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뒤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 함께 하는 세상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뒤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사람사는 이야기] 신종호 아산사회복지재단 예술감독

본문

오래된 얘기 하나가 떠오른다. 1990년대 초에 들었던 ‘농담시리즈’ 같은 내용인데, 사실 그 안에 인생의 중요한 가치관이 담겨 있는 것 같아 지금껏 기억하고 있는 우스갯소리이기도 하다. 대화 속 주인공이 ‘대머리’라고 지칭되기에 그 표현에 대한 양해를 미리 말씀드리며, 당시에 들었던 내용 그대로를 되살려 보고자 한다.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중매를 서던 어떤 사람이, 여자 쪽 집안에 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남자’는 최고의 대학을 나왔고 직장 또한 최고로 좋은 데 다니고 있으며, 재산도 넉넉하고 집안이든 뭐든 남부러울 게 없는 조건을 다 갖췄는데… 다만 단점 한 가지가 있다면 아직 젊은 나이인 그 남자가 ‘대머리’라고 했다. 순간 여자 쪽 집안의 표정은 일순간 일그러졌다는 게 첫 번째 내용이다.

같은 결혼의 중매를 서던 또 다른 사람은, 다른 여자 쪽 집안에 가서 똑같은 내용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남자’는 사실 대머리라고. 그걸 먼저 밝혀놓겠다고. 하지만 최고의 대학과 최고의 직장에 최고의 어쩌고저쩌고 그 모두를 소유한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을 신랑감으로 소개하겠다고. 그 얘기를 듣던 여자 쪽 가족은 동시에 만족감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이것이 두 번째 경우이다.

별 내용도 없는 말장난이라 치부하기 쉽지만, 위의 두 가지 상황은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내포하고 있다. 수많은 장점들을 드러낸 다음 마지막에 등장하는 단점 하나는, 앞서 언급했던 모든 장점들을 일순간 반토막내기 일쑤이다. 하지만 미리 고백한 하나의 단점은 이어지는 장점들에 가려지며, 장점 위주의 결론으로 대미를 장식한다는 게 인지상정이라는 것 - 우리네 인생은 바로 그런 것이다. 사람의 가치를 장점에 두느냐 단점에 두느냐의 차이는, 위의 예와 같이 단어와 문장 하나의 위치만으로도 180도 달라지는 게 대부분이다.

‘사람사는 이야기’ 본문은 적지 않고, 웬 대머리타령이냐고 지적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다. 그런데 오래 전 그 우스갯소리를 인용해야만 이번 글이 시작될 것 같아, 두서없이 긴 서두를 먼저 풀어냈다. 이제 이 대목에서 함께 생각하고 싶었던 문제를 언급하고 싶다.

그 얘기에 등장했던 ‘대머리’라는 단어 말고 같은 자리에 ‘장애’라는 글자가 들어간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적 세상은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될까? 99가지 장점 뒤에 마지막으로 ‘장애’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과, ‘장애’를 먼저 언급하며 밝힌 다음에 99가지 장점을 소개하는 건 어떤 차이가 있을까? 대머리의 예와 같을까? 아니면 변함없는 편견의 늪에 빠져버리고 말까? 본문으로 이끌기 위해 길게 이었던 이 질문의 판단은 독자 여러분 개개인의 몫이 되리라 짐작해 본다.

    신종호 아산사회복지재단 예술감독 ⓒ채지민 객원기자 할머니 등의 사라짐, 그리고 홀로서기

신종호 - 미국 신시내티대학(University of Cincinnati) 비올라 전공 음악 학사 및 석사, 서울심포니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역임, 구리시 교향악단 음악감독 역임, 현 아산사회복지재단 예술감독 재직 중 등등.

그가 지닌 화려한 약력의 극히 일부분만 옮겨놓았는데, 그것만으로도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세계적 명문 음대인 신시내티대학을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현재 음악을 전공하고 있을 이 땅의 후배들한테는 크게 우러러볼 대선배임이 분명하다. 게다가 국내외에서 행한 수많은 활동영역과 수상경력을 나열하듯 읽다 보면, 이 주인공에게 쏟아졌던 찬사가 오히려 부족한 게 아닐까 싶은 느낌마저 든다.

