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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하나님 아파유 아파유"

빈민장애우 오임순

본문

"하나님 아파유, 아파유"
-빈민 장애우 오임순-

▲오임순씨

철도 사고로 두 팔과 한쪽 다리를 절단 당한 오임순씨는 신정동에서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이 외롭게 살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가난의 고통까지 짊어지고 사는 그이, 그이는 아프고 괴로울 때면 신음처럼 "하나님 아파유, 아파유" 기도를 한다. 누가 그이 비명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올해 쉰아홉살인 오임순씨는 가난하다. 아니 가난하다 못해 빈곤하다. 그이가 처해 있는 빈곤 정도가 어느 정도냐 하면 이 풍요의 도시 서울에서 달랑 가진 것이 월세 보증금 삼십오만원밖에 없을 정도로 그이는 빈곤의 늪에 빠진 채 무기력하게 생활하고 있다. 문제가 심각한 것은 그이가 이렇게 생활한 지가 어언 삼십년째에 이른다는 것이다.
 강산이 바뀌어도 세 번 바뀌었을 그 기간 중에 그이 생활이 나아질 기회는 물론 없었다. 그러므로 이 고통 외에도 뼈저린 가난을 동시에 수반한다는 것을 그이 경우에서 실감할 수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여기서 그이가 가지고 있는 악조건을 하나하나 언급해 보자.
 우선 그이는 철도사고로 왼쪽 다리와 왼쪽 팔이 잘려나가고 오른쪽 팔은 팔뚝 아래가 잘려나가 성한 신체는 오른쪽 다리 하나뿐인 매우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다.
 이런 심한 장애는 그이에게 수시로 고통을 준다. 잘려나간 부위의 신경이 불뚝불뚝 살아나 그이는 아픔에 시달린다. 최근에는 중이염까지 그이를 덮쳐 아픔에 시달리는 시기가 부쩍 길어지고 있다.
 여기에다 그이는 가족도 없다. 물론 그이 몸에서 나온 자식이 둘 있긴 하지만 그 자식들이 그이를 버려 지금 어느 하늘에서 살고 있는 지 소식을 모르고 지낸 지가 오래 됐다.
 이렇듯 주위에 그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그이의 심한 장애를 대비해 볼 때 궁핍 외에도 하루하루가 전쟁을 치르는 듯 비감하게 이어가는 삶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매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며, 화장실에 가는 것이며, 병원에 가는 것이며, 하다 못해 겨울에 연탄을 가는 것까지, 다리는 그렇다 치고 손이 없는 상태에서 가능한 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설상가상으로 그이는 지금 살고 있는 신정 삼동이 재개발 지구로 지정돼 오래지 않아 살고 있는 방이 헐리면 이제 어디로 떠나야 할지 막막한 상황에 놓여 있다. 영세민이긴 하지만 단독세대라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갈 수도 없고, 가진 돈으로 딴 곳에서 방을 얻자니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이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이는 뻔질나게 동네를 들락날락거리는 투기꾼들을 불안한 눈초리로 쳐다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또 하나 그이를 괴롭히는 것은 과거의 기억이다. 결코 순탄한 세월이 아니었기에 기억하자면 절로 몸서리가 쳐지지만 어느 때 멍하니 혼자 앉아 있으면 무시로 과거의 기억이 그이를 찾아와 그이 가슴에 심한 통증을 안겨다 준다.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결혼생활, 행상으로 길 위에서 보낸 세월, 그리고 춘자, 추자 두 딸아이에 대한 미안함…. 그이는 자신도 모르게 꺼이 꺼이 통곡을 토해낸다.
 그이는 일천구백삼십사년 충청북도 보은군 회북면 면소재지에서 아버지 오희재씨의 열한 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이 어머니 송재희씨는 얼마 안 가 불치병을 고쳐준 보답으로 또 다른 후처를 맞아들여 그이 집안은 세 어머니에게서 나온 자식들로 북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오희재씨는 면 단위에 하나밖에 없었던 "오약국"을 경영했던 한의사였다. 그래서 곤궁한 왜정시절 다른 집은 쑥이나 나물로 연명할 때에도 그이 집은 끼니를 굶지 않았고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이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따로 떨어져 살아야 했다. 어머니 송재희씨는 또 다른 후처의 등살과 아들을 낳지 못한 죄로 자기가 낳은 자매 둘을 데리고 아버지가 얻어준 동네 근처 땅에다 집을 짓고 밭농사를 지으면서 평생을 살아야 했다. 물론 농사지을 때 아버지가 인부도 대주고 약간의 생활비도 보태주곤 했지만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은 어쨌든 송재희씨 몫이었다.
