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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점프를 하다!

장애인 이동권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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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지하철 안. 내릴 역을 알리는 안내 방송과 함께 지하철 문이 열리고.
 
휠체어를 탄 C. 문이 열리는 쪽으로 돌아선다. 순간 엄청나게 높은 지하철 단차를 보고 놀란 C의 당혹스런 표정클로즈업. 서둘러 하차를 시도해 보지만 단차 앞에 덜컥 걸려 버리는 휠체어 바퀴 클로즈업되며 긴박한 분위기. 겁에 질린 C, 떨리는 손으로 다시 한번 하차를 시도해 보지만... 승강장과 지하철 사이에 멈춰버린 휠체어, 닫히는 지하철문 사이에 끼어 버리고.
 
곧 열차가 출발한다는 안내 방송 점점 커지고, 공포에 식은땀이 맺힌 C의 이마 클로즈업.
 
공포로 동공이 흔들리는 C의 눈과 지하철 문 사이에 낀 휠체어의 모습 긴박하게 교차하는데...
 
만일 이런 편집으로 구성된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본다면 뭔가 꽤 익숙한 느낌이 아닐까.
 
다이하드나 미션임파서블 같은 헐리우드 판 블록버스터급 액션영화에 길들여진 관객이라면 어쩌면 이런 긴박한 장면이 식상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은 현실에서일어나는 실제상황이다. 어느 날 나에게 일어난, 지금도 누군가에게 일어나고 있을, 앞으로도 그 누구에게든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실제상황 말이다. 
 
 
오산대역에서의 아찔한 경험
친구가 ‘물향기 수목원’에 수국이 참 좋다 했다. 그래? 그럼 또 안 가볼 수 없지. 불편한 1호선 지하철로 지루하도록 긴긴 장시간의 이동을 감수하기만 하면 물오른 수국의 정원을 볼 수 있을 터였다. 해서 친구와 서둘러 약속을 정하고는 수국의 향연을 기대하며 일찌감치 지하철 1호선에 몸을 실었다. 이용량이 유독 많은 지하철 1호선, 특히 번잡한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 1호선을 타는 일은 삼엄한 적진을 뚫고 돌진하는 장수의 용기가 조금은 필요하다.
 
그러나 용기도 기대도 수목원이 있는 오산대역에 내리는 순간 단번에 얼어붙어 버렸다. 안 그래도 1호선 지하철 타고 오는 내내 중간중간 승강장 사이와 단차 간격이 엄청난 역들을 지나오며 슬슬 기가 질리던 중이었다. 드르륵... 지하철 문이 열리는 순간 내 앞에 거대한 절벽이 가로막히는 듯한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승강장 사이와 단차 간격이 큰 역들은 대부분 하차시 엉겁결에 훌쩍 뛰어내리는 기분으로 내려오곤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이 역은 높은 절벽을 뛰어올라야 하는 형국이었다. 가히 10센티는 족히 넘어 보이는 높은 단차를 휠체어로 거의 날아올라야만 하는 수준이었다. 이건 적진을 뚫고 돌진하는 정도가 아니라 무협지에 등장하는 강호의 고수들처럼 공중부양을 하는 신기를 발휘해야만 가능한 경지가 아닌가.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2호선 을지로입구역, 단차가 높다.)
 
두 눈 질끈 감고 몸은 깃털처럼 가볍게! 최면을 걸며 한껏 숨을 들이키고 섬세하게 칼끝을 겨누듯 조이스틱을 앞으로 힘차게 밀어 보았지만... 역시 나는 고수가 아니었다. 결국 절벽 앞에 멈춰 선 휠체어. 황급히 뒤로 후퇴했다가 있는 힘껏 몸을 젖히고 다시 밀어 올리니 앞바퀴가 날아올라 승강장에 겨우 닿았다. 이제 뒷바퀴만 앞바퀴를 따라가 준다면 성공. 아뿔싸... 그러나 뒷바퀴는 도무지 그 높은 절벽 위로 치고 오르지 못했고 낑낑대는 동안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에 어정쩡하게 멈춰 버린 채 그만 닫히는 지하철문 사이에 끼어 버리고 말았다.
 
