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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나는 날마다 일어서는 꿈을 꾼다"

행상장애우 곽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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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일어서는 꿈을 꾼다"
행상장애우 곽기근

척수장애인 곽기근씨는 서울 황학동 벼룩시장 한켠에서 라이타 행상을 한다. 일어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 거의 날마다 일어서서 다니는 꿈을 꾼다는 그, 그는 하루에 천원씩 모아 자신처럼 전동휠체어가 없어서 세상에 나오지 못하는 장애우에게 전동휠체어를 사주겠다는 소박한 소망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
 
 전동휠체어, 이 작은 반경으로 움직이는 기계가 거리를 활보한다. 그러면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차도 많고 인파도 많은데 괜히 나와서 걸리적거린다"고 못마땅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사정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문외한의 투정이기 쉽다. 장애우에게 경우에 따라선 전동휠체어가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일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동휠체어를 타는 장애우 입장에서는, 더욱이 척수에 장애를 입어 무려 십오 년을 집에서 죽은 듯이 누워있어야 했던 곽기근씨 입장에서는 이 말이 여간 섭섭한게 아니다.
 곽기근씨가 전동휠체어를 구입한 것은 지난 칠월이다. 충격적이게도 그 날 전까지 그는 이 세상에 전동휠체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십오 년이라는 긴 세월을 오매불망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끼고 살았음에도 그 "문명연인"이 외면하며 가르쳐주지 않아 그는 움직이는 휠체어가 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하지 못했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전동 휠체어를 탈 수 있었던 것은 관절염을 앓아 역시 다리를 쓰지 못하는 바로 위 누나 곽용순씨가 먼저 한 종교단체 도움으로 전동휠체어를 구입했기 때문이다. 그는 누나의 전동휠체어를 보고 비로소 대상은 분명치 않지만 누군가 자신을 속였다는 심한 자괴감을 맛봤다. 십오 년이라는 생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린 것 같은 억울함…
 그러는 그는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그는 서둘러 십오년 동안 사촌형들과 고향친구들이 가끔씩 찾아와서 용돈 하라며 떨구고 간 꼬깃꼬깃 접은 돈 육십여만 원을 꺼내들었고 그런 다음 마침 찾아온 한 친구에게 "전동휠체어를 한 대 사고싶다"고 말했다. 그 친구는 "친구들이 오십만 원을 모아줄 테니까 나머지는 알아서 마련하라"고 했다. 그런데 그 즈음 그 소식을 들은 그가 다니던 동네 교회의 마음좋은 한 권사가 선뜻 전동휠체어를 그에게 선물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세상바람을 쐬게 됐다. 정확하게는 칠월 육일이다. 그는 처음 전동휠체어를 타게 되자 너무 좋아서 힘든 것도 모르고 바퀴 닿는 대로 가리지 않고 온 시내를 쏘다녔다. 안 그렇겠는가. 십오 년만에 만난 건물들이 새롭고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들 모습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 돌아다니지 않고 어떻게 배길 수가 있겠는가.
 그는 이렇게 며칠을 쏘다녔다. 그러다가 우연히 서울 충무로에서 그와 같은 전동휠체어를 타고 라이타 장사를 하고 있는 김아무개씨가 작은 좌판을 휠체어 위에 올려놓고 장사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파뜩 그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게 됐다.
 예순 다섯 살이 된 어머니와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는 누이, 그리고 조카 두 명을 부양해야 할 책임이 그의 어깨 위에 무겁게 얹혀져 있었다. 아버지 곽성옥씨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은 올해 삼 월이었고 그의 집 생계는 전적으로 그때 나온 보상금 팔백만 원을 까먹으며 이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것저것 재 볼 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래서 불문곡직하고 김아무개씨에게 다가가 "나도 이런 장사 한번 해보고 싶은데 어디서 물건을 떼 오는지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김아무개씨는 라이타를 받아 오는 장소를 가르쳐 주는 것과 아울러 손수 "좌판까지 짜주겠다"며 쾌히 응낙했다.
 그는 오천 원을 주고 나무좌판을 짠 다음 김아무개씨가 일러준 거래처에서 삼십만 원어치 라이타를 떼와 본격적인 장사에 나서게 됐다. 이때가 칠월이십사일이다. 그 날 이후 그는 명동에도 가보고 대한극장 앞에도 가서 좌판을 벌여 놓기도 하다가 결국 청계천 팔가 유명한 황학동 벼룩시장에 자리를 잡고 현재 두 달째 장사를 하고 있다.