 그이는 "계집애들은 학교 보내면 글씨 배워서 연예편지질이나 한다"며 아버지가 학교를 보내주지 않아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집에서 일꾼들 밥이나 지어 나르고 가사일을 돌보며 별 특징 없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다가 그이 나이 열일곱 살 때 그이는 호랑이 같은 아버지 성격이 무서워 이의 한 번 달아보지 못하고, 그래서 선도 보지 않고,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근처 보은군 해남면 열아홉 살 먹은 농사꾼 신랑 최윤형씨에게 시집을 갔다. 그이가 최윤형씨 얼굴을 처음 본 것은 장롱과 이부자리 한 채를 혼수품으로 마련해 가서 맞았던 첫날밤이었다. 그이는 남편 얼굴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서 웃방에서 방문에 구멍을 뚫어 아랫방을 훔쳐봤는데 의외로 남편 얼굴이 흡사 병자처럼 백짓장같이 하얘 무척 충격을 받아야 했다.
 물론 남편이 특별한 병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쨌든 농사짓는 사람 얼굴은 아니었다. 그이는 시집에서 밥을 하고 인부들 새참을 지어 나르며 신혼을 보냈다. 그리고 시집간 지 일 년여만에 처 딸 춘자를 낳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이보다 먼저 시집가서 서울에 살고 있던 언니 오순애씨가 내려왔다. 언니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시집을 잘못 가서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이더러 "서울에 가서 같이 살자"고 했다. 그래서 그이는 결혼한 지 삼 년만에 남편과 함께 서울로 상경하게 됐다.
 당시 어니는 마포에 살았는데 형부가 목수일을 해 근근히 먹고살고 있었다. 그이는 언니 도움으로 마포 공덕동 한흥시장 내에 월세 단칸방을 얻어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마침 또 아이를 배서 그이는 집에만 있고 남편이 나무로 짠 사진 액자를 지게에다 지고 다니면서 팔아 겨우 밥을 먹었다. 하지만 남편 장사가 잘 안될 때도 있어 그이는 쫄쫄 굶고 지낼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언니가 쌀을 사줘 겨우 굶어죽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그렇듯 핍진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이 소집영장을 받고 덜컥 군대에 갔다. 그이는 할 수 없이 둘째 딸 추자를 낳고 채 몸도 추스르기 전에 머리에 다라를 이고 행상으로 나서야 했다. 그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일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겨우겨우 생활을 해나가던 어느 날 불시에 남편이 돌아왔다.
 분명 남편이 제대해서 온 것은 아니었다. 남편의 제대 기간은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그이는 불안한 심정으로 남편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왜 온 거예요?" 남편은 어눌한 목소리로 "진해 역전에 갔는데 서울 가는 기차가 있어서 타고 왔다"고 대답했다. 그이는 직감으로 뭔가 크게 잘못 됐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이는 남편을 다그쳤다. 결국 그이는 남편이 겉은 멀쩡하지만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고 그 증세로 인해 군대에서 탈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이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남편이 입대해 있던 진해 해병 부대를 찾아갔다. 거기서 군인을 붙들고 "아니 사람이 도망을 가서 집에 돌아와 있는데 잡으러도 안 오느냐"고 따졌지만 그 군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이의 기억도 하기 싫은 악몽의 나날이 시작된다. 남편이 집에 있자 그이는 두 아이를 시집에다 갖다 맡겼다. 그런 다음 벌어야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장사라는 장사는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닥치는 대로했다. 떡 장사, 김밥장사가 주 장사였고 어떤 때는 생선장사로 나서기도 했다. 그렇게 몇 년을 살았다.
