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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내 건강이 오빠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 지 몰라요"

장애의 벽 뛰어넘어 결혼한 박진수·정미숙 부부

본문

"내 건강이 오빠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 지 몰라요"
             장애의 벽 뛰어넘어 결혼한 박진수·정미숙 부부

 
 

                                 

 한 편의 소설같은 삶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이야기 주인공은 박진수씨와 정미숙씨이다. 박진수씨는 올해 서른한살로 뇌성마비 장애우이며 현재 포천에서 장애우를 위한 선교단체 "사랑의 선교회"를 운영하고 있다. 또 한 사람 정미숙씨는 스물일곱 살로 서울 성서신학교 사학년에 다니고 있는 비장애우이다.
 이 두 사람은 작년 구월 사일 결혼했다. 박진수씨의 심한 장애로 인한 주위 반대를 무릅쓰고 두 사람은 "사랑"으로 마침내 하나가 됐다. 물론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험난 했다.
 오죽했으면 남들은 기쁨에 설레이는 신혼 첫날 밤,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대신 밤새도록 부둥켜 안고 통곡하며 눈물을 쏟아냈겠는가.
 두 사람의 결혼은 전적으로 신앙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때로는 신앙이 사랑보다 우선 한다는 사실을 두 사람의 결혼은 잘 보여주고 있다.
 박진수씨의 고향은 강원도 철원이다. 아버지 박창호씨와 어머니 조옥례씨의 칠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한 살 때 열병으로 앓고 뇌성마비 장애우가 됐다. 그것도 아주 심한 말을 제대로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장애 상태로 그는 그 후 십오 년을 누워서만 지내야만 했다.
 세 살 때 농사를 짓던 아버지가 포천에 문구점을 열고 이사를 해서 그는 포천에서 자라게 됐는데 집에서 학교를 보내주지 않아 학교 문턱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텔레비전만을 벗하며 지내야 했던 유년기는 암흑기였다. 그는 부모님이 자신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 이유를 장애우에 대한 인식이 왜곡됐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별 수 없이 한글을 텔레비전을 통해 깨쳤다. 그리고 야구중계를 보면서 미치도록 야구를 하고 싶어 그의 나이 열다섯 살 때 자리에서 일어나려 애를 썼고 그의 "나는 할수 있다. 일어나자 일어나서 야구를 하자"는 간절한 바람은 마당에 있는 세발 자전거를 타는 연습을 하는 것으로 구체화됐다.
 숱하게 넘어지면서도 그는 자전거타는 연습을 그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이백 번 정도는 족히 넘어지고 나서야 겨우 세발자전거를 타게 됐다"고 한다.
 그는 세발 자전거를 타게 되자 본격적으로 바깥 나들이를 시작했다. 그런데 처음 그가 밖으로 나서자 동네 아이들은 그를 "바보"라고 놀리고, 때리고, 그것도 모자라 돌을 던지기도 했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 지는 아이들의 행패를 묵묵히 이겨내야 했다. 그러다가 그가 아이들에게 야구 규칙을 가르쳐 주고, 나아가 코치역도 마다하지 않자 시간이 지나면서 동네 아이들은 그에게 친근감을 표시했다.
 이렇게 동네 아이들과는 문제가 없었던 대신 집안에서 그는 심각한 난관에 부탁쳐야 했다. 큰형이 그의 바깥 나들이를 달가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근 오년을 "집안 망신 시키려고 그래! 창피하니까 나가지 마. 나가지 마라구" 라며 큰형이 구두발과 야구 방망이로 무지막지하게 휘둘러대는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지만 그는 매를 맞으면서도 바깥 나들이를 그치지 않았다. "나 보다 더 못한, 집에만 있는 장애우들을 위해서 나는 나가야 된다. 내가 나가서 장애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야 된다."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그는 형이 없는 틈을 타 부지런히 바깥으로 나갔다.
 이런 그의 바깥 나들이는 그로 하여금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워주었음과 동시에 그가 교회를 다니고, 신앙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집에 누워있을 때는 꿈도 꿀 수 없었던 교회 출입이 그가 바깥으로 나서면서 가능해졌던 것이다.
 그의 나이 열일곱 살 때 그는 그를 찾아온 동네 교회 어느 전도사의 안내로 기도원이란 델 가게 됐다. "기도원에 가서 일주일만 기도하면 낫는다."며 전도사가 오산리 금식기도원에 데려가 그는 그곳에서 꼬박 일주일을 굶었다. 그렇지만 장애는 낫지 않고 대신 "배가 고파서 혼나야"했다.