마치 거대한 기차가 덮치듯 다가오고 있는 철로에 발이 끼인 채 사투를 벌이는 주인공 같은 심정이었다. 액션영화의 주인공은 멋이라도 있지, 재미와 스릴이라도 있지. 지하철문 사이에 끼어 허둥대는 내 꼴은 마치 그물에 걸린 한 마리 벌레 같았다. 그대로 지하철이 출발해 버리면 문 사이에 끼어 있는 나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현실을 코앞에 둔 절체절명의 순간, 가위에 눌리듯 버둥거리다 겨우 목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도와 주세요!!!”
그야말로 액션영화 감상하듯 남의 일처럼 멀뚱히 보고 있던 사람들 사이로 한 승객이 튀어나와 있는 힘껏 내 휠체어를 밀어주었다. 기차가 덮쳐 오는 바로 그 순간, 극적으로 철로에서 발을 뺀 액션배우처럼 나도 가까스로 닫힌 지하철문에서 빠져나와 간신히 절벽 위로 안착할 수 있었다. 아찔한 순간을 모면하고 나니 극도의 긴장감에서 풀어진 몸이 헝겊 인형처럼 늘어졌다. 피가 얼어붙은 듯 새하얗게 질리고 차디찬 온몸이 그때서야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 왔다. 살았다!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수목원이고 뭐고 수국이고 뭐고 순식간에 모든 것이 시들해져 버렸다. 휠체어 타고 다니다 보면 이런 위험한 순간은 차고 넘치게 겪는다. 다만 오산대역에서의 경험이 내게 특별했던 것은 휠체어 탄 채로 지하철문 사이에 끼어 버둥대며 탈출을 시도한 역대급 블록버스터 액션의 주연을 내가 맡았다는 것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도 나는 결코 액션 체질이 영 아닌데도 본의 아니게 액션영화급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곳들이 곳곳에 많아도 너무 많다. 
 
(2호선 을지로3가역의 단차로 승차를 시도하는 휠체어 이용자. '번지점프'를 해야 한다.)
 
 
목숨 걸고 해야 하는 번지점프?
이런 일이 비단 나만의 경험일까. 휠체어를 타는 수많은 지하철 이용자들이 날마다 겪어내야 하는 일상이다. 어쩌면 장애인들은 넓디 넓은 승강장 사이와 높디 높은 절벽 같은 단차 사이를 그 어떤 안전장치 하나 없이 목숨 걸고 번지점프 해내며 살아남은 극적인 생존자들인 것이다. 
 
이를 절감한 이들이 지난 2019년 서울교통공사를 상대로 차별 구제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을 청구한 두 장애 당사자들(장향숙, 전윤선)은 신촌역(서울지하철 2호선)과 충무로역(3호선) 승강장과 연단 간격이 10cm를 넘거나 높이 차이가 1.5cm를 초과한 부분에 대해 ‘장애인 승객의 사고 방지와 정당한 이동편의지원을 위한 안전발판 등의 설비’를 요구하며 손해배상도 청구했으나, 법원은 사건 청구를 모두 기각하였다.
 
‘지하철 차량과 승강장 연단의 간격이 10cm가 넘으면 안전발판 등 승객의 실족 사고를 방지하는 설비를 설치하’도록 되어 있는 조항은 엄연히 ‘도시철도건설규칙’ 제30조의 2 제3항에 명시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에 대해 법원은 신촌역(1984)과 충무로역(1985)이 이런 규정이 없던 2010년 이전에 준공된 것을 이유로 소급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또 법원은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 정하는 교통사업자가 제공하여야 하는 편의 내용에 안전 발판은 규정되어 있지 않다며, 서울교통공사가 정당한 편의 제공을 회피했다고 볼 수 없다고도 판단하였다.
 