바로 이 시점에서 질문 아닌 질문 하나를 슬며시 덧붙여본다. 위와 같은 화려한 인생여정을 소개할 경우, ‘장애’란 단어는 맨 앞에 붙이는 게 좋을까? 아니면 마지막에 언급하는 게 나을까? 앞서 소개했던 우스갯소리와 같은 예가 우리 일상에 등장하게 되면, 문장의 순서만으로도 모든 게 뒤바뀐 이미지로 비춰지게 된다. 농담시리즈의 웃음이 실제 삶 속에선 상처나 심각함으로 돌변하는 게 순식간이란 의미이다.

“아장아장 잘 걷던 아기가 열이 심하게 나서 병원을 찾았고, 그 열이 단순한 감기인 것 같아 주사를 맞았는데 올라갔던 열이 갑자기 떨어지며 다리가 이상해졌다는…, 그런 얘기는 어른들한테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어릴 적 기억이라면 제 병을 고치려고 용하다는 데마다 찾아가서 침을 맞으며 별의별 치료를 다했다는 거,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도 주사 맞는 것하고 제 몸에다가 손을 대는 것에 노이로제 같은 거부감이 있어요. 그 어릴 적 기억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도 예방주사 하나 맞는 데도 식은땀이 막 흐를 정도로 힘듭니다.”

그것 이외에는 어린 시절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여러 가지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건 몇 가지가 있지만, 어렸을 때의 기억은 고통과 더불어 힘들었던 내용밖에 떠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할머니 등에 업혀 일반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지금처럼 휠체어도 없던 1956년생 남자의 어린 시절은 모든 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는 기억뿐이란다.

남겨지는 건 ‘끝날 때까지는 참자’라는 거. 용변을 참고 무언가를 참아야 한다는 본능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참는 것에 대한 ‘힘들었던 기억’이 주로 남겨진다고 했다.

당시 학급 동료들이나 선생님들의 시선 내지는 반응이 어땠느냐고 물었다. 이건 물론 요즘 얘기가 아닌 40년도 훌쩍 넘은 먼 과거의 상황을 묻는 대목이다. 지금의 장애인들 삶과 모든 게 엄청난 차이가 있던 시절이었기에, 당시의 어려웠던 생활을 얘기한다면 지금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단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오면서 느꼈던 나름대로의 모든 감정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담아놓고 있는 게 낫지, 지금 굳이 끄집어내서 세세하게 나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그의 음성이 귓전에 여운처럼 맴돌았다.

서울에서 태어나 살다가 대전으로 옮겼고, 할머니 등에 업혀 다니던 학교생활은 4학년에 이르러 멈춰 서게 된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집안 생활을 책임지셨던 어머니는 그의 등하교를 대신할 수가 없었고, 결국 그의 새 보금자리는 성세재활학교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신종호 씨는 자신의 인생 그림 자체가 뚜렷이 기억나는 건, 바로 그 재활학교에 들어간 이후부터의 시점이란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일반학교를 다니다가 특수학교로 옮기고 난 뒤 적응이 잘 됐는지, 눈높이가 달라진 세상 속에서 무엇이 가장 많이 바뀌었는지를 말이다. 새로운 환경이 좌절의 계기로 작용하는 경우를 많이 접해왔기 때문이다.

“처음엔 아무런 의식도 없이 다녔던 것 같은데, 특수학교에 적응하면서부터 제 인생의 투쟁과 스스로의 인식이 뚜렷하게 생겨난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도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있는 줄을 몰랐어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집단으로 있다는 건 처음 알았는데, 저 말고는 다른 장애인들을 처음 만나게 된 셈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대부분 군대 갔다 왔다고 말을 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신은 성세재활학교라는 군대를 갔다 왔다고 떠올리게 된단다. 단체생활을 직접 체험한 사람만이 느끼는 묘미랄까? 수많은 어려움과 그 안에서 느끼는 많은 체험들이, 그 곳 역시 하나의 사회임을 깨닫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약육강식과 서열화(化), 그리고 드러내지 않는 경쟁 같은 수많은 현상들을 직접 겪으며 가슴 깊이 받아들이게 됐다고 한다. 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이 세상에는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거, 어딘가가 달라도 모든 게 다 다른 사람들이라는 걸 겪게 됐단다. 그래서 그 안에서 뭔가를 나타내려고, 또한 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각각의 노력이 겸비돼야만 했다는 것!

