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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부부 청각장애우와 포장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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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부 청각장애우와 포장마차

       “아저씨 닭꼬치 주세요 얼마에요?”
       “천원인데요”
       “풀빵은 얼마에요?”
       “천원에 4갠데요”
       “그럼 풀빵 2천원 어치는 싸주시구요. 닭꼬치는 가면서 먹게 그냥 주세요 ”
       “네. 합해서 3천원입니다”


길거리 노점상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들이다. 물건을 고르고, 가격을 묻고, 돈을 지불하고. 닭꼬치와 풀빵을 까만 비닐봉투에 넣고... 기분이 내키면 농담 한 두 마디 건내면서 친해진다면 단골손님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청각장애우가 장사를 한다면...? 이달에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청각장애우 김유환, 박인순 부부 이야기다.

 
                      
 

포장마차는 여느 노점상과 다를 것이 없었다. 하트모양의 와플파이가 몇 개 구워져 나란히 세워져 있고, 유환씨가 직접 반죽해서 만든 풀빵은 노랗고 맛있어 보인다. 인순씨는 닭꼬치를 한차례 구워 놓고 양념이 눌러 붙은 철판을 닦고 있다. 얼핏 지나가면서 본다면 길거리 노점상에서 늘 보는 그런 풍경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부부가 유달리 잘 웃고 사람 좋아 보인다는 정도.
그러나 닭꼬치라도 한 개 사먹을 요량으로 주인에게 주문을 하고 나면, ‘어∼’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얼마냐고 물어도 물건 파는 사람은 대답이 없다. 손님이 지갑을 꺼내들어야 그제서야 얼마라는 말 대신 손가락 하나를 펴서 내밀거나 입술을 움직여 ‘천원’이라는 표시를 한다. 그리고는 미안한 듯 부부가 둘 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웃는다.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김유환(43)·박인순(40)부부는 두 명 모두 청각장애우기 때문이다.

〈주문하고 돈 계산 하는 건 어떻게 할까?〉
유환씨가 장사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종이에 가격을 적어서 포장마차에 달아놓고 손님에게 그걸 가르켰다고 한다. 호떡은 천원에 몇 개, 와플은 얼마. 그럼 웬만한 손님들과는 문제가 없었다. 다들 알아서 돈을 주고 사가지고 가니까. 하지만 간혹 손님과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천원 짜리를 내고 오천원을 냈다고 착각하는 손님이나 싸달라는지 먹고 가겠다는 건지 분간이 안가는 손님은 참 곤란하다.
특히 낸 돈을 착각하는 손님은 방법이 없다. 말로 따질 수가 없으니, 그냥 손님이 줬다는 금액에 맞춰 거스름돈을 주거나 물건을 싸주는 수밖에. 장사를 하면 간도 쓸개도 다 내줘야 한다고 하지만, 말이 쉽지 장사꾼 속은 타들어 가기 마련이다. 하물며 청각장애우가 장사를 한다면 그 속내는 안 봐도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종이에 써서 이야기하고 따지면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건 시간이 너무 걸리고 다른 손님이 있거나 음식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하나 쓰는 것이 힘들다고 했다. 그렇다고 장사를 안 할 수도 없고 ‘차라리 손해를 보고 말지’ 하니까 손님과 부딪힐 일도 적고 또 자연스럽게 웃음으로 대신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어서오세요”라는 말 대신 ‘환하게 웃는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것이다.
손님문제가 아니더라도 힘든 일은 많다. 불판에서 나오는 열 때문에 한여름이 너무 힘들고 닭꼬치를 굽는 연기에 눈이 예민한 인순씨는 항상 매워서 눈물을 흘리곤 한다. 또 장사가 좀 되니까 은근 슬쩍 유환씨네 포장마차 옆에 자리를 만드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인터뷰하는 날도 옆에 붕어빵 리어카가 보였다.
포장마차라고는 하지만 노점상이니, 간혹 있는 노점상단속도 무섭다. 한번은 유환씨가 시청에 가서 ‘장애우니까 혜택을 달라’고 따진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별다른 혜택을 주거나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계도기간이라는 게 있어서 시청에서 미리 나와서 다닌다고 한다. 그래서 계도기간이 지나고 나면 유환씨는 몇 일씩 장사를 쉰다. 계도기간이 지나면 단속기간이니까.