 그 전도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후로도 집요하게 그를 찾아 왔다. 그가 숨고 도망치기도 했지만 "한 영혼을 구원하겠다"는 전도사의 집념은 대단해서 그를 업고, 때로는 자전거 뒤에다 태우고 교회로 데려갔다. 비록 자발적인 교회행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해서 그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 신앙은 그의 일생을 바꿔 놓는다.
 그의 나이 열여덟 살 때의 일이다. 어느 여름날, 그는 여느 때처럼 마을공터에서 동네 아이들과 야구를 하며 놀다가 해가 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마을길을 세발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저만치서 젊은 청년 두명이 역시 젊은 여자 한 명을 사이에 두고 걸어 오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여자는 강압적으로 끌려 가는 듯 눈물을 흘리며 걷고 있는것이었다. 그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일행이 지나치기를 기다려 간격을 두고 일행을 쫒아갔다.
 일행은 마을 뒷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청년들이 돌아보면 딴데를 보는 척하고 딴전을 피우면서 계속 일행을 따라갔다. 일행은 산을 오르고 있었고 그는 멀리 떨어져서 산을 기어 올랐다. 인적 드문 산 속으로 들어서자 무덤가에 이르러 일행은 멈춰 섰고 청년들이 여자를 밀어 넘어 뜨렸다. 그런다음 반항하는 여자를 때리며 옷을 벗기는 것이었다.
 나무 뒤에 숨어서 그 모습을 목격한 그는 애가 타서 순간 자신도 모르게 기도를 했다.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 제게 지혜를 주세요."그러자 믿을 수 없이 빠르게 마음 속에 응답이 왔다. "모르는 사람들은 뇌성마비 장애우를 바보 취급하잖아요 그걸 이용해서 바보처럼 행동하며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기어서 청년들에게 다가가 "이러면 안돼요. 이러면 안돼요"라고 소리치며 매달렸다. 청년들은 "이 바보 새끼가 뭘 안다고 그러는 거야, 저리 꺼지지 못해!"라며 그를 걷어 찼다.
 그는 매를 피해 다시 기어서 나무 뒤로 갔다. 나무를 붙잡고 청년들 쪽을 돌아보니 상황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여자 웃옷을 벗긴 청년들이 이번에는 여자 아랫도리를 벗기려고 하고 있었다. 그는 기어서 또 청년들에게 다가갔다. "이러면 안돼요. 이러면 안돼요."라며 그가 청년들 바지가랭이를 붙들고 매달리자 이번에는 주먹세례가 쏟아졌다.
 눈덩이에 주먹을 정통으로 맞고 뒤로 넘어지면서 그는 기도를 했다. "어떻게요, 하나님. 지혜좀 주세요. 간절히 기도했어요 그러자 어떤 지혜가 왔냐면 맞고 죽은척 하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나는 넘어지면서 숨도 쉬지 않고 죽은 척했죠. 그랬더니 청년들은 내가 매를 맞고 진짜 죽은 줄 알고 겁나니까 여자는 그냥 놔두고 놀라서 도망가는 거였어요. 청년들이 도망간 뒤 여자가 와서 보니까 내가 멀쩡해요. 그래서 내 옷을 벗어 입혀주고 같이 산을 내려 왔어요."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절대자의 존재를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감도 얻게 된다. "그래 나는 할 수 있다. 부족한 몸이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자." 그렇게 해서 시작한 일이 청소년 상담이었다.
 집에다 "사랑의 글 상담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그는 포천지역 청소년들을 상대로 광고지를 만들어 뿌리며 본격적인 고민 상담에 나섰다. 상담을 하면서 가장 큰 고민은 그의 장애 특성상 의사 소통이 제대로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말을 몇 번 이고 반복해서 하니까 나중에는 알아 들어 그는 상담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그는 청소년들이 고민을 털어놓으면 이런 말로 청소년들을 달랬다. "이거 봐요. 나는 감사해요. 몸은 이렇고 알아듣기는 힘들지만 말할 수 있는 목소리가 있어서 감사해요. 자유롭게 쓸 수는 없지만 사물을 만질수 있는 손이 있어서 감사해요. 세상을 마음대로 볼 수 있고 사랑하는 여러분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는 건 또 얼마나 행복한 일 인지 몰라요…. 내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말해요. 나는 당신을 돕고 싶어요." 띄엄띄엄 이런 말을 들려주면 청소년들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에 비하면 얼마나 하잘것없는가를 깨닫게 되고, 그래서 감동해서 울곤 했다.
 이렇게 청소년 상담을 하면서 그는 한편으로 자신이 장애로 인해 겪어야 했던 아픔을 다른 장애우들은 겪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장애우 선교회를 만들었다. "사랑의 빛 선교회"가 바로 그 선교회다.