    ⓒ채지민 객원기자 기회는 갑자기, 아무도 모르게 찾아든다

이어지는 내용에 계속 언급이 되겠지만, 신종호 씨의 모든 인생은 ‘귀인(貴人)’들과의 만남의 연속이다. 꼭 필요할 때, 계기가 절실할 때, 반전이 요구될 때마다 초면의 ‘누군가’가 나타나고 등장한다. 일상의 ‘아무나’가 아니라, 꼭 필요한 ‘인생의 그 누군가’가 정확한 시점에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는 뜻이다. 군대와 같았다는 재활학교에서 그의 삶을 뒤바꾼 첫 번째 인연은 누구였을까? 강민재 선생님이라는, 인연이 연결될 리 없을 외부의 낯선 인물이 그의 앞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 분은 서울대를 나온 바이올린 선생님이셨는데, 당시 대전에서 가장 유명한 선생님이셨어요. 그 분하고 저희들이 만날 수도 없고 어떻게 보면 서로 연결될 끈도 전혀 없었는데…, 정말 신의 은혜라고나 할까요? 대전 성세재활학교가 유성 근처에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선생님이 유성으로 목욕을 하러 지나가다가, 재활학교생들이 운동장에서 먼지 속에 노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셨대요. 목발을 짚고 뛰거나 목발마저 자유롭지 않은 아이들은 기어서라도 야구와 축구 같은 걸 했었는데, 그 선생님의 눈에는 그 장면이 큰 의미로 다가왔던 모양이에요.”

‘나는 목욕을 하러 가고 있는데, 저 아이들은 저렇게 땀 먼지를 뒤집어쓰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가 저 아이들한테 뭔가를 해줄 수 없을까?’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강민재 선생님은 목욕을 다녀오는 길에, 예고도 없이 재활학교 안으로 들어오셨단다.

사전약속도 없이 임의로 방문했던 건데, 학생들의 여러 생활 모습을 둘러보다가 결심 하나를 하게 되셨단다.

‘내가 이 아이들한테 바이올린을 가르쳐야겠다!’ 특별하고 체계적인 예체능교육이 없던 학교 상황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자신의 주특기인 음악, 그 중에서도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결심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희망자를 모았는데, 아무래도 악기 구입 자체에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가정형편이 상대적으로 괜찮았던 아이들 위주로 팀이 꾸려졌단다. 또한 형편이 어려웠던 이들한테는 학교에서 지원을 함으로써, ‘음악’이라는 세상이 그들 앞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저는 그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보면, 오기가 굉장히 많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처음엔 지원을 하지 않았었는데, 다른 학생들이 시작하고 연습하는 걸 보며 관심을 갖게 됐죠. 그래서 저도 뒤이어서 음악을, 바이올린을 같이 배우게 됐어요. 선생님이 정말 열심히 가르쳐주셨는데, 그 중에서 몇 사람이 나름 음악적인 재능을 갖추게 되었죠.”

시작은 많은 학생들이 같이했지만, 결국 남은 건 서너 명 정도였단다. 특별히 열심히 했던 것 같진 않지만 바이올린이 항상 곁에 있는 생활은 계속 이어졌는데, 중학교 과정까지 마치고 나니까 서서히 현실적인 문제가 다가왔단다. 이제는 스스로 벌어먹고 살아야 할 시간이 됐다는 거, 이 사회에 나가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할, 다른 문제는 고사하고 자기 자신부터 책임져야 할 시기 앞에 놓이게 됐다는 뜻이 된다. 재활학교에서 지낼 나이제한에 다가섰다는 것.

인생의 전환점은 그 시점에도 등장한다. 재활학교 이사장님이 일본통(通)으로 알려진 분이었는데, 일본 큐슈의 벳푸에 있는 ‘태양의 집’이라는 일본 최대의 사회복지시설과 연계하여 교환학생 형식으로 5명을 선발하게 됐단다. 태양의 집은 일종의 사회적 기업으로, 소니나 미스비시 혼다 같은 일본 유수의 대기업들이 장애인들을 위한 공장을 차렸고, 거기서 모든 시스템을 장애인들에 맞게 책임지고 운영하는 단체였다고 한다.

1년 기간으로 가는 직업연수 형식이었는데, 한국에 태양의 집 같은 시설을 설립했을 때 다른 장애인들을 가르치며 공장장 같은 역할을 할 임무를 부여받아 출발했던 거란다. 물론 철저한 일본어 교육은 학교에서 이미 마친 상태였다.