 "거리에서 장사를 하다보니 수시로 단속반에 쫓기기도 해요. 단속하는 사람이 골목에 들어가서 장사하라고 그러지만 사람이 많이 다니는데 있어야 라이타를 하나라도 더 파는데 어디 그럴 수 있나요. 그래서 그냥 단속하는 사람 말 듣는 시늉만 해요. 다행히 주위에서 장사하는 사람은 뭐라고 그러지 않아요. 장애를 가졌다고 봐주는 것 같은데, 이보다 더 뭘 바라겠어요. 저는 지금 하고 있는 장사에 만족해요." 그이는 지금 삶이 이전 삶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소중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 같은 설레임마저 든다"는 그, 그는 과연 어떤 인생을 살아왔을까?
 곽기근씨는 일천구백오십이년 아버지 곽성옥 어머니 허종심씨의 사남 일녀 중 셋째로 전남 승주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여덟 살까지 자란 그는 아버지가 서울에 먼저 올라가 도장포를 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이 나이 아홉 살 때 식구들과 서울로 올라오게 됐다. 신당동 한양공고 건너편에 셋방을 얻고 일곱 식구가 한방에서 기거하는 가난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설상가상으로 그이는 어머니가 전학서류를 떼 오지 않아 학교마저 다닐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그는 나이 열 살 때 그이 네가 세를 살고 있는 주인집아들이 다니고 있는 것을 계기로 겨우 초동공민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당시 학교는 청구동 산꼭대기에 있었다. 그 곳을  이학 년까지 다니다가 그는 결국 학업을 끝마쳤다. 그렇게 된데 에는 당시 한 달 육성회비 오십 원을 어머니한테 받아서 학교로 가다가 동네 불량배들에게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학교를 가지 않고 거리를 쏘다니다가 사촌형한테 걸려 많이 혼이 난 다음 아예 학교와는 담을 쌓아 버렸다.
 이른 나이에 돈벌이에 나선 곽기근이 처음 한 일은 금호동 로터리에서 청구동 꼭대기까지 물지게를 져다 주고 한 지게당 이십 원을 받는 일이었다. 하루에 한 지게라도 져주고 두 지게도 져주고 그 대가로 받은 돈으로 그는 당시 한 그릇에 이십 원 하던 우동도 사먹고 군것질도 하며 거리에서 지냈다. 그러다가 수입이 일정치 않자 이번에는 신문팔이로 나섰다.
 신아일보와 대한일보가 나오던 그 시절, 그는 신문 일곱 부를 십원에 도매로 떼와 청계천에 있던 시네마극장이라고 동시상영을 하던 영화관에서 관객들을 상대로 한 부에 삼 원씩 팔았다. 다 팔리면 또 가서 떼 오고, 영화도 공짜로 보면서 신문팔이를 이 년여쯤 했다.
 그 다음 그가 한 일은 구두닦이였다. 구두 통을 둘러메고 평화시장 앞에서도 닦고 청계천 끝에서 끝까지 왔다갔다하면서 닦기도 하면서 한 켤레 닦는데 십 원을 받았다. 그는 하루 열다섯 켤레 가량을 닦았다. 평균 수입이 백오십 원 정도인 셈이었다. 이때부터 집을 나와 생활하던 그는 창신동 전차 정거장 부근 하숙집에 거처를 정하고 돌아다니는 게 재미있어서 고생이라 생각지 않고 구두 닦는 일 외에 껌 장사, 귤 장사 등 돈 되는 일이라면 닥치지 않고 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미제 껌을 팔다가 경찰에게 잡혀 가지고 악명 높았던 아동보호소에 넘겨져 육 개월을 갇혀 있기도 했는데 아동보호소 생활은 지독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루종일 무릎 꿇고 앉아 있고 도망치다가 걸리면 매를 맞고, 그래서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어떻게 알았는지 찾으러 와 아동보호소를 나올 수 있었다.
 아동보호소에서 나오고 난 뒤에도 그는 거리에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이 나이 열여덟 살이었을 때 아버지가 "사촌이 다니고 있는 금은세공 공장에 기술을 배우러 다니라"고 엄명했다. 그이는 별수 없이 금은세공 공장엘 나갔다. 그런데 이틀째 출근하자 공장에서 숙식하던, 그보다 나이가 어린 소년들이 유세를 하며 이불을 널어놓고 그이에게 개라고 해 그는 배알이 꼴려 그냥 공장을 나와버렸다.
