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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목소리만 듣고 점을 칩니다

본문

   

 

                                            

목소리만 듣고 점을 칩니다
                   시각장애우 역술인 공병갑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역술인 공병갑씨가 점 동네로 유명한 서울 미아리 고개 마루턱에 "홍일점 여학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철학원을 연 것은 지난 구십이년 십이월이다.
 말하자면 그는 지금 역술인으로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은데 내노라하는 역술인이 몰려 있고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미아리 고개에 입성해서 철학원을 연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전성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예상이 꼭 맞지 만은 않은 지 공병갑씨는 전성기라는 말을 꺼내자 고개를 설래설래 젓는다.
 "두 달 동안은 현상유지가 되더니 요즘은 적자를 완전히 봐버리고 있어요." 장사가 안 되는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루 두 명만 봐도 괜찮아요. 중년 아주머니들이 와야 뭐를 엮어도 엮을 수 있지 학생들은 힘들어요. 옛날에는 이 근처에 술집에 다니는 아가씨들이 많이 살았거든요. 그땐 밤 영업도 했고, 그게 지금은 없으니까 힘든 거에요. 술집 아가씨들이야 뻔하죠. 내일 봉을 잡을 수 있겠느냐? 이 사람과 계속 관계를 유지해도 괜찮겠느냐? 이런 걸 보러 와요. 그러면 예방을 해라 대답해 주고 부적을 판다든가 살풀이를 하도록 하는 거예요. 이게 수입이 괜찮아요. 지금은 밤 영업을 못하게 하니까 밤늦게 찾아오는 손님들이야 술 취한 사람들뿐인데 이런 손님은 아예 보지 않죠. 그리고 여름엔 비철이라 더욱 손님이 없어요."
 그는 "요즘은 간간이 찾아오는 여학생들을 상대로 궁합과 신수를 봐주고 용돈을 버는 정도"라고 말을 이었다.
 내친김에 도대체 역술의 기본인 주역이 뭐냐고 그에게 물었다. "주역이라는 것은 쉽게 얘기해서 통계학이라는 겁니다. 동양철학에서 나온 건데 내용은 똑같아요. 그게 적중되는 사람도 있는데 터무니없이 맞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보기에 칠십프로는 맞는 것 같아요. 대개가 좋은 일은 잘 맞지 않고 좋지 않은 일은 잘 맞죠. 사실 주역은 파고들어 갈수록 묘해요. 사주팔자와 오행을 분리해보면 숨어있는 애인도 잡아낼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의 조상대대까지 다 알아낼 수 있지요. 한마디로 주역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내려온 거니까 외면할 게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장애우들은 어떤 사주팔자를 갖고 태어났길래 장애우가 됐을까? "장애우들이 태어난 날짜나 시를 보면 대개 고장살 내지 시박대패살이 박혀 있어요. 또 교각살이라는 것도 박혀 있죠. 언급한 살은 육십갑자에 나와 있는 건데 이게 일이나 시에 있으면 대개 자신이 장애우가 되거나 아니면 장애를 가진 자손을 두게 되는 거예요. 나 같은 경우도 시박대패살이 일시에 박혀 있어요. 이럴 경우 어느 해를 조심해라 일러주면 예방할 수 있죠."
  그가 흡사 정물처럼 앉아 있는 세평 남짓한 공간에는 조그만 앉은뱅이 책상 위에 점자판 하나와 천세력(사주의 기본 날짜) 한 권이 달랑 놓여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이 없다. 그는 이곳에서 손님들이 태어난 일·시와 목소리만 듣고 점괘를 낸다고 한다.
 "생년월일을 물어봐서 불러주면 암기를 하든가 점자로 써놓고 점을 보죠. 관상은 못보고 저는 음성을 중요시해요. 그래서 남들보다 귀가 예민합니다. 여자들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음성톤이 높으면 거의가 색골이에요. 음성이 허스키한 여자는 남자가 많이 시달릴 타입이죠. 좋은 음성은 맑은 음성인데 이런 음성을 가진 여자들은 따로 있어요."