태양의 집 생활이 시작된 5명은 제각각 기숙사로 흩어져서 일본 사람들과 똑같이 공장에 출근하고, 똑같이 저녁에 돌아오는 생활을 1년 동안 반복했단다. 신종호 씨는 가구를 만드는 목공 기술 중심으로 배웠는데, 그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여러 작업장을 두루 돌면서 전반적인 시스템을 익히다 보니, 1년이란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고 기억된단다. 당시 한국에서 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도장을 판다거나 시계수리, 잘 풀린 경우는 양복점이나 금은방을 하는 게 전부라는 생각뿐이었는데, 일본은 똑같은 사회 속에 시스템화(化)된 경쟁의식으로 사회적 기업을 운영한다는 사실이 커다란 인상으로 남겨졌다고 한다.

한국의 본래 자리로 되돌아온 뒤 절실히 확인하게 된 건 이 땅의 현실뿐이었던 모양이다. 너무나 다르다는 것, 30년 이상 격차가 났다던 당시 한국과 일본의 수준이 장애 문제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것.

선진기술은 배워왔지만, 정작 한국의 열악한 환경 안에선 그 기술들을 어떻게 써먹을 방법조차 없었다는 게 냉혹한 현실이었단다. 그래서 일본에서 배운 건 일본어밖에 없다는 자조 섞인 마음에 실망하고 있을 때, ‘정식으로 음악을 하는 건 어떨까’라는 생각이 가슴에서 움트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본에 연수 갔던 시절에도 그의 곁엔 언제나 바이올린이 있었고, 5명의 연수생 중 3명이 함께 바이올린을 배우고 익히던 동료들이었기에 의기투합은 이내 이루어지게 됐단다.

그래서 당시 대전 모 대학교의 오케스트라 청강생 모집에 지원을 했고, 3명의 예비 음악인들은 대학생 수준의 실력을 오케스트라 안에서 펼치게 됐다고 한다. 정식 학생이 아니라 음악활동만 같이 하는 과정이었는데, 그들은 거기에서 또 하나의 귀인과 마주치게 됐단다. ‘고영일’ 선생님은 이전의 강민재 선생님 대학 후배였고, 다양한 지역 공연과 성세재활학교 위문공연을 통해서도 이미 알고 지내던 얼굴이었단다.

그 분이 그 대학 강사로 오셨는데, 신종호 씨를 비롯한 3인의 음악을 접하고 난 뒤 뜻밖의 제안을 꺼내셨다고 한다. ‘너희들 이렇게 각자 하지 말고, 현악4중주를 만들어 보면 어떻겠나. 3명 중에 신종호 네가 비올라로 바꾸고, 첼로 1명을 추가로 들이면 제대로 된 현악4중주로 활동할 수 있게 된다.’

‘신종호 = 베데스다’ 인생의 시작

음악적 재능이 있던 재활학교의 또 다른 1명이 첼로연주자로 함께 하게 됨으로써 현악4중주의 틀이 갖춰지게 됐고, 학교 이사장님 권유에 따라 ‘베데스다’라는 팀 이름이 탄생하게 된다.

성경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연못 이름인 베데스다는 히브리말로 ‘은총의 샘’을 의미하는데, 신종호 씨와 동료들은 그 뜻이 참 좋았단다. 그래서 비록 자신들이 어려운 가운데 음악을 하고 있지만, 우리의 연주를 듣고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고 은총을 받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 이름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취미로 하던 음악이 어느 순간부터 실생활 자체로 탈바꿈했고, 인생의 승부처가 바로 음악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는 것 - 운명은 그렇게 밖에서 안으로 흘러들 때도 있지만, 안에서 밖으로 표출되어 최종 결론이 날 때도 있는 법이다.

재활학교를 나와야 할 나이가 됐기에 4명은 외부에 집을 얻게 됐고, 고영일 선생님과 함께 다섯이 살면서 하루하루를 연습 또 연습의 나날로 이어갔단다. 꼭 필요할 때 꼭 필요한 사람이 등장한다는 거…, 그건 보통의 인연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신기하다고 하니까, 신종호 씨의 대답은 낮고도 묵직한 음성으로 이어졌다.

