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같이 살겠다는 것이다 > 사람 사는 이야기


우리는 같이 살겠다는 것이다

권익옹호활동가 배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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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부터 항상 그 자리를 지키는 한 인물이 눈에 띄었다. 앞장서서 외치지 않고 남보다 먼저 나서지도 않으면서 뒤로 물러서는 일도 없이, 언제나 집회 현장 중심 어딘가의 자리를 굳건히 채워주는 한 사람이었다. 말보다는 실천으로 증명한다고 할까? 언제 어떤 현장을 촬영으로 기록해도, 사진들 속에 반드시 등장하는 그 얼굴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매번 지나치며 눈인사는 늘 나누었지만, 직접 통성명을 한 적이 없던 그에게 악수의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악수를 <함께걸음> 독자 여러분과의 통성명으로 연결하고자 한다. ‘어, 이 친구 나왔네?’하며 반길 이들이 많을 것 같다. 권익옹호활동가 배재현 씨가 이번 호의 주인공이다.

 

불합리함, 그걸 그냥 마주봐야 하나요?

지난 4월 19일, 서울 광화문에선 ‘비장애의 시선’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광경이 펼쳐졌다. 수십 명의 중증장애인들이 전동휠체어에서 내려와, 아스팔트 바닥을 기어가며 절규 같은 구호를 외치는 이른바 ‘오체투지’가 진행됐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장애인권사(史) 또는 장애투쟁사, 그 명칭이 무엇이 되건 간에 분명하게 기록되고 길이길이 기억될 하루였는데, 그 자리에 함께했는지를 묻는 질문에 그는 주저함 없이 한마디로 답했다. “당연히 동참해야죠!”

‘사람 사는 이야기’, 이 지면을 통해, 그를 만나야겠다는 나름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 그런데 대화를 진행하면서 ‘투쟁’ 얘기만 나오면 두 눈에 불길이 당겨지는데, 일상의 화제로 돌리면 ‘조곤조곤’ 수줍은 소년처럼 그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성인인 한 남성을 이렇게 표현하면 큰 결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어릴 때 별명이 ‘순둥이’가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그는 자신의 일상과 심적인 여린 면들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여린 면’에 대해서는 뭐랄까, 이 정도까지 고백해도 되는지 조심스러워질 만큼 그는 스스로한테 솔직했다. 이 글을 적으면서도 ‘가릴 건 가려야 할’ 정도로 말이다.

“정확히는 2012년 10월 25일이라고 해야겠죠. 오랜 인연을 간직하던 1979년생들끼리 한 활동가 집에 모여서 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어요. 그날의 주제 중 하나는 여행이었죠. 준비를 해서 국내여행을 같이 하고 그 다음 해외여행에 도전하자며, 저녁식사에 술 한두 잔을 곁들이는 정말 즐거운 자리였어요. 저는 다음날 일찍 해야 할 일정이 있어서 ‘내일 오전에 다시 만나자’며 먼저 그 자리를 나왔는데…, 그 자리가 주영이(故 김주영 열사)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는 걸 지금까지도 가슴 아프게 간직하게 됩니다.”

故 김주영 열사가 귀가하기 전 세상 속에서 마지막 함께했던 이들이 누구인지, 그 자리가 어디였는지가 확인되는 고백 같은 설명이었다. 이튿날 26일 새벽 2시에 발생한 전기합선의 화재로 인해, 우리는 한 동료의 비보를 뉴스의 짧은 보도를 통해 접하게 됐던 바 있다. 국민을 최고로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세우면서도, 국민 삶의 질을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던 정부에서 벌어진 참극이기도 했다. 전동휠체어를 탄 중증장애인들에게 캡사이신(최루액)을 태연하게 쏘아대던 당시의 정권이었으니, 중증장애인 한 명의 사망은 그들에겐 관심 밖의 일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집회가 있다, 중앙 차원에서 모임이 있다, 투쟁이 필요하다, 문화제가 열린다, 그런 연락이 늘 오거든요. 그럴 때마다 별의별 핑계를 다 대며 안갈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연락을 받게 되면 이런 마음부터 들어요. ‘가야 한다, 필요하다, 나를 부르기 때문에 참석해야 한다. 왜냐, 그래야 힘이 되니까.’ 제가 간다고, 저 하나 동참한다고 제가 빛나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저는 센터에서 해야 할 일들을 미리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자리에 동참하려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움직이게 될 힘 하나를 더하게 되니까요.”