 며칠 후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게 되고 그는 "외삼촌이 좋은데 취직시켜 줘 거기 다니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아버지가 "그럼 그 곳에 같이 가보자"고 대동을 하는 바람에 아버지와 같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삼각지 부근에서 내려 그 길로 줄행랑을 쳤다.
 그가 도망쳐 간 곳은 전주였다. 구두닦이 할 때 알게 된 등사원지 만드는 공장 사장이 "와서 기술 한번 배워보지 않겠냐"며 가르쳐준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던 그는 기차를 쌔벼 타고 전주에 내려갔다.  
 전주에서 별탈 없이 등사원지 만드는 공장에 취직한 그는 공장에서 기거하면서 아침 네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일을 했다. 닥나무 껍질을 벗겨 가지고 그것을 찐 다음 거기다 원료를 섞어서 등사원지를 만드는데 거기서 그는 종이는 한 번 떠보지도 못하고 하루종일 닥나무 껍질을 밟기만 했다. 월급이라고 받긴 했지만 식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이일을 그는 일년여 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객기가 발동해 그는 공장 동료들과 어울려 둔 한푼 없이 술집에 가서 술을 진탕 마셨다. 돈 대신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그것도 모자라 옷까지 벗어줬지만 주인이 막무가내로 돈을 가져오라고 해 그는 말할 수 없는 수모를 당했다. 결국 이 일이 빌미가 돼 그는 사장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술 먹고 지랄한다"는 말과 함께 공장에서 쫓겨났다.
 딱히 갈 데가 없었던 그는 전주 서학동 싸구려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그리고 나서 아침에 나오려는데 여인숙 주인이 "갈 곳이 없으면 조바일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의를 해왔다. 그는 서울 갈 차비라도 마련할 요령으로 선뜻 이 제의를 수락했다.
 조바 일이라는 것은 윤락여성을 손님과 연결시켜 주는 일을 말한다. 그는 여인숙 밖에 서서 지나가는 남자들을 행해 "아가씨 있어요. 놀다 가세요." 호객한 다음 잠깐 놀다가는 손님은 삼백 원을 받아 아가씨 백 원 주고 여인숙 주인 백 원 주고 나머지 백 원을 갖고 손님이 긴 밤을 자겠다고 하면 오백 원을 받아 아가씨 이백 원 주고 여인숙 주인 이백 원 주고 역시 나머지 백 원을 소개비로 가지면서 두 달여를 지냈다.
 그런데 조바 일은 낮에는 손님이 없어 지난밤에 겨우 번 돈 이심백 원을 쓰며 죽치고 놀아야 하는 등 별 재미를 보지 못하자 그는 조바 일을 때려 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가 집으로 들어가 식구들은 "왜 또 나가지 그래"하며 비아냥거렸다. 그는 집 부근 신당동 어느 빌딩 앞에다 구두 닦는 터를 하나 잡아 다시 구두닦이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그리 오래하지는 않았다. 한군데 앉아서 구두를 닦으려니까 답답해서 좀이 쑤시던 차에 어떤 사람이 다가와 "이만오천 원 줄 테니 자리를 팔아라"고 하자 그는 솔깃해 그 자리를 팔아 넘긴 것이다.
 그는 자리를 판 돈 가운데 오천원으로 리어카를 한 대 장만했다. 그런 다음 동대문운동장 부군에서 시장 상인들 물건도 날라주고, 철공소 짐도 실어다 주며 호구를 이어갔다.
 이런 짐꾼 일을 하다가 취직한 곳이 밸브 만드는 신진정공사장 아버지가 자주 집에 자주 놀러온 게 계기가 돼 그는 "일을 배워 보겠다"는 소박한 생각을 했고 견습공으로 취직했다. 다행히 큰 쇠를 다루어서 답답하지 않았기에 그는 그 일에 곧 적응했다. 그곳에서 이 년여를 일하는 동안 그의 월급은 처임 이천 원에서 사천 원으로 올랐다. 이때가 칠십 년대 초였다. 당시 사천 원이면 쌀 한 가마니를 살 수 있었던 거금이었다.