 그러다가 그이는 종국에는 남편을 놔두고 가출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남편의 정신이상 증세가 나날이 심해져, 그이를 심하게 학대하는 수준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남편은 처음에는 방안에서 멀쩡한 이불을 뜯어서 다시 꿰매고 다시 뜯는 이상한 행동을 반복하다가, 그이가 보는 앞에서 날카로운 바늘로 자기 얼굴을 비롯한 온 몸을 찔러대는 소름끼치는 행위까지 하더니, 살림을 집어던지고 다리미를 휘두르면서 그이에게 덤볐다. 특히 눈을 까뒤집은 채 "죽인다"며 그이 목을 수시로 졸라대는 데에는, 그이는 너무나 무서워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편은 집 앞에 서서 애꿎게 지나가는 차를 향해 돌맹이를 던져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차창이 깨진 차 주인이 달려와 그이에게 손해를 배상하라며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거의 매일 그런 일이 일어나자 그이는 집 밖에서 쨍그랑 소리가 나면 얼른 집을 나와 몸을 숨겨야 했다. 귀찮기도 했지만 그때만 해도 차 유리가 비싸 도저히 물어줄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이가 이런 남편 학대에 못 이겨 가출해서 찾아간 곳은 동부이촌동에 있는 언니 집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남편이 언니 집으로 찾아왔다. 그때쯤에는 형부도 남편이 정신이상자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을 열어줄 리 없었다. 그러자 남편은 거의 매일 저녁 무렵 찾아와서 노크를 하며 "우리 와이프 예스까 노까?" 마누라 있냐, 없냐는 소리를 반복하며 밤새 서 있다가 새벽녘에 돌아가곤 했다 그래도 그이가 문을 열어주지 않자 남편은 포기했는지 몇 달 후에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남편이 대전에 있는 큰형 집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이는 이혼은 하지 않았지만 남편과의 문제가 해결되자 아무리 언니 집이지만 눈치가 보이고 불편을 느끼게 되면서 마포쪽에 따로 방을 얻어 나와 살게 됐다. 그이는 그곳에서 시집에 맡겨두었던 두 딸을 데려와 같이 살았다.
 그이 일상은 아침밥을 지어먹고 울면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들을 강제로 떼어놓고 떡 공장으로 향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떡 장사는 밑천이 별로 안 들었고 당일 이문이 남는 현찰 장사였기 때문에 그런 대로 할만한 장사였다. 하지만 이문이 박해 세 식구가 먹고사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 그렇지만 밑천이 없어 다른 장사는 할 엄두도 낼 수 없었기에 그이는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떡 장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이 나이 서른 살이 됐을 때 그이는 떡 장사를 나가 건널목을 건너다가 철도 사고를 당하게 됐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해 정확한 날은 모르지만 아이들이 아직 어렸을 때였다. 그이는 사고를 당한 순간 까마득히 정신을 잃었고 깨어난 곳은 병원이었다. 나중에 들은 바에 따르면 사고를 당한지 열사흘 만에 깨어났다고 하는데 처음 그이 눈에 들어온 것은 수심에 가득한 친정어머니 얼굴이었다. 눈은 떴지만 당연히 그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얼굴도 쳐다만 봤지 뭐라고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이미 두 팔과 한쪽 다리는 잘려나가고 없는 채였다.
 그이는 그런 상태로 일 년을 철도병원에서 보냈다. 그이 과실이었기 때문에 보상금은 한푼도 받지 못하고 겨우 치료만 받은 채 아무대책 없이 일 년이 지나자 그이는 퇴원해야 했다.
 병원에서 퇴원 후 그이는 그이 때문에 서울로 이사온 친정어머니와 동부이촌동에서 한동안을 살았다. 이때부터 생활은 전적으로 동회에서 주는 "배급"에 의존해야 했다. 말하자면 그이 나이 서른한 살부터 그이는 일급 거택보호자 신분으로 전락한 채 살아야 했던 것이다.
 이렇듯 생활이 어려워지자 그이는 아이들 교육을 제대로 시킬 수가 없었다. 동회에서 학비를 대줘 두 딸을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시켰을 뿐 더 이상 상급학교로의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일찍부터 공장에 나가야 했다. 아이들이 공장에 나가면 그이는 집에서 밥 하나 제대로 짓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세월을 보냈다.