맞는 말이고 정답이다. 누구에게나 ‘N분의 1’의 책임을 벗어날 만한 핑계는 쌓여 있다. 그런데도 그는 현장에 동참하기 위해, 어떻게든 주어진 업무를 먼저 처리한 뒤 움직인다고 한다. 그 업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의 ‘뒷감당’까지 감수하면서 말이다. 왜 그럴까?

“그건 모든 자립생활센터에 근무하는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느끼는 딜레마일지도 모를 일 같아요. 장애인의 자립운동 자체에 몰두하기보다는, 늘어나는 서류작업에 더 눌리는 일상이 반복되니까요. 갈수록 보고서 작성 같은 부담이 커진다는 건, 자립생활센터 본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잊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거든요. 게다가 현장 활동을 하는 이들이 오히려 소외되는 역효과까지 발생하고 있어요. 자립생활을 위한 투쟁인데, 그 투쟁을 하는 활동가들이 자신이 속한 집단 안에서 소외된다는 건 분명한 이율배반이 아닌가 싶어요.”

권익옹호를 담당하는 활동가로 세상과 마주하는 배재현 씨는 스스로를 내세우는 일 없이 일상을 생활한다고 했다. 쉬운 표현으로 ‘어지간한 건 그냥 넘어갈 만하다’는 자세였다. 하지만 ‘불합리함’에 대해서는 인내의 미덕을 품지 못하는 성품 같았다. 1박2일이 될지 모르는, 새벽잠을 설치게 만드는, 부상의 위험이 뒤따를 것 같은 각종 모임과 집회의 참석 요청엔 손사래를 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도 관심 자체는 물론 있었지만, 제가 정식으로 장애인권의 세상과 연계를 맺게 된 건 故 송국현 동지 사건이 결정적 계기였던 것 같아요. 주영이 다음으로 똑같은 죽음이 연이어지는데 국민을 책임지는 정부가 없다는 거, 이건 분명히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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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의 탈출, 생각만으로

배재현 씨는 지금까지 서울 도봉구 인근을 벗어나지 않은 토박이의 삶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은 1987년부터 5년 동안 삼육재활원에서 보냈는데, 손 물리치료가 재활원 생활의 주된 목적이었단다. 그러다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어느 제도’로 인한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재활원에서 나와 ‘일반’ 초등학교로 옮겨야 했는데, 뇌병변장애 1급의 일반학교 진입이 수월했을 리는 없는 일이다. 당시는 1990년대 초반이었기 때문이다. ‘장애인 입학거부’가 생각보다 먼 일은 아니다. 이동권 보장이 최소한이나마 실현된 게 불과 십여 년 전이듯이 말이다.

“재활원에서 4학년 과정까지 마치고 5학년으로 전학을 해야 했어요. 먼저 찾아간 ㅊ초등학교에선 교장의 면접을 마친 뒤 일단 ‘오케이’가 됐는데, 당시 목발로 거동하던 저한테 계단을 올라가 보라는 요구가 덧붙었어요. ‘오케이’를 했던 교장이 계단을 오르는 저의 모습을 보더니, 다른 학생들한테 방해가 되겠다며 전학을 거절했죠. 지금 같으면 아마 난리가 났을 거예요. 뉴스에도 나왔겠죠. 하지만 당시는 그런 불합리함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습니다.”

학교장의 거부로 인해 1년을 흘려보낸 뒤 전학을 ‘허가’한 인근 ㅅ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 그는 차별 그 자체였던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기간을 연이어 보냈다고 했다. 언제 어디를 가든 ‘똑같은 그런 인간’이 있지 않느냐며, 배재현 씨는 자신을 심하게 괴롭혔던 면면들이 떠오르는 듯 긴 한숨을 내질렀다. 하지만 모든 게 먹구름인 건 아니다.

“지금도 참 감사하게 기억하고 있는 선생님이 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이었는데, 반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저랑 점심을 먹게 하셨어요. 친분이 있든 없든 간에 말이에요. 불편해하는 애들이 많았지만, 저를 반기는 친구들도 물론 있었죠. 같이 반찬을 나눠먹고 많은 얘기를 나눴던 모습들이 기억납니다. 아마도 좋았던 기억은 그것밖에 없었나 봐요. 그것만 계속 떠오르는 걸 보니….”

모든 게 벽이었기에, 그는 기가 죽은 채로 학교생활을 해야 했다며 몇 가지 사례들을 부연했다. 그러던 그가 찾아낸 탈출구는 운동이었단다. 특히 농구에 열광했다고 한다.