 이 시절 일화다. 팔십팔년 그는 포천군 신부면에 사는 한 여성 뇌성마비 장애우의 도움을 호소하는 편지를 받는다. 편지에는 "집이 너무 가난해서 휠체어가 없어 바깥 구경을 못합니다. 형제님 휠체어가 한 대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어요."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보는 듯해 가심이 아팠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휠체어 한 대를 사줄 수 있는 이십오만원 가량의 돈이 없었다. 그는 "내가 이 사람을 위해 뭘 할 수 있겠는지 가르쳐 달라"고 기도를 했다. 간절한 기도 끝에 그는 껌장사를 생각해 냈다.
 만 원어치의 껌을 구입해 하나하나 일일이 포장지를 뒤집어 "예수 ale으세요"라고 쓰고 그는 자전거 앞에 모금함을 만든 다음 포천 시내로 나가 껌장사를 했다. 때는 겨울이었는데 찬바람이 휘몰아 치는 거리를 누비며 그는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여섯시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꼬박 삼일을 껌장사에 매달렸다. 결국 그렇게 해서 이십오만 원에서 삼만 원이 모자라는 돈을 모금해 도움을 요청한 장애우에게 휠체어를 사줄 수는 있었지만 이때 한 지독한 고생의 후유증으로 그는 지금 심한 기관지염을 앓고 있다.
 그렇게 된 데는 그가 껌장사를 한다고 집 식구들이 "네가 거지냐, 왜 그런짓을 하느냐!"며 그를 집에 들여 놓지 않아서 영하 십오 도나 되는 그 추운 날씨에 삼일을 꼬박 바깥에서 노숙해야 했기 때문이다. 휠체어를 사 보낸 후 그는 몸저 누웠고 자리에서 일어난 후에도 그는 기침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일화에서 보듯 그는 선교회 일을 하면서 받기보다는 주는 쪽을 선호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는 이미 이때 베품으로써 더 큰 것을 얻는다는 진리를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를 절대자가 있다면 외면할 리는 없었을 것, 이라는 표현을 여기서 쓰면 지나친 표현일까.
 이제 두 사람의 결혼에 얽힌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때는 구십이년 십이월 이십오일 성탄절이었다. 그날 저녁 서울 상계동 마들복지관에서는 장애우들을 위한 예배가 열렸다. 여기에 박진수씨는 참석했다.
 그날 오전 성서 신학교 이학년에 다니고 있던 정미숙씨는 써클 후배에게서 "오늘 저녁 빛 선교회에서 여는 장애우들을 위한 예배가 마들복지관에서 있는데 와서 자원봉사 좀 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정미숙씨는 기쁜 마음으로 친구와 함께 참석했다.
 예배는 여덟 시에 시작됐다. 정미숙씨가 처음 박진수씨를 본 것은 예배 중간 순서인 장애우들 "찬양"시간이었다. "진수 오빠를 처음 본 순간 다른게 뭐였냐면 찬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형식적으로 입으로만 부르는 게 아니라 뭔가 깊은데서 우러나오는 찬양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그뿐 정미숙씨는 박진수씨에게 더 이상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당시 정미숙 씨의 머리는 온통 언니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엄마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여덟 시까지는 들어 가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는 것이 여간 초조하지 않았다.
 순서가 진행돼 선물교환하는 시간이 끝나면서 시계바늘이 열 시를 가리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다음 뒤쪽으로 가 신발을 챙겨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구석에 앉아 있던 박진수씨가 손짓으로 정미숙씨를 불러 세웠다. 정미숙씨는 박진수씨에게 다가가 "저 너무 바빠요. 가야 해요."라고 말했다. 박진수씨는 "잠깐 얘기 좀 하고 가요."라며 정미숙씨를 붙들었다. 박진수씨가 정미숙씨를 붙든 건 다름아닌 정미숙씨 얼굴에 그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진수씨는 청소년 상담을 해본 경험으로 정미숙씨가 뭔가 고민이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 보았다. 그래서 박진수씨는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어 정미숙씨를 불러 세운 것이다.