안타깝게도 지하철을 주로 이용하는 수많은 장애인들이 안전 설비와 대책 미비로 인한 치명적인 사고 위험에 노출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상응하는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 서울교통공사 측에 책임이 없다고 합법적으로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럼 위험에 처해 있는 수많은 장애인 승객들은 대체 어디에 도움을 구하고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단 말인가. 
 
 
서울지하철과 비교되는 사례
다른 지역의 지하철은 어떨까? 대구에 있는 한 대학에서 학업을 한 탓에 매주 대구에 가야 했던 특별한 경험이 있다. KTX를 타고 약 2시간쯤 달리면 딱 여행하는 기분으로 도착지에 내릴 수 있다. 기차에서 내려 학교까지는 보통 대구지하철로 이동하는데, 그 지역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승강장 넓이와 단차 때문에 긴장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물론 대구의 모든 역을 다 이용해본 것은 아니지만 일단 내가 다니는 동선(1호선과 2호선을 모두 타는)만큼은 휠체어로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대구지하철 1호선의 동대구역. 휠체어 이용자가 디니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어 보인다.)
 
부산에 갔을 때 승강장과 지하철 단차가 꽤 높은 역이 있었는데 전혀 위험하지 않게 이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휠체어 이용자를 위한 탑승 위치를 눈에 잘 띄도록 설치해 두었을 뿐 아니라 단차만큼 승강장 높이를 돋우어 단차를 없애 안전한 승차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물론 서울지하철역 승강장 중에도 그런 곳이 여러 군데 있긴 하다. 그러나 단차를 완전히 제거하는 정도는 아니어서 미비할 뿐 아니라 그 지점에서는 안전하게 승차했더라도 도착하는 승강장에 위험한 단차가 있다면 피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도착지에 내리기 전 안전발판 서비스를 미리 신청하라고 해결책을 권하지만, 그도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셀 수 없이 많은 역들 중에서 초행자라면 그 역의 상황을 미리 예측할 수도 없거니와 언어장애가 있는 이용자들에겐 전화로 안전 발판 서비스를 요청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난관이기 십상이다.
 
특히 붐비는 출퇴근 시간에 위험한 승강장에서 그 블랙홀 같은 단차를 뛰어넘어 승하차에 성공하기란 거의 ‘날아오르는’ 수준의 기술이 필요하다. 빼곡히 늘어선 승객들 사이 견고한 틈을 비집고 날아오르려면 과감함, 민첩함, 세밀함의 절묘한 조화가 이루어져야만 하는 극도의 예민한 순간이 된다. 이 모든 조건이 여의치 않다면 결국 승하차를 포기해야만 하는... 그러다 보면 정해진 약속이고 뭐고 어그러지는 일은 다반사가 된다.
 
 
위험한 정글과 같은 승강장, 하루빨리 안전한 설비가 갖춰지길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들은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지하철 승강장에서 번지점프를 해야 하는가. 과감한 도전에 성공한 번지점프는 박수라도 받지. 휠체어 탄 지하철 이용자들이 감행해야 하는 진퇴양난의 번지점프는 성공해 봐야 고작 ‘오늘도 살았다’는 안도와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 위험한 상황에 방치된 약자로서의 자괴감만 남을 뿐이다.
 
내가 살아 숨 쉬는 일상의 공간이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도록 마련된 보호장치가 아니라 요행이나 운에만 의존해야만 하는 곳이라면 그것이 위험한 정글과 무엇이 다른가. 그럼에도 이 위태로운 현실에서 우리를 구원해줄 동아줄은 끊어진 셈이다. 
 
법이 나서서 마땅히 안전한 설비를 갖추고 위험을 방지할 책임이 있는 이들에게 ‘책임 없음’을 선언해 주지 않았던가. 누군가 겪는 위험한 일상을 그저 식상한 액션 영화 보듯 대하는 그 무딤과 안일함이 어쩌면 더 위험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어느 위험한 승강장에서 번지점프를 해야 하는 이들의 건투를 빈다! 
 
 
작성자글. 차미경/작가 ⊙ 사진. 박관찬 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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