“제 인생의 나이가 벌써 50 중반을 넘어서 60을 바라보는데, 인생의 포인트마다 귀인이 나타날 땐 하나의 기적인 것 같다는 생각은 많이 했어요. 그런데 지나고 나서 냉정하게 판단해 보니까 우연히 나타난 건 아니더라고요. 우연이 아니라 자기가 노력하고 뭔가를 열심히 했을 때 그런 사람들이 다가왔던 거지, 빈손으로 가만히 있을 때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저희는 자고 나면 연습만 했어요. 왜냐하면 예술이라는 건 어렸을 때부터 조기교육이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다들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따라잡으려면 연습밖에 없었어요. 선생님은 정말 엄청나게 연습을 시켰고, 우리도 먹고 자는 시간 이외에는 연습 하나에 몰두했습니다.”

인생의 길은 그렇게 결정이 됐고, 혼자였으면 나태해지거나 나사가 풀렸을 수도 있었을 텐데, 여럿이 함께 하는 팀이었기에 잡념을 떠올릴 틈도 없었단다. 인간 신종호의 오늘이 만들어진 밑거름은 그 시기에 갖춰진 셈이 되는데, 이 대목에서 내용이 다른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었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신종호’라는 사람은 뭐를 하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혹시 해보신 적 있는지를 말이다. 그 당시 악기를 만지지 않았거나 음악에 흥미가 없었다면, 지금 어떤 인생을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 질문이 전해지는 동안 그의 입에서는 아주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너무 깊은 얘기라면 말씀을 안 하셔도 괜찮다 했는데, 그는 아니라며 천천히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이런 얘기를 함으로 인해서, 저 자신을 되돌아볼 계기가 될 수도 있겠죠. 만일 제가 음악을 안 했더라면 뭐를 했을까…. 제가 가지고 있는 음악적인 게 아닌, 다른 뭔가로 제 역량을 펼칠 수가 있었겠죠. 막연하게 변호사가 된다 판사가 된다는 허황된 얘기가 아니라,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자’는 저의 생활신조처럼 뭔가를 열심히 했을 겁니다.”

“재활학교 시절에도 열심히 지냈고, 일본에 갔을 때도 저는 열심히 배웠고, 바이올린을 하면서도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음악 아닌 인생의 결과를 뭐라고 딱 예측할 순 없겠지만, 저는 분명히 뭔가를 열심히 하며 살았을 것 같아요. 제 입장을 그렇게 말씀드리는 게,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대답인 것 같습니다.”

현악4중주 팀을 결성한 이후 4, 5개월 정도 지났을 때, 베데스다는 이 사회 안으로 그 이름을 등장시키게 된다.

1976년 봄 대전 가톨릭문화회관에서 첫 연주회를 했는데, 너무 떨려서 약까지 먹어가며 첫 공연을 마친 순간, 참으로 많은 것들을 안겨주는 희열을 느끼게 됐단다. 그 희열은 더 열심히 연습하고 노력하자는 다짐으로 되돌아왔고, 베데스다의 존재는 자연스럽게 음악계의 중심 쪽으로 서서히 알려지게 된 모양이다.

서울의 음악과 교수님들이 베데스다의 소식을 접하게 됐고, ‘서울대 출신 고영일이라는 선생이 지도한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새로운 반전의 계기가 등장하게 된다. 베데스다의 초청연주회가 이뤄진 것이다. 서울 공간사랑에서 연주회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또 하나의 귀인을 만나는 인연을 얻게 됐단다.

그들의 연주를 들은 정립회관 관장님의 제안이 뒤따랐다. ‘너희들이 음악을 하려면 대전에 머물러 있어선 안 된다. 서울로 와라!’

    ⓒ채지민 객원기자 베데스다의 4인, 미국 신시내티음대 석사가 되다

뜻밖의 서울 생활이 서울 정립회관에서 시작됐고, 각 음대의 기라성 같은 교수님들이 자원봉사로 가르침을 전하시면서, 베데스다는 음악적인 양적 질적 팽창을 이룩하게 된다.

그런데 4명의 소아마비 음악인들에게 다가오는 귀인의 행렬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선생님 중 한 분이 한국에서의 활동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 미국으로 공부를 떠나라는 제안을 던지신 것이다.