 이런 박진수씨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당시 정미숙씨는 많은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가서 진도를 따라가기도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집에서 학비를 대줄 형편이 못돼 정미숙씨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겨우 학비를 마련하는 형편에 놓여 있었다. 때문에 등록금 문제가 커다란 고민으로 다가와 있었다. "이번 겨울엔 또 무슨 아르바이트를 해서 등록금을 마련할까." 이런 고민으로 정미숙씨 표정은 자연히 어두울 수 밖에 없었다. 박진수씨는 정미숙씨를 붙잡고 늘하던 말을 했다. 정미숙씨가 보기에 박진수씨는 장애가 심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따라서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박진수씨는 "난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가 왜 행복하냐면 나는 볼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볼수 있어서 여기있는 사람들을 바라볼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나는 말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비록 내 말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나는 내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나는 또 먹고 싶은 것들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암에 걸린 환자들은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는 그 고통이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나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손이지만 누군가를 만져 줄 수 있고 사물을 만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또 걷지 못하는 다리지만 짤려지지 않고 달려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나에게서 가장 큰 행복은 남들보기엔 멸시할 수밖에 없는 나지만 이 나를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으셨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나 같은 못난 사람도 사랑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은 정미숙씽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정미숙씨는 박진수씨 말을 들으면서 자신을 비춰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몹시 부끄러웠다. "나는 참 이렇게 건강한데 하나님 날 이렇게 건강하게 해주셔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이렇게 고백해본적이 한번도 없구나. 그동안 하나님앞에 열심히 살아 왔다고 자부했지만 중요한 감사를 나는 잃었던 거야. 그래, 지나온 나의 삶은 전부 다 가식이었어." 정미숙씨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 날 열 시부터 열두 시까지 두사람은 이야기를 나눴다. 박진수씨는 지나온 자신의 삶을 얘기했고 정미숙씨는 그 말을 들으면서 연신 눈물을 훔쳐냈다.
 돌아갈 시간이 되자 박진수씨는 "선교회 회지를 보내줄 테니 집주소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정미숙씨는 기숙사 주소와 언니집 전화번호를 가르쳐 줬다. 그리고 헤어지면서 다시 박진수씨가 "자매를 위해 기도를 해주고 싶으니 기도제목을 말해 주세요."라고 말해 정미숙씨는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게 해달라고 기도해 주세요"라고 대답했다. 정미숙씨도 박진수씨를 위해 기도를 해주고 싶었다.그래서 이번에는 정미숙씨가 말했다. "집사님, 기도 제목이 뭔지 말해 주면 저도 기도해 드릴께요." 그러자 박진수씨는 부끄러워하며 "결혼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어요."라고 자신으 기도제목을 말했다. 정미숙씨는 그 말을 듣자 속으로 신기해 했다. "아니 어떻게 이런 분이 결혼할 수 있을까, 저런 몸으로 결혼할 마음을 다 가지고 있구나."
 그 날은 그렇게 헤어졌다.
 그런데 정미숙씨는 한동안 박진수씨를 만났을 때의 감동을 떨쳐 버릴 수 없어 안절부절해야 했다. 박진수씨가 한 말만 떠올리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찡해 오는 것이어서 정미숙씨는 그 날 봉사를 같이 갔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곤 했다. "은경아, 왜 그 사람생각만 하면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니. 불쌍해서 그런 게 아니야. 난 그 사람 존경해. 얼마나 신실하고 진실한 분인지 몰라…."
 그후로 언니 집으로 박진수씨 전화가 몇번 걸려 왔다. 박진수씨 전화 목소리는 더 알아 들을 수 없어 정미숙씨 는 애를 태웠다. 대충 짐작으로 알아들은 말이 "잘 지내느냐, 어려움은 없느냐"는 말이었다.
 정미숙씨는 이어진 바쁜 학교 일정으로 감동도 엷어지고 점차 박진수씨를 잊어 가고 있었는데 박진수씨는 이렇게 안부전화를 계속 걸어 왔다.
 그러다가 얼마 후 정미숙씨는 박진수씨가 보내온 소포 한 꾸러미를 받는다. 소포를 뜯어보니 안에는 편지와 성구가 새겨진 목각 장식품, 그리고도 뜻밖에도 오만원 이 든 통장과 도장이 들어 있었다. 정미숙씨는 서둘러 편지를 읽어 보았다.