 그가 예를 들 때 여성을 언급하는 이유는 주로 중년여성들이 부부관계 때문에 점치는 집을 많이 찾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의 기억에 남는 손님도 중년여인이다.
 "어느 해 중년부인인 점을 보러왔는데 내가 보니까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해요. 그래서 당신은 일부 종사할 팔자가 못되며 당신 지금 남편 몰래 애인과 만나고 있다, 그리고 애인은 최근에 생긴 게 아니라 상당히 오래 전에 생겼다, 해서 남의 남자 만나고 다니는 건 좋지만 너무 거기 빠지지 말라고 일러주었죠. 사는 건 풍족하게 사는데 욕심을 못 채워서 그러니 만나는 건 좋은데 물질적인 거에는 빠지지 말라고 점괘를 내줬더니 여자가 어떻게 알아 맞췄냐며 놀라더군요. 이런 여자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면 명이 짧아지는 타입이죠."
 그는 오전 열시에 문을 열어 손님이 있건 없건 밤 열두시까지 꼬박 가게문을 열어 놓는다. 때문에 무엇보다 "인내가 필요한 직업이 이 직업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 장사가 안 되기 때문일까. 그는 이즈음 "차라리 안마나 침술업 같은 이료업이 자신에게 적합한 직업이 아니었을까"라는 때늦은 후회를 해보기도 한다.
 그가 역술을 업으로 택하게 된 것은 부모가 그의 직업으로 역술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시각장애우들이 할 수 있는 직업이 제한된 상태에서 안마나 침술은 나이 들면 힘들지만 역술은 입심만 있으면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 부모의 생각이었다. 그는 그래서 햇수로 이십여 년째 남의 운명의 비밀을 가르쳐 주고 그 대가로 호구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일천구백사십팔년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에서 공무원이었던 공우식씨(지금 일흔 다섯)와 어머니 김순자(작고)씨의 사남 일녀 중 장남으로 세상에 나왔다.
 당시 아버지는 서울 익선동 동사무소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물려받은 재산이 있어서 집안 형편은 양호한 편이었는데 집이 있었고 다른 재산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전운이 채 가시지 않은 일천구백오십이년 그의 나이 네 살 때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자애는 처음 홍역으로 그에게 다가왔는데 마땅한 치료약이 없어서 홍역은 곧 실명으로 진행됐다. 그가 실명하자 부모는 돈을 싸들고 용하다는 한의사들을 찾아 다녔다. 그의 얼굴을 보면 곳곳에 침 자국 투성인데 당시 한의사들이 얼굴이 곪으면 가망이 없고 얼굴이 곪지 않으며 가망이 있다며 그의 얼굴에 무수히 많은 침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불행히도 그는 부모가 노력한 보람도 없이 얼굴이 곪아 결국은 완전히 실명하게 되었다.
 그의 치료비로 많은 재산이 들어갔지만 그래도 가신이 기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실명한 후 삼 년여를 집안에서 아무 하는 일 없이 지내다가 일곱 살 때 부모가 집을 아버지 직장 근처인 신설동으로 옮겨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서울로 와서도 그는 오 년여를 집안에서만 지냈다.
 그가 부모의 배려로 신교동에 있는 서울맹학교에 들어간 것은 그의 나이 열세 살 때였다. 그는 맹학교에 입학해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한동안 부모와 떨어지는 게 겁이나 울기도 했지만 토요일마다 부모가 데리러 오고 방학 때는 집에 가기도 하면서 학교 생활이 차츰 익숙해지자 두려움은 곧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는 맹학교에서 일반 초등학교 과정을 배우고 중등부에 진학해 안마, 지압, 생리학, 해부학 등 이료과목을 주로 배우게 됐다. 고등부에 올라가서는 침술과 한의학을 공부했다.
 그런데 일천구백육십구년도에 갑자기 가세가 기울여 가정형편상 고등학교 이학기 과정을 끝으로 그는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역시 아무 하는 일 없이 시간만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삼 년이 지나자 부모는 그에게 역술을 배우라고 권했다. 안마 침술 등은 나이를 먹으면 힘이 들지만 점치는 것을 배우면 평생 힘 안 들고 자립할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부모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일천구백칠십이년 그의 나이 스물네 살 때 역술업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이 해 부모가 아는 사람을 통해서 소개받아 그를 데려간 철학원은 용두동에 있는 "평택문복가"였다. 선생은 곽효석씨로 역시 시각장애우였다. 그는 곽효석씨 밑에서 일년여를 역리학을 배우게 됐다.