 그곳에서 군데 소집영장을 받고 그는 군대에 입대했다. 그런데 논산까지 갔다가 그는 무학이라고 귀향조치를 당해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래가지고 다시 일에 열중했는데 추석 끝 무렵 시골을 다녀왔다가 이틀인가  늦게 온 게 빌미가 돼 공자에서 그만두라고 해 그는 신진정공을 그만뒀다. 그곳에서 나와 그는 신진정공에 있을 때 알게된 사람이 차린 공장에서 일 년여를 일하다가 문래동 고성밸브라는 공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비로소 기술자 대우를 받은 다음 거기서 나와 화양리 대양기계라는 공장을 다시 옮겨갔는데 이곳에서 일하던 중 그는 운명을 돌려놓은 희비극을 맛보게 된다.
 희극은 같은 공장에 다니는 꼬마중매로 이아무개 여인을 만나 결혼을 약속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 보다 두 살 아래였던 이 여인은 당시 성남시 수진동에 살고 있었는데 옷을 만드는 제품공장에 다니는 참한 아가씨였다. 두 사람은 선을 보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의지하고 살기로" 약속했다.
 이 가난한 연인들은 일주일에 서너번 데이트를 했다. 만나면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주로 돌아다니는 쪽을 택했다. 이 여인의 집이 있는 성남에서 만나 포장마차에서 술을 한 잔 먹고 무교동에도 나와 보고 남한산성에도 올라가 보고 마석에도 놀러갔던 것이 그가 기억하고 있는 그 시절 추억이다. 결혼 얘기가 깊숙이 진행되면서 그가 "결혼하면 나가서 살다가 동생들 장가보내고 나서 들어와서 살자"고 하자 이 여인은 "그러면 다시 들어오기 어렵다. 그냥 부모님 모시고 같이 살자"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여인과의 결혼을 삼개월 앞두고 그는 비극을 당하게 된다. 때는 칠십팔년 봄날 어느 날이었다. 그 날 저녁 그는 퇴근 후 자전거를 타고 성남으로 이 여인을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허탈해서 돌아오는 중이었다. 속력을 내던 그는 공장이 있는 화양리 로터리 부근에 아무개 호텔 버스가 세워져 있는 것을 언뜻 보았다. 그래서 버스 옆으로 돌아가려고 핸들을 꺾는데 마침 옆쪽으로 택시가 달려오는 것이었다. 그는 택시를 피하려고 다시 핸들을 꺾었고 다음 순간 호텔 버스를 들이받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는 일어나려고 용을 썼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신은 말짱했는데 이상하게 전신의 힘이 다 빠져나간 듯 어지럽기만 하고 기운을 쓸 수 없었다. 그는 주변 운전사들의 도움으로 근처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때만 해도 코피만 조금 흘렸을 뿐 겉으로는 멀쩡했기에 금방 나을 줄 알았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그에게 사십팔주 치료를 요한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가 자신의 장애상태를 안 것은 수술을 받기 위해 옮겨간 백병원에서였다. 담당의사는 "그의 목 뒤 경추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뼈가 부러졌으며 이는 전신마비를 뜻한다"고 일러주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장애를 실감할 수 없었다. "코피만 조금 흘렸을 뿐인데 언젠가는 일어나겠지" 이런 생각이 들어 사고를 당한 사람이 겪게 마련인 절망감을 그는 느끼지 않았다. 다만 밥 먹을 때 어머니가 일일이 떠 넣어줘야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 불편한 뿐이었다.
 그가 병원에 누워 있자 이 여인이 찾아왔다. 이 여인은 처음 "어떻게 다쳤어요. 일어설 수는 있는 거예요"라고 묻곤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이 여인은 그 후 육개월이라는 기간동안 병원을 찾아왔는데 수발도 들어주고 말동무도 해주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제 나 오지 않을 거예요"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그래, 좋은 자리 있으면 시집 가. 내 생각은 하지  말고"라며 담담하게 말했다. 마음 아파해 봤자 뭐하나. 생활능력이 있어야지 붙잡지. 당시 그는 자신의 처지를 뼈아프게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서 구 개월여 있다가 더 이상 차도가 보이지 않자 그는 퇴원했다. 치료비도 없어 버스회사에 사정사정해 이백오십만 원을 받아 내고 나머지는 동회에서 영세민 증명을 받아 탕감하는 형식으로 오백만 원에 달하는 치료비를 해결했다.