 편지에는 "나는 자매님을 만나고 나서 참 기뻤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아팠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자매님을 도와드릴 수 없는 형편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가 저 자매님을 위해서 뭘 해줄 수 있는지 지혜를 달라고 기도를 하던 중에 어떤 집사님이 오만 원을 선교회일에 쓰라고 부쳐 왔습니다. 지금 선교회에 쓸 일이 많지만 이 오만원을 자매님께 드립니다. 부족하지만 책이라도 사는데 보태 쓰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자매님을 위해 작은 도움이라도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내가 도와야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미숙씨는 박진수씨 편지를 읽고 나서 심한 자책감에 휩싸였다. "오히려 내가 도움을 받다니…" 이런 번민 끝네 정미숙씨는 다시 자신을 돌아 보았다. "나는 입으로만 때웠는데, 후배가 뭐가 절실하게 필요해서 언니 나 지금 어려워요 날 위해 기도해 주세요 그러면 그래 기도해 줄께라고 대답하고 하나님 얘기가 어렵대요 도와주세요. 그러고 나서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진수씨는 기도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남에게 도움을 주려고 애를 쓰고 있어. 그래 이분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올바로 따르는 사람이야. 나도 이제 입으로만 때우는 이천의 내가 아니라 달라진 모습으로 살아야 겠다." 정미숙씨는 이때 신앙생활에 잇어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날 이후 정미숙씨는 박진수씨가 놀러 오라고 해 몇번 포천을 찾아갔다. 찾아온 정미숙씨에게 박진수씨는 이번에는 위로의 말 대신 늘 "많이 공부하고 많이 배웟으면서 왜 그렇게 살지 못하냐, 차라리 못 배우고 덜 배워도 배운 만큼 사는 사람이 더 나아, 어쩌면 많이 배운 그것이 행도을 못하도록 막는 걸림돌이 되는지도 몰라. 신학을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지. 왜 말씀이 있다는 건 머리 속으로 알면서 행도은 그렇게 못하냐, 입으로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돌아볼지 모르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야…"라고 책망을 했고 벙미숙씨는 묵묵히 그 꾸지람을 듣고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오빠와 동생사이로 충고를 해주고 받는 입장으로 만남을 이어가던 어느 날 구십삼년 이월초 박진수씨가 정미숙씨에게 부탁을 해왔다. "이월 삼일에서 오일까지 온양에서 장애우 선교단체 세미나가 열려 가려고 하는데 휠체어를 밀어줄 사람이 없으니 자원봉사 좀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정미숙씨는 때마침 방학이었고 박진수씨에게 뭔가 도움을 줬으면 하고 바라던 참이라 쾌히 박진수씨 부탁에 응했다.
 그런데 세미나에 참석한 정미숙씨에게 생각지 않은 어려움이 닥쳐 왔다. 세미나장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두 분이 어떤 사이예요? 연인 사이 아니예요?"라고 물어오는 것이었다. 자원봉사자냐고 묻는 사람은 없고 결혼 할 사이냐고 물어오는 데 정미숙씨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남감했다. 할 수 없이 정미숙씨는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우리는 연인 사이가 아니라 작년 성탄절에 만나서 알고 지내다가 봉사자가 필요하다고 해 같이 왔다"고 변명을 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야릇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변명도 한두 번이지 자꾸 그런 일이 되풀이 되자 정미숙씨는 짜증이 났다. 그런 한편으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 마음 속에 회의가 왔다.
 "그래 진수 오빠가 장애를 갖지 않고 비장애우였다면 나는 오빠를 엄청 좋아했을 텐데, 이분만큼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이 분이 장애를 갖지 않고 있다면 어쩌면 내가 쫒아다니면서 결혼해 달라고 졸랐을지 몰라. 그런데 나는 이 분의 눈앞에 보이는 장애 때문에 뒷걸음치고 있구나. 그래 나도 별거 아니었어. 나도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어. 세상 사람들이 겉모습만 보고 뒷걸음치고 있는거야. 그런 내가 무슨 신앙인인가? 나는 그 사람에게 있는 영혼이 늘 소중하다고 말하지만 사람의 소중한 영혼보다는 겉으로 보는 모습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그런 사람이구나."
 정미숙씨는 이런 생각을 하자 자신이 싫어지고 슬퍼졌다. 그래서 세미나 마지막 날 저녁, "산책 나가자"며 박진수씨 휠체어를 밀고 밖으로 나가 박진수씨 앞에서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박진수씨가 왜 우냐고 물어볼 것 같아 정미숙씨는 변명삼아 박진수씨에게 물었다. "오빠 혹시 이유없이 울어본 적 있어요? 나는 지금 아무이유없이 울고 싶어요." 박진수씨가 그런 정미숙씨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지금 자매가 왜 우는지 알아요. 아마 나 때문에 울 거예요." "아니예요. 오빠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에 울어요."
 짧은 침묵이 지나갔다. 그윽한 눈길로 정미숙씨를 바라보던 박진수씨 입에서 갑자기 "사랑해요. 자매"라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정미숙씨는 당황해서 박진수씨 얼굴을 쳐다보았다. 박진수씨는 그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나랑 결혼해 주세요."