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자신의 출신 학교로 연결다리를 놓아주셨고, 모든 게 제약투성이였던 당시의 미국행을 뚫기 위해 새로운 도전에 돌입했단다. 그들의 공식적인 최종학력은 국민(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기에, 대학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선 고입 대입 검정고시 통과가 필수였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던 삶의 자세는 공부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입 검정고시와 대입 검정고시를 1년 만에 모두 완결 지었다는 것!

미국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대학은 미국 최고의 음대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 대학의 문이 베데스다에게 활짝 열렸고, 일단 정식입학이 아닌 1년간의 초청연수로 가게 됐는데 문제는 현실이었다. 생활비가 하나도 없다는 것, 거기서 생활할 아무런 준비도 갖춰진 게 없다는 게 커다란 장벽으로 남겨질 뿐이었다.

해결책도 없는 상태에서 일단 ‘출발을 위한 출발’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고별연주회를 하게 됐다고 한다. 그 연주회의 객석에 새로운 귀인 하나가 앉아 있었음을 당시의 그들은 까맣게 몰랐던 셈이 된다.

신시내티 출신인 지도교수님이 친구 한 분을 객석에 손님으로 초대했는데, 그 주인공은 첼로 전공의 서울대 음대 장정자 교수였다. 그는 현대그룹 고(故) 정주영 회장 남동생의 부인이었고, 베데스다의 화음에 감동을 받은 장 교수로부터 유학 생활비를 지원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결국 베데스다 4인은 1982년에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된다. 초청연수를 온 한국 학생들을 지도하던 미국 교수님들은 그들에게 아예 정식 학생으로 공부할 것을 권유하셨고, 1년 예정으로 출발했던 미국 생활은 대학원까지 마치는 6년의 긴 기간으로 이어지게 됐다고 한다.

현대그룹 산하 아산재단에서 그들의 학업과 현지생활을 후원했고, 88년 서울장애인올림픽이 열리던 시점에 금의환향하면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올림픽 기념 연주회를 하며 한국에서의 인생이 다시 시작됐다는 대목에선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다.

어떻게 귀인과의 인연이 이렇게까지 ‘손에 손잡고’ 연결될 수가 있을까? 그런데 그걸 행운이나 우연이라고만 치부할 순 없는 일이다.

앞서 신종호 씨가 밝혔듯이, 빈손으로 만난 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인연의 결과가 맺어질 만큼 연습하고 노력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될 일이다.

“한국의 음악적 환경은 정말 심각했어요. 휠체어를 탔다는 이유 하나로 모든 게 거부되기 일쑤였으니까요.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려 해도 다들 반대했어요. 물론 오케스트라는 연주의 통일성과, 검은 양복 복장으로 상징되는 시각적인 면도 굉장히 중요하긴 해요. 그런데 휠체어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오디션조차 받아주지 않았어요. 지금이야 장애인들의 인권과 권익을 보호하려는 시민운동과 사회적 인프라가 최소한 갖춰져 있지만, 당시에는 아예 면접마저 거절당하는 게 일상이었죠.”

그런 여파였을까? 미국 신시내티음대 시절에 학교 오케스트라가 뉴욕 카네기홀에서 연주회를 하게 됐는데, 신종호 씨를 비롯한 4명은 담당 교수님을 찾아가 미리 얘기했단다. 우리는 안 가겠다고. 그랬더니 지휘자인 교수님이 깜짝 놀라면서, 왜 안 가려고 하는 건지 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미 굳어져 있던 한국적인 사고방식에 따라 이렇게 대답했단다. 우리가 휠체어에 앉아 무대 위에 있으면, 신시내티 오케스트라 전체의 이미지에도 영향이 있게 될 테니까 무대 연주를 하지 않겠다고.

그 얘기를 들은 교수님은 단 한마디로 베데스다의 생각을 뒤바꿔놓으셨단다. ‘음악이라는 건 귀로 듣는 거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다. 왜 너희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느냐. 무대에 올라가서 모두와 똑같이 연주를 해라!’

세상 모든 건 자기와의 싸움이다

4명 중 2명은 미국 대학에 남고 2명은 귀국을 해서, 베데스다는 각자의 자리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단다. ‘주어진 일은 열심히 한다’는 평소의 지론 그대로 노력하는 활동을 해오다 보니, 신종호 씨 마음에는 이런 생각이 점점 쌓여가게 됐다고 한다. 장애인라는 게 한편으로는 이점이 아닌가 하는…. ‘장애인이 음악을 한다. 그런데 굉장히 잘하더라. 일반 사람도 하기 어려운 걸 저 정도 하면 꽤 잘하는 거다’라는 병풍이 둘러져 있는 듯한 느낌을 지속적으로 받게 됐다는 것이다.