 난생 처음 역리학을 배우다보니 그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단에 때문에 한동안 당황해야 했다. 처음 과정은 사주의 기본인 갑자을축, 병인정묘, 갑을경정, 모의경식 이런 단어가 들어있는 까다롭기가 한이 없었다. 그는 다행히 점자를 익혔기 때문에 선생이 단어를 불러주면 점자로 적어 하루종일 외우고 또 외었다.
 간신히 육십갑자를 암기하고 나자 택일 따지는 법, 신수점 내는 법 등을 또 배워야 했다. 육십갑자와 육십사계 외우는 건 별문제가 아니었는데 택일법 배우는 데에서 그는 많은 애를 먹어야 했다. 날짜와 일진에 따라 택일법이 달라 그는 혼란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일 년여 동안 사주 내는 법, 택일, 요집서 등의 과정을 배우고 나자 그는 역술은 파고들수록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역술을 다 배우려면 한도 끝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은 영업할 수 있을 정도만 배우기로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일천구백칠십사년 봄 그는 배운 지식을 밑천으로 집에 고향 이름을 따서 "화성문복가"라는 간판을 걸고 처음 영업을 시작했다. 간판을 걸고 이틀이 지나자 첫 손님이 들어왔는데 젊은 여자가 신수를 봐달라는 것이었다. 얼굴은 화끈거리고 가슴은 떨려오는데 저절로 진땀이 흘렀다. 그는 어떻게 봤는지도 모르게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서 여자의 신수를 봐줬다. 다행히 실수는 하지 않았는지 여자는 그의 점괘에 만족하면서 복채로 삼백원을 냈다. 지금 돈으로 삼만원의 가치가 있는 그 돈은 그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번 돈이었다. 그는 너무 기뻐 여자가 돌아가고 나자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후 그는  연결 연결로 꽤 많은 손님을 봤다. 그러다가 일천구백칙십육년 팔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한동안 역술업을 쉬게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기울던 가세가 결정적으로 더 기울었기 때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얼마 안가 젊은 여자를 맞아들여 새장가를 갔다. 서모는 그와 나이차이가 십여년 밖에 나지 않았다. 때문에 당연히 불편한 관계가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천구백칠십팔년 봄 그는 독립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친구와 사업을 한다고 집과 시골 땅을 팔아 속초로 갔다. 아버지가 사업을 한다고 나섰을 때 그는 직감으로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는 것 같아 "농사 안 짓는 시골 땅 판 거는 할 수 없지만 연세도 있으신데 서울 집은 그냥 놔두십시오"라고 말렸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서모까지 동조해 기어이 아버지는 땅과 집을 팔아 사기꾼에게 갖다 바쳤다. 그는 다른 것은 몰라도 장애우를 자식으로 둔 사람이 그런 섣부른 행동을 했다는 것에 두고두고 섭섭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속초로 가면서 방을 얻으라고 준 돈 일백오십만원을 가지고 동생들과 살던 집 근처에다 전세방을 얻었다. 그런데 집주인이 간판을 못 달게 해 영업은 할 수 없었다. 동생들은 제 밥벌이를 하지 못하고 다른 수입이 없자 궁여지책으로 그가 한 일은 다른 시각장애우 동료들이 맡은 일거리를 나눠서 해주고 약간의 수고 비를 받는 것이었다.