 정미숙씨는 박진수씨의 느닷없는 프로포즈를 받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미숙씨는 박진수씨가 이성으로 자신을 좋아 하리라는 생각은 여태껏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나한테 책망만했는데 그런 오빠가 나를 이성으로 좋아한다니, 한순간 많은 생각이 정미숙씨 가슴을 휘저었다.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냉정하게 나는 오빠하고 한번도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저한테 그런 얘기하지 마세요 실망했어요 이렇게 말할까. 아니야 나는 오빠를 좋아하고 있잖아. 오빠가 장애만 가지지 않았다면 이라는 생각을 나는 했어. 그런 내가 그런 말을 한다면 그건 내가 거짓말을 하는 거야. 그렇다고 네 저도 오빠랑 결혼하고 싶어요 우리 결혼해요 이렇게 말할 수도 없어. 이렇게 말한다면 앞으로의 내 삶은 어떻게 되는거지. 내 꿈, 내 계획이 모두 뒤바뀌어 버리는데 아 어떻게 해야 하나."
 정미숙씨는 고민했다. 겨우 "기도해 볼께요."라고 대답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 다음날부터 박진수씨는 매일 밤 열 시면 정미숙씨 언니 집으로 전화를 걸어 왔다. 박진수씨는 정미숙씨가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을 이해한다고 말하고 자신이 왜 정미숙씨에게 청혼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했다.
 "혼자 선교회 일을 하면서 힘들어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하나님 이제 저는 더 이상은 못할거 같아요. 그러자 배우자를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해 보라고 하나님이 응답을 주셨어요. 그래서 자매를 만나기 전 구십일년 십이월부터 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일 년이 지나도록 응답이 없었어요. 나는 왜 약속해 놓고 지키지 않냐고 하나님을 원망했어요. 그런데 자매를 만나고 나서 하나님이 자매 모습을 보여 주시면서 너를 위해 준비해 놓은 자매라고 그러는 거예요. 나는 그 응답을 부인했어요. 내가 보기에도 힘들게 살아온 자매인데 나를 만나면 더 힘들게 살 수밖에 없잖아요. 나는 기도했어요. 하나님 그럴 수 없습니다. 저 자매는 지금까지 힘들고 어렵게 살아왔습니다. 나 때문에 더 힘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자매는 누구보다 편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계속 자매 모습을 보여 주면서 응답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매에게 청혼했어요."
 말 끝에 박진수씨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나는 가난해서 풍족한 생활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 거예요. 자매, 지금 우리에게 밥이 한그릇 있고 우린 너무 배가 고파요. 그런데 이 밥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이 잇어요. 그러면 그 밥을 줄 수 있겠어요? 나는 그렇게 살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없고 굶더라고 나 보다 더 어려운 이웃이 있다면 나는 그들을 위해서 살 거예요. 그리고 비록 장애를 가진 몸이지만 이 목숨으로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나는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어요. 목숨이 아까비 않아요. 나는 이미 하늘나라에 갈 사람이고 천국이 내것인데 무엇이 두렵겠어요."
 정미숙씨는 감동했다. 자신이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삶을 박진수씨가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결혼은 냉정한 현실이었다. 정미숙씨는 박진수씨에게 마음이 기울었지만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 몸이 불편한 사람과 평생을 같이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한다면 주위에서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 볼 텐데, 그걸 어떻게 이기지. 또 부모님은 어떻고 나에게 가장 큰 기대를 하고 있는데 부모님을 실망시켜야 하다니…" 말 그대로 정미숙씨 가슴속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정미숙씨는 길을 가다가 자신도 모르게 기도를 했다. "하나님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저를 택하셨습니까? 저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일도 없고 부족한 것 투성인데 왜 저한테 이런 짐을 주셨습니까?" 순간 정미숙씨 마음에 이런 하나님 말이 찾아 왔다. "내가 만약 네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너에게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 중에 너를 택한 것이다."
 순간 정미숙씨는 전율했다. 하나님이 그 많은 좋은 사람 중에 부족한 나를 택하셔서 그렇게 좋은 분을 도울 수 있는 배우자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가. 그런데 나는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하나님이 나를 인정했는데 나는 도망칠려고만 하다니.
 정미숙씨 마음에 환희가 찾아왔다. "그래 나는 못한다. 나는 할 수 없지만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물론 내가 결혼해서 살다가 중간에 후회할 일도 있고, 가슴 아픈일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그때마다 변치 않고 나를 힘주시고 지켜주실 것이다."