‘이건 하나의 병풍이다. 남들에게 보이기 좋게 하기 위한 하나의 병풍 역할밖에 안 되는 게 아닌가. 하나의 장식품 같은….’ 그래서 이건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고 한다.

“그래서 더더욱 장애인들만의 음악 또는 오케스트라가 아닌, 기성의 조직에서 활동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편견의 틀을 깨며 탈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휠체어에 앉은 연주자가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을 한 예는 저 이외에 없었습니다. 물론 앞으로 제2의 베데스다, 제3의 베데스다는 당연히 나와야겠죠. 정말…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음악의 중심에 서기까지, 그 강고한 폐쇄성을 뚫어야 했던 힘겨웠던 과정을 설명한다는 건 책 몇 권이 나올 만큼의 현실들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저와 동료들은 그걸 다 극복했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너무나 많이 했기 때문에, 주어진 현실 안에서 최상의 결과를 얻으려는 노력들이 정말 많이 있었습니다.”

편견의 틀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참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단다.

어차피 이 세상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니고 장애인들만 사는 세상도 아니며, 모든 걸 장애 비장애가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할 세상이라는 거,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같이 노력해야 한다는 걸 당사자 입장에서 직접체험으로 확인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장애 비장애를 나눈다 하더라도 결국 돌아가야 할 곳은 현실이라는 것, 그런 의미에서 지금이야말로 장애 비장애를 굳이 나누려는 사회적 시각 자체를 바꿔야 할 시점이 된 거라고 확신하게 됐단다.

“저는 장애 비장애로 나누는 걸 좋지 않게 바라보고 있어요. 이 세상은 어차피 함께 가야 하거든요. ‘우리가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고통스럽고 어려웠다.’ 그건 맞는 말입니다. ‘그만큼 남들이 많을 걸 봤을 때 우리만 덜 봤고, 남들이 많은 걸 가졌을 때 우리는 덜 가졌다.’ 그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도 함정이 있어요. 장애인끼리 모든 걸 다 한다면, 누군가가 특출하게 되기 위해선 결국 다른 장애인을 눌러야 올라갈 수 있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건 우리가 배척하던 사회와 똑같은 모습으로 살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여태까지의 삶이 어쨌든 지금의 세상은 너무나 많은 변화와 세분화된 환경 속에서, 우리 역시 수많은 나사들 중에 하나의 나사 역할을 담당해야 하게끔 바뀌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장애 때문에 나사의 역할을 덜 하거나 못한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신종호 씨의 언어가 가볍게 또는 피상적으로 들리지 않고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그 역시 흙먼지의 맨바닥부터 시작했던 인생의 산 증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흙먼지 일색의 그 재활학교 작은 운동장에서 음악의 꿈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꿈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받아들였다 해도 대강 따라가는 시늉에 머물렀다면 어떻게 됐을까?

인생의 계기와 반전은 정말 순식간이다. ‘이것이 바로 내 인생이다!’라는 직감을 느낄 수 있는 절대적 만남은 몇 차례 되지 않는다. 삶의 명암은 그 짧은 순간순간의 선택에 따라 직진인지, 좌회 전 또는 우회전인지, 아니면 유턴으로 되돌아감인지가 갈라지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제가 베짱이같이 남들 힘들게 일하고 노력할 때 악기 하나로 살아왔을 수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베짱이라 하더라도 남들이 쉴 때까지도 치열하게 땀을 흘리며 남몰래 노력한 베짱이니까요. 모든 건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자기를 이겨야만 된다고 봐요. 그 싸움에서 이겨야 하고, 최선을 다한 다음에 자신을 바라봐야 할 일입니다. 여러 가지 우리가 받지 못했던 사회적 혜택들은 그 패러다임을 우리가 바꾸는 만큼 이뤄진다고 봅니다. 모두가 각자 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훨씬 더 큰 역할을 담당한다면, 패러다임을 바꾸는 건 바로 우리 자신이 될 겁니다. 그게 바로 자기완성이자 자기개혁이고, 본질적인 장애운동의 길이라 믿으며 저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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