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우면 너희들이 장애인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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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 펌프, 조명, 공구 등, 각종 기자재 매장들이 가득한 지역의 한 건물 3층에, 주변 환경과 동떨어진 카페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예상 밖의 외진 공간에 카페가 들어서는 게 최근의 추세라더니, 눈으로 직접 그런 현장을 확인하게 된 셈이 됐다. 극히 어두운 실내, 카메라 플래시 사용금지, 창밖엔 거센 가을비, 사진 촬영에는 더없이 열악한 조건이었지만, 어쩌면 이런 촬영 분위기가 이번 만남의 주인공과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지기도 했다.
마이크 하나뿐인 무대에서 오로지 자신의 발언 하나로 관객들을 상대하는 스탠드업 개그. 이번 호에는 장애인 최초 스탠드업 개그맨으로 활동하는 한기명 씨를 만났다. 장애인으로 사는 이유? “지하철 공짜로 타려고”라며 너스레를 풀어놓는 그의 세상을 들여다본다.
무의식의 선택, 반전
“태권도 학원 차에서 다 내리지도 않았는데, 차가 그냥 출발해 버렸다고 해요. 사경을 헤맸대요. 육 개월 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다고 하니까요. 일곱 살 때의 일이었는데, 그때 왼쪽 뇌를 크게 다쳐서 오른쪽 몸에 후유증이 많이 남게 됐죠. 왼쪽 귀도 안 들리고 두 눈의 시야도 훨씬 좁아진 상태가 됐고, 무엇보다 아쉽고 안타까운 건 사고 이전의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유년시절의 추억 같은 게 저한테는 모두 사라진 셈이 된 거죠.”
만남의 순간부터 여유가 넘치던 한기명 씨는 후천적으로 얻게 된 장애, 그 원인이 된 사고를 언급하는 대목에선 얼마간 말끝이 흐려졌다. 다시 깨어난 이후에도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로 1년여 입원을 더 해야 했다고 한다. 난데없는 심한 언어장애로 말마저 못하던 걸 언어치료로 되살려놓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발음이 어눌한 건 그 여파 때문이란다. 사고 이전의 기억이 전혀 없다는 그의 발언은 듣는 내내 가슴이 먹먹해지는 여운으로 남겨졌다. 그런데 남다른 반전이랄까? 자신의 인생을 선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그 ‘무기력의 기간’에 잉태됐다고 한다.
“입원한 상태에서 재활훈련을 하던 그 기간에 제 눈에 띈 건, 오로지 ‘개그콘서트’라는 방송 프로그램 하나였어요. 그 프로그램을 볼 때만 저의 감각이 살아났거든요. 사람들한테 웃음과 재미와 감동을 선물한다는 게 저렇게 멋진 일이구나 싶어서, 그때부터 꿈꿨던 게 바로 개그맨이었어요. 제 몸이 어떤 상태가 됐는지, 앞으로 어떤 인생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꿈 하나는 확실하게 새겨두게 된 셈이죠. 당시의 그 다짐이 지금의 저를 만들어놓은 거예요. 장애? 그런 건 다 필요 없고요. 제가 꼭 이루고 싶었던 꿈을 향해 지금 나아가고 있다는 게 저에겐 중요해요.”
세상 누구도 다루지 못했던 개그 소재
형제가 어떻게 되는지 물으니까 위로 형, 밑으로 남동생이 있단다. 남자만 셋이냐고 되물으니 아빠까지 넷이고, 남자들 속에서만 생활하는 엄마까지 절반은 남자가 돼서 남자 다섯의 집안과 같다고 했다. 그 말과 함께 분위기가 되살아난 그는 초중고교 내내 일반학교 특수학급에서 생활하던 당시를 떠올렸다.
“한마디로 나대는 성격이었어요. 남들을 웃기려고 매번 노력했거든요. 장래희망은 확실하게 정해졌는데, 남모르는 고민도 커지긴 했죠. ‘내 신체가 이런데, 내가 어떻게 공채 개그맨이 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에 혼자 빠져 있던 즈음,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의 현장학습으로 연극을 보러 갔어요. 실제 연극은 그때 처음 마주하게 된 거죠. 그런데 그 연극무대를 보면서, 저는 정말 놀라운 느낌을 얻었어요. ‘저 배우들은 자기 이야기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나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인생을 묘사할까?’ 그게 저한테는 엄청난 영향을 줬거든요. 그래서 저의 고민을 말끔히 해결하게 됐죠. 일단 연극배우가 된 다음에 개그맨에 도전하기로 다짐한 거예요. 실제로 개그맨들 중에선 연극배우 출신들이 많거든요.”
한기명 씨의 표현 그대로 ‘나대는’ 성격은, 항상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그의 일상을 만들었단다. 어떤 일이든 참여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 성격과 장애로 인한 ‘뻔한 따돌림’도 청소년기 내내 심하긴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왔단다. 그 방식이 바로 ‘디아이디(DID) 정신’이란다. 그게 뭐냐고 물으니까, 우리말로는 ‘들이대 정신’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어릴 때부터 ‘나대던’ 생활이 ‘들이대는’ 천성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한 장애계 단체의 장애인 연극 오디션이 있어서 도전했는데 합격했어요. 제가 이 사회로 나온 첫 발걸음이 된 거죠. 목표가 더욱 강해졌어요. 꿈으로 향하는 길, 그 꿈이 다가오는 길로 들어섰다는 확신이 들었죠. 어느 무대든, 그 무대가 크든 작든 간에, 저는 ‘지금 이 무대에서만큼은 내가 주인공이다’는 자신감으로 덤볐어요. 공연무대에는 일곱 편 정도 직접 올랐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스탠드업 개그 오픈 마이크’라는 공개모집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오픈 마이크라는 건 누구나 설 수 있는 무대라는 뜻이에요. ‘선수’들만 하는 게 아니라, 재능이 있는 일반인들에게도 문호가 개방된 자리를 만나게 됐던 거죠.”