 일은 주로 정성을 드리는 일이었는데 동료들이 철학원에서 손님 사주를 봐서 살이 끼어 있으면 "이런 살이 끼어서 당신이 성공하는 길도 막히고 부부간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니 풀어야 한다"고 하면 손님들은 그 방법을 물었고 그러면 그에게로 연락이 와 그는 하루 아니면 삼일을 내내 한강이나 법당에 가서 격문을 읊조리며 기도를 올려주곤 했다. 그렇게 해주고 그는 오만원도 받고 십만원도 받아 살림에 보탰다. 하지만 그 일도 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생활의 곤궁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방을 빼서 월세 방으로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사할 방을 알아보러 다녔다. 집주인들은 "장애우가 들어오면 모든 것이 지저분해진다"며 방을 내주려 하지 않았다. 장애를 속이고 겨우 들어간 신설동 방은 얼마 못가 "하숙을 친다"고 나가달라고 해서 다시 면목동으로 이사해야 했다. 거기서도 기한을 채우지 못하고 집주인이 나가달라고 해서 다시 옛날 살던 집 근처인 용두동으로 이사갔다.
 이렇게 몇 번 이사를 다니자 그는 별 수 없이 처음 아버지가 준 돈 일백오십만원을 다 까먹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는 눈물을 머금고 동생들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뿔뿔이 흩어지고 난 후 그가 들어간 곳은 정릉 맹인역리학협회 안에 있는 독신자 숙소였다. 거기서 일년육개월을 밥값만 내고 기거하면서 그가 한 일은 미아리 굴다리 아래에다 노점을 벌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사주, 신수를 봐주는 것이었다. 당시 굴다리 아래에는 그처럼 가게를 낼 돈이 없는 시각장애우 동료들이 여러 명 길가에 늘어앉아 있었다.
 그는 한동안 거기서 일을 하다가 처량하기도 하고 밤에 늦게 들어가야 하는 것이 지겹기도 해 나가는 것을 그만뒀다. 대신 협회 사무실에 대기해 있으면서 동료들의 정성 들이는 일을 나눠했다. 어쨌든 밥값은 생겼고 어떤 달은 적은 액수지만 저축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협회 숙소에서 지내던 어느 날 동료 시각장애우 아주머니가 "장가 갈 마음이 없냐"며 은근히 중매 설 뜻을 그에게 비쳤다 그는 "어디 한 번 다리 좀 놓아보쇼"라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해서 팔십일년 구월 그는 생전 처음 선을 보게 됐다.
 그는 천호동 어느 철학원에서 처음 남성례씨를 만났다. 남성례씨는 역시 시각장애우로 그곳 철학원에서 역리학을 배우고 있었다. 이때 그의 나이 서른네 살, 남성례씨 나이 스물 아홉이었다, 선은 서로 손을 잡아보고 음성으로 서로를 확인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첫 만남에서 남성례씨가 마음에 들었다. 음성을 들어보니 무척 착한 여자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날 남성례씨는 자신이 열아홉 살에 실명했으며 그래서 세상물정을 많이 안다고 말했다. 유명한 영화배우 얼굴도 다 기억한다고 말하며 남성례씨는 웃었는데 웃음소리가 그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그 날 오후 그는 틈만 나면 천호동으로 향했다. 데이트는 서로 역리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에게 방 한 칸 얻을 돈은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양심에 가책이 돼 나중에 자신이 빈털터리임을 실토했다. 그래도 남성례씨는 그를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을 얻은 그는 몇 차례 만남이 이어진 후 어느 날 용기를 내 남성례씨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 날 남상례씨 스승은 곗날이라고 외출하고 철학원에 없었다. 그는 남성례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불쑥 "미스 남, 나 당신을 안아보고 싶은데 어떡하지"라며 농담처럼 말했다. 뜻밖에도 남성례씨는 진지하게 "진짜예요?"라며 정색을 하고 물어왔다. 그는 "진짜지 그럼. 내가 비싼 밥 먹고 왜 거짓말을 하겠어"라며 애써 흥분을 감추며 대답했다. 남성례씨가 "그러면 안아만 보는 거예요"라며 그에게 몸을 맡겨왔다. 그는 남성례씨를 안았다. 그런 다음 애초 약속을 어기고 강제로 남성례씨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그는 남성례씨 집을 찾아갔다. 그이 부모를 만나 그는 "나는 남성례씨와 이미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으니까 그렇게 아시고 협조를 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솔직히 말해 저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결혼에 협조를 해주시면 열심히 살겠습니다"라며 결혼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남성례씨 부모는 어이가 없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하고 돌아온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남성례씨 부모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와 남성례씨가 살 방을 얻어놨으니 와서 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팔십이년 사월십삼일 남성례씨 부모가 얻어준 천호대교 밑 일백오십만원짜리 전세방에서 남성례씨와 혼인신고를 마치고 살림을 차렸다. 돈이 없어 결혼식은 올리지 못했지만 그는 생전 처음 행복감을 맛보았다.