 정미숙씨는 마침내 박진수씨와의 결혼을 결심했다. 결혼을 결심하고 보니 박진수씨가 가난하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적어도 재산보고 장애우와 결혼한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것이므로, 정미숙씨는 박진수씨가 가난하다는 사실이 못내 고마웠다. 정미숙씨는 전화로 박진수씨에게 "오빠와 결혼하겠어요. 오빠,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그 날 이후 정미숙씨 가슴에는 박진수씨에 대한 동정이라든가 결혼에 관한 두려움이 말끔이 사라졌다. 결혼을 결심하자 한 사람의 남자로 박진수씨가 가슴에 다가와 너무너무 잘생기고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정미숙씨는 박진수씨와 사랑에 빠졌다. 하루라도 안보면 보고 싶고, 보면 헤어지기 싫고, 박진수씨에게서 전화가 안오면 불안해서 안절부절했다.
 입장이 바뀌어 이번에는 정미숙씨가 하루에 서너번씩 박진수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금요일이면 꼬박꼬박 박진수씨를 보러 포천행 버스를 탔다. 박진수씨는 박진수씨대로 밤 열 시면 전화를 걸어 한 시간이 넘게 통화를 하고, 두 사람의 사랑은 표가 날 정도로 각별했다. 오죽했으면 정미숙씨 친구가 "너는 눈에 뭐가 씌인거 같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정미숙씨는 그런 말을 하는 친구에게 "그래 맞아 씌었어. 나는 이 씌인 것이 죽는 날까지 안 벗겨 줬으면 좋겠어"라고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잠정적으로 결혼식 날짜를 정미숙씨가 여름방학을 시작하는 칠월 사일로 잡았다. 결혼식 날짜까지 잡자 정미숙씨는 집에 자신의 결혼을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언니에게 처음 박진수씨와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예전에 장애우들이 다니는 교회를 다닌 적도 있어 누구보다 장애우에 대한 인식이 좋으리라 생각돼 이해를 해줄 것이라고 믿었던 언니는 그러나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펄쩍 뛰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장애우와 결혼한다면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얘기하겠지만 내 동생이 그럴 수는 없다. 내 친동생이 장애우와 결혼한다면 나는 견딜 수가 없어. 용납할 수 없다고, 알겠니." 정미숙씨는 당황했따. 별수 없이 언니 동의는 받기 힘들겠구나 생각하고 "그럼 언니, 엄마한테는 당분간 비밀로 해줘"라고 부탁하고 말을 끝맺었다.
 정미숙씨가 어머니에게 자신의  결혼을 비밀로 해달라고 언니에게 부탁한 것은 어머니가 마음아파할 것이 분명한 이상 그 아픔을 좀 짧게 해주는게 도리일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언니는 곧바로 어머니에게 정미숙씨의 결혼 사실을 알렸고 그러자 정미숙씨 어머니는 농사를 팽겨치고 고향 완도에서 한걸음에 달려왔다.
 학교로 정미숙씨를 찾아온 어머니는 기대가 무너진 것에 망연자실해 하며 "난 네가 병신하고 결혼하는 걸 죽어도 볼 수 없다. 세상에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나를 가슴아프게 하냐. 난 네가 내 가슴을 아프게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이년아, 당장 나랑 집으로 내려가자"며 창피한 것도 모르고 슬프게 우셨다.
 그렇지만 정미숙씨는 어머니 말을 따를 수 없었다. 정미숙씨는 간절하게 어머니를 설득했다. "엄나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야. 그 사람 아니면 난 결혼할 수 없을 것 같아. 그 분은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냐. 몸은 그렇지만 정상인 못지 않은 사람이라구. 엄마 생각해봐. 내가 멀쩡한 사람과 결혼해서 그 사람이 방탕하고 나 속썩이는 것 보다 몸은 좀 불편하지만 진실하고 나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게 좋지 않아? 내가 행복하다는데 왜 그래. 엄마 조금만 양보해. 지금은 가슴이 아프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미숙이 너 참 결혼 잘했다 내가 그때 왜 반대했는지 모르겠다고 얘기할 거야. 엄마 내가 부탁할게. 그 사람 만나서 얘기라도 한번 해봐."
 "필요없다. 그런 자식을 내가 왜 만나! 다 도둑놈들이야. 다 도둑놈들이라구. 세상에 우리 미숙이가 순진하니까 꼬셔 가지고, 얼마나 꼬셨으면 애가 넘어갔을까,. 안된다. 안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난 그 자식에게 너를 보낼 수 없어 보낼 수 없다구."
 그렇게 박진수씨에게 욕설을 퍼부어대며 통곡하던 어머니는 정미숙씨가 간절하게 애원하고 또 애원을 하자 박진수씨를 한 번 만나보는 것에 동의했다. 며칠 후 박진수씨가 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박진수씨를 보자마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서 방을 나가 버렸다.