“제가 운동을 많이 좋아했어요. 특히 농구를 보면서 대리만족도 느끼고, 선수들의 멋진 플레이에 푹 빠져 지냈거든요. 스포츠 선수들 이름을 다 외우고, 어지간한 경기 용어들도 섭렵했어요.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그렇게 몰두하는 것 자체가 저의 유일한 취미가 됐던 거죠.”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뒤 곧장 4년제 대학에 가는 게 꿈이었는데, 수능시험을 치른 뒤 그가 갈 수 있었던 학교가 대구에 있었단다. 하지만 너무 멀어서 안 되겠다는 어머니의 만류에 뜻을 접어야 했다고 한다.

“지금처럼 활동하고 다녔다면, 분명 ‘그래, 네가 알아서 결정해라’ 하셨을 거예요. 그런데 당시의 저는 행동반경이 극히 좁았거든요. 어머니의 염려도, 그 의견을 받아들인 저 역시도 그만큼 좁은 울타리 안의 삶이었다는 걸 인정한 셈이 됐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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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세상을 계속 바꿔가야 한다

대학 진학의 꿈을 접은 뒤, 그는 컴퓨터 교육에 몰입했단다. 그런데 그 몰입이 그의 인생에 새로운 길을 열어놓았던 것 같다. 인터넷 이전의 PC통신 시절, 이어지는 인터넷 포털사이트들의 등장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게 해줬고, 그의 눈앞에는 아주 넓은 신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 아닌 지인들이 생겨나게 됐다는 것이다.

“지금 전국에서 자립생활운동의 핵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동료들을 그때부터 만나게 됐어요. 그때는 자립생활이라는 개념 자체도 몰랐지만, 인터넷카페를 통해 소통하고 오프(off line)모임도 하면서 인간적인 교류의 폭을 넓혀갔던 거죠. 인권이니 자립이니, 그런 운동의 차원이 아니라말 그대로 ‘놀자판’이었어요. 회비를 걷어 먹고 마시고, 정립회관의 공간을 빌려 1박을 하는 정모행사도 열었죠. 하지만 당시의 만남이 장애인의 이동권, 장애인의 자립, 장애인의 권리 같은 걸 자연스럽게 얘기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계기로 자리 잡았던 것 같아요. 직접 만나서 얘기하다 보니, 답답하고 불편하게 생각했던 모든 걸 다 쏟아낼 수 있었다는 거죠.”

아는 얼굴들이 늘어난다는 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방법론 또한 늘어난다는 의미가 된다. 함께 청년학교를 다녔고 서로의 활동을 독려하고 이끌면서, 배재현 씨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주관하던 장애우대학을 수료하고 연구소 내 모니터링 요원으로 1년간 일을 하게 됐단다. 사회 속에서의 첫 번째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이후 2008년부터 자립생활센터의 활동가로 정식 업무를 시작했고, 한 걸음 한 걸음씩 세상의 한가운데를 향해 나아가게 됐다고 한다.

“일을 하다가도, 저의 마음은 현장에 가있고 싶다는 생각이 늘 들었어요. 직접 움직여서 세상의 일그러진 틀을 조금씩이라도 계속 바꿔가는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저는 확신하거든요.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된 게 아닌데, 제 생활을 문득 되돌아보니까 저도 모르게 제가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더라고요.”

지난 6월 지방선거 당시 사전투표를 마치고 나왔던 대통령과 마주한 장애인권단체 활동가들의 맨 앞자리에 있었던 이도 배재현 씨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물었더니, 그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너무나 많은 내부의 모순도 깨뜨리고 싶고, 언제 어디서든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며, 지금 어딘가에서 혼자 웅크리고 있을 많은 이들이 어서 빨리 세상 속으로 나오게끔 힘을 보태고 싶다고 한다.

“말로만 하는 ‘국민명령 1호’, ‘국민명령 2호’, 그런 건 다 필요 없습니다. 실제로 진행되는 실천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지난 80년대 90년대부터 ‘장애인은 무조건 받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아직도 국가는 버리지 않고 있어요. 더 나아지고 더 개선돼야 하는데, 점점 더 ‘이거 안 되고 저거 안 되고’, 또 ‘이건 어렵고 저건 힘들고’ 하며 본질과는 동떨어진 처방만 내리고 있잖아요. 언제까지 리프트 추락으로 계속 죽어가야 하죠? 등급제든 점수제든 뭐든 다 필요 없습니다. 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같이 살게 해달라는 겁니다. 장애인은 더 이상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도록, 우리가 직접 세상을 바꿔야 합니다.”

작성자글과 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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