 남성례씨와 살림을 차리게 되자 그는 먹고살기 위해 그곳에서 연못에 피는 꽃이라는 뜻을 가진 "백연화"라고 철학원 간판을 붙이고 다시 영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동네가 워낙 가난한 동네이다 보니 점보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는 할 수 없이 동사무소를 찾아가서 생활보호대상자로 책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동사무소 담당자는 "호적을 분가해 와라"며 까다롭게 굴었다. 그는 "아니 장남이 어떻게 분가를 하냐"고 항의했지만 동사무소 담당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의료보호만 되는 이종 영세민에 되는 이종 영세민에 책정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가 쌀과 돈을 주는 거택보호자로 책정된 것은 종암동으로 이사와서였다. 그는 천호동에서 이 년여를 살다가 장사가 안돼 종암동 친구 집에 전세를 얻어 거처를 옮겼다. 거기서 비로소 친구 동생의 도움을 받아 거택보호자로 책정될 수 있었다.
 이 해 팔십삼년 삼월 아내 남성례씨는 첫 딸 선영이를 낳았다. 생각 같아서는 아기를 더 낳고 싶었지만 살기가 힘들어 부부는 더 이상의 아이를 갖는 것을 포기했다.
 종암동에서도 그는 철학원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했지만 벌이는 신통치가 못했다. 살기가 힘들자 팔십칠년 그는 철학원 간판을 내리고 청량리에 있는 아무개 침술원에 나갔다. 비장애우가 침술원을 하고 있었는데 이를테면 이름이 필요했기에 그는 남 밑에서 이름을 빌려주고 대신 월급으로 이십만원을 받았다. 맹인역리학협회 임원을 맡아 회의기록 작성을 해주고 수당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이 일들을 최근인 작년 이월까지 했다.
 아내는 아내대로 청량리 침술원이 들어 있는 건물 이층에서 "현대여성철학원"을 열고 영업을 했지만 벌이는 역시 시원치가 않았다. 그러던 중 구십일년 시월 동사무소에서 영구임대아파트가 나왔으니까 의향 있으면 나와서 도장 찍으라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그는 이 해 십일월 중계동 십이평짜리 영구임대아파트에 입주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가 지금 철학원을 열기 전 최근에 한 일은 성북점자도서관 점자 교정사 일이다. 작년 유월 말 들어가 십이월에 사직서를 쓰기까지 그는 꼬박 육개월을 그 일을 했다. 그러다가 올해 초 이곳 미아리 철학원을 일천팔백만원에 인수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는 토요일 저녁 중계동 집에 들어갔다가 월요일 아침에 철학원에 나온다. 배운 연도로 봐선 그가 위이지만 응용력은 아내가 훨씬 뛰어나 아내가 나와 있는 것이 벌이가 더 잘 되지만 이제 초등학교 사학년인 딸아이가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 해 밥을 해먹어야 하는 등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그가 나오고 있다. 다행히 선영이는 부모의 장애에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자라주고 있다.
 그의 남은 소망 하나는 어떡하든 호텔 안마시술소 한군데를 잡아 운영하고 싶다는 것이다. 아는 사람이 있으면 가능한데 연줄이 없어서 못하고 있다고 말하며 그는 웃었다. 말끝에 만약 눈을 뜨게 된다면 무엇이 제일 보고 싶으냐고 묻자 그는 "집사람 얼굴과 선영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꼭 보고 싶습니다. 남들은 이쁘다고 그러는데 만져봐선 모르겠어요. 생전에 꼭 한번보고 싶은데 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의 철학원에는 단 한 명의 손님도 찾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장사가 안 되면 어떡하냐고 걱정하자 그는 호기 있게 말했다. "설마 까먹기야 하겠습니까?"
글/이태곤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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