 그로부터 십오 년, 이 긴 세월을 집에서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누워만 있는 그의 고통은 나날들이 시작된다. 아버님이 복덕방에 나가 버는 수입으로 김치와 밥만 먹으면 그는 무료하기 짝이 없는 그 시간을 견뎌야 했다. 덕분에 라디오와 텔레비전 프로는 줄줄이 외울 수 있게 됐지만 그것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답답함이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특히 대변보는 게 제일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그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다. 대신 "내복이 이것밖에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부모님이 짜증을 내며 "그렇게 살아서 뭐하냐. 차라리 죽어버려"라며 고함을 질러대고 "다 같이 죽자"고 그를 채근해도 그는 "이게 내 복이구나"라는 생각만을 했다. 대신 현실의 고통스러움을 그는 꿈꾸기로 달랬다. 잠을 자면 꼼 속에서 그는 걸어다녔다. 어디를 갔는지는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는 두 발로 걸어서 너울너울 세상을 돌아다녔다. 꿈을 깨서도 그 기분은 그대로 이어져 금방이라도 자리를 털고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한참을 헛발질을 하곤 했다.
 그의 꿈꾸기는 행상을 하고 있는 지금도 이어져 그는 "내 생각으로는 지금이라도 금방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아요. 난 일어설 수 있다. 일어설 수 있어. 그런 생각이 드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죽고싶다는 생각은 안 해요"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만약 자신이 일어설 수 있다면 "장애우 시설에 가서 봉사하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키우고 있다. 물론 결혼도 하고 싶고, 결혼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그는 아직 예전의 이 여인을 잊지 못하고 있다. 시집을 갔을 테니 잘살기를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사고를 당하기 전에 이 여인과 결혼만 했어도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진한 아쉬움을 갖고 있다. 이 아쉬움은 엉뚱한 발상으로 이어져 "머리를 부닥쳐서 이렇게 됐으니까 다시 한번 머리를 부닥치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는 지금 신당동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부근, 아버지가 마련해 놓은 여덟 평짜리 집에서 살며 십분 거리인 벼룩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고 있다. 집이 있다고 영세민 혜택을 주지 않아 여전히 생활은 어려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실질적인 가장이다 보니 그가 느끼는 짐은 무척이나 무겁다. 이제 겨울이 시작되면 그 짐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겨울에는 몸이 얼기 때문에 장사를 못나가고 적어도 내년 삼월까지는 쉬어야 하는데 그 기간동안 어떻게 생활을 이어나가야 할지 막막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이제 남은 그의 간절한 소망 하나는 겨울에도 장사를 할 수 있는 가판대를 하나 마련하는 것이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그는 버는 돈을 쪼개 저금을 하고 있다. 현재 삼백오십만 원 가량을 모았는데 천만 원이 모이면 구청에 신청을 해볼 계획이다. 그리고 그는 이웃을 생각한다. 작년 십이월 텔레비전을 보다가 전주에 사는 한 아주머니가 콩팥이 없어서 수술을 못한다는 보도를 접하고 그는 자신의 콩팥을 떼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심장재단에 물어보니 장애우 콩팥은 안 된다고 해서 그는 그 일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요즘 들어 그의 이웃 생각은 좀더 구체성을 띠고 진행되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내가 장사를 할 수 있게 도와준 충무로에서 라이타 장사하는 장애우하고 둘이서 하루에 천 원씩 매일 이천 원을 모으고 있어요. 지금 모은 돈이 한 이십만 원 가량 되는데 이 돈이 팔십만 원쯤 되면 지금 제가 타고 있는 정동휠체어를 사서 저처럼 전동휠체어가 없어서 바깥출입을 못하는 가난한 장애우에게 주려고 해요." 그가 이천 원짜리 라이타를 하나 팔면 팔백 원이 수입으로 떨어진다. 이렇게 장사를 해서 하루에 많이 벌면 삼만 원, 보통은 만오천 원 정도를 버는데 이 수입으로 그는 집안 살림에도 보태고 저금도 한다.
 오늘도 일어서서 다니는 꿈을 꾼다는 곽기근씨, 그의 더 이상 돌아다니지 않고 한 곳에 정착해서 장사를 하고 싶다는 소망은 언제나 이루어질 것이며 그가 마침내 꿈에서처럼 일어서서 다닐 수 있는 날은 그 언제일까.

글/이태곤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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