 그이는 아이들이 내놓고 원망은 하지 않았지만, 엄마로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아이들 보살핌을 받는다는 게 내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시집갈 나이가 되자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나를 갖다 내버리기 전에 혼자 나가서 살아야 되겠다"는 마음을 먹고 도망치다시피 연구자가 없는 수원에 가서 한동안을 숨어살았다. 그곳에서 한 어느 아주머니를 따라 다시 방을 옮긴 게 지금 살고 있는 신정동 보증금 삼십오만원에 월서 이만오천원짜리 셋방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이들과 소식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다. 그이는 지금 아이들이 어디 살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못배운게 죄라고 딸들이 역시 배우지 못한 사위들과 결혼하다 보니 겨우 입에 풀칠만 하고 있는 형편이라 그이는 신세를 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형편 때문만이 아니라 딸들 쪽에서도 그이에게 섭섭한 감정이 있는지 이젠 그이가 사는 곳을 알면서도 일체 찾아오지 않고 있다.
 얼마 전에는 그이가 목소리라도 들으려고 전화를 걸었을 때 큰딸이 "전화도 하지말고 만나지도 말고 가급적이면 인연을 끊자"고 일방적으로 말해 그이는 무척 서운한 감정을 느껴야 했다. 그이는 "너희들 여름에 참외 났다고 참외 하나 사줄 애들 아니니까 그래 끊어, 끊어서 너희들 편할 거 같으면 끊어"라고 얘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그이는 "내가 죽었으면 아이들이 고아원에 가야 했는데 내가 있어서 잘먹든지 못 먹든지 그래도 고아원 신세는 면했던 것 아니냐"며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다.
 그이 주 수입원은 여전히 동회에서 주는 배급이다. 동회에서 한 달에 한번씩 주는 쌀 한 되로 밥을 해먹고 반찬은 그이가 다니는 인근 교회에서 일요일날 밥을 해먹고 김치니 뭐니 남은 반찬을 비닐 봉지에다 싸서 휠체어에 넣어줘 그것으로 해결하고 있다. 그이는 밥을 발과 입을 통해 숟가락을 오른쪽 남은 팔뚝에 묶어 먹는다.
 남이 먹여주면 미안하고 먹고 싶은 반찬을 제대로 먹을 수 없어 가능한한 혼자 해결하고 있다.
 밥은 이렇게 해결하지만 다른 수입원이 없어 일상생활에서 곤란을 받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이는 전시세 때문에 선풍기를 마음놓고 돌리지 못한 채 여름을 보냈고 겨울에는 갈지도 못하기도 해서지만 돈이 없어 냉방에서 지내야 했다.
 그이 생활의 곤란 정도가 어느 정도냐 하면 얼마 전 부름의 전화에서 그이를 십이만원씩 두 번 도와준 적이 있는데 난생 처음 거금을 만지게 되자 그이는 기뻐서 밤에 잠을 못 잤을 정도였다. "하나님, 맛있는 것 좀 사먹어 볼까여?" 그이는 기도를 하고 처음으로 수박도 한 통 사먹어 보고 복숭아도 사먹어 보고 하드도 이백 원짜리를 두 개 사서 동네 할머니와 나눠 먹었단다.
 그이 일과는 오전 열시에 아침밥을 먹고, 혼자서 가정예배를 본 다음 하루종일 나와 있는 것이다. 양지에 앉아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쳐다보고 근처 버스정류장으로 노방전도를 나가기도 한다.
 그런 그이에게 사는 낙이 뭐냐고 물어보았다. 그이는 "주일날 교회 가서 우리 주님하고 교제하는 거 그것 뿐이야. 묻지 마세요. 그런 거 말하면 나 울어요"라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기세다. 그이가 신앙을 가진 건 십여 년을 헤아린다. 장애가 심하다 보니 신앙을 가지게 됐는데 그래서 제일 필요한 게 "현금도 내고 싶고 교회 건축금도 내고 싶은 물질"이라며 꿈은 "오로지 하늘나라 천국만 바라보고 죽으면 천국에 가서 살게 되리라는 것"이다. "가능하면 옛날 생각은 안하려고 해요. 그저 하나님하고 대화만 하죠. 그러면 하나님 손길이 알아서 돌봐줘요." 그이 말이다.
 돌이켜보면 하도 시달리며 살았기에 좋았던 날들이 없어 지금 사는 게 좋다는 그이, 그이는 지금까지 "죽을려는 생각을 한번도 안 했으며 다치고 난 후에도 오히려 재미있는 세상을 못보고 죽을까봐 무서워 벌벌벌 떨었다"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이는 남아있는 신경이 불뚝불뚝 뛰고 아프면 "하나님 나 신경이 아파유" "아이고 어쩔까요. 아파유, 아파요" 기도를 한다고 했다.
 과연 누가 그이 비명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글/이태곤

새끼

김종태

하잘 것 없는 너나 나
더는 지푸라기로 서성이지 말고
너는 내게 기대고
나는 너를 보듬어
서로 비비고 꼬아보자
가슴 속에 숨은 태양이
이글거릴 때까지
한동아리로 어우러지자
내가 꼬여야 너를 꼬을 수 있고
서로의 길이가 조금만 짧아져야
비로소 부둥켜 안을 수 있으니
혼자는 쓰잘 데 없지만
꼬이면 우리는 탈바꿈하느니
퉤퉤 침뱉어 가며 옹골차게
엉덩이 들썩이며 신나게
사래사래 기나긴 줄 꼬아보자
사람 사는 일이라 티격태격도 하겠지만
웬만하면 도탑게 다독이며
오지게 한 번 꼬아보자
멍석 방석도 엮고
둥구니 멱서리도 걷고
가마니 짜고 망태기 뜨며
켤레켤레 짚신도 삼아보자
사는 재미가 게 있으니

<솟대문학 가을호에서>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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