그는 자신의 강점이 ‘주저함 없이 확실하게 해버리는 성격’이라 했다. 하겠다고, 해야겠다고 일단 결정하면 멈칫거림 없이 밀고 나간다는 것이다. 텅 빈 무대에 마이크 스탠드 하나 서 있는 공간에 처음 섰을 때도, 그는 긴장감 같은 것 없이 술술 이야기가 풀렸다고 한다. 그런데 스탠드업 개그맨 한기명 씨의 개그 소재는 그 누구도 다룬 적 없는 내용에 집중돼 있다. 바로 ‘자신의 장애’가 개그의 소재이자 주제라는 것이다.
“맨 처음엔 장애 얘기가 아니었어요. 그냥 비속어와 사회 불만, 이런 내용으로 채웠거든요. 그런데 저의 공연을 보셨던 한 전문가께서 뜻밖의 조언을 해주셨던 거예요. 사회비판의 내용도 재미있게 잘 봤는데, 그것보다는 저의 장애를 중심으로 내세우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셨던 거죠. 장애의 비하가 아니라, 동등한 인간으로서 일상의 에피소드를 담아내면 색다른 화제를 낳을 수 있겠다는 그 말씀에 완전히 동감하게 됐죠. 그때부터 저의 스탠드업 개그는 무한대의 소재를 얻게 됐어요. 제가 살아가는 생활 자체가 개그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게 됐으니까요.”
장애 자체를 드러내며 산다는 것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는 전제 하에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그는 그 질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개그맨으로서는 관객의 웃음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웃음이 동정일 수도, 비아냥거림일 수도 있겠죠. 그런 느낌은 곧장 제게 전해지거든요. 저는 상관없어요. 물론 가장 피부에 와 닿는 건, 저의 공연을 그 자체로 즐기는 공감의 웃음이니까요.”
한기명 씨는 자신의 고정 무대가 생길 만큼 입지를 다지고 있는 중이다. 언론의 인터뷰가 점점 늘어나고 초청 강연도 많아지는 걸 보니, 자신의 목표에 한 걸음 더 다가서고 있다는 실감도 든다고 했다.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 때문에 기분도 좋아진단다.
“당당하게 살고 싶어요. 길이나 교통편에서 저를 쳐다보는 사람들은, 좀 이상하게 생긴 저의 외모 때문에 시선을 던지겠죠. 하지만 저는 ‘아, 내가 이렇게 유명해지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받아들여요. 그게 속 편하잖아요. 그래야 실제로 그렇게 될 것이고요.”
지난 9월 부산에서 열린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에 그는 초청을 받아 공연을 펼쳤다. 지금까지의 모든 공연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였다고 한다.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났다는 관객들의 환호에 큰 힘을 얻었다며, 그는 얼굴 가득한 만족감을 표시했다.
“앞으로의 제 계획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제가 잘 성장하고 자리를 잡아서 나중에 제 후배들을 양성하는 거예요. 장애인 스탠드업 개그맨을 많이 발굴하고 싶거든요. 또 하나는 좀 더 경험을 쌓아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한국어로 공연하는 거예요. 미국까지 가서 왜 한국어로 하느냐고요? 그거야 아쉬운 사람들이 알아서 들어야죠. (웃음)”
함께 참여하는 독서모임이 저녁에 있다면서, 그는 가방을 열고 책 한 권을 꺼냈다. 김신회 작가의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였다. 매주 한 차례씩 만나는데, 의무적인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분위기 중심이라서 열심히 참가한다고 한다. 책 읽는걸 좋아하고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하기 때문에 일석이조라는 얘기였다.
사람들이 ‘스탠딩 개그’ 또는 ‘스탠딩 코미디언’처럼 ‘스탠딩’이라 말을 하는데, 그건 콩글리시니까 앞으로는 ‘스탠드업’이라는 정확한 용어를 사용해 주면 좋겠단다. 장애를 숨기거나 부끄럽게 여기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장애 자체를 즐기고 있다는 한기명 씨의 언급은 그의 인생관 전체를 드러내는 키워드 같았다. ‘부러우면 너희들이 장애인 하던가!’ 그가 무대에서 객석을 향해 즐겨 사용한다는 반어법의 발언 또한 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자신의 개그를 들으며 웃으면 장애인 비하이고 안 웃으면 장애인 차별’이라며,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감부터 허물고 공연을 시작한다는 그를 가리키면서, 사람들은 ‘긍정 청년’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아직 ‘공채 개그맨’의 꿈은 이루지 못했기에, 모든 게 인맥(人脈)과 학맥(學脈)과 지연(地緣) 등으로 얽히고설킨 이 사회를 향해 한마디 던져 보라 했더니, 그는 반말로 표현해도 괜찮겠냐며 나름의 생각을 되짚었다. 언급한 내용 그대로 지면에 옮기겠다고 하니, 그는 무대에 서서 관객들을 향하듯 손짓을 섞으며 한마디를 툭 내질렀다. ‘너희들 모두’라는 표현만 앞에 덧붙이면 될 것 같다.
“나의 앞길을 막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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