〈가구공장에서 손가락까지 잘리고... 안 해본 일이 없어〉
김유환씨 역시 사연 많은 장애우의 삶을 살았다. 우선 청각장애가 선천적인 것인지부터 물었다. 그러나 유환씨는 대답을 주저했다. 갓난아이 때, 할아버지가 안고 어르다가 떨어뜨렸는데 그 사고로 청력을 잃었다고 알고 있지만, 유환씨의 누나 역시 청각장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환씨는 자신이 선천적 청각장애우인지 사고에 의해 그렇게 됐는지 정확히 모르겠다는 것이다.
청소년 시절은 농아학교에 다니면서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서울에서 가구공장을 하는 친구가 유환씨를 데려다 일을 시켰는데 그게 유환씨의 첫 직장이었다. 그곳에서 1년 넘게 일하면서 손가락 두 마디를 잃었다. 나무를 다듬는 대패기 기계의 전기톱에 왼손 엄지와 오른손 검지마디를 잘린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이라, 작은 가구공장에서 산재보험에 들었을 리도 없고 공장주인이 아빠친구라 보상금도 없이 그냥 치료비를 대주는 것으로 끝냈다고 한다. 그리고는 공장을 떠나 다시 김제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더 있다가는 어떻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에 공장 일을 그만둔 것이다.
김제에 내려와서는 부모님이 하시는 농사일을 도왔다고 한다. 그 뒤로 10년 동안. 유환씨는 밭농사와 논농사를 지었다. 인터뷰 도중 얼굴이 까맣다는 말을 했더니, 한참 농사짓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하얗다며 쑥스러운지 자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사람들이 잘생겼다고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유환씨는 수화로 뭔가를 한참 설명했다. 통역을 하던 윤여진씨가 입을 삐쭉거리며 전하는 말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유환씨 본인은 원래 잘생기지 않았는데 부인이 워낙 예뻐서 20년을 같이 살다보니 유환씨도 닮아 가는 것 같다네요”
결국 부인이 너무 예쁘다는 자랑이었다. 여진씨의 말로 유환씨와 인순씨의 애정은 남다르다고 한다. 교회 안에도 사이좋은 부부가 있고 그냥 그런 부부들이 있기 마련인데,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애정을 별로 숨기지 않는 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인순씨는 장사를 하면서도 곱게 화장을 하고 유환씨와 똑같이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짓는 모습이 참 많이 닮아 있었다.
유환씨와 인순씨는 주말이면 장사를 쉬면서 김제 에바다농아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나가는데, 신앙심이 깊어진 데에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장소가 교회였기 때문이다. 부안교회와 김제교회의 합동예배에서 처음 만나 결혼까지 간 것이다. 그러나 결혼이 쉽지는 않았다. 유환씨 집에서 아들이 비장애우 여성을 만나 결혼하길 바랬던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흔히 말하는 ‘사랑의 도피’를 결행했다고 한다. 수원에서 방을 얻어 신혼살림을 살면서 큰아들 성수도 낳았다. 부모님이 찾아오신 건 성수가 2살 되던 해였다. 아이까지 낳고 사는 두 사람을 인정해 주셨고, 나중에 두 사람은 김제로 내려다 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짓고 살았다. 현재 둘 사이에는 고1이 된 성수와 14살짜리 민수, 막내딸 선미, 이렇게 3자녀가 있다.
 
〈웃는 얼굴만큼 한복도 예쁘게 만들어요 〉

인순씨가 17살 때였다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이모가 안다는 친척을 따라 혼자서 정읍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그 집에서 이것저것 시키는 대로 일을 배웠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한복치마를 만드는 일이었다. 집안 일부터 가게 일까지 이런저런 잡다한 일까지 다 해주고는 20살이 되던 해까지 3년 동안을 그렇게 살았다. 더 이상은 일이 힘들어 견딜 수 없어서 부안집으로 다니러 왔다가 다시 가질 않았다. 그 뒤에도 몇 차례 전에 일하던 집에서 데리러 왔지만 가지 않았다. 그러다 집 근처의 한복집에서 본격적으로 기술을 배울 기회가 왔다. 한복집 아주머니가 인순씨의 바느질 솜씨를 보더니, 솜씨가 좋다며 딸같이 데리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인순씨의 한복 만드는 솜씨는 꽤 인정받고 있다. 85년에 있었던 ‘장애인기능대회’에서 한복 만드는 기술로 금상을 받은 적도 있다. 인순씨도 자신의 실력이 인정받아서 좋았지만 누구보다 좋아하신 건 시부모님이었다. 처음에 결혼을 반대했던 시부모님들도 인순씨가 상을 타고나자 자랑스러워 하셨다고 한다. “남편이 대회소식이나 참가방법까지 다 알아봐 주고, 그래서 대회에 나갈 수 있었다”며 인순씨 역시 은근히 남편자랑을 했다.
아직도 한복을 만드냐는 질문에 인순씨는 “요즘은 너무 유행을 많이 타고 말을 못하니까 일감을 얻기가 힘들다”고 했다. 다만 몇 일 전에 딸아이를 위해 바지를 한 벌 만들었다고...인순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장애우들이 힘들게 익힌 기술이 제대로 된 교육과정이 없어서 ‘한때 기술자’로 끝나는 것 같아 아쉬웠다. 고급기술을 가진 장애우를 위한 재교육과정이나 일감 알선 프로그램이 정부의 보조나 장애우 단체들에 의해 만들어져야할텐데.

