’을 정말 잘 해냈다고 말하게 될 거예요.”

모든 인터뷰를 마쳤다. 그리고 다음 순서를 진행하려 하자, 믿음직스러웠던 이 ‘의원님’은 일순간에 수줍은 소녀로 돌변했다. 어색한 표정, 어색한 자세,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를 시선 처리와 두 손의 자세…. 바로 사진 촬영이 시작된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있을 때 가장 난처한 순간이 이럴 때지만, 반대로 가장 재미있기도 한 게 바로 이와 같은 ‘모델과의 대결’이다.

물론 그 대결은 언제나 서로가 만족하는 윈윈(win-win)게임으로 마무리되곤 한다. 촬영자의 입장으로 사무실 여기저기에 있던 보좌관들을 전부 불렀다. 그리고 부탁 겸 강요를 했다. 지금부터 의원님을 웃겨달라고. 잘 알겠다며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달려들어, 의원님을 웃기려는 공작(?)이 시작됐다.

그랬더니 이건 또 뭔가. 잠시 공격을 당하는 척하던 의원님이 단 몇 마디 말로, 모든 보좌관들을 한참 동안 깔깔거리게 만들었다. ‘되는 집’의 정겨운 풍경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상황의 급반전 - 사진 촬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순식간에 일사천리로 마무리가 됐다.

모두가 자주 만나게 될 얼굴이기에, 정겨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의원회관을 걸어 나왔다. 잔뜩 찌푸린 하늘을 배경으로 한 의원회관 건물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 건물의 주인공이라는 300여 명은 이 자리를 권력의 상징이라 자부할까, 아니면 국민과 연결되는 가교(架橋)의 수단으로 활용할까….

함량미달의 일그러진 의원들을 그동안 너무 많이 경험했기에, 솔직히 별다른 기대 같은 것도 생겨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희망을 밝혀 줄 누군가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모두가 높은 것, 화려한 것, 이익이 되는 것, 그럴싸한 것에만 눈 돌리고 있을 때
낮은 곳, 그늘진 곳,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가 함께 땀 흘리는, 그런 누군가를 기다리며 관심과 관찰의 끈을 놓지 않고자 한다.

국민과 함께 하겠다는 믿음과 희망을 다짐한 곽정숙 의원이 그 대표적 인물로 손꼽히리라 기대한다. 4년 후에 의정활동의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룩해 낸 웃는 얼굴로, 모두의 축하와 격려를 받는 장면을 미리부터 마음에 담아두고자 한다.

만남의 자리에서 전하지 못한 인사를 이 지면을 통해 대신한다.
“의원 당선 그리고 의정활동의 시작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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