 정미숙씨는 그런 어머니 모습을 보면서 방을 나가 버렸다.
 정미숙씨는 그런 어머니 모습을 보면서 야속함을 느꼈다. "오빠가 엄마를 만날 생각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아침부터 몸을 긴장하고 불편한 몸으로 목욕하고 옷도 갈아입고 그렇게 준비해서 그 먼 길을 왔는데 아무리 밉더라도 말이라도 한 마디 하고 가지 그냥 돌아서 가다니 너무나 섭섭했어요." 정미숙씨 말이다.
 정미숙씨는 이런 어머니 때문에 다시 한번 갈등을 겪었다. 어머니가 진지한 표정으로 "만약 네가 내 말을 듣지 않고 그 자식과의 결혼을 끝내 고집한다면 나는 네가 결혼하는 날 자살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데에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정미숙씨가 다니던 교회 목사도 정미숙씨의 결혼을 반대했다. "너는 너무 착해서 탈이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앞으로 해야 할 사역이 많은데 왜 한 사람 때문에 모든 걸 희생하려 하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정미숙씨는 그런 목사에게 "목사님 저는 희생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한 사람을 사랑해서 결혼하는 겁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서러움을 감출 수는 없었다.
 마치 깊은 산 속에 혼자 내팽개쳐진 것 같은 외로움과 답답함을 느꼈다. 고민 끝에 정미숙씨는 도망칠 생각도 했다. "차라리 결혼을 포기해 버릴까. 아무도 없는 섬으로 도망가서 사는 거야." 그러나 그렇게 하면 박진수씨 마음이 아플거고, 그렇다고 결혼을 하자니 어머니가 잘못 되면 그 죄책감을 어쩌나 싶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갈림길에서 방황해야 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정미숙씨는 다시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부모님 가슴 아프게 하고 결혼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못할 것 같아요. 어쩌면 좋은 지 말씀 좀 해주세요." 그러자 다시 마음속에 응답이 왔다. 정미숙씨가 신앙이 사랑보다 우선할 때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이때의 경험을 두고 한 말이다.
 "너는 내 것이라는 거, 세상 모든 것이 다 나 하나님의 것인데 무엇을 두려워하느냐는 거였어요. 너도, 너의 어머니도 다 내것이라는 거였죠. 그러니 엄마가 절대 자살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셨어요. 저는 어머니가 너무 심각해서 정말 자살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저에게 그런 믿음을 주신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또한 말씀을 주셨는데 성경 시편 백십팔 편에 이런 말이 있어요.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여호와께서 내 편이 돼서 나를 돕는자 중에 계시니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이 말을 읽고 저는 더 이상 결혼문제로 갈등하지 않았어요."
 정미숙씨가 갈등하지 않은 또 한 가지 이유는 박진수씨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미숙씨가 갈등하면 박진수씨가 더 힘들어 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박진수씨가 자신의 장애를 더 의식하게 되고 결국 정미숙씨의 행복을 바라며 정미숙씨를 포기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미숙씨는 집과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결혼을 준비했다. 그렇게 해서 구십삼년 구월 삼일 두사람은 의정부 시청앞 잔디밭에서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신혼 첫날 안도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 그도 아니면 기쁨의 눈물인지 모를 눈물을 쏟어내며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특히 박진수씨가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눈물을 쏟아낸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박진수씨와 정미숙씨는 지금 포천에 산다. 두 사람은 박진수씨 어머니가 나물 장사를 해 먹고 살 정도로 가난하고, 그래서 변변한 살림살이 하나 없지만 맨날 보고 같이 있다는게 너무너무 행복해 웃음을 그칠 날이 없다.
 박진수씨는 여전히 선교회 일을 하고 있고 정미숙씨는 신학교에 다닌다.
 앞으로 계획으로 장애아 교육을 위한 "해뜨는 집"을 준비하고 있는 두 사람은 장애우에 대한 인식을 개선시키기 위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끊임없이 일을 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보통 부부들과 똑같아요. 불편한 것도 별로 없고, 아침에 세수물 떠다 주는 거 정도예요. 그리고 우리 부부는 내기를 참 좋아해서 재미있게 놀아요. 우리 진수 오빠 농담도 잘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나한테는 또 얼마나 잘해주는데요." 정미숙씨 말이다.
 "제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냥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장애는 아무 문제가 안 되는 것 같아요. 내 건강이 그 사람을 필요해요. 그러면 내 건강을 그 사람에게 줄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해요?. 저는 내 건강이 오빠에게 필요하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런 정미숙씨를 쳐다보며 박진수씨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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