〈노점상 생활만 올해로 13년째 〉
유환씨와 인순씨는 10년 짓던 농사일을 관두고 식용토끼를 키운 적이 있다. 이천의 농장에서 토끼를 가져다가 키웠는데 첫해에는 번식도 잘하고 토끼도 많이 늘었다. 그러나 다음해에 전염병인지, 정확히 뭔지도 모르는 병에 걸려 토끼들이 다 죽어버렸다. 시작한지 1년만에 다시 빈털털이가 된 것이다. 두 사람은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때만 해도 인순씨가 한복을 만들 때여서 한복 만드는 일도 간혹 있었고 유환씨 역시 기술을 배우려고 아파트 공사 현장을 따라다녔다. 그런데 인생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공사현장에서 사고를 당해 유환씨의 갈비뼈가 부러진 것이다. 치료야 받았지만 그후에도 계속 허리가 아파서 결국 그 일도 그만둬야 했다.
다행히 유환씨에게 호떡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사람이 있었다. 기름기 없이 노릇노릇하고 담백하게 굽되 안은 텅 비어있는 모양의 옛날호떡을 굽는 비법이었다. 지금이야 길거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만, 유환씨가 장사를 시작하던 93년도에는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고 한다. 옛날호떡을 처음 만든 사람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농아들에게만 그 비법을 가르쳐 줬고 유환씨도 그 사람으로부터 기술을 배워 옛날호떡 장사를 시작했다.
지금도 유환씨는 옛날호떡에 대한 애착이 많이 남은 듯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사가 뭐였냐고 물었더니 호떡 장사였다고 말하는 걸 보면. 그러나 지금은 담백한 맛에 먹는 옛날 호떡을 찾는 사람이 없어서 가끔 지역축제 장소에서나 만들어 판다고 한다. 그런 곳에는 의례 나이 든 어른들이 많이 오니까.
  
〈작은 가게라도 하나 가졌으면...〉
유환씨와 인순씨가 김제 금만사거리에서 포장마차를 시작한지도 어느덧 8년이 지났다. 처음 장사를 시작하고 13년 동안 익산, 군산, 정읍까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노점상을 했다.  옛날 호떡도 팔고 풀빵도 팔고 닭꼬치도 구워가며.... 안 해본 장사가 없다.
올해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큰아들 성수는 머리카락에 젤을 잔뜩 발라 멋을 내고 다닐 정도로 컸다. 얼마 전 둘째아들 민수가 자전거를 타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한참 장사도 못하고 걱정도 많았지만, 다행히 움직이지만 않으면 별탈이 없을 거란다. 14살이면 한참 움직일 나이라 좀 답답하기야 하겠지만 녀석에겐 좋은 경험이려니 싶다. 무엇보다 앞으로 자전거를 조심해서 타겠지. 막내딸 선미는 올해 8살이다. 정말 눈에 넣어도 안아프다는 귀염둥이다. 유환씨가 멀리 장사를 가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초등학교 1학년인 딸애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을 생각하면 그냥 말아버리곤 했다고 한다.   
그러다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지금 포장마차가 있는 금만사거리 옆에는 초등학교도 있고 시장 앞 입구와도 통해 있어서 그럭저럭 장사는 괜찮은 편이다. 손님들도 대부분이 아이들이다 보니 어른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사보다 마음도 편하다고 한다. 비슷한 업종의 포장마차가 생겨도 그러려니 하고 여름에 뙤약볕에도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다,
나라에서 나오는 장애우 생활보조비와 장사해서 번 돈을 합하면, 어렵지만 그럭저럭 살아간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별 탈없이 잘 크고 유환씨와 인순씨도 잘 지내고 있으니까. 다만 한가지 바램이 있다면......
“여름 햇볕이나 피하고, 단속반 걱정 안 해도 되는, 자그마한 가게 하나 있으면 좋겠어요”
수화로 말하며 웃는 인순씨의 밝은 웃음이 따가워지는 여름날씨에 살짝 찌푸려진다.  

글 서현숙 객원기자  / 사진 윤정은 사진기자/ 수화통역 윤여진


 

작